모나리자의 미소와 석불사 본존불의 영원한 미소의 차이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석불사 본존불의 영원한 미소의 차이는??
후세백작
지금 위의 모나리자의 미소와, 석굴사 본존불의 미소를 함께 보고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전 세계인에게 회자되는 영원한 미소의 대명사라는데,우리에게는 우리의 미소가 있다,
이 석굴사 본존불의 미소가, 우리를 상징할 수 있는 미소일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것은 "푸른기차"의 루브르 박물관 기행에서 모나리자 미소의 감동의 글을 일축 하자는 뜻은 아니며, 그 감상은 그 사람에게 주관적 느낌을 주는 것이기에 이 글은 그것과는 무관함을 고지하며..........
친들 --- 위 사진의 두 얼굴의 미소가 주는 느낌은 어떠한지 ????
이 후세가 보는 감상의 뉘앙스 차이점을 쓰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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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의 미소는 무엇인가 ??
평범한 얼굴에 눈썹도 없지만, 기쁠때 인지,슬플때인지 구분은 않 되지만 입가에는 웃는 모습의 미소와 생동하는 눈으로 독자를 바라보고 있다.이 컴앞에서 1분만 모나리자를 보고 있으면 같이 웃음의 기분이 된다. 이렇게 사람을 끌리는 것을 가지고 아마 영혼의 미소라는 말하는 것 같다. 허나,친들.. 그대들의 마누라 웃는 모습을 컴에 올리고 바라보고 있으면 똑같은 현상이 생길 것이다. 웃는 마음이 될 것이다. 이렇게 동화 되는것도 감상일 것이다.
모나리자의 친화 그림은 지구상에 두개가 존재한다. 하나는 왕에게 팔아서 루브르 궁전이 박물관이 되어 이 박물관에 소장되 있고, 또 하나는 영국의 부호가 소장 한다는데,이 모나리자 그림을 80년대 후반 일본에서 500억에 경매 받은 것으로 안다.
나는 이 두개 그림을 직접 본 적은 없다. 모나리자는 조콘다부인을 모델로 할때, 후배인 라파엘로가 스케치한 그림이 입증 자료이다. 그리고, 혹자들의 감상은 영국의 모나리자가 더 조은 거라는데,나는 이 모나리자에 대해 혹평하는 글을 본적은 없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는 모나리자 그림의 감상소견을 말한다.
우선 레오나드 다빈치는 피렌체의 수학자이고, 과학자임과 동시 예술가이다. 당대 교황이 예우해 주는 사람은 마이스터 (제일 장인, 匠人)이다. 이 마이스터로 통하는 다빈치는 15C 초기에 르네상스 태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중세 억압으로부터 복고의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의 부활은 피렌체가 그 중심이며,부호 메디치 가문이 예술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대문이며, 여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에서 보면 예술은 현상계의 복사분이기에 예술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3단계의 아랫부분으로 가치가 없다는 플라톤의 "국가론"이란 책으로부터 중세 천년의 암흑기에 마침표를 찍고 인문주의 복고의 주역의 한 사람이 되었다.
모나리자에 모나는 부인의 존경어이고 리자는 약칭으로 엘리자베스라는데. 금융부호 조 콘다의 세째 와이프라나.이 리자를 모델로 다빈치가 초상을 그린듯 하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說이 많은데, 분명 모델을 대상으로 끝까지 완성하진 못한 점이 나의 느낌이다.
모나리자 그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빈치는 해부학을 창시하였고 한정된 학문이라 당대에 그 스스로 완성하여, 지금도 의학의 해부학 원본으로까지 쓰이는데,,
농담을 좀 하면, 레오는 해부학의 창시자로 해부 대상체는 야밤에 넘의 묘소를 파서 시체를 훔쳐와서 근육을 연구하는데, 부패 정도 차이로 2개월된 묘에서 도둑질하여 근육을 연구하였고 1년이 넘는 묘에서 시체의 뼈를 도둑질하여 뼈의 해부학을 연구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이 소문나면 마이스터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텐데-- 이런 불굴의 노력과 의학적 해부학의 기원과 당대에 해부학의 종결을 가져온 업적은 찬양되지만...이 모나리자 그림엔 이 해부학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듯 하다. 인체는 외부에 살같이 있지만 이는 내부 뼈에 구조가 맞아야 된다. 피부와 3겹의 근육과 그의 지주는 뼈이다. 그러기에 인체 미술에서는 해부학이 기초라야 한다.
