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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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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사서인 『길위의 역사책』 분석과 재정립 평창의 사서인 『길위의 역사책』 분석과 재정립 2,009년 평창문화원에서 출간한 『길위의 역사』( 글; 김진백. 공동답사; 정원대) 책의 발행에서 평창의 역사에 관심과 노고에는 감사를 합니다만, 동 책은 평창의 개괄적인 역사를 포괄한 것은 아니라 古城이나 역원, 도돈의 거슬갑산 답사와 이에 따라 문헌적 자료등으로 199쪽으로 서술한 역사책이다. 동 책은 2009년에 서술하였으나 10 여년 사이에 역사의 발전에의하여 새롭게 확정할 필요가 아니라 책의 대다수 평창 역사가 오류라는 점으로 이에 분석과 재 정립을 합니다. 역사는 시대의 발전에 의해 정보가 방대해지며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유적과 유물의 발굴과, 또한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천문학의 이용과 방사선 연대측정의 정밀화. 유전자 감식 ..
일제때 평창군 지도 일제때 평창군 시내 지도 아래의 지도는 일제때 2차(1911년), 3차(1915년)의 강원도 측도시 평창군 지도를 부분 확대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중앙 박물관의 일제 박물관 문서) (1) 평창읍 (1911년 측도) 1) 대로(大路)는 영월서 도돈-약수- 하평을 지나 평창으로 들어오는 도로는 현 읍사무소로 직선으로 꺾어 올라 곡각으로 시루목을 넘어 대화로 빠진다. 이 도로는 주진교는 없이 주나루로 강을 건너고 또한 대화 신리에서 모치 재를 넘어 강릉으로 간다. 당시 신리에서 장평- 봉평은 간선도로이다. 2) 중로(中路)천변리에서 중리로 올라가 다리를 건너 상리천 종부쪽으로 간선 도로는 미탄으로 향한다. 3) 실선은 소로(小路)를 표시함. 4) 왼쪽으로 전선이 영월서 강릉으로 넘으며 군청으로도 연결했다..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 출처 – 국립 중앙박물관의 조선총독부 자료내에서 발췌함 ◆ 위 강원도 고적대장의 내용중 문서에 기록한 1)진부면 탑상리 탑 ,2)진부면 수항리사지 탑 5). 중리탑. 6) 상리 탑. 7} 하리 탑 9) 유동리 탑에 관한 기록. 그리고 5층탑이 아래의 문서에서는 3층탑이라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월정사 8각9층 석탑과 이 문서에서는 탑상리 탑과 상리탑이 3층, 5층으로 각각 기록된 바 아래에서 이 문제를 연구토 합니다. 이어서 마지막 장에서는 월정사 8각 9층탑이 원래는 13층 탑 아니었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빈틈없이 연구합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10여년전 필자의 블로그에 남긴 게시글을 이번 한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평창 지리 정보의 모든 것을 논하며 이 점의..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1960년대 근대 도시하의 경제발전 속에 도시로의 이촌향도의 공간적 재편이 급하게 이루어졌으나 이주한 산업도시는 그냥 살아가는 공간이 었슬뿐, 삶의 애착이 깊게 스며든 장소는 아니었다. 또한 이후 세대는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80년대의 권위주의적 수동적 생활상에서 민주주의의 생활상으로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삶터의 인식에 다른 전환점이 되었는데(지방 자치단체는 ’50년대에 이승만정권시 실시되다가 이후 중단하였지만)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자기 권역의 역사와 문화적 상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첫째, 해당 권역의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군지(郡誌)의 간행이 되었고, 역사 유적에 대한 ..
