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kks1.tistory.com/2086
방림역 위치 고찰 ( 용역 자료에 대한 질의 고찰 )
1. 방림역 (方林驛)
[방림역 개설]
◆방림역 (方林驛)은 고려시대에는 양계 가운데 동계 지역의 역도인 명주도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에 강원도 지역의 역도인 대창도에 속하였으며, 세조대에는 보안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방림역은 조선의 8대 대로, 이후 10대 대로의 제 3로인 평해로에 속하는 강원도의 관동대로의 가장 중요한 방림, 대화, 진부의 역원에 속하였다.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강원도 강릉 편
방림역에는 역리 30 명, 역노 15口, 역비 11 명과, 기마 1 필, 복마4 필 등 5 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 방림역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강무(講武/동계 극기훈련)장으로 활용되었는데, 1449 년(세종 31)에는 세자가 강무를 하기 위해 방림역 일대에 강무장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31 년 4 월 17 일 )[변천]
■ 조선시대에 역도와 역로 조직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방림역은 대창도에 소속되어 대창도 역승 (驛丞)의 지휘를 받았다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
■ 1457 년 (세조 3)의 역승폐지 조치로 찰방의 순시 범위가 넓어지면서, 각 역도에 소속된 역의 수가 많고 역 사이의 거리가 멀어 제대로 순시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역로가 쇠퇴하는 등의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1462 년 (세조 8)에 대대적인 역로 개편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방림역은 보안도의 속역으로 편성되어 보안도 찰방 (察訪)의 통제를 받았으며, 역의 명칭 또한 방림역 (方林驛 )으로 변경되었다 『세조실록 』 8 년 8 월 5 일 ].
■ 1896 년 (고종 33) 1 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 9호‘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조선시대 후기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 『고려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 『여지도서』
2. 문헌의 기록으로 본 방림역 위치 추정
<방림 옛길과 『평창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고증한 방림역의 기록>
1) 실록의 기록
◆『태종실록 권29』의 기록
“그해 가을(1415년 9월 29일) 태종은 영월군에서 몰이 부역으로 천명을 일구고 강원도에서 4,400명 도합 5,400 명이 동원되어 대화면에서 사냥을 하였다.”
◆태종실록 권30』의 기록
태종 15년(1415년) 10월 7일 신미 1번 째 기사.“돌아오다가 방림역 동쪽 들에서 술자리를 베푸니. 종친, 도 진무, 대언이 시연하다.”
(원문) 辛未/還次芳林驛東坪置酒,宗親及都鎭撫、代言侍宴。仍賜酒于隨駕大 小人員。【태백산사고본】 13책 30권 26장
(이해)
위 실록의 기록은 태종의 5천명의 몰잇군과 함께 약 10일간의 여정으로 대화역 근처에서 강무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방림역 동쪽 들에서 그간 사냥한 사슴 20여 마리를 몰잇군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원관찰사는 술 100병을 가져와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기록으로 실록에서 방림역 동쪽 들(還次芳林驛東坪置酒)에서 연회를 하였다는 기록에서 연회장소는 현 방림교 아래의 천변의 돌장강을 지정한다. 또한 방림에서 수천명이 사슴을 잡아서 천렵을 하기에는 이곳만 적당한 장소이다.
◆소결 –연회장소로 방림역 동쪽들(芳林驛 東坪)이라 할때에 방림역은 그보다 서쪽으로 驛路인 방림 옛길에 천재당 아래의 지역으로 확정된다.
따라서 태종실록의 기록에서 방림역은 방림시내 일원으로 비정된다.
2) 동유록(東遊錄)/ 금강산 遊山記
▪이세구(李世龜)
▪일시: 1691년 9월 2일~10월 8일
◆ 원문; 五日丙戌. 行二三里, 過縣倉, 秣馬於太和驛村李承吉家. 又行二十五里, 渡芳林大川, 宿芳林驛安大敏家. 川南有高嶂,是平昌縣後主山.
9월 5일 2,3리를 가서 고을의 창고를 지나 태화역 (太和驛) 마을의 이승길 (李承吉 ) 집에서 말을 먹였다. 또 25 리를 가서 방림 (芳林)의 큰 시내를 건너 방림역 안대민 (安大敏)의 집에서 묵었다. 시내의 남쪽에 높은 봉우리가 있으니, 이것이 평창현(平昌縣) 뒤에 있는 주산(主山)이다.