이러한 업적의 다빈치의 말기작 모나리자에, 그 해부학적 측면에 균형이 맞지 안는듯,이 리자 그림의 풍만한 모습에 살을 30kg 뺀다면 얼굴과 목과 양 어깨가 분리되 있는 듯하다.
뒷 배경은 풍경으로 일전 내가 말한대로 16C 램브란트가 나오기 전까지는 독단적인 풍경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미소의 얼굴, 리자는, 거상 조콘다의 셋째 마누라이긴 너무나 평범하며, 여기서 르노와르의 풍만한 여체는 그 균형을 맞추는 데포름(변형)이라 할진데, 이 리자의 균형은 데포름이 아닌 기형처럼. 나는 감히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그림은 초기엔 대상체인 피조물의 모델을 직접 보고 그렸으나, 무슨 연유인지, 모델없이 완성하기에 눈썹도 안 그린것 처럼 느껴지고 목 아래의 균형이 부자연 스러워 보인다. 평범한 미모에, 평범한 복장이다.
이 모델이 누구이든 미완성으로 팔지 않고 죽을때 화실에서 나오니 애착물건이란 둔갑으로 더 유명세를 탄듯하다. 이 모든 사실을 차치하고서, 이 리자 그림은 일관된 것이 아니라 균형의 밸런스가 좀 석연찮고,덧칠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탄생한 모나리자의 미소를 영혼의 미소라 한다면 나 혼자라도 그것을 거부한다. 다만 순수한 한국말로 표현한다면 물그러미 웃는 미소일 것이다.
아래에 석불사 본존불의 미소를 쓰면, 답을 쉬 알리라.만약 피렌체에 석불사가 있었으면 세계의 찬란한 유산중 으뜸이라 하며, 미국 교과서에 나오게 압력이라도 가했으리라. 왜냐면 신라의 김대성 1인의 의지와 힘으로 이룩한 석불사는 과학과 종교와 예술이 동시어 어우러져 감히 무어라 표현하기에 언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석굴사는??
어떤이는 안 보았기에 말 할수 없고, 보았으면 보았기 때문에 감히 말 할수 없다 하였다.
중국엔 3대 석굴 (돈황 .윈깡, 용문)이 있는데 당 ,송, 명대 천년간 10 Km까지 길이며 그 안에서 만점이 넘는 불상이 나왔는데.이는 김대성이 발로 조각해도 될 느낌의 예술성이 미약한 것이라. 인도에는 500년간 돌산을 위에서 부터 파 내려가며 불상과 절을 만들었다. 인도와 중국의 돌은 사암으로 조각이 쉬웠다.하지만 우리 나라는 고대 지형으로 단단한 화강암이기에 그러한 조각을 하지 못한다.
미켈란 젤로의 조각은, 이태리 대리석은 칼로도 다듬을수 있는 연질이기에 유명한 조각가가 탄생된 것이다.우리나라엔 대리석이 익산석으로 강도는 방활석이며,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 예로 이효석 기념비 한쪽 끝에 한복입은 여인 조각상을 보라.( 사진을 아래 첨부) 이는 조각상 으로 볼때 김의웅 선생의 조각이다. 저는 조각을 전공해서 그 사진만 보고서도 그분의 래파토리란 느낌이다..
런데 두리뭉실 뭉겐 이러한 우리 조건속에서도, 김대성은 시대를 뛰어넘는 생각과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하였다. 석굴사 본존불의 미소가 있기까지, 김대성의 느낌의 조각이 아닌가.---이 김대성의 업적은 서양의 마이스터로도 절대 가능하지 못할일 일것이라.
삼국유사에 김대성편을 직관적으로 해석하면 모량리의 빈 촌의 대성이 육두 계열의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재상까지 오르고, 이후 불국사 재건과 생부모를 위해 석불사 창건을 착수하였다 (770년경) 이후 숲에 가려져 이조의 역사에 암자 하나 정도의 기록이 있다가 1907년인가 어느 우체부의 발견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쏘네 총독의 도둑질과 석불사를 일본 이전계획까지 획책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측량기사 (요네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연구 측량의 결과 우리에겐 상당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또한 “야나기”의 비평도 범 인류적인 차원이라 그에 감사한다.
