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昌歷史 史觀定立 (55) 썸네일형 리스트형 평창의 사서인 『길위의 역사책』 분석과 재정립 평창의 사서인 『길위의 역사책』 분석과 재정립 2,009년 평창문화원에서 출간한 『길위의 역사』( 글; 김진백. 공동답사; 정원대) 책의 발행에서 평창의 역사에 관심과 노고에는 감사를 합니다만, 동 책은 평창의 개괄적인 역사를 포괄한 것은 아니라 古城이나 역원, 도돈의 거슬갑산 답사와 이에 따라 문헌적 자료등으로 199쪽으로 서술한 역사책이다. 동 책은 2009년에 서술하였으나 10 여년 사이에 역사의 발전에의하여 새롭게 확정할 필요가 아니라 책의 대다수 평창 역사가 오류라는 점으로 이에 분석과 재 정립을 합니다. 역사는 시대의 발전에 의해 정보가 방대해지며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유적과 유물의 발굴과, 또한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천문학의 이용과 방사선 연대측정의 정밀화. 유전자 감식 .. 《송어의 고향, 평창》 《송어의 고향, 평창》미탄의 송어는 예전 '60년대에 박경원 강원도 지사께서는 우리나라에 송어를 처음 전래하고 양식하여 전 국민의 식단에 그것도 외식을 하기에 휼륭한 송어 식단을 새롭게 창출하였습니다.요즘은 송어사료가 있지만 과거에는 제천. 원주.강릉등지에 푸줏간에 내장들을 가져다 삷아서 잘라서 먹이를 만들었고 80년대 초 마이카 시대 이전에는 판로도 없고 힘든 시기였으며 어쩌다가 미군 헬기가 송어 수송하려 오면 저희는 헬기 구경하려 상리 양어장에 얼른 뛰어가고, 사람들은 새카맣케 몰려들어 헬기 구경하기 비빴지요. 그 시절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헬기가 신기하게 보였습니다.전 국민이 송어 모르는 사람 있어요 ? 안 먹어본 사람 있습니까?우리나라에 송어의 시원은 박경원 도지사가 천 개의 알을 부화하여 송어는.. 일제때 평창군 지도 일제때 평창군 시내 지도 아래의 지도는 일제때 2차(1911년), 3차(1915년)의 강원도 측도시 평창군 지도를 부분 확대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중앙 박물관의 일제 박물관 문서) (1) 평창읍 (1911년 측도) 1) 대로(大路)는 영월서 도돈-약수- 하평을 지나 평창으로 들어오는 도로는 현 읍사무소로 직선으로 꺾어 올라 곡각으로 시루목을 넘어 대화로 빠진다. 이 도로는 주진교는 없이 주나루로 강을 건너고 또한 대화 신리에서 모치 재를 넘어 강릉으로 간다. 당시 신리에서 장평- 봉평은 간선도로이다. 2) 중로(中路)천변리에서 중리로 올라가 다리를 건너 상리천 종부쪽으로 간선 도로는 미탄으로 향한다. 3) 실선은 소로(小路)를 표시함. 4) 왼쪽으로 전선이 영월서 강릉으로 넘으며 군청으로도 연결했다..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 출처 – 국립 중앙박물관의 조선총독부 자료내에서 발췌함 ◆ 위 강원도 고적대장의 내용중 문서에 기록한 1)진부면 탑상리 탑 ,2)진부면 수항리사지 탑 5). 중리탑. 6) 상리 탑. 7} 하리 탑 9) 유동리 탑에 관한 기록. 그리고 5층탑이 아래의 문서에서는 3층탑이라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월정사 8각9층 석탑과 이 문서에서는 탑상리 탑과 상리탑이 3층, 5층으로 각각 기록된 바 아래에서 이 문제를 연구토 합니다. 이어서 마지막 장에서는 월정사 8각 9층탑이 원래는 13층 탑 아니었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빈틈없이 연구합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10여년전 필자의 블로그에 남긴 게시글을 이번 한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평창 지리 정보의 모든 것을 논하며 이 점의.. 송계산은 원래 이름은 여름산이다 송계산은 원래 이름은 여름산이다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읍의 장암산과 남병산, 청옥산을 잇는 삼각 트라이 앵글의 고원부에는 장바우가 있으며 장암산 능선에서부터 산등성이가 길게 이어지는 긴등의 산을 현재는 송계산이라 부른다. 하지만 송계산(松契山)이란 명칭은 일제 후기에 불리어졌으며 일제 초기까지도 동 산은 여름산(餘蔭山)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따라서 아래의 여름산과 송계산의 분석 연구에 의하여 원래의 여름산의 산이름으로 다시 개정되어야 한다.( 현 지명으로는 송계산으로 되어있다) ◆여름산의 고찰1) 「평창군 지명유래」에서는 "송계산은 상리에서 주진에 이르는 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주; 「평창군 지명유래」 평창문화원 발간. (2,000, 12.) p 17.2) 「평창군 지명.. 