<이해>
◆ 1691년 10월 5일 모노원촌에서 출발하여 53리를와서 큰 시내를 건너 방림역 안대민의 집에 묵었다라는 기록에서 안대민의 집은 일반 점막이 아니라 방림역 안대민 집이라 표시하고 있다(宿芳林驛安大敏家)
◆ 방림역내 역리와 노비의 합 56명이 驛과 院(여관)을 관리하는 큰 역으로서 여러 동의 院이 있어야 하고 안대민은 그중 한 채를 담당하는 역리(驛吏)라는 이해이다.
◆ 소결 –
1) 이세구의 동유록에서 방림역은 방림천을 건너서 (渡芳林大川, 宿芳林驛安大敏家) 즉 방림역 안대민家는 방림역원내 역리의 한사람인 안대민이 관리하는 원(숙소)에 머물렀다는 듯이다.
2) 또한 위 기록에서“시내 남쪽(南川/방림천) 높은 봉우리는 무동산으로 관아의 뒷산이다.(川南有高嶂,是平昌縣後主山.)”에서 방림삼거리나 방림초교 부근에서 시내 남쪽의 산(무동산)이라 표현함은 저기라고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가 따라야 하기에 어색하고 불가능한 문장이 된다. 따라서 이 위치는 무동산 뒤편인 중방림 지역이 해당된다.,
3) 또한 상수리나무가 많았다는 표현에서 산에 상수리 나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넓은 개활지에 방품림이나 그늘 등의 목적으로 심었기에 이곳은 개활지의 평지에 해당된다.
3) 동유일기(東遊日記) <금강산유람록/ 평창부분 발췌>
◆ 성담 송환기
◆ 일시 : 1781년 7월 29일~9월 29일
◆ 번역문
13일. 잠깐 흐림. (운교역에서 아침 식사후)
저녁에 방림<강릉 땅으로 관아와 170리 떨어져 있다.>에 이르렀는데, 시냇물이 깊고 넓어 마을 사람들이 남여를 들고 부축하며 보호하여 건넜다.여관에 머물며 묵었는데 듣자하니 관찰사가 오전에 지나갔다고 한다. 나는 이번 유람에서 나의 여정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산길에 여관이 드물어 부득이 역원의 마을로 들어갔다.
◆ 원문
十三日. 乍陰. 夕到芳林,-江陵地, 距府百七十里.]- 川水深濶, 村人擧籃輿擁護而渡.
止宿旅店, 聞巡使午前過去. 余之今行, 不欲爲歷路所知, 而山路店稀, 不得已入驛村.
◆ 소결
송환기의 동유일기에서는 운교리에서 저녁네 방림에 다다라 방림천을 건너“여관에 머물며 묵었다”(止宿旅店)와 ”止宿旅店“에서 驛站이 아닌 여관의 점으로 기록하여서 사설 점막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또한 ”역원마을로 들어갔다(不得已入驛村)“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역 마을을 통칭하는 것이다. 즉 특정지시가 없는 일반적 관형구로 일반적으로 역마을이라하지 점(店)마을이라 하지는 않는다.
◆ 방림삼거리 점막이 역이라 주장하는데 문제제기
정원대는 삼거리 주민의 증언에 의하여 이곳이 역이라 주장하고 있다. 주민 두어 사람은 이곳에 140년 살면서 조부로부터 이곳이 역이고 노비도 있었으며 300원도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주민들의 역이라 함의 증언을 액면대로 믿지 못하는 점은 보편적으로 역이라 말한다. 가령 역이 어디쯤 있어요 하고 물을때나 저기라고 답할때 사설 점포도 역으로 통상 말한다.