왜냐면 일본의 침략정책은 우리의 역사도 뭉게었는데, 그 단편적인 예는 나주에 고무덤을 현장 조사한 역사선생이 유품도 일본으로 반출하고, 리포트도 안 남겼고, 이후 80년대 우리의 어느 학자가 집요히 추궁한 결과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성씨까지도 변경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이 무덤은 삼국이 아니라 고구려, 신라, 백제와 다음의 4국으로 갈 중요한 자료인데 이 무덤이 일본의 왕족에 직계조상이 되는지?? 크나큰 역사의 줄기를 지워버린 죄책감에 시달렸으리라.
중앙 박물관에 가면 암사 선사의 빗살무늬 토기 (역사책에 뾰족한 토기 깨어져 삼발이어 얹혀 놓은...)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문화재이고 다음으로 나주지방에서 출토된 금관이 있다. 그러나 아직 나주지방에 국가의 존립의 역사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분위기의 침략시기에 그 요네다는 우리의 고 문화 측량에 무수한 업적을 남기며 정림사지에서 인가 서른 다섯나이로 현장에서 풍토병으로 죽음을 맞으면서도 열과성을 다하여 우리의 고 문화를 측지,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미술전공도 아닌 “야나기의 석불사 예찬론을 인용하겠다.야나기는 이것을 최초로 소개하는 한사람 답게 말한다.
그의 감상문엔 ""실로 석굴암은 분명히 하나의 마음에 의해 통일된 계획의 표현이다. 정연한 구성으로, 외형적이건 내면의 심리적으로 주도면밀한 완전한 통일체이다"" 참으로 멋진 예찬론이다.
굴안에 들어서면 위대한 불타는 소리없이 조용히 부동의 모습으로 연화좌대 위에 갖춘다.
우러러 보는 자는 그장엄의 미에 감동되지 않을수 없다.
이곳은 완전히 영적인 내면의 세계이다.
누가 능히 이 조각의 뜻을 말 할수 있으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 불상의 아름다움이 있으리라.
사람들은 여기서 아무런 착찹한 수법을 보지 못한다.'
실로 아무것도 없는 지순(至純)과 지고의 위엄이다.
어둡고 고요하기 이를데 없는 이 곳은 좌선의 시간이고 침묵의 순간이다.
모든 것이 무의경지이다.
여기엔 종교도 예술도 하나이다.
이렇게 야나기는 1,200년후 처음 보는 석불사를 예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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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흥,( 국민교육헌장 만든 교수로 경주태생)
""고요한 정밀의 심연 속에 멈추어진 본존불의 미소를 보라 ---""
청년시절의 박중흥의 말이다.
그는 19세 나이에 이 석불사를 연구하려고 한 달간 이 굴속에서 보낸적이 있다는데, 아침에 해뜰때 석굴 속으로 비취는 햇살에 빛나는 모습, 그보다 달밤에 빛이 들어와 본존불을 비출때 그윽한 그 미소의 모습,김대성은 가상적으로 그 효과를 알고 제작 하였으리라.
또한 이 제작과정의 본존불 포함 40인의 보살, 천, 나한들의 질서 정연하고, 리얼리티하게 조각하여 묘사한 점을 보아라.
종교의 이상< 理想>을 다하는 하나의 우주관이며, 요네다가 말하는 궁륭원주는 천체우주를 나타냄이다.
천정부의 덮개돌 하나가 25톤 정도이며, 이때까지의 시기에도 서양에서도 돔(DOME) 양식은 없었다.
석불사의 과학적 고찰은 생략하지만, 이태영박사. 남천우,황수연, 강우방 김원용 박사와 김익수교수등 25명정도의 석학들의 연구로, 이제 석불사는 근 95%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아직도 김효경박사의 콤푸레샤로 습기를 제거하는지 모르겠다. 김대성이 습기 문제에 고심하여, 두갈래 샘물 위에다 세웠다. 그는 방정식도 없는 옛날에 이 이치를 미리 예측하여 샘물 위에다 창건하였다.