"만수산" 사설의 아리랑은 미탄 아리랑이였다(1부) "만수산" 사설의 아리랑은 미탄 아리랑이였다.후세백작 2020. 02. 26. 02;50"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 사설의 정선아리랑은 600년전 고려말 충신들이 부른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사설이 고려말 충신의 노래라는 점은 위증이라는 여러 문제를 2013년부터 여러편을 제시하였었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하여(만수산 사설의 아리랑) 정선인의 책에 글을 인용하여서 해부, 비평합니다.(1)  진용선의 책에서 만수산 아라리의 허상에 대하여.진용선의 책 p28. 발췌인용거칠현동의 발상지 문제는 칠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이들이 자신들의 심정을 한시로 지어 처음 불었을라는 "발상지"에 대한 지나친 애정때문이다, 이러한 애정은 정선 아리랑의 성립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시기적으로 본다면..
平昌歷史 定立 5> (4) 미탄, 남부권 발전방향 제안의 이해 平昌歷史 定立 5> (4) 미탄, 남부권 발전방향 제안의 이해 후세백작 1) 육백마지기 개발안( 오토 캠프장과 천문대/ 평창아라리 기념관 제안에서) 우리나라에서 별을 이야기하는 옛 지명은 이곳 육백마지기와 성마령이 유일한 듯 합니다. 육백마지기(해발 1,256m)의 육백이란 조선시대때 금성을 육백이라 불렀으며, 그 옆의 성마령(星摩嶺, 973m)의 摩자는 백과사전등에서는 높은 재를 넘기에 별을 만질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 닦을 摩, 갈을 摩자로 잘 닦고 갈은듯 반들반들하게 빛난다는 의미를 가지는 별로서, 이 표현은 금성을 지칭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평창은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10여년간 평창군 예산은 북부권으로 실린 바, 그간 준비. 실사 방문단 맞이할때 ..
장평리의 < 無名塔의 報告 > 후세백작 보낸날짜 : 20.11.16 08:00 (가칭 장평리 탑) 위 사진의 탑은 지금현재 알려지지 않은 탑으로 이 탑을 소개합니다. 동탑은 아직 학계와 문화재청에도 보고되지 않은 탑이기에 이에 상세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탑의 현 소재지는 평창군 용평면 금송1길 27 (지번; 용평면 장평리 355-1번지)내 정원에 위치합니다(G.P.S상으로도 확인이 용이함) 동 탑은(이하 가칭, 장평리 탑으로 칭한다) 사각칠층석탑으로 상륜부는 유실되었으며 5층 탑신석만 새로 정비한 흔적이 보이는 바,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에서 기단부의 지대석 상층부까지 높이가 4,2m이며 탑의 폭이 가장 큰 부분으로 하대갑석의 가로 폭은 1,2m이다. 탑은 마치 맑고 깨끗하게 보여 그 자태가 단아하다. 그러기에 근자에 조성된 것처럼 ..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귀환운동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귀환운동 후세백작 오대산 사고(五臺山 史庫, 사적 제37호)의 오대산 사고본의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에 일제에 의해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반출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실록 중 27책이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오대산사고본실록 27책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후 일본에 남아있던 오대산본 실록 47책이 2006년에 환수(2007. 2. 26 국보 추가지정), 2011년에는 의궤도 환수되었다. 배현진 교수는 1책이 남아있는 점을 알고 다시 반환받아 환수문화재 추가 지정 1책(2019. 6. 26 국보 추가지정)되어 현재 75책이 국..
평창 지명변천의 이해 평창 지명변천의 이해 후세백작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지명의 연원과 그 바른 이해를 위해서 하나의 과제로 평창읍 소재의 입탄리에 대한 고지명의 변천을 분석함으로서 고지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져 합니다. 지명이란 바로 땅의 이름이지만 이 이름값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설정되어 인간의 의지작용에 의해 명명하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명은 그 지역에 형태적 형상이나 인위적 사건등에 의해 이름값이 확정되지만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풍수적 형태에 의한 용어를 사용하거나 또한 모든 이름값에 저변에는 이러한 풍수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슴이 드러난다. 우리는 풍수란 금시발복의 명당론을 생각하지만 풍수란 인간이 땅을 사용하기에 합리적 선택의 사고방식을 취하는 사상으로 조선시대는 잡과..