그리고 이 증언자는 300원이라 하는데 일제때의 화폐단위로 삼백원은 강원도에서 일제때 백원짜리 돈을 구경한 사람이 없을듯 하고 지역주민들의 증언으로 지방역사책에 기록된 오류의 예로 계촌에는 향교터가 있다고 증언하고 모든 평창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조선은 주자 성리학의 나라로 각 군현에 향교를 두어 고을 태수 ( 평창군수)가 제를 지내는 곳으로 군현의 3단 일묘제의 하나이다. (삼단은 사직제사, 종묘, 산천(기우제)이고 1묘는 향교에서 공자께 제를 지내는 석전대제를 태수가 직접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이러한 향교는 성균관이 주관하며 허가를 내주는데 마치 지역주민들은 서낭당처럼 마을에서 향교를 마련한다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증언이다.
이렇듯이 방림역원은 일명 역참제라고도 한다. 그리고 위의 동유일기에서 방림삼거리에 止宿旅店(점은 역참이 아닌 사설의 점포, 점막이다)
그러면 역참과 점의 구분을 하면 歷站은 공무로 다닐때 숙식을 제공하는 정부기관으로 이를 위해서는 출장명세서로 각 역에 마패를 제시하면 말의 그림수마큼 말을 받고, 또한 말의 먹이 여물을 먹이려면 초료란 명세서를 제출하는데 방림역 삼거리가 점포의 점막이 아니라 관리들을 위한 역이었다면 이러한 말을 길렀어야 하고 일반 점막의 마방에서 초료를 받고 말 먹이를 주고 초료를 관에 가지고가서 결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둔토에서 생산된 물자를 공급하는 문서로 방림삼거리가 방림역이라면 이러한 역둔토인데 노비가 30명등 있었다는 증거나 증언이 필요한것이기에 정원대는 방림 삼거리가 역이라 주장하기에는 이러한 마패와 초료에 관한 기록이라도 가져야 한다.
4.『평창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방림역의 위치기록
발행처 ; 평창군청. 1999
학술용역;강원대학교
• 평창군 역사와 문화유적 조사단장 (강원대학교) 최복규
◆『평창의 역사와 문화유적』책의 기록
방림면 5리 85의 이용수氏가 역타로 알려진 자신의 밭에서 밭을 경작하던 중 1m 깊이에 돌로 다져 지었던 역터를 발견하고 그 곳에서 분청사기와 기왓장등을 주웠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평창의 역사와 문화유적. 442쪽)
역터 전경 역터에서 나온 돌들
<사진출처- 『평창의 역사와 문화유적』p448>
역터에서 발견된 분청사기 역터에서 발굴된 암기와 와편
<사진출처- 『평창의 역사와 문화유적』p450>
5.방림역터의 종합적인 고찰
◆ 방림역의 위치에 따른 역원취락의 이해
1) 방림지역의 역로 지리적 고찰
관동대로 (평해로)는 현재 횡계 차항리에서 국도를 올라타면 아스팔트 바닥에 평해로(도로고에 종점은 서울이고, 시발점은 도로의 끝의 지명으로 부른다)는 한양에서 울진 평해까지의 도로가 되었다. 방림역은 평해로가 방림을 관통하는 역로(驛路)로 방림천변을 따라 있었으며, 방림역은 방림 5리의 천재당 인근의 옛길의 가도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모든 역은 가도를 따라서 존재하며 역원제가 끝난 1896년 이후에도 취락은 정비하지 않아서 흔적이 사라질 수 있으나 역로는 말 발굽으로 도로를 압축하였기에 잡초도 나기 어려운 땅이지만 역로는 현재까지 도로로 존속 발전하였다.
당시의 관동로는 1870년 평창군 해동지도 주기에서 보면 성마령은 大路이나 대관령는中路로 표시한바 수운 이해로 대로는 가마로 넘어 갈 수있는 길이고 중로는 말로 겨우 다닐수 있는 길이란 점이다. 따라서 방림 천변을 따라서 옛길이 형성되었으며, 현재 방림시내 중간으로 관통하는 도로는 1912년도쯤 일제가 만든 신작로이다.(이러한 추정은 일제식민 초인 1910년 테라우치 1대 총독은 전국에 도로를 1년에 1만 km, 다음해 9천km를 건설하여 현재의 도로의 모태가 된다, 이에 관동대로는 아마도 도로공사 원년에 개척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헌영의 <풍악록>에서는 방림역은 상수리나무가 즐비했다라는 점은 보통 가옥은 배산임수의 북풍을 막아주는 곳에 자리잡지만 방림역은 사방이 트인 개활지에 강을 옆으로 끼고 있어서 추운 강바람을 막아주며, 그늘 등을 마련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심은 나무이다. 이러한 점이 방림역의 지리적 고찰이다.
