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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탑 조성 시기의 연구

월정사 탑 조성시기의 추론

1) 월정사 탑의 조성 시기에 대하여

월정사 탑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다. 지금까지 월정사 탑의 조성시기를 10세기, 11세기, 12세기고 각기 다른 연도의 주장을 폈고, 13세기라는 점은 단 한 명이 논하였는데 이 모두 정확한 사료들은 없지만 이에 대한 추론도 없이 막연한 주장이다.

다만,‘70년 탑의 해체 정비공사시 출토된 주색(朱色사리 14과와 전신사리경의 4점의 청동문경과 금동사각합수정 사리구바리떼보협인다리니경 등의 유물의 양식편년은 대략 9~110세시 중국에서 제작된 것에 의한 탑의 조성시기 추정이다.

여기에 필자는 월정사와 고려 불교사 등 여러 사료들을 추정하여 탑의 조성시기를 추론한다. 이러한 연구에는‘70년 정비공사 감독 정영호 박사의 3중 기단론인가 하는 점과 2,000년 탑 지층 시굴 조사시 발견된 지하 석조물 유구등의 자료와 2,000년 성보박물관 기념 세미나 질의에서 정영호 박사는 탑전 공양상(석조보살상)은 탑과 하나라고 답을 하였지만 필자는 탑전공양상의 조형과 구층탑의 조형상의 차이 등 조형론적으로 하나의 시기가 아닌 다른 시기의 탑이란 고찰 등과 위의 역사 기록의 하나인월정사 사시 장경비문에 기록된 月靜寺施藏經에 대한 고찰을 한다.

과연 월정사에서 오천 명이 모일 수 있는 대법회를 하자면 어떠한 목적이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 여러 고찰특히 몽고병란 후의 고려 등의 여러 고찰을 하여 1,339월정사사시장경비(月靜寺施藏經碑)의 기록은 지하 유구에서 보이는 원래의 석탑이 파손되자 새로운 탑의 복원이고(현재의 탑), 이로써 보면 금강연에 잇던 석조보살상을 들어다 놓앗다는 일설에 대한 이해도 가능하며이전 탑에서 사리 및 여러 부장품들을 다시 봉안하며 고려의 불경인보협인다리니경이란 경전을 다시 탑에 수장()한다는 법회라는 가설을 제시하는 논문을 작성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탑의 낙성법회라야 할테지만 탑은 재축조된 탑으로 탑보다 더 우위의 진신사리등는 그 이론인 보협인다라니경을 함께 수장하기에 장경(藏經)이란 용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추정이다.

아마도 이러한 고찰과 탑의 필자의 논문수항리사지 탑의 원형은?에서 본 탑이 2층 탑신석으로 하나 더하면 되지만 아래의 기단석에 삼중 면석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조형론으로 풀어서 해결해야 된다관심있는 학자들께서는 한번쯤 탑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시면 탑에 조형론이 기본양식의 하나라는 점을 이해할 것입니다.

지금껏 석박사 논문 20여 편에서 전남대 석사 논문 하나에 앙각이란 단어 하나만 나왔는데 이러한 앙각이 조형론의 범주이다그러기에 지금껏 탑의 학문에서는 그 기초인 조형론은 아직 태동조차 못한 것이다.

필자의 수항리사지 탑의 논문에서처럼 우리나라 탑의 사학계에 새로운 체계를 마련하여야 하는 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또 하나의 논문은 현 89층 석탑은 고려 때의 학자 민지는 13층탑이라 기록했고아마도 이 13층 탑이란 기록 약 30년 전에 쓴 책 삼국유사에서는 9층 탑이라 기록했다.

여기에‘70년 탑의 정비공사 리포트 2에 똑같이 13 층이라 함은 기단석까지 잘못 헤아린 것이라고 무시를 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금강산 유람기에서 월정사를 기행한 유교학자 3사람은 12층 탑이라고 기록했다.

