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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옥산 육백마지기 어원이해》

후세백작 2023. 5. 13. 22:59

《청옥산 육백마지기 어원이해》

미탄편 글을 쓰자니 육백마지기 어원부터 다시 이해 합니다..

저의 블로그엔 육백마지기의 어원의 고찰로 육백은 음양오행수로 금성을 뜻한다는 이해의 긴 글 두 편이 있습니다.

필자의 글 천여 편의 글중 가장 많이 검색되고 있지만 반응은 없다.

고씨동굴에 역사 글 한편이 인터넷 떠돌다 영월문화원에서는 이를 보고 고씨동굴에 고종경 어른의 (필자의 13대 조) 임진왜란 의병탑을 5m 크게 세우건만 평창은 뼝창은 만치만 메아리가 울리지 않는 뼝대입니다.

지난번엔 어떤 대화에서 필자에게 육백마지기란 볍씨 육백말을 뿌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참으로 한심한,,,,

육백은 금성을 뜻한다는 것운 컴에서 육백 두자만 검색하도 음양수록금성을 말한다.

이점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필자 혼자만 그렇게 이해할까? 따라서 볍시 육백말은 얘기하는 사람들은 남의말 그냥 믿는 까막눈으로 보인다

본인의 블록에서는 육백은 음양수로 금성을 칭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 까막눈 되지말고. 인터넷 검색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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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 요약 >

육백마지기에 어원은“육백 +마지기 ”의 합성어로 육백은 제자백가 시대에 풍수가의 음양오행설의 이론에 따라서 아홉별 중에 여섯째를 육백이라하며 금성을 말함이다.

마지기는 저의 블로그 글에 그 해석도 있습니다.
 

<"육백"의 인터넷 사전 검색 >

◆ 육백 (六白) - 음양설에서 아홉 별의 하나인 금성을 이르는 말

◆ 음양설(陰陽說) - 음과 양의 理, 氣를 우주 만물의 생장 변화의 근본 원리로 하는 설

◆ 구성(九星) - 구성이란 하늘의 별은 음양수로 헤아리는 수를 이야기 합니다.

一白(일백)은 음양가에서 수성을 일컷는 말,

二惑은 토성,

三碧은 목성 ,

四綠은 삼벽과 함께 목성을 말함.

五黃은 토성,

六白은 금성,

七赤은 육백과 함께 금성을 말함. 八白은 토성.

紫白은 화성을 말한다.

이것이 음양수로 말하는 아홉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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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어느 미탄분이 육백마지기에 화전민으로 고랭지 채소를 경작하러 올라가기 전까지는 육백이란 말이 없었다 합니다.

그러면 비유적인 이해 하나 합니다. 육백마지기 반대편으로 내려오면 조동이라 합니다.

조동리는 고길리와 노론리 사이에 지명으로 마을의 지형지세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비조탁목지형(飛鳥啄木地形)이라 한다.

(평창의 지명유래. 평창문화원. 2,000년)

조동리의 어원은 비조탁목형의 풍수적 용어를 지명으로 사용하기에 이 어려운 단어를 마을사람들은 쉽게 새에 형상의 조동리라 부르는 갓입니다.

이러한 비조탁목형의 이름이 마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슬까요? 아마 관아의 군수나 이러한 학문을 겸비한 사람들이 지었다고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듯 육백마지기도 논 농사의 논도 많치않은 시절에 화전민들이. 볍씨 육백말을 뿌리는 공간으로 가늠해본다는게 어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풍수랁모든 사람이 금시발복으로만 생각합니다만. 증국에서 원래의 풍수는 북풍을 막아주고 할때에 지형지물의 보편성에서 고려초 왕건과 도선국사에 의해 중국풍수에서 우리나라는 습곡산지로서 간룡법등 산새를 용으로 보는 한국적 풍수가 생겨납니다만 (왕건의 훈요십조 2번과 8번을 검색해 보시면 이해 될 것입니다)

제자백가의 풍수가에서는 음양오행수를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먼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고 현재 누구도 이사갈때는 손 없는 날을 가리는것도 음양 오행수를 따지는 것으로 모든 지형의 대부분도 풍수에 기인하는데 요즘 지명지나 지리학자들은 이런 풍수를 도외시하고 있다.

그럼 역사학자들은 요즘의 잣대로 옛날을 연구합니까? 최소한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 민족의 생활의 기조를 이루던 음양사상과 불교, 유교, 노장사상 모두들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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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옥산 육백마지기의 유래)
 

청옥산의 육백마지기는 해발 1.256m의 고원으로 고생대 지질이 융기한 고위도 평탄면으로 대관령과 같은 구조를 같고 있습니다.

조선 선비들 금강산 유람록에 보면 강릉에서 대관령을 올라서며 횡게는 산도 아닌 산등성이라고 여러 선비가 신기한 지형으로 형용하고 있습니다.
이곳 청옥산 아래엔 옛날 정선의 관문 성마령이 위치하며, 육백마지기는 토산으로 산의 정상부까지는 차가 오르기에 완만한 도로의 지리적 잇점을 가지고 있다.
 
고지도를 통해보면 산 이름도 없으며 성마령만 표기되다가 조선 말기시대에는 두만산으로 표기되고 있다.필자의 평창 지명 변천의 글에 의하면 평창읍 마지리가 마지리로 표기되듯이 두만산으로 표기되다가 조선 말기에는 그 뜻이 바른 두만산으로 표시된다.
필자의 지명변천사 글에서는 1870년대 이후에 지명이 가장 풍수적인 용어로 바뀜을 볼수있다
횡계의 발왕산의 욍은 이때 1870년 이후의 왕으로 1870년 이전의 고지도에서는 왕이 아니라 배낭 랑자를 쓰고있다 즉 스님의 가방이고 진부의 수항리 고지도에서는 수다라고 기명되어 있다
여기서 항자는 풍수적으로 굽어도는 관자놀이의 뜻이고 평창의 시루목도 증항으로 이때 발생되는 이름이다. 더 나아가서 봉평의 팔석정은 이 시기에 원길리 신범선생이 보고 기록한 기문은 두자의 한문인데 이 시기 이후 4자 한문으로 바뀌고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금강산)이 양사언의 호이기에 양사언이 놀았다 한다
 
뮈. 평창학 연구소에서는 양사언으로 팔석정을 지정 문화로 하자는 글도 있더만 무엇으로 고증됩니까?
그 석각에 치석의 수법은 깡통으로 긁고 글체는 양사언 체는 하나도 없다. 유일한건 신범선생의 봉서유고에서 직접보고 기록한다며. 두자한문들의 기문을 적고있다. 이러한 비난보다는. 후일 신사임당과 율곡의 판관대편에서 팔석정을 논하겠습니다.
이때 1870년경 지명이 설명적인 한문으로 바뀝니다
그것은 한글이 창제되고 한글은 토씨로만 쓰이다가 명사에도 한글로 통용되며 획많은 한문은 쉬운 한문으로 사용됩니다.
청옥산이 윈 지명은 두만산으로. 머리두 찰만자가 한문에서는 말두 찰만의 두만으로 바뀌나 1870년대 전후에 청옥산을 바뀌며 육백마지기란 지명이 생겨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청옥산이란 어원은 세종때쯤 실록어 북한의 단천과 이곳에서 옥이 출또되는데 옥은 임금의 소유물로 제한되기에 일반인들은 캐지말라는 어명이 두번 기록됩니다

여기서 청옥산은 연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