2) 방림역의 역원취락
평해로에서 경기도는 한성과 인접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살기에 교통과 주막이 발달하여서 상대적으로 역원제가 작은 추세이나 관동대로(평해로 내의 원주에서 강릉까지)에는 고을이 없는 곳을 가야 하기애 방림역, 대화역, 진부역은 보안도 역중에 가장 왕래가 빈번한 역원이 발달하였기애 가장 큰 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방림역의 역원취락 형성에는 역리 30명, 역노 15구(口), 역비 11구로 역리의 가족과 손님 등 약 100명 이상과 기마와 복마의 합 5필의 말이 배속되기에 마굿간도 3~5칸 준비하는 역원취락을 형성하여야 한다. 또한 100여명의 취사량을 가지는 역위토를 가진다. 따라서 방림역의 위치조건의 첫 번째는 물의 사용의 용수가 원할한 지역이며, 역전토와 건초준바등의 초지, 땔감의 화목이 용이한 지역이라야 한다, 식수와 생활수, 그리고 다섯 마리의 말이 필요로 하는 물을 가져야 하는 곳이다. 장마의 걱정은 있지만 이러한 요건에 적당한 곳으로 역로중에 천변 가까이에 역원을 형성한 것이다.
율곡의“대화 산중”이란 시에 제목에서는 제목의 대화산중이란 뜻이 내포하듯이 산과 산이 가까이 마주하는 골짜기로 이곳을 지나다 해가 기울자 범 발자국과 범소리에 저 멀리 있는 움막에 찾아가서 하루 묵었다는 시나 금강산 유람기에서 대화는 빈 골짜기에 산 중턱에는 부역을 피해 도망온 움막 몇 채가 있었다 하는등 과거 평창지역의 관동대로는 인적이 드물어서 방림역, 대화역, 진부역은 관동대로중 가장 중요하고 이용자 수가 가장 많은 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조선시대 사회의 용수이해
고대의 인간사회에서 우물을 파기도 힘들기에 용수의 물은 필수품으로
그 예로 필자는「평창역사의 이해」책의 평창의 풍수지리편에서 수정산에서 발원하는 용맥은 노산에서 멈추고. 노산아래에 있는 평창관아는 수정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개념이다.
맥이(고조선의 한 종족)의 정기를 받았다고 하는데, 노산 아래는 두 개의 옹달샘이 솟는다, 옹달샘은 여름철에는 시원한 청량감을 주기도 하며 겨울철에도 건수가 아니기에 관아가 자리잡고 중학교 뒤의 옹달샘의 객사가 자리잡았다.
당시 우물을 파기도 힘든 시대에 이로서 평창 고을 현감은 냉장고 옹달샘의 시원함은 임금님도 부러워 할 것이기에 평창 관아는 임금님터 보다도 대명당이란 점이다. 이렇게 옛날에는 식수등의 용수는 생활에 필수 조건이었다.
그래도 방림역은 천변이라 위험하지 않는가라는 의구심에 가까이 평창의 예를 들어 이해합니다.
◀노암사지 (평창읍 중리 두만여울) ▶수항리 사지 (진부면 수항리)
위 두 곳의 애로 보면 공통점은 천변에 위치한 사찰의 사원지로서 이에 이해적 설명을 합니다.
1> 노암사지
평창읍 중리의 노암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하는데 기록으로는 일제때 강원도 고적대장에 노암사지가 기록되어 있다.
노암사의 원래의 터는 위의 일제때 실측 지도에서보면 원내의 작은 점하나가 폐사원지가 된 노암사터에 남아있는 오층석탑이다. 일제때 제방을 쌓자(임의의 노란 선) 노암사는 제방밖의 천변에 놓이게 되고 이후 돌체험관 바로 아래쪽으로 이전되었고 이후 논이되고 탑은 논 안쪽에 있다가 60년초 유실되었다
이 문제는 제방을 축조하고 노암사에 남아있는 탑을 후일 제방 안쪽의 현 돌체험관 바로 아래로 이전하였고, 이곳이 논의 경지로 되자 논 가장자리에 있다가 60년대 초에 분실되었다.