이점은 탑의 9개층과 탑신석괴임 및 2층 갑석, 2층 기단석, 1층 갑석의 4개로 세었으며 유학자들은 탑신괴임석과 2층 갑석을 하나의 층으로 하고 2층 기단석과 1층 갑석을 하나의 층그리고 지면에 1층 기단석을 층으로하여 12층으로 보았다.

2.「월정사시장경비 (月精寺施藏經碑)」

 이 비는 1339년(충숙왕 복위 8) 절에 대장경을 시주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후기에 이우(李俁)가 편찬한『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탁본의 단편만이 수록되어 있다.『대동금석서』에는 이제현(李濟賢, 1287∼1367)이 비문을 짓고 종고(宗古) 스님이 글씨를 썼다고 명기하고 있지만 현재 볼 수 있는 탁본 일부만으로는 이러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음기] (장경비문 내용)

所生幷三名供其使令田七十(결락)/ 소생이 모두 3명인데, 각기 부리게 하고,밭 70…

信安公李公安壽以聞(결락) / 신안군 이안수가 듣고서…

白金二鋋又入廩祿歲(결락) / 백금 두 덩어리를(시납하고) 다시 봉록을 시납하였다. 해마다…

會衆五千指 己卯之會(결락) / 대중을 모으니 5천을 헤아렸다. 기묘년의 모임에…

相國金夫人洎信安李(결락) / 재상의 김씨 부인과 신안 이공 …

(『한국금석전문』 중세 하(下), 1984)

요약하면 1,339년 월정사에 장경 봉안하는데 왕비가 백금을 하사 하였고, 원나라에서 환관을 지냈던 신안군 이방수도 백금 두 덩어리를 시주하였으며 당시 재상의 부인 김씨 등도 여기에 동참하였다는 내용이다.

장경의 봉안법회[己卯之會]에 5천 명의 대중이 모였다는[會衆五千指] 한다.

3. 월정사 사시장경비에 대하여 문제제기

이 법회(己卯之會)는 施藏經 碑라 기록되어 있는데이를 대장경으로 해석하는데월정사의 에서 대장경 법회인가 하는 점에서는 개인적 의문을 가진다.

◆ 위의 조선 현종때 이우의 대동금석서 중에월정사사시장경비(月靜寺施藏經碑)“는 1,339(고려이제현이 쓴 기록으로 그 내용은 원나라에서 환관을 지냈던 신안군(信安君이안수(李安修)도 백금 두 덩어리를 시주하였으며 당시 재상의 부인  김씨 등도 여기에 동참하였다는 내용이다.(원문; 信安公李公安壽以聞).

월정사사시장경비(月靜寺施藏經碑)”연구

일부에서는 월정사사시장경비의 藏經이란 용어에 의해 팔만대장경을 봉안하였기에 예전에는 큰 가람이 있었어야 했다또는 팔만대장경은 많은 물량이기에 여러 사찰에서 나누어 조각했을 것이란 갖은 억측들이 난무한다.

그런데 팔만 대장경은 초조대2장경이 1,232(고종 19)에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자 이후 재조대장경 사업에 착수하여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조판(組版)이란 활판을 만들어내고판각은 남해군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판각하였다즉 팔만대장경의 제작시기는 고종 23(1236)에서 고종 38(1251)에 16년동안 완성하였다.

그러면 이제현이 월정사시장경비쓴 기록은 1,339년으로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1,251년과는 8~90년 시간 차이가 있기에 이러한 대역사를 완성하고 80년 시간의 공백에 대장경 봉안의 약사보고도 없이이제현은信安公李公安壽以聞만 기록하였다는 내용은 비문의 맥락이 맞지 않고또한월정사사시장경비에서는 팔만대장경이라고 지정하지 않았고다만 장경(藏經)이란 용어 때문에 팔만대장경으로 비약하는 것은 이해가 곤란하다.

藏經이란 경전()을 (감추어 봉안하다)란 뜻이다. 1,970 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해체 정비공사 시 탑내에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이 출토되었다따라서월정사 사시장경비란 월정사팔각구층석탑 내에 경전을 봉안()하는 예식으로 사료한다.