평창의 산 이름 바로 찾기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 산명의 재고 엄기종 ◆ 두타산(평청 수항리) ◆ 발왕산 ---------------------------------------- ◆ 국가 지리정보원 기록 평창군 도암면 용산리 발왕산(發旺山)의 왕(旺)을 왕(王)으로 정비해 2002년 12월 27일 발왕산(發王山)으로 변경 고시했다. 옛날 도승이 이 산에 팔왕(八王)의 묏자리가 있다 하여 팔왕산이었으나 일본강점기 때 일왕(日旺)을 우상화하기 위해 왕(旺)으로 왜곡한 것을 바로잡았다. 평창군 진부면 장전리와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에 걸친 가리왕산(加里王山)과 평창군 대화면 주왕산(住王山)도 같은 이유 등으로 정비됐다. 평창군 방림면 방림리와 대화면 상안미리의 중대갈봉은 우리 문화를 비하하고자 어감이 좋지 않은 단어를 사용해 .. "平昌"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 "平昌" 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평창에서는 지금까지 3종의 지명지가 발간되고 이에 기초가 되는 읍면지에서 평창의 각 동리에 대한 지명의 연구에서도 평창 지명의 제일 기조를 이루는 “평창(平昌)”이란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은 연구는 없었다. 그러기에 이 장에서 "평창"이란 지명의 어원의 출처와 그 뜻의 고증을 합니다."평창"의 어원의 뜻은 공자의 고향 "창평"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에 평창의 향토사학자 엄기종님의 선행 연구기록이 있어서 를 인용하며 분석합니다. 엄기종 07.01.13 02:51 ◎ 평창(平昌)이란 地名 由來平昌은 三國時代에는 高句麗의 領域으로 郁烏縣(일명 于烏縣)이라 불리다가 신라의 三國統一 이후 景德王 16년(서기757)에 白烏縣으로 改稱하여 奈成郡(現 영월군.. 거슬갑산(琚瑟岬山) 의 위치 연구 거슬갑산(琚瑟岬山) 의 위치 연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이 장에서 고찰로는 거슬갑산은 강원도 7대명산으로 평창읍 도돈리의 오도산이 거슬갑산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증적 고찰연구로 현재의 백덕산이 원래 거슬갑산이라는 점을 제시하며, 다음으로 수정산 조명시 수정산을 평창의 진산으로 보았슬 때 백덕산 (거슬갑산 )은 이에 대한 증조산이 되는 점으로 보아야 하는 문제에 거슬갑산은 수정산의 연구에 선행되는 문제이기에 먼저 거슬갑산에 대한 고찰을 합니다. ◆ 도돈리의 거슬갑산이란? ◎ 오도산이 거슬갑산으로 불리어지는 점의 이해 현재에 통용되는 거슬갑산(琚瑟岬山) 은 평창읍 도돈리 산 46번지로 해발 540m 이다, 산 정상에는 평창군에서 세운 오도산(悟道)이란 표지판이 있는데 오도산 아랫줄에 괄호속에 작은 글..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1960년대 근대 도시하의 경제발전 속에 도시로의 이촌향도의 공간적 재편이 급하게 이루어졌으나 이주한 산업도시는 그냥 살아가는 공간이 었슬뿐, 삶의 애착이 깊게 스며든 장소는 아니었다. 또한 이후 세대는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80년대의 권위주의적 수동적 생활상에서 민주주의의 생활상으로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삶터의 인식에 다른 전환점이 되었는데(지방 자치단체는 ’50년대에 이승만정권시 실시되다가 이후 중단하였지만)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자기 권역의 역사와 문화적 상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첫째, 해당 권역의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군지(郡誌)의 간행이 되었고, 역사 유적에 대한 .. 평창읍 천동리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2022.05.10. (평창서 청동기시대 추정 매장시설 2개·돌화살촉 9점 등 발견) 10일 평창군에 따르면 지난 1일 한 주민이 옥수수경작을 위한 고랑 내기 작업 중 토사 아래 돌이 걸려 이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유물을 발견, 문화관광과에 신고했다. 발견된 문화재는 매장시설 2기와 돌칼 1점, 돌화살촉 9점, 대롱옥 6점, 붉은간토기 1점 등 유구 및 출토 유물로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군은 토지 소유주에게 발견 경위를 조사해 문화재청에 신고했다. 