2> 수항리 사지
위 지도에 굽어도는 수항천을 따라 만 여평이 넘는 경지에 원내의 점은 지금도 남아있는 탑의 사진이다. 이 탑 바로 뒤에 법당의 주춧돌이 있었다고 증언기록한다.
◆ 소결-
노암사나 수다사는 일반 가옥에서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집합 건물이기에 많은 용수를 사용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는바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천변 바로 옆에 위치한 점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방림 역터인 방림 5리 85번지는 역로의 가도에 위치하였으며 역원은 100여명 이상이 주거하기에 생활 용수가 가장 필수조건이었으며 또한 일제의 1912년 2차 축적지도에서는 이곳에 가옥이 표시되지 않았다(용역조사 지도는 1918년 3차지도이다) 함에는 역원이 폐지된후 홍수나 어떠한 사정으로 경지정리가 된듯하며, 우리가 무심코 생각하기엔 역원이 고래등 집으로 연상하나
위의 예시한 수항리사지나 노암사지에서도 보면 목재가옥은 없어지고 석재의 탑만 남았듯이, 일반적으로 역사 사료들은 매장지 시굴조사에서 밝혀지듯이 방림역터의 지하 1m 에는 강변 호박돌로 터를 고른 돌의 사진이 보인다,( 위 사진의 역터에서 나온 돌들의 사진 참조)
◆ 방림 삼거리 점막(店幕)의 이해
(옛날의 역사를 지금의 관점에서 이해들 하고 있기에 기록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중기까지 도로가 없었고 조창등의 수운이 발달하였다.
중종때 고형산 강원도관찰사는 임기 일년동안 자비를 털어 관동대로의 길을 정비하였다. 이로인해 정묘호란때 청군이 주문진에서 관동대로로 한양엘 쏜살처럼 올라왔다는 보고를 받자 중종은 대노하였고 이로 인해 관찰사의 봉분이 파헤쳐지는등 수모를 당하였지만 10년후 중종은 관동대로 때문에 교역이 물자의 교역이 왕성하여졌다는 보고를 받자 그의 고향에 사방 10리의 사패지를 하사하였다.
이 기록이 우리나라에는 도로가 없었다고들 하는 글들이 많은데 인위적으로 도로정비는 관동대로 정비가 처음인 듯 하지만, 그간 지방 관리들이나 대과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와 파발마들만 다닌던 관동대로는 도로가 생겨나며 상업이 교류되며 많은 사람이 이동하게 되며 주막과 식사와 여관의 사설 점막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발전에 힘입어 임진왜란이 지나며 방림삼거리에도 점막이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민간의 써비스 좋은 점막의 발달로 국영의 역원은 16~17세기에는 피폐되어 갔다고 한다.
피폐는 되어갔지만 역원제는 1894년 갑오개혁에 폐지될 때 까지 국가의 역원은 변동사항이 없었다 하는바 방림역이 방림 삼거리의 사설의 점막이 국가의 역원이 될 수는 없다
역원에는 마패를 보이고 그 수효에 따른 말을 빌리며 국가 공적인 업무의 출장에 말의 먹이를 주는 초료까지 발행하여 각 역에 제시해야 되는데 방림 삼거리의 일반 사설의 점막에서 말 다섯 마리를 관장하고 있었는가? 정원대의 방림 삼거리 점막이 역이라 주장하는 점은 역사적 문헌사료나 유물등이 없는 증언만으로 주장하는 점이다.
위 동유일기의 이해편에서 언급했듯이 역과 점막에 대해서 일반일들이 정확하게 구분할 수있는가에 문제로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일반명사로 점막도 역이라 말할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증언만 가지고 역이라 단정한다면 위 역원고찰의 실록의 기록까지 4편의 기록은 전혀 무시하는 처사는 이치에 맞지 않는 부당한 처사이다.
정원대의 방림 삼거리 점막이 역이라 주장하는 점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가 제일이라는 돈키호테적 발상이란 점이다.