월정사는 강릉에서 대관령(선자령)을 넘는 도보로 이틀개성에서는 6~7백여리로 도보로는 하루 3~4십리 길이다(야간에는 호랑이의 위험으로 이동을 금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 관찬지등에서 보면 강릉대도호부는 인구가 28,000명 이었으며이런 시각으로 볼 때 장경 봉안법회는 상당한 규모로 전국적인 행사로 이해된다. 그러면 월정사에서 이러한 대규모의 봉안법회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추정하여 고찰한다.

4) 1,970년 동탑의 해체 정비공사를 실시하였다.

공사의 목적은 탑이 동편 쪽으로 쏠려 기울어져 있어 붕괴 위험에 전면 해체하여 다시 축조하였다당시 기록에 의하면탑 내부에서 주색사리 14과와 사리병 등 사리장엄구바리떼보협인다리니경 등이 출토되었다.

◀ 일제때 칠불보전의 사진으로 탑은 동쪽으로 쏠려 기울어져 있다 6,25동란에 탑의 초층, 2층 옥개석등이 파손되고‘70년 정비공사시 4개의 옥 개석이 교체되었다,

‘70년 월정사 탑 해체 정비공사

5) 정비공사의 문제점

위 사진에서 보듯 정비 이전에는 탑이 동편 쪽으로 쏠려 있었는데현재는 서편쪽으로 기울어져 있고또한 지반의 수평도 내려앉아 있는 상태이다해체 복원공사시 지반 다지기가 불충분했던 점과 각 부제들의 방향을 맞추지 않았기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건설사가 공사를 시행하였는데 감독관은 학자들로 감독과 실측기록관이 실측하였다그런데 필자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탑에 문제점을 지적한다.

1) 탑의 움직임을 없이려면 토양은 얼어서 수축하지 않토록 소금이 배합되어야 하며이 문제는 지반의 수축에 의하여 탑의 요동 움직임을 가지기 때문이다탑이 조금씩만 움직인다면 수없는 반복에 의해 석재는 모래로 변하기 때문이다.

2)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해체된 탑의 재축조시 지반도탑의 각 부위의 수평을 못맞춘 점이다.

2, 3층 탑신이 서북쪽으로는 1,5cm 이상의 몰탈로 괴임을 하여 수평을 맞추고 있다동편쪽 기울기가 서편쪽으로 변했다면당시에는 실측기록원도 있었지만 실측 자료는 찾아볼 수 없지만 반대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은 탑의 복원시 각 부재들이 원래의 방향이 아니라 돌아갔기 때문이다.

팔각구층석탑 정밀 안전진단보고서에 의하면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 탄성파, 초음속파 등의 검사에서 탑의 각 부위별 검사에서 대체로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했음을 볼 수있다.

(*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정밀안전진단서. 안전진단; 누벨 비 에이엔씨 2017,10.)

현재까지 탑에대해 학자들은 역사적 관점의 전문 연구만하지 탑의 조형적인 연구는 모른다따라서 대부분의 탑들은 몇 번식 부서져 다시 올리곤 하였는데 맞지 않게 되어있다혹 앞으로도 탑의 이전 등의 재구성시에 유의사항을 서술한다.

현재 많은 탑들이 각 층의 탑신석이나 옥개석 사이틈 공간으로 반대 쪽이 조금씩 보이는 탑들은 모두 재시공시 바른 방향으로 앉히지 못한 결과이다대표적인 예로서는 진부면 탑동리의 삼층 석팁이고묘적사탑도 여러 면이 돌아가 틈을 보이고 있다따라서 탑이 이전시에는 묘목 식재 때 방향을 맞추듯 탑도 각 부재들 모두 방향을 맞추어야 한다.