또 관련 연구소의 전문가를 통한 현지 조사와 유물 감정 평가 등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시균 문화관광과장은 "돌칼, 돌화살촉, 대롱옥 등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자료들이 함께 출토돼 의미가 크다"며 "문화재 조사와 진행 중 불편이 없도록 세심하게 살피겠..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증보판)책에 대한 비평> 지난해 출간된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은 평창역사 조명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에 이 장에서 동 책을 집중 분석합니다. 정원대의 책은 평창군 예산으로 증보판까지 발행했는데 동 책은 평창 역사책이 아니라 평창역사를 상당히 왜곡하고 있어서 평창역사를 저해하고 있다. 그것은 약 4~50개 오류및 오논술로 그러고도 자칭 향토사가라고 한다. 참으로 이러고도 평창이 발전하겠습니까?? 따라서 정원대가 떠드는 것은 평창역사가 아니고 오히려 평창역사를 저해하는 픽션이이란 점이다. 정원대는 그간 가 오류라서 도에서 군청에 하달된 공문에 지명지에 쓰인 한문의 오류를 적어 주었다는 등 하며 지명지는 법적인 문제가 있기에 폐간해야 된다는 등 몇 삼년 떠들었는데 정작.. "만수산" 사설의 아리랑은 미탄 아리랑이였다(1부) "만수산" 사설의 아리랑은 미탄 아리랑이였다.후세백작 2020. 02. 26. 02;50"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 사설의 정선아리랑은 600년전 고려말 충신들이 부른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사설이 고려말 충신의 노래라는 점은 위증이라는 여러 문제를 2013년부터 여러편을 제시하였었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하여(만수산 사설의 아리랑) 정선인의 책에 글을 인용하여서 해부, 비평합니다.(1) 진용선의 책에서 만수산 아라리의 허상에 대하여.진용선의 책 p28. 발췌인용거칠현동의 발상지 문제는 칠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이들이 자신들의 심정을 한시로 지어 처음 불었을라는 "발상지"에 대한 지나친 애정때문이다, 이러한 애정은 정선 아리랑의 성립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시기적으로 본다면.. 平昌歷史 定立 5> (4) 미탄, 남부권 발전방향 제안의 이해 平昌歷史 定立 5> (4) 미탄, 남부권 발전방향 제안의 이해 후세백작 1) 육백마지기 개발안( 오토 캠프장과 천문대/ 평창아라리 기념관 제안에서) 우리나라에서 별을 이야기하는 옛 지명은 이곳 육백마지기와 성마령이 유일한 듯 합니다. 육백마지기(해발 1,256m)의 육백이란 조선시대때 금성을 육백이라 불렀으며, 그 옆의 성마령(星摩嶺, 973m)의 摩자는 백과사전등에서는 높은 재를 넘기에 별을 만질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 닦을 摩, 갈을 摩자로 잘 닦고 갈은듯 반들반들하게 빛난다는 의미를 가지는 별로서, 이 표현은 금성을 지칭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평창은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10여년간 평창군 예산은 북부권으로 실린 바, 그간 준비. 실사 방문단 맞이할때 .. < 平昌歷史의 理解 2> 미탄면(1)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의 이해 미탄면 (1)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의 이해 후세백작 ◆ 평창역사의 시원은 미탄면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 입니다. 본 유적은 연세대 박물관의 동굴유적 조사로 청원 두루봉동굴, 단양 상시바위그늘, 단양 금굴, 연당 피난동굴에 이어 2007~8년 기화리 쌍굴 조사를 통하여 신생대 4기 갱신세 동물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동굴유적의 체계를 마련하여 구석기 문화와 자연환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인용합니다. ◆ 기화리 구석기유적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인류의 기원부터 조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류의 기원은 전기구석기 시대로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300~350만년전 오스트랄 피테쿠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여름에는 아프리카 동굴에서 185만년된 인간화석을 발견했습니다( 탄소연대 측정.. 