참고 1) 유산기속의 관동대로의 이해
조선시대의 도로사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로가 아니고 산을 넘기에는 아주 열악한 오솔길 수준이다.
임진왜란 200년 후인 1871년에 쓴 송환기의 동유일록에서는 견여(肩輿)를 타고 문재(門岾)를 넘어 운교역(雲交驛) 마을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하루 종일 좁은 골짜기 속을 지나갔는데, 벼랑의 돌이 안장에 걸리고 숲의 넝쿨이 모자를 건드려 답답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850년대의 해동지도 주기에는 성마령은 대로이다. 대관령은 중로이다라 기록하는데 성마령은 가마를 타고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지만 중로라 하면 말을 타고 오르지 못하는 현재의 선자령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은 하루 7~80리, 도보는 30리를 이동할 수 있으며 밤길은 범(호랑이)에게 물려 죽게되는 사례가 많아서 (성마령의 돌 무더기를‘평창의 인문지리’책에서는 서낭당이라 하지만 서낭당은 마을을 수호하는 개념이기이 성마령의 돌 무더기는 호식총이다) 당시에는 밤길은 다니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 여건으로 안흥의 오원역에서 계촌역, 방림역, 대화역, 진부역, 횡계역으로 가기에는 인적도 드물고 가옥도 없는 많은 산중에는 각 역원에 의존도가 높아서 관동대로에 기록으로는 방림역, 대화역, 진부역이 가장 번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2) 필자가 지난해 연말에 출간한 <평창역사의 이해> 책에서는 방림역 고찰에 일부 오류가 있었다.
이 문제는 <평창역사와 문화유적>책에서 방림역은 방림5리 85번지라 기록하였기에 컴에 지도로서 이 장소를 다음지도에서 검색하면 계촌의 산이 나오고 따라서 방림리 85번지를 검색하면 방림 삼거리에 산속의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가 검색된다. 이를 네이버에서는 나오지도 않는다. 다섯 개의 컴으로 검색하여도 동일하다.
번지 검색에 오류로는 정원대의 <평창인문지리> 책에서 평안역의 기록에 쓰인 번지를 그대로 검색하면 높은산 가운데가 나온다.
따라서 필자는 책에서 전기 방림역은 방림리로 하고 후기 방림역은 방림리 85번지로 기록하였기에 여기에 후기 방림역은 오류라는 점을 밝힙니다.
•◆“역사환경문제소”에 방림역 위치 확정에 대한 질의
평창군청의 용역사업으로 <역사환경 문화 연구소>는 방림역의 원위치 고찰의 보고서에서 방림역을 방림면 방림리 753-11번지로 확정함에 역사와 고고지리학적,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로 확정한 장소라고 발표하였다.
그 보고서에 여러 자료들은 방림에 역이 있다는 사실로 이는 실록에도 나온 기록 하나로도 충분한 것이다.
본 용역 연구자는 방림의 지리적이나 역사적 고찰에 미비한 점을 드러내고 있다. 역원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역도를 먼저 파악해야 되는데 본 용역 자료서에는 방림 역도의 옛길이란 사실을 모르고 소로(小路)로 표시하고 있다.
평창군청에서 요구하는 점은 방림내에 방림역의 위치 고찰의 문제이다. 하지만 본 용역사는 이러한 심층탐구는 없고 정원대의 주장대로 방림리 753-11번지라함은 구체적 사료나 지리적 유추사실이 전혀 없다.
이에 대한 타당성의 문제고찰도 없이 방림삼거리를 방림역으로 지정한 것은 지방 사학에서는 오류라고 판단하고 있다. 여기에 방림리 753-11를 방림역이라 주장함에는 아래의 사항들을 충족시키는 연구 사항이 보강되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연구가 없다면 방림삼거리 위치지정이 불가한 점으로 평창군청에 연구용역은 전면 재 검토되어야 한다.
◆ 아래사항
1) 방림역 원 위치 고찰에서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의 담당자는“조선 지형지도 3차”라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지도는 일제때 실측의 측지지도로 평창지도는 2, 3차 두 개로 작성되었다. 한국학 연구원이 고지도로서 방림역을 방림리 1284-11번지라 단정함이 잘못이다.