후일 유네스코에서도 이 문제를 풀지 못하다, 이태영 박사의 아이디어로 채득하였다. 과연 이 석불 사건축에 아직도 우리가 알지못하는 미 해결 문제가 다수 있슬 것이다. 다빈치가 수학자이고 과학자이며 미술가였다고 서양의 제일의 마이스터로 뽐내지만 우리의 김대성은 25명의 박사들의 연구에도 풀지 못하는 숨은 과학과 종교, 미술의 통일성의 위대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석불사 본존불의 미소!!
은은하고 유연하다고 말하기엔 강함과 질서가 있고, 고요한 심연 속에서의미소를 내가 감히 무어라 하는것 보다 차라리 詩 한편을 인용하겠다.
석 불 사 청마 (유치환)
목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개 돌로 눈 감고 앉아 있노니
천년을 차거운 살결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숨결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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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 연닢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없이 지새는 휜 달을 이마에 느끼노다.
뉘랴 알라 !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개 돌로
적적히 눈 감고 가부좌 하였노니---.
본존불 --- 신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인간적이고
인간이라 말하기엔 절대자의기픔이 너무도 강하다.
엄숙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도 온화한 미소이다.
또한 인자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도 엄하다.
이 세상의질서와 평화가 저 안에 있는 듯 하다.
이상 여러 책들을 인용하며, 감히 본존불과 모나리자에 관한 나의 생각을 필 하였다.이는 석굴암이라 하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절하적 발상 단어이고 굴사 본존불이라야 우리의 가치관의 양식에 적합한 단어라 생각한다.
봉평 이효석 기념비로 김 의웅 선상의 작이이다.
이 돌의 원산지는 익산석이고, 방활석으로 대리석 보다 단단하여, 아래 몸뻬 입은듯 표현될 수 밖에 더 섬세하게 표현이 힘들며,그래서 일반인에겐 좀 우스운 느낌일수도, 왜냐면 지금은 변두리로 화장실 옆으로 방치 했다는데...그러나 이 조각은 국상의 데포름이고, 김의웅 작가의 세계이다.다만 한 작가의 세계가 다른작가 < 이효석의 세계>에 공존한다는것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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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의 [ 생각하는 사람 ]의 다른 생각은??
<보살 여래 좌상> < 생각하는 사람>
미륵반가 사유상은 미소짓고 어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울상이라고요. 그래서 동양의 생각하는 사람이 더 정감있다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지옥의 문 조각에 고민하는 단테를 묘사.지옥의 문 앞에서 물질적 욕심을 제판하여 정신적 세게로 이입하는듯한 고뇌를 표출하였는데, 그 한계를 넘어 인간이 동물과 틀린 고차적 사유의 동물임을 나타내는 최고의<最古> 간이 생각하는 힘을 표출하고 있는듯 하다.
조각이란 물체의 명암대비로 높이 70쎈티의 조각품안에 인간의 함축적 모습을 그려 내었다. 힘찬 근육을 표출하여 생각하는 이지적인 모습으로 숭고해 지려는 인간의 고뇌를 나타내어숭고함을 그려 보는듯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세계의 영역이란 점이다.
그러나 미륵 반가 사유상의 미소는 ...
한참을 보노라면 이 은은한 미소는 우매한 중생을 경멸하는듯한 미소로도 보이고, 또한 자애로운 미소로도 보인다. 그것은 왜 그럴까?
이 반가사유상에 대하여 철학자 야스퍼스는 "지상의 모든 속박을 초월해 도달한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이다""
이 석조보살상(약왕보살)엔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나 또한 야스퍼스의 말보다 더할순 없기에 그에 말을 인용한 것이다.
온화한 미소 뒤엔 사유의 지평에서 관조하는 미소일 것이기 때문일까??
인간의 고뇌를 인간의 범주가 아닌 넒은 우주의 범주에서 헤아려 보는 영원한 미소일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로, 위 동양과 서양의 두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은 그 시발부터 엄연한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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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에 조각된 조각상이며 이 지옥의 문엔 그 유명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입 맞춤. 허무한 사람, 아담과 세 망령들.등 다수 조각되 있으며.. 당시 기베르티란 조각가는 성당의 문 두짝을 조각하는데 40년 세월이 걸린것도.. 그는 젊은 나이에 성당 문의 조각을 위한 콩쿠르에 일등하녀 인생 40년 간 문 두개 제작하였다. 당시엔 이런 조각풍의 사조가 지옥의 문을 만들게 했는지??
가져온 곳 : 카페 -- 평창 22.25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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