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昌歷史 史觀定立

평창경찰서 오층석탑의 설명

후세백작 2018. 7. 13. 21:07

 

 

『조선고적도보』의 동북 5층탑과 평창경찰서 5층탑의 비교이해

 

 

후세백작 2018.07.13 21:07

 

◆『조선고적도보』의 동북 5층 석탑

 

 

 

 위 사진은 일본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5년 강원 중부권을 다녀가며 원

주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와 평창읍의 유동리 동남 오층석탑과 동북 오층석

탑, 그리고 월정사 문화유적을 사진으로 남긴것의 하나이다.

 

 사진에서 보면 분명 평창읍내의 오층석탑인데 탑 주변의 무성한 나무나 풀을 보면

폐사지임엔 틀림없다. 또한 탑 뒤의 배경지는 중리 노암사에서 보는 여만리에 두곳

의 비슷한 곳은 있지만 정확하지 못하고 노암사에서 바라보는 남산은 시계가 멀고

또한 각도가 맞는 봉우리도 없다.

 

 그리고 송기산 위 장바우골에 절터에서는 고길리쪽은 큰 산세가 단조로워 이러한

배경은 안나올것이다.또한 천동리나 도돈리 일대는 평창의 동북방이 아니기에 제외

된다면 다수나 용황 어디쯤 일까는 의문사항입니다.

-1-

 

 

 

▲ 평창경찰서 오층석탑

 

 본 탑은 전장에서 발표하였듯이 아래에는 기단석이 없고 3개 유형의 탑신부가 모

아져 올린 비 정상의 탑입니다. 혹시나 탑에 상식이 없는 사람이 탑은 이런것이구

나 하고 잘못 인식할 수 있기에 정확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충 설명을 하면 맨 아래에 새로히 만든 부재는 기단석이 아니라 지대석

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 위에 조그마한 석재는 탑신 괴임입니다.

이 부분에 수항리 사지 탑은 연꽃 좌대를 조각하였고 아래에는 기단석에는 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 안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면의 분활에서,,,전체가 하나로 보임 보다는 면을

분할할때 더욱 짜임새가 잇어 보이므로 분할하여 장식적 효과로,,, 쉬운이해로 굽도리의 띠

장을 조각한 것입니다. 이 안상은 탑, 부도등 여러곳에 나타나는데 안상의 중요한점은 시대

구분에 잇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개의 탑은 팔부중상이니 이러한 조각은 갖고있지 않습니다.

경찰서 탑의 4층 옥개석은 상단부는 5층 탑신석이 원래 같은 것으로 제 싸이즈 입

니다만 아래 새로 만든3층 탑신석은 가로가 작게 되어 4층 옥개석에 싸이즈가 미

달됩니다.

-2-

 

 그러면 4층 옥개석은 15도의 각도가 될 것이며 이런 각도로 올리면 3층 석탑이

되는 것이고 현 4층의 옥개석은 그 크기로 미루어볼때 알수없는 3층탑의 중간 2층

옥개석으로 추정됩니다,

 

 

◆『조선고적도보』의 동북 5층탑과 평창경찰서 5층탑의 비교이해

 

사진에서 두탑은 옥개석 끝의 전각의 각도가 틀립니다.

평창경찰서 탑의 2,3층 옥개석이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의 탑과 비슷하지

만 차이점은 여러게중 우선 전각의 경사와 수직이 차이로 두 탑은 하나의 탑이 아

닌 별개의 탑이란 점입니다..

 

 탑에서 왜 각도가 틀린가 하는 점은 전의 글에서 발표하였듯이 \전각이 경사지게

하면 낙숫물이 아래로 흐르지 않고 바로 떨어지는 것이기에 이 옥개석 하단부엔 빗

물받이 홈이 없어야 할 것이란 점이며 전각이 직가인 탑은 낙숫물이 옥개석 아래로

타고 흘러서 탑신부 내부로 들어가기에 빗물받이 홈을 파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두가지방법 모두 똑같은 작용의 다른 조각이란 점입니다.

 

 그리고 두탑모두 옥개석의 층급은 4개란 점으로 신라 중기의 다섯대의 층급이 고려

의 3개 층급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인 신라말 고려초의 4개신라말에서 4개의 층급시

대에 제작된 것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상 두 탑의 비교로 보면 두 탑은 하나의 탑이 아니기에 『조선고적도보』의 탑

은 노암사의 탑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리에 있던 탑을 평창경찰서로 옮긴 증언자

김**옹의 직접 증언이란 점입니다.

 

 그러면 조동리 절골의 탑이란 점에 대하여서는 전 글에서 가설로 발표하였습니다

만 경찰서 옮긴 당사자의 증언이었기에 조동리 탑이 경찰서로 옮겼다는 이야기는

아니란 점 도 알수 있습니다.

 

 만약 경찰서 5층탑이 조동리 탑이라 하여도 조동리에서 경찰서로 바로 옮겨진 것은

아니라 증언자가 해방 이후시기에 올겼기에 조동리 탑은 혹시 『조선고적도보』

실린 5층탑은 아니었슬까 추정도 합니다만 그에 답은 탑 사진의 배경이 똑같아 되

는 사항입니다.

-3-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월정사 절본 감지금니 대방광 화엄경>

 

 

▲ <월정사 절본 감지금니 대방광 화엄경>

 

 고적도보에 실린 월정사의 소장품인데 지금은 얼정사 성보박물관에 없는듯 하다.

6,25동란중 중공군 개입에 유엔군 사령관 워커 장군과 3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월

정사 소각명령은 떨어지고 국군도 아닌 민간인들이 당우 21채를 전부 전소시킬때

타고 없어진듯 하다.

 

 민간인들이 소각하게되는 이유는 이해가 갑니다만 그러면 준비게획을 세우고 귀

중품은 파묻던가 하는 선행 조치가 없었던 점이다. 그래서 성보박물관엔 조각품이

상 문서등은 없게된 것으로 위 대방광 화엄경의 사이즈나 내용설명도 알 수 없게

된듯하며 존재했다면 아마 국보급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