장평리의 < 無名塔의 報告 > 후세백작 보낸날짜 : 20.11.16 08:00 (가칭 장평리 탑) 위 사진의 탑은 지금현재 알려지지 않은 탑으로 이 탑을 소개합니다. 동탑은 아직 학계와 문화재청에도 보고되지 않은 탑이기에 이에 상세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탑의 현 소재지는 평창군 용평면 금송1길 27 (지번; 용평면 장평리 355-1번지)내 정원에 위치합니다(G.P.S상으로도 확인이 용이함) 동 탑은(이하 가칭, 장평리 탑으로 칭한다) 사각칠층석탑으로 상륜부는 유실되었으며 5층 탑신석만 새로 정비한 흔적이 보이는 바,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에서 기단부의 지대석 상층부까지 높이가 4,2m이며 탑의 폭이 가장 큰 부분으로 하대갑석의 가로 폭은 1,2m이다. 탑은 마치 맑고 깨끗하게 보여 그 자태가 단아하다. 그러기에 근자에 조성된 것처럼 ..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귀환운동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귀환운동 후세백작 오대산 사고(五臺山 史庫, 사적 제37호)의 오대산 사고본의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에 일제에 의해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반출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실록 중 27책이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오대산사고본실록 27책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후 일본에 남아있던 오대산본 실록 47책이 2006년에 환수(2007. 2. 26 국보 추가지정), 2011년에는 의궤도 환수되었다. 배현진 교수는 1책이 남아있는 점을 알고 다시 반환받아 환수문화재 추가 지정 1책(2019. 6. 26 국보 추가지정)되어 현재 75책이 국.. 평창 지명변천의 이해 평창 지명변천의 이해 후세백작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지명의 연원과 그 바른 이해를 위해서 하나의 과제로 평창읍 소재의 입탄리에 대한 고지명의 변천을 분석함으로서 고지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져 합니다. 지명이란 바로 땅의 이름이지만 이 이름값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설정되어 인간의 의지작용에 의해 명명하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명은 그 지역에 형태적 형상이나 인위적 사건등에 의해 이름값이 확정되지만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풍수적 형태에 의한 용어를 사용하거나 또한 모든 이름값에 저변에는 이러한 풍수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슴이 드러난다. 우리는 풍수란 금시발복의 명당론을 생각하지만 풍수란 인간이 땅을 사용하기에 합리적 선택의 사고방식을 취하는 사상으로 조선시대는 잡과.. 평창 최초의 사진조선고적도보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평창 최초의 사진들 후세백작 「조선고적도보」 15권은 일본서 출간된 책으로 일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2년 대동강의 낙랑유적 발굴현장 사진 촬영을 시작으로 매년 조선에 찾아와 2~3개월씩 전국문화유적, 유물 6,333장의 사진을 기록하다. 이중 아래의 월정서와 평창면 동북오중석탑, 하남오중석탑의 사진은 실린 평창 최초의 사진들은 정확한 기록은 안나오지만 1912년 금강산과 오대산과 경주 답사시 찍은 것으로 인근의 사진으로는 영월의 탑 한 점과 제천에 한 점 사진이 있는점으로 미루어 금강산과 경주 사이를 가는 길에 평창을 들린듯 하다. 그리고 보통 답사 3년후에 매년 한권씩 책을 출간했기에 1915년 출간된 3집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신작로도 없는 길에 사진사를 대.. (평창구석기) 기화리 쌍굴 유적 (평창구석기) 기화리 쌍굴 유적 ◆ 평창시공) 평창의 하늘은 열리고,,,(1) 기화리 쌍굴 연혁 1. 기화리 쌍굴유적의 조사 연구동굴운 선사인류의 중요한 생활공간의 하나였고, 지금은 선사문화를 연구하는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특히 석회암 동굴은 동굴안 쌓임층이 알칼리성을 띠고 있어서 뼈 유물을 화석화하고 오랫동안 보존하는데 적합한 환경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동굴유적에는 많은 뼈와 유물이 출토되며 이를 통하여 과거의 기후와 동물상과 인류의 기원과 이동과정 그리고 문화행위를 살필 수 있다.