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치의 문인국가와 무신 국가론에 차이(평창 하리 청동가 유적 - 부록 1)
문치의 문인국가와 무신 국가론에 차이(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 부록 1)
이 장에서는 과거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도 내일도 생산적이지 못한 역사 문제를 따져야 하는가에 대한 단펴넉인 단상을 그려 봅니다.
역사가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오늘의 대화라고 지적하였듯이 과거의 역사를 필요의 의지를 가지고 오늘에 수급하지 않으면 그 역사의 사실은 역사로 인식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오늘의 필요에 의해 과거의 역사가 소급되어 다시 정립되어야 역사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체성"이란 현재의 모습의 칼라나 그에 입혀진 유니폼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정체성이란 역사적 사실의 궤적에 의한 것입니다. 즉 과거가 역사가 없다면 오늘의 정체성의 칼라는 살아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예를 쉽게 들면.. 요즘 한류의 기세는 이미 세계를 정복하였고 이제는 세계 문화사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러한 한류의 배경엔 여러 요인과 여러 현상이 작용하고 있습니다만, 그 하나로 십 수 년전부터 스포츠계의 노력으로 한국의 세계화 노력의 경주에 일원이되어 그의 밑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는것입니다.
한때 한국 야구에 투수중 한 사람은 스포츠 신문들의 표현은 빌자면 괴물투수니 기라성 같은 투수라고 표현하지만 미국 프로야구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프로 야구 마운드에는 한번도 오르지 못했던 기억처럼, 동양계는 세계 스포츠계에 끼일 수 없다는 편파적 이미지의 인종론까지 대두 되었건만 이제 우리의 젋은 세대는 수영, 야구, 피겨 스케이트등 모든 종목에서 세계를 제패하며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국력의 신장에 힘입어 음악. 영화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한류는 세계를 파고 들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중국이 눈부시게 우주 유영까지 하고 짝퉁 항모도 만드는 첨단 과학의 스파이짓도 하지만 축구와 야구에는 벤치마킹이고, 스파이로는 통하지 않음에 중국의 고민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짱께들아.. 축구와 야구 아무나 하나!!
그러기에 늘상 국력 신장이 모든것을 해결하는 만능은 아닙니다만,, 우리의 문화는 세계가 원하는 코드가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노밸 문학상이란 영광의 과제는 남아 있지만,, 무엇이 우리문화의 세계화를 추구하였슬까요?? 그것은 위에서 말한바 우리의 정체성을 가지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란 점입니다.
그럼 과거 일본에 가와바따 야스나리의 "설국"이란 소설이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그 소설은 아마도 소설 자체 보다는 경제 신장의 힘인듯 노벨상은 상대적인 개념의 영향이 많이 작용한듯, 설국 소설 자체에 의미는 찾기 힘듭니다만,,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는 과거 '80년대에 아시아의 4용(龍)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란 이야기에서 일본도 중국도 경제 부국이 되었지만 문화 수출은 하질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용의 자태를 드러내며 문화수출국으로 한국드라마를 즐겨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무신의 통치국가는 과정이 필요없고 오직 결과만을 가지는 정부 형태입니다만 문(文)을 숭상하는 문화국가는 그 결과도 필요하지만 과정상의 모든 문제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기에 한국의 드라마나 K-팝, 영화에 이르기까지 한류의 문화는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패턴으로 이야깃 거리로 각광받고 있지만 결과만을 가지는 무신정권하의 생활상은 생활 과정상의 아기자기한 이야깃거리보단 목적달성의 결과만 추구하고 중시하는 문화로 그러기에 일본의 역사는 우리보다는 단조로웠던 것이다.
일본은 과거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무신정권의 에도 막부가 일본 근대화를 꾀하여 서양화 하지만 조선은 전형적인 문인국가로 문치를 숭상하는 점의 차이를 가지는 바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문화수출을 가능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요인이 바로 문치의 국가였기에 그에 생활은 삶의 과정상의 이야기가 누군에게나 공감이 가고 공존할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란 점입니다.