2)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자료에는 방림역은 방림리 1284-11번지라 하고 여기에 방림창고 옆이라 한다. 사료로서 다섯 개의 고지도를 예시하고 있다.
∎고지도들은 지번이 나오는 실측지도가 아니기에 이 지도들로서 한 지점의 좌표를 파악할 수는 없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릴 때 이곳을 답사한 것도 아니고 위 다섯지도중 현지인이 그린 것은 1872년 지방지도이다. 현지인은 강릉관아사서 당시 강릉 도호부는 강원도의 절반의 따을 답사하였겠는가 하는 점에서 홍천의 고지도에서는 강 저쪽으로 달리 표현되는 예도 있듯이 고지도는 한 마을의 내용만을 파악할뿐이란 점에서 인용가지가 없다 하겠다.
∎본 용역처는 방림리 1284-11번지가 방림역이라 주장하려면 다음사항의 타당성 연구의 자료를 첨부해야 한다.
문제는 역원의 가옥은 폐허가 되어 흔적이 없다손 치더라도 조선시대의 역은 가도변에 있다함은 쉽게 이해하면 수백년 역말이 다닌 길은 그 무게로 인하여 풀도 안자란다.
역로는 가도로서 방림천변의 옛길이 역로였는데 역로에서 1284-11번지까지의 역로이 흔적이 없다.
또한 본 용역조사에서 이러한 문헌기록이나 지리 환경에도 맞지 않은 방림초교인근을 방림역이라 주장할때엔 이에 맞는 역사적 문헌이나,지리적으로 이곳이 방림역이란 점을 제시하기 바란다.
3) 연구 용역자는 방림 삼거리(방림리 753-11번지) 점막을 방림역으로 사료한다고 한다.
이 점에서 문제는 두 가지 문제를 충족하여야 한다.
첫째 사항은 역사는 문헌 자료가 많아지고 새로운 유물이 발굴되고 유전자나 첸문의 과학의 발전에 따라 항상 새로운 역사로 바꿈이 된다.그러기 위해서는 위 4번항까지 방림의 역사기록들,(실록의 기록이나 유람기 방림편의 기록) 모두에 대하여 방림역에 대한 상반되는 문제점을 밝혀서 제시해야 한다.
둘째로 방림역이 점막이 아니라 국가의 역원이었다면 이에 따르는 문헌적 사료나 유물들을 증거자료로 제시헤야 한다.이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한다.
즉 방림삼거리는 점막으로 알고잇는데 이 점이 국가의 역원이 되기위해서는 여러 조건중 하나만 보면 개인들의 사설 점막에서 파발마등 말 다섯 마리를 관리를 하였는가 하는 점에서 관리들은 공공의 출장에는 말 먹이를 주는 초료라는 문서를 발행해서 역에 제출하는데 사설점막에서 이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요즘 이해로서는 초료를 받아 관에 제출하여 결재를 받는 것으로 연상하지만 각 역은 역전토에서 생산하는 물품을 제공하기에 후 결재 방식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연구 용역은 학술적인 연구를 발표하여야 방림역이 삼거리였다고 성립되는 것이다.
◆ 연구용역 리포트의 그 외의 문제점
용역 보고서에서 대화역과 운교역을 임의로 지정하였는데 그 사유는 없다. 설정한 위치에 대한 이론적 근거는 대화역과 운교역을 지정하였다.
보고서 글에 의하면 역간의 사이 30리인데 구간이 작다는등 이러한 문제로 30리를 재어서 대화역과 운교역을 설정한 듯 하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 역간의 거리는 걸어다니는 보도행정의 기준으로 30리마다 역을 설치하였고(하루 걷는 걸이는 산과 강을 돌아가는것과 밤으로는 호랑이로 인하여 밤길은 자제되기 때문이다) 산길등에는 이 거리를 단축하는등 임의 조정이란 기록까지 있다.
또한 말을 타고 가는 거리는 금강산 유람기에서 보면 많은 선비들이 하루 말을 타고 70~80리 간다고들 기록하였다.
여기에 조선시대에 1리는 400m가 아니라 당시에는 m단위의 척도가 아니었으며 조선시대 1리의 환산은 시대별로 370m.380m등 세가지 거리 단위를 사용하였었다.