평창 최초의 사진조선고적도보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평창 최초의 사진들 후세백작 「조선고적도보」 15권은 일본서 출간된 책으로 일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2년 대동강의 낙랑유적 발굴현장 사진 촬영을 시작으로 매년 조선에 찾아와 2~3개월씩 전국문화유적, 유물 6,333장의 사진을 기록하다. 이중 아래의 월정서와 평창면 동북오중석탑, 하남오중석탑의 사진은 실린 평창 최초의 사진들은 정확한 기록은 안나오지만 1912년 금강산과 오대산과 경주 답사시 찍은 것으로 인근의 사진으로는 영월의 탑 한 점과 제천에 한 점 사진이 있는점으로 미루어 금강산과 경주 사이를 가는 길에 평창을 들린듯 하다. 그리고 보통 답사 3년후에 매년 한권씩 책을 출간했기에 1915년 출간된 3집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신작로도 없는 길에 사진사를 대..
< 평창경찰서 5층석탑의 글에서 아래 사진에 대한 답> 아래 사진속 인물은 故, 김종환 氏의 중학교 시절의 사진입니다. 그러면 ‘69~’70년 사진으로 당시로서는 파출소는 시장쪽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고, 또한 경찰서(구 일신중학 자리)가 옆의 2층의 신 사옥으로 이전되며 그 자리는 야학이 들어서게 되었고 후일 일신중학이 개교하게 되었다. 2층 경찰서 준공 시기는 대략 ‘64~5년도 쯤으로 ‘65년 국군장병 파월 이전쯤으로 보입니다. 당시 라듸오엔 연일 파월 군가가 나오던 시절을 회상하시면 그 이전에 2층 경찰서가 있었다고 얼른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일신 중학 개교는 아마도‘68~9년도 쯤으로 당시 경무대는 경찰서 자리는 다년간 비어 있어서 그 앞의 운동장과 같이 동네 놀이터가 된 적이 있으며 일신중..
평창경찰서 탑의 분석과 그 이해 평창경찰서  탑의  분석과  그  이해      2021-01-17 03:35                                                                         2010. 1. 10.  후세백작 평창의 향토사학자 정원대는 지난 가을「평창의 인문지리」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그 내용중에 ‘노암(魯菴)석탑 ‘편에서 동 탑은 평창경찰서 5층 탑이고, 원래는“동북오층석탑”이라 한다. 그러나 이 글은 단연 오류이고 왜곡도 가진다. 그러기에 픽션(허구)의 기록이 평창역사가 되는 점에대해서는 단호하게 엄정한다. ◀조선고적도보에 기록된 평창의 동북오중(五重)석탑   (조선고적도보는 일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0년대 이후 한국의 고적을 답사 촬영한 것으로  동북오중..
평창의 임진왜란사 이해 ◆ 기천록과 호구록의 차이점 문제 기천록에서는 호구록보다 정확도는 떨어지나 자세한 점은 원주 강원감영에서 탈출시 설명으로 고종원, 종경 형재는 새벽에 포승줄을 이빨로 잡아뜯어 끊고 탈출을 하고자 하니 권군수도 포승줄을 풀어달라고 애원해서 풀어 주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상부의 명이지만 동생 종경을 사형시킨 당사자이지만 그 보다 탈출은 생사를 건 모험으로 탈출에 대한 사전 약속도 없이 포승줄을 물어뜯은 일에 종원 형제는 두 사람만이 빠져 나오려 했는데 권군수와 그의 아들의 포승줄도 풀어주자 (여기까지는 기천록) 이때 힘이 좋은 권군수 아들 주는 벽을 헐고 탈출하개 된다(호구록) ◆ 조선침략에 나선 왜구 4번대 구성원은?? 일본군 4군(4번대)의 총대장 모리 야스나리(毛利吉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풍신수길)의..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후세백작 평창 역사에서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평창의 상고사에 대해서 관내의 사료집 책자들에는 30여개의 고인돌과 임하리의 선돌, 그리고 주진강등에서 일부 선사 유물의 채집등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서술하고 있으나, 2,010년대 이후에 고고학계에 의해 새로 밝혀지는 평창의 상고시대(석기시대, 청동기및 철기시대)의 역사 유구와 유적 발굴에 의해 평창의 상고사는 당연히 수정되어야 하는바, 이러한 작업은 역사학회나 관의 주도하에 공적인 입장으로 발표하여야 하는 과제이며 그에 따라 평창의 역사서들에 새로 개정된 일관된 역사가 수록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평창은 세미나는 자주하고 있으나 세미나에는 향토적 색채에 대한 외부 학자들이 논지에..