이러한 장황한 비교론에 쉬운 이해를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일본은 화산지형이라 우리나라처럼 화강암이 만치 않으며 화산재에 의해 산림이 잘 자라 목재가 풍족한 나라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화강암재의 탑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교토의 청수사 앞 마당에는 조그만 3층 석탑 2기가 있는데 그냥 반듯 반듯한 사면체, 육면체들로 무신정부하에 하나의 탑을 조성시 탑의 조성이란 목적에만 부합하는 탑을 세우면 되는 것이지 우리나라 탑 처럼 안상이니 팔부중상이니 옥개석의 반전이나 2중 기단이니 하는 조각적 양식 구현은 전혀 없다. 그냥 3층탑이란 목적에만 부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문화에서 3층 석탑의 맨 아래 바닥에 놓이는 부분은 2중 기단석으로 기단석 위 아래에는 갑석과 받침석을 만드는데 탑신이 부타의 전신으로 보았기에 갑석과 받침석은 부타가 앉아 계시는 방석으로 보고 그 받침석(기단 면석)엔 연꽃모양의 안상들로 장식하였다. 이렇게 탑의 조성에 우리나라 탑은 여러 이론에 맞추어 조형미를 드리우고 있다.
청수사 탑은 탑의 미학적 양식론을 가지지못하나 우리의 석탑은 405개쯤의 국보중 가장 많은 범위로 28개의 탑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한국의 탑은 문명의 태동에 있어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1,400년간에 걸처 탑의 조성 양식은 가장 진귀한 보물로 국보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무신 정치의 국가하에서와 문인국가에서 문화양상은 극과 극의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무신정치 아래의 일본 문화는 어떤 것일까?
오늘의 일본은 자동차도 한국보다 많이 수출한다. 그러한 기술력과 상술로 그들은 왜 문화상품은 수출하지 못하는가 하는 점에의 의문에서,, 그들의 상술력은 하늘을 친다. 가령 오끼나와와 쓰시마섬은 우리가 6,25 전쟁 난리중에 일본은 미국과 샌프란 시스코 조약에서 오끼나와와 스시마를 미국으로부터 일본땅이라고 인정받는다. 물론 당사국이나 주변국과 협의해야 될 문제를 이런 빤질한 심리를 이용하는 훈돗시들의 상술력이 제 아무리 하늘을 친다 하여도 문화상품은 수출을 못하는 이유는 위에 언급한 무신정권하에 그들의 생활상은 오직 목적만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었기에 이야깃 거리의 소재도 말라 비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궁중 이야기도, 선비의 이야기에서도 우리 생활의 단면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소재가 무궁한 점이 한류의 바탕을 이루는 저력의 한 부분인 점이다.
이렇듯 한류에 나타나는 한국의 민족적 역량은 언제라도 자랑스러운 문화를 드리우는 문치의 문인국가라는 점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평창에선 이런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고 역사를 잘못 서술하고 왜곡시켜 이상스러운 문화를 전개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평창 역사 전반에 걸쳐 잇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름아닌 노산성의 " 노산성의 임란 전적비" 입니다.
이제 평창의 임란사중 일부는 임진란당시 권두문 평창군수의 "호구록'에 의해 평창임란사가 밝혀졌고 또한 많은 평창사람들이 그 내용을 인지하시고 계신다. 필자는 이점, 노산성의 전투의 허위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기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규명을 당연 수정하여 바른 역사로 정립하여야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郡의 각종 행사의 시작에 郡際에 노산성의 임란 전적비 앞에서 충의제를 드리는 행사는 문치국가의 문화론에는 걸맞는 행위가 아니란 점입니다.
가령, 우리나라의 위인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면 대게들 세종대왕, 성웅 이순신 하고 두 세분을 거명하지만 율곡 이이, 정약용, 이황 선생 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치 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문치국가에서 비뚤어진 사관 조명에 기인하는 문제로 이러한 학문을 중시 여기지 못하기에 우리가 따라야 할 학자들의 이야기도 없기에 우리나라 민족 문화의 정통성을 그려내지 못하고 오늘도 우왕좌왕 걸며 국가가 시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에겐 대통령은 있지만 존경하는 학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학자는 있으나 존경하지 못한다는 점으로 우리는 무엇을 본받고 무엇을 배워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과거 일본의 명치(메이지)유신이 성공하기엔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지도력이 아닙니다. 모든 일본은 농업등 각 분야에 모든 국민이 존경하는 학자 4명을 숭앙하였기에 국만들은 그들이 말하는 의견을 잘 따랐기에 명치유신은 성공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에선 성웅 이순신이 존경받는 위인이지만 그것은 국가의 존폐의 기로에서 국난을 극복하는 위인으로 민족적 영웅으로 길이 존경하여야 하는 문제이지만 그러한 국난극복의 무인을 기리는 것이 이 땅의 문화발전의 전체는 아닌 것입니다.