연세대 박물관은 이러한 동굴유적 조사로 1973년부터 1980년까지 7차에 걸쳐 제천 점말동굴에서 남한에서 최초로 구석기 동굴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으며 청원 두루봉동굴, 단양 상시바위그늘, 단양 금굴.. < 평창경찰서 5층석탑의 글에서 아래 사진에 대한 답> 아래 사진속 인물은 故, 김종환 氏의 중학교 시절의 사진입니다. 그러면 ‘69~’70년 사진으로 당시로서는 파출소는 시장쪽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고, 또한 경찰서(구 일신중학 자리)가 옆의 2층의 신 사옥으로 이전되며 그 자리는 야학이 들어서게 되었고 후일 일신중학이 개교하게 되었다. 2층 경찰서 준공 시기는 대략 ‘64~5년도 쯤으로 ‘65년 국군장병 파월 이전쯤으로 보입니다. 당시 라듸오엔 연일 파월 군가가 나오던 시절을 회상하시면 그 이전에 2층 경찰서가 있었다고 얼른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일신 중학 개교는 아마도‘68~9년도 쯤으로 당시 경무대는 경찰서 자리는 다년간 비어 있어서 그 앞의 운동장과 같이 동네 놀이터가 된 적이 있으며 일신중.. 평창경찰서 탑의 분석과 그 이해 평창경찰서 탑의 분석과 그 이해 2021-01-17 03:35 2010. 1. 10. 후세백작 평창의 향토사학자 정원대는 지난 가을「평창의 인문지리」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그 내용중에 ‘노암(魯菴)석탑 ‘편에서 동 탑은 평창경찰서 5층 탑이고, 원래는“동북오층석탑”이라 한다. 그러나 이 글은 단연 오류이고 왜곡도 가진다. 그러기에 픽션(허구)의 기록이 평창역사가 되는 점에대해서는 단호하게 엄정한다. ◀조선고적도보에 기록된 평창의 동북오중(五重)석탑 (조선고적도보는 일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0년대 이후 한국의 고적을 답사 촬영한 것으로 동북오중.. 평창의 임진왜란사 이해 ◆ 기천록과 호구록의 차이점 문제 기천록에서는 호구록보다 정확도는 떨어지나 자세한 점은 원주 강원감영에서 탈출시 설명으로 고종원, 종경 형재는 새벽에 포승줄을 이빨로 잡아뜯어 끊고 탈출을 하고자 하니 권군수도 포승줄을 풀어달라고 애원해서 풀어 주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상부의 명이지만 동생 종경을 사형시킨 당사자이지만 그 보다 탈출은 생사를 건 모험으로 탈출에 대한 사전 약속도 없이 포승줄을 물어뜯은 일에 종원 형제는 두 사람만이 빠져 나오려 했는데 권군수와 그의 아들의 포승줄도 풀어주자 (여기까지는 기천록) 이때 힘이 좋은 권군수 아들 주는 벽을 헐고 탈출하개 된다(호구록) ◆ 조선침략에 나선 왜구 4번대 구성원은?? 일본군 4군(4번대)의 총대장 모리 야스나리(毛利吉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풍신수길)의..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후세백작 평창 역사에서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평창의 상고사에 대해서 관내의 사료집 책자들에는 30여개의 고인돌과 임하리의 선돌, 그리고 주진강등에서 일부 선사 유물의 채집등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서술하고 있으나, 2,010년대 이후에 고고학계에 의해 새로 밝혀지는 평창의 상고시대(석기시대, 청동기및 철기시대)의 역사 유구와 유적 발굴에 의해 평창의 상고사는 당연히 수정되어야 하는바, 이러한 작업은 역사학회나 관의 주도하에 공적인 입장으로 발표하여야 하는 과제이며 그에 따라 평창의 역사서들에 새로 개정된 일관된 역사가 수록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평창은 세미나는 자주하고 있으나 세미나에는 향토적 색채에 대한 외부 학자들이 논지에..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원본게시글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후세백작 ( 이 게시글은 문화재청의 자료 열람에 의해 강원고고문화원구원의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pdf" 조사 연구 리포트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Ⅰ. 