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원본게시글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후세백작 ( 이 게시글은 문화재청의 자료 열람에 의해 강원고고문화원구원의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pdf" 조사 연구 리포트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Ⅰ. 조사개요 1, 조사경위 평창읍 하리(240-4, 240-12번지)일원에서 1986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화재 조사에서 마제석촉이 수습되어 평창읍 하리 유물 산포지로 수습된바 있으며, 2004년 문화유적 분포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지표조사중 무문토기편이 수습되어 선사시대 유적이 입지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건축주 지해영씨는 본 지역에 단독주택 신축허가를 평창군에 신청하였으나 동 지역은 상기한 바와 같이"평창읍 하리 유물 산포지"*㈜에 해당하는 이유로 ..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아래의 『평창상고사』 게시글을 사정상 본인의 임의로 삭제합니다. 하지만, 본 게시글은 아무런 문제나 제약을 받지 않기에 후일 원문 그대로 다시금 평창의 상고사를 조명하겠습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위 연구 보고서에는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이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탄소연대 (ytsBP) - 2620년에 오차범위-30년, 즉 연대범위는 (4호분 주변 검사 기준) (BP) 2590~2565 전으로 BC590~565년 사이의 역사임이 밝혀졌습니다. 하리 청동기 시대 석관묘 내에서는 국내 가장 오래된 피장자의 전신상 인골이 발굴 되었으며 인골과 함께 매납된 비파형 청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비파형 청동검(일명 고조선식..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평창 역사에서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평창의 상고사에 대해서 관내의 사료집 책자들에는 30여개의 고인돌과 임하리의 선돌, 그리고 주진강등에서 일부 선사 유물의 채집등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서술하고 있으나, 2,0..
4.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서...(2019를 돌아보는 사유적 사색에서) 4.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서...(2019를 돌아보는 사유적 사색에서) 후세백작 2020.01.23 00:53 저의 모든 글이 그러하듯 하리 청동기 유적에 관해서는 4~5년전 당시에 몇 편의 글에 의해 역사적인 사안을 소상하게 언급하였으며, 이 장에서는 이러한 하리 청동기 유적(예를 들어 역사에서는 ..
3,평창의 바위공원과 백일홍 축제에 대한 사유적 사색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3, 평창의 바위공원과 백일홍 축제에 대한 사유적 사색 (평창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후세백작 2020.01.09 평창의 레져문화에 훌륭한 것으로는 노람뜰의 바위공원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노르웨이엔 비겔란의 조각공원이 있지만 평창엔 그 순수한 자연의 세계의 바위공원이 있다. 이 ..
2. 노산성의 여러 현안문제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2. 노산성의 여러 현안문제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 후세백작 2020.01.06 07:32 제 1장의 평창역사 정립에 관한 회고의 의의와 개괄적인 이야기에 이어서 제 2장 이하 3장등 계속하여 이미 발표한 평창역사의 새롭게 정립하는 각 개뱔 역사의 게시글들의 이래에 관한 보층 설명을 ..
판관대 세미나를 환영합니다 판관대 세미나를 환영합니다 후세백작 2019.11.03 22:19 오는 11월 22일 평창에서는 판관대의 문화콘텐츠 계발을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심사임당과 율곡에 관하여 평창으로 이 문화 콘텐츠를 계발함은 고무적인 일로 환영합니다. 우션 죄송합니다만 "문화 콘..