그러기에 연구용역서에서 30리에 거리가 짧다 하는 등으로 방림역간의 거리를 적용함은 용역서의 방림역 지명에도 혼돈을 초래한 것이다.
아래 지도에서 대회역과 운교역의 추정자도 제시한다.
.◀<대화역 추정지>
실록 기록에는 태종은 대화역 건너편에서 잤다고 한다. 위 삼거리 양쪽의 거리는 100여 m가 넘는다.
▶<운교역 추정지>
방림역 위치 연구의 용역사 <역사문화환경 연구소>는 방림리 753-11번지를 방림역으로 지정함에는 이로서 평창군 역사 사료가 되기에 이러한 납득이 갈 수 있는 바른 고찰로 평창역사에 기록될 연구 리포트를 바랍니다.
◆ 예증으로 이해
아래 방림삼거리에 정원대의 증언 내용에서도 역참이라 하는데 일반인들이 역참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어렵고 그저 역이라 하였을 것을 정원대가 역참으로 쓴 것으로 간주된다. 이 점은 증언자등 일반인이 역참과 점막을 구분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또한 기록에 방림대천이란 표현이 있다. 정원대의 책에서는 세 강이 만나 대천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안미에서 내려오는 평창강 본 류와 사추거리에서 내려오는 여울이 합류되는데 3강이 함류된다고 거짓 기록하고 있는데 방림교를 지난 여울이 무등산 뒷다락에 돌아서 대천처럼 물이 조금 감아도는 점을 볼 수있다. 이 점은 평창 시루목에 노산을 감아돌며 5m여 깊이의 소를 만드는데 물속 4m만 내려가면 물 밀도가 틀림을 볼수잇고 차거운 물이며 아래 모래바닥에는 물방울이 올라옴을 볼수 있는바 이 산이 카르스트지형의 샘물이다.
무동산도 카르스트 지형이기에 아마도 샘물이 올라와 물이 많아지고 여울 도는 것인지는 간단하게 테스트는 물속을 들어가 보면 알 수있다. 천제당에서 물이 만아진는 것을 느끼는 것은 혹 지하 샘물이 올라오는 작용일 수 있다.
정원대의 증언의 예로는 <인문지리> 책에서 평창 경찰서 증언에는 평창여관에 있던 탑이라고 기록하면서 또 하나의 증언에 유동 가나안 농군학교에 실습가서 본 증언자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평창경찰서 탑은 출처가 두 개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 탑이 평창장 여관에 탑이라고 확실히 알면서도 또 하나는 유동 가나안 농군학교의 탑의 증언이라고 논리도 맞지않는 탑의 증언을 또 갔다가 붙인 것이다. 따라서 인문지리 책에서는 경찰서 탑은 반장정도의 글에서 탑의 출처는 두 곳이며 이를 가지고 다섯 개의 오류를 하고있다.
50년전에 여름 성경 학교에 중학생이 가서 본 기억으로 오층탑이라 한다면 이것도 당시 수해로 교회지붕에 올라가서 헬기타고 나온 학생이 5층탑이라고 증언한다.
정원대.. 일반인은 그렇게 믿지만 본인은 그렇치 않다는 점을 잘 아실텐데.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가 돌출되는데 그 모양이 틀리지만 이를보고 삼층인지 사층인지 일반인은 구분이 어렵다. 그런데 오십년전 중학생이 이틀 있던곳에 오층탑이라고 보았다면 일반인은 그 증언을 믿을 수 있지만 본인은 바른 증언이 아니기에 그 정도에는 속지 않습니다.
일반 탑에 박사는 탑재의 조식 양식의 편년에의한 역사적 고찰아나 하지 조형론은 알지를 못하지만, 필자는 탑의 조형론에 하나의 공식을 세운 사람으로 조선 유학자들은 월정사 9층 탑을 12층탑으로 기록한 선비가 3명 있다. 탑을 모르는 유학자들의 눈에서 12층이라 한 점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헤아린 것이다.
결론은 정원대의 인문지리책에 증언들은 매사 본제와는 다른데 정원대는 증언이라면 맹신하는 점을 익히 잘 알고있으며 동 책에서 이러한 오증언들은 이하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