지난 연말에 평창에선 율곡의 판관대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는데 이에 대한 문제의 논고는 분명 다음에 하겠습니다만,, (왜 본인이 남의 세미나에 엇대고 다시 정립해야 되는가 하면 그 세미나의 리포트를 보면 역사학자도 아닌 문학자들이 사관적 기록의 정립도 없이 마구잡이 논지의 리포트를 남긴 바 후일 다른 연구에서 이 리포트이 옳고 그름도 구분치 아니하고 무조건 인용한다면 판관대에 대한 해석은 더욱 둔갑 되기에 본인은 한권의 책으로라도 이런 평창 세미나의 오류들에 진위를 밝혀 서술할것 입니다)
율곡의 사당은 봉평 입구에 봉산서재란 이름으로 이항로와 같이 모셔져 있는데 몇 평도 않되는 공간에 아마 왠만한 집안 젯상보다 작디 작은 사당을 가지고 있다. 아마 용인 수지에는 우리가 잘 아는 국회의원 한 사람이 열심히 후원하여 기백 억 들인 신곡서원을 보라, 아니 그보다 일제때 각 고을의 의병장의 사당들을 보아도 그 크기 면에서 율곡의 봉산서재는 그 규모가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작은 부류에 속한다. 이것이 조선 성리학, 천 년을 이어져오며 연구하시고 마무리진 대 학자 율곡 이이 선생의 사당이고 서원도 아니다. 물론 파주는 선영의 묘에 대한 사원이고 오죽헌은 율곡의 사당이 아니고 율곡의 사당은 오작 봉산서재가 유알하다. 이것이 이 나라가 문과 학을 숭상하는 나라인가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성웅 이순신은 아산의 현충사는 그의 고향에 있는 것이고 통영의 충렬사는 현지적 사당이다. 이렇게 볼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색력에 문제가 있는지는 몰라도 문인에 대한 예우보다 무인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큰 듯 하다. 현대 정치가 난잡해 지는 것도 이라한 문치국가에 저명한 학자의 지침이 없기 때문이다.
평창에서 지내는 가장 큰 군제(郡際)로는 노산성 임란 전적비 앞에서 지내는 충의제이다. 이것이 위 예시문처럼 문치국가에 학문을 숭상치 못하고 충의제를 지내고 평창군 페스티벌의 장을 여는 것은 그렇게 아름다운 모양새는 아니다.
과거, 조선시대에 각 군은 국사 성황사가 있어 평창군도 정초에 군수나 군수를 대신하는 제사장은 평창의 1번지 노산성의 국사 성황사에 올라 국태민안의 제를 지낸 것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도 이 고을의 수장인 종 4품으 군수는 나라와 평창군으 번영과 군민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재를 지낸것이지 일종의 부분적인 예우의 충의제로 대신하지는 않았었다.
그러기에 이제라도 이러한 내용을 알았다면 다시금 고쳐서 이러한 뜻의 제를 지내야 함이 바르고 정의로운 일이라 하겠다.
이것이 문화국가의 군제(郡際)이지 충의제가 군민의 화합의 장의 군제(郡際)라기엔 무언가 흡족치 못한 점에 이러한 긴 설명적인 이해를 그려 봅니다.
그러면 이러한 군제(郡際)에서 그 메인 대상체는 무엇으로 선정하는가에 대한 점에서 필자는 앞전의 글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발굴""에서 고조선 청동검을 치켜 든 2,600여년 전의 평창의 선인의 인골을 발굴하였는데 이 유골은 2,600년 후의 이땅의 후손들에 의해 세상의 빛을 다시 보았건만 못난 후손들에 의해 박물관일하는 제집하나 마련 못해주어서 이제서 고향을 등지고 먼 타지의 박물관에서 타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 평창 이땅에 먼 선안들,, 전국 어느지역 역사에서도 없는 고조선 시대의 선인을 모시지 못하는 불찰에, 박물관을 장만하여 주기 보다는 차라리 능을 만들고 다시금 흙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며 이 능이 평창의 선인으로서 최고(最古)의 시원을 가지며 전국적으로도 가장 상고시대의 능으로 자리매김 하고 우리는 평창의 후손으로서 매년 제를 드림이 옳은 일 아니겠는가?
이것이 우리 역사가 자랑하는 문치국가의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하며 평창의 문화는 역사적 사관의 정립에 의해 바른 문회로 가듭나길 희망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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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부록 2부에서는 하리출토 청동기 유적에서 발굴된 고 인골의 20대 여자는 고조선식 청동검을 높이든 정말 그 시대에 제사장이나 아니면 상류계급의 신분을 가진사람으로 과연 그녀는 누구였슬까?
역사에 가상적 추정의 가정은 금물이라 하지만, 인골과 같이 매납된 고조선식 청동검과 활의 탄두격인 석촉등이 그를 무릎 슬개골이 놓인 점 등을 통해 그녀의 정체를 한 번 추정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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