조사개요 1, 조사경위 평창읍 하리(240-4, 240-12번지)일원에서 1986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화재 조사에서 마제석촉이 수습되어 평창읍 하리 유물 산포지로 수습된바 있으며, 2004년 문화유적 분포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지표조사중 무문토기편이 수습되어 선사시대 유적이 입지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건축주 지해영씨는 본 지역에 단독주택 신축허가를 평창군에 신청하였으나 동 지역은 상기한 바와 같이"평창읍 하리 유물 산포지"*㈜에 해당하는 이유로 ..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아래의 『평창상고사』 게시글을 사정상 본인의 임의로 삭제합니다. 하지만, 본 게시글은 아무런 문제나 제약을 받지 않기에 후일 원문 그대로 다시금 평창의 상고사를 조명하겠습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위 연구 보고서에는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이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탄소연대 (ytsBP) - 2620년에 오차범위-30년, 즉 연대범위는 (4호분 주변 검사 기준) (BP) 2590~2565 전으로 BC590~565년 사이의 역사임이 밝혀졌습니다. 하리 청동기 시대 석관묘 내에서는 국내 가장 오래된 피장자의 전신상 인골이 발굴 되었으며 인골과 함께 매납된 비파형 청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비파형 청동검(일명 고조선식..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평창 역사에서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평창의 상고사에 대해서 관내의 사료집 책자들에는 30여개의 고인돌과 임하리의 선돌, 그리고 주진강등에서 일부 선사 유물의 채집등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서술하고 있으나, 2,0.. 평창 후평리의 선돌백이 평창 후평리의 선돌백이 * 강원도민일보의 기사 내용이 글에서 후평리의 선돌백이는 옛 석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인공적인 선돌은 아닙니다. 따라서 정원대의 의문이나 강원일보 기사는 의미없는 이야기입니다.[강원도민일보 신현태 기자] 평창읍 후평리 노산 입구에 선돌로 추정되는 대형 바위가 발견돼 선돌여부를 확인하는 학술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자칭 평창지역 향토사학자 정원대와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평창읍 후평리 31호선 국도 옆 노산 자락에 위치한 이 선돌 추정 바위는 높이 10여m,폭 1.8m 크기로 국내에서 발견된 선돌 가운데는 상당히 큰 규모에 속한다.특히 이 바위가 위치한 마을은 주민들 사이에 선돌백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어 전국적으로 선돌이 있는 마을지명과 같아 주민들은 이 바위가 선.. 4.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서...(2019를 돌아보는 사유적 사색에서) 4.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서...(2019를 돌아보는 사유적 사색에서) 후세백작 2020.01.23 00:53 저의 모든 글이 그러하듯 하리 청동기 유적에 관해서는 4~5년전 당시에 몇 편의 글에 의해 역사적인 사안을 소상하게 언급하였으며, 이 장에서는 이러한 하리 청동기 유적(예를 들어 역사에서는 .. 3,평창의 바위공원과 백일홍 축제에 대한 사유적 사색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3, 평창의 바위공원과 백일홍 축제에 대한 사유적 사색 (평창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후세백작 2020.01.09 평창의 레져문화에 훌륭한 것으로는 노람뜰의 바위공원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노르웨이엔 비겔란의 조각공원이 있지만 평창엔 그 순수한 자연의 세계의 바위공원이 있다. 이 .. 2. 노산성의 여러 현안문제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2. 노산성의 여러 현안문제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 후세백작 2020.01.06 07:32 제 1장의 평창역사 정립에 관한 회고의 의의와 개괄적인 이야기에 이어서 제 2장 이하 3장등 계속하여 이미 발표한 평창역사의 새롭게 정립하는 각 개뱔 역사의 게시글들의 이래에 관한 보층 설명을 ..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