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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고향 백옥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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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선생의 평창에서의 詩(1) 율곡 이이선생의 평창에서의 詩(1) 판관대-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논문 추가사항 ( 지난해 12월 봉평의 판관대에서 실시한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에 필자의 논문에 추가 수정안 입니다 ◆ (국역 이이 율곡전서) 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에 묵으면서 형제(兄弟)를 그리다. (번역문) 모래톱 위에 말을 멈춰두고, 밭도랑 사이로 오솔길을 찾으니, 외로운 마을은 고목에 의지해 있고, 가느다란 냇물은 황만으로 흘러가네. 채소밭엔 비가 흠뻑 내렸는데, 안개는 산과 지붕에서 막 걷히네. 이별의 시름 이젠 더욱 짙어지니, 내 얼굴의 주름살 펼 길이 없구려. 過越溪棧, 宿邨舍, 有懷兄弟 歇馬滄洲上, 尋蹊畎澮閒。 孤村依老樹, 細澗下荒灣。 雨足連畦菜, 嵐收繞屋山。 別愁今轉極, 無境解吾顔。 ---------------..
(논문) 율곡의 고향, 판관대의 바른 이해 1) 율곡의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 (판관대의 바른 이해) (※ 첨부파일 1) 2) 율곡 고향마을 가꾸기 ( 율곡 세미나 리포트) ◈ 율곡마을 역사정립 세미나 (2020.12.3. 평창군 용평면사무소 대회의실) (※ 첨부파일 2)
평창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평창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2020. 12.5, 05;00 平昌歷史硏究者 高 柱 浩 지난 12월 3일 용평면사무소 2층 대회의장에서 “평창 율곡마을 역사정립 세미나”를 비대면으로 개최하였습니다. 이번 세미나는 평창군, 평창군의회, 평창문화원, 평창교육지원청, 용평면번영회, 용평면이장협의회, 봉평농협이 후원하고, 평창군민신문사가 주관햐여 평창율곡마을가꾸기 추진위원회가 개최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곳 판관대에서는 이미 세 번의 세미나가 발표되었고, 또한 평창군에서는 판관대 정비계획까지 만드는등 수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지만 그것은 판관대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모두 신사임이 율곡을 잉태하였다는 잉태지 설화설을 주 모티브(모체)로 전제하였기에 판관대의 역사적 소명에 제역..
잉태지의 단어적 이해 잉태지의 단어적 이해 2020. 12.5, 05;00 平昌歷史硏究者 高 柱 浩 (1) 율곡의 사패지에 관해서 앞으로의 연구방향 이곳 판관대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을 잉태한 곳으로 알려지자 현종은 사방 5리의 사패지를 하사하였다.(1655년, 임인년). 이러한 기록에 의하여 평창군민신문은 백옥포리 212번지외 123개 번지에 1916년 일제식민시대에 토지조사부 정보공개 신청하여 밝혀진 바 총 50,830평의 토지가 당시 강릉군 정동면 죽헌리 (현 오죽현)의 권영달씨 소유로 밝혀졌다. 이는 "이씨 분재기"에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는 율곡 이이에게는 제사를 지내는 봉사조로 재산을 분배하였으며, 대릴사위인 넷째딸의 부군 권화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오죽헌에 벌초를 하는 배사조로 오죽현을 물려었고 이후 오죽헌은..
율곡의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 이제 논문 2편을 재 탈고하여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는 12월 3일 열립니다. 본 군에서는 만류하였으나 이제 계속적 지원아래 율곡의 문화는 탄생하게 됩니다. 2 평창에서 그간 학자들에 의해 판관대 세미나는 3번정도 열렸는데 전부다 바른 이해로 다가서지는 못했고 또한 평창의 주장을 펼치지도 못했습니다. 세미나는 일반적인 이야기들만 치중하지 10년설이나 4년설이 잘못 논고된 점이나 서울대 교수들이나 여러 학자들 모두 조운에 대해 깊이 알지도 못하고 남의 것만 베께 관서를 대동강이라만 하는 학문적 오류들,, 이런 오류들에 휩쓸린 판관대의 입지적 재 소명등은 일반 학자들이 주창하는 예는 없엇습니다. 그렇다고 평창에 향토사학자들도 전무하여 부득이 필자로서는 이에 연구를 하고 가장 평창..