팔석정의 역사사료의 고찰에 의한 제 연구 팔석정의 역사사료의 고찰에 의한 제 연구 후세백작  봉서 선생은 물의 가운데 신선들이 사는 땅에 취해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 이름을 붙였다 기록한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여덞개 바위에 석안石鞍 석귀石龜 석옹石瓮 석평 石枰 석두石竇  이름을 새겨 놓았으니 전해 오기를 율곡 이이 맏伯형 죽곡竹谷 선생이 노닐던 곳으로 물의 동쪽에 정자를 세웠는데 팔석정八石亭이라고 하였다그 후에 후손 이아산李牙山이 살다가 정자를 중수 하였는데 정자는 없고 글씨만 남았다고 ...죽곡竹谷 새긴 것인가 아산牙山이 새긴 것인가 알 수 없다 하였다                                                                                                출처 : 병인..
대상리 사지(岸井寺址)를 찾아서 대상리사지를 찾아서 지난 겨울에 정원대님과 동행하여 대상리사지 탑을 찾아갔다. 일명 안정말사지라는 대상리사지는 폐사지로서 지금 매매라고 붙여놓은 개인 주택이 사찰이었는지 알 수도 없었으며 다만 저 멀리 산자락에 방치된 탑재들만이 사찰이 있었슴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사..
평창이여 .. 정말 어디로 가시나이까.. 평창이여.. 정말 어디로 가시나이까.. 2018년 10월 8일 '평창신문'의 기사를 인용합니다. * 임진왜란 당시 권두문 군수가 지사함. 이인서, 우응민등과 합심하여 왜적과 맞서 싸운 격전지이다. * 이후 그곳에 성황당이 세워져 군민의 안녕과 백의의병의 넋을 비는 성황제로 이어졌고~중략. * 매..
평창에 남겨진 역사과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창의 역사방관 고발 (평창에 남겨진 역사과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 가리왕산 碑 가리왕산은 발왕산에서 발원하여 차령산맥으로 이루는 해발 1560m로 백두대간의 지붕으로 평창군과 정선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 맥국(貊國)의 가리왕(加里王)이 이곳에 피난하여 성을 쌓고 머..
평창경찰서 오층석탑의 설명 『조선고적도보』의 동북 5층탑과 평창경찰서 5층탑의 비교이해 후세백작 2018.07.13 21:07 ◆『조선고적도보』의 동북 5층 석탑 위 사진은 일본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15년 강원 중부권을 다녀가며 원 주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와 평창읍의 유동리 동남 오층석탑과 동북 오층..
"올림픽 종각"이라는 명칭에서.. [올림픽 종각"이라는 명칭에서] 후세백작 2018.03.24. 03:04 "평창 올림픽 대종에 대하여 여러분들의 관심이 많으신 듯 합니다. 우선 평창 올림픽 대종을 건립에는 많은 분들의 노고와 성원에 힘입어 국가 적인 대종을 건립함에 평창인으로서 자랑스럽기에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평창올림픽 대종"을 바라보며.. [평창올림픽 대종을 바라보며...] 후세백작 2018. 02. 26. 02;95 지난 구정때 날은 추웠지만 어느 향토사가님과 군청에 17억들인 올림픽 종을 살펴 보았다. 종의 생명은 첫째가 종소리라, 한번 타종하고 싶었지만 철고리에 자물통을 채워서 할 수 없었다. 본인은 종만보면 힘껏 때려보는데 옛날 ..
김삿갓에 대한 저의 생각 김삿갓에 대한 저의 생각 | 후세백작 2017.05.31. 01:14 ****************************************************************************************** 평해거사 17.05.26. 23:40 익균이 천동리에 살았고, 마지리에 김삿갓시비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소생이 지금 김삿갓 전기소설을 쓰는데 참고하려고 하오니 보다 ..
평창엔, 두 가지가 있으면 더욱 좋겠다 [평창엔, 두 가지가 있으면 더욱 좋겠다] 본인은 지난 가을 이 유적의 발굴이 기사화되자 몇 편의 글을 통하여 이 유적의 중요성을 논하며 평창인들은 이곳에 박물관 건립을 건의하고 추진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춘천 중도 위락단지 조성지구에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