세미나 논문 후기 1, 판관대 비석의 명문에서 (1) 비석의 명문 해석 "율곡선생의 어머님 행장에도 봉평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강릉땅에서 지내던 신사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1536년 음력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서울에서 수운판관직에 있던 부 군 이원수공이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귀가하니 그때에 율곡선생을 잉태한 것으로 전해온다" ◈ 봉평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강릉땅에서 지내던 신 사임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1536년 음력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라는 기록에서, ~ 이 보이거니와라고 표현하는것은 그 다음 문장엔 그런 행장의 기록이 아닌, 지금까지의 기록은 특히 율곡이 쓴 선비행장의 기록도 전혀 무시하겠다는 의도형 문장으로 그 다음 글들은 역사적 기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란 입장을 취하는 느낌이다. ◈ 또한...
"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는 코로라로 인하여 연기 되었습니다. 이번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는 박사님과 향토사가의 총 5명의 주제 발표로 계획되었습니다만 이번 코로라 사태 2단계로 인하여 연기되었습니다. 본인의 논문은 약 60여 페이지 분량으로 율곡과 신사임당의 백옥포리 판관대의 생활과 저변의 이해에 대한 과제로 오죽헌의 영역과 판관대의 영역이 구분되는 논제로 한평생 서울대 교수에서 규장각 관장까지 역임한 자가 백옥포리 집은 강릉에서 서울을 다니기에 힘들어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가 그 중간에 지어준 별서라는등 웃기지도 않는 놀리들이 난무하기에 백옥포리 판관대에 대한 기준적 정ㅇ의의 글로 이번 세미나 자료집에는 후기로 별첨하며 13페이지로 새로 구성한 논문으로 판관대 부분만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세미나에서는 이러한 본인의 판관대의 역사적 사실의 실체를..
평창의 문화 교육레져의 숨은 아이콘 계발 (啓發) 평창의 문화ㅡ 교육레져의 숨은 아이콘 계발(啓發) 후세백작 2019.11.29 03;10 판관대 글에 율곡의 부친 이원수 공에 관한 역사적 기록의 댓글 한 점을 인용하며 시작 합니다. 너브산장 19.11.20. 18:29 저의 생각은 향토사 특히 역사는 지역에 살고 있는 경험의 전문성과 장인의 존중을 인정하여..
팔석정의 석각(石刻)의 제 문제에 대한 논고 팔석정의 석각(石刻)의 제 문제에 대한 논고  후세백작   2019.09.17 03:59  팔석정은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 903-17에 위치하며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이곳의 바위에 팔 석의 이름을 새겼다 한다.바위의 모양에 따라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석대투간(石臺投竿) 석지청련(石池靑蓮) 석평위기(石坪圍棋) 석실한수(石室閑睡) 석요도약(石搖跳躍) 의  여덟 개를 바위에 새겨 八石이라 하는데, 여기엔 많은 문제점을 가지기에 이에 대하여 하나씩 분석합니다.◈의문 1 八石의 여덟개의 명칭을 石刻을 새겼다 하는데, 그럼 여기서 이 여덟 개의 명칭을 왜 八石亭이라 부르는지 어원의 이야기는 없다. 또한 석요도약(石搖跳躍)에서 도약(跳躍)이라는 단어는 그 음은 한문이지만 단어는 일본이..
판관대 비석의 명문을 읽으며,,<울곡의 고향은 어디인가??.> 판관대 비석의 명문을 읽으며,,<울곡의 고향은 어디인가??>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본인 후세백작의 글중에는 율곡선생의 고향은 평창입니다 http://blog.daum.net/kkks1/424 와 봉산서재와 판관대로 보는 율곡의 고향은?? http://blog.daum.net/kkks1/1219 등 몇 편의 율곡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쓰는 글 "오죽헌과 판관대의 산책"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이원수 공과 신사임당이 백옥포리에서집을 마련하여, 이씨 가문의 종친업무를 관장하러 서울로 오르기 전까지 18년간 이곳에서 살았다는 이야기의 글입니다(물론 결혼후 2년간 찬정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고 이사하게 됩니다) 엇그제 고향을 방문하여 친구 두명을 만났는데 재미있는 대화를 하였다. 그..
판관대에서,,, 일전 두 편의 글에서 율곡 이이선생의 잉태지인 판관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피력하였던바 이 글에서는 판관대 비석명문의 내용이 좀더 보완되어 이곳 백옥포리가 율곡의 고향임과 동시에 판관대의 구체적 내용을 명확해게 전하여 율곡의 고향에대한 바른 이해를 알리기 위해서이다. 지..
<봉산서재와 판관대로 보는 율곡의 고향은??> &lt;봉산서재와 판관대로 보는 율곡의 고향은??&gt; 봉산서재를 검색하여 보면 율곡 이이 선생의 부친 이원수(李元秀)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벼슬을 하던 조선 중종(中宗;1530년경)때 이 곳에서18년간(1526-1543) 거주하는 동안 사임당 신씨에게서 율곡선생을 잉태하였는데(1536년 봄)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