탑의 각 부재들을 조각할 때 우선적으로 바닥면을 고르게 평면으로 만든다요즘은 전동공구와 수평 레벨들이 있지만 옛날에는 2m 정도의 비석은 판석으로 연자방아식으로 연마가 가능하지만 탑의 석물은 정을 쪼아서 평면을 만들고탑의 각 부재를 조각 후 쌓아 올려 탑을 완성시 탑신석옥개석을 각 층을 올릴 때 맞지 않는 부위는 다시 내려서 바닥면을 조정하는 그랭이 공법으로 사면의 틈을 맞춘다.

그러기에 틈이 심하게 벌어진 석부재는 있을 수 없는데 월정사 탑에 다시 축조시 동편 3, 4번 기단석 사이에 2cm 두께로 몰탈로 고임할 하였다각 부분에 2cm 정도의 유격이 있어서 몰탈로 괴임을 한것은 공사가 부실하였다는 점이다또한 복원 후 현재도 동편 쪽은 지반이 내려 앉았으며이 결과는 심하면 무너지겠지만 그보다 반경 2m내에 9층까지와 상륜부 장식까지의 힘을 집중적으로 수직으로 받기에 힘의 중심의 축이 이동하여 무게 대칭이 짝다리가 되면 석부재들에 부서짐 현상을 가져오는 것이다이 글을 읽고 탑을 잘 살펴보면 충분히 그 장면들을 읽을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서술하면, 1970년 탑을 해체하여 다시 올려 맞출 때 이 석부재들은 최소 1,300년부터 700년 이상이 된 탑이었지만 해체 복원할 수 있는 탑이었다그러나‘70년에 쌓은 탑은 50년된 지금에서 보면 해체 복권할 수 없을 만큼 부서지게 보인다이 점은 무게의 힘이 한부분으로 쏠리고 수평을 못맞췄다는 이해이다.

6) 월정사 9층탑이 원래 13층임에 대한 고찰의 논문도 마련합니다.

이러한 시시비비는 놔두고 필자는 모든 탑과 동 탑의 특별히 구분되는 지점즉 9층의 탑신부와의 접합의 9층 옥개석 넓이가 노반에 비해서 넓다는 점으로 아래서 볼때는 미세한 차이로 분석이 어렵지만 동 탑의 사이즈에 따른 그래픽으로 볼때엔 노반에 아랫부분이 9층 옥개석 상륜부와 접합면에서 차이가 지기에 가령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탑신부 상부를 제거하고 13층 탑을 9층으로 작업시에는 9층 옥개석의 곡선을 지금처엄 늘어지게 하여 접합부가 노반과 맞게 하였다는 추론으로 미세하지만 이 차이는 몇cm이 나기에 이를 계산할 수 있고 그래픽으로 나타내는 논문을 연구할 것이다.

◆ ‘70년 탑의 해체 복원 중 정영호 박사는 지나며 탑 하부를 보니 기단석 아래에 우주구를 새긴 기단석 보았다 하였다그리고 리포트에서 3층 기단석인가 하는 운을 뗐다이로부터 현재의 탑 이전에 다른 탑이 있었다 또는 지하에 기단이 있어 삼중기단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계속되어 왔다.

물론 지반공사에 이러한 탑재가 보였으면 공사 감독관은 면밀히 체크하고 또한 빼내고 수십 톤의 압력을 내려받는 단단한 지반을 구축했어야 하는데 그냥 지나쳤다.

지층의 문제가 불거지자 2000년 지층 시굴 공사를 실시하였다이때 아래 사진들의 지하 유구가 나오자 정영호 박사는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한 이론이 전면적으로 뒤집어 진다고 그냥 덮어 버렸다 한다.(관게자의 2023년 증언)

그래서인지 더 이상 이 석물들의 제원은 찾아 볼 수 없고 하나의 논문에 의문점만 기록하고 있다.

            ◀월정사 석탑 지하유구 남쪽                                                                월정사 석탑 지하유구 서쪽

그리고 어느 박사 학위 논문에서지하 기단과 지상부 석탑의 기단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지하 기단은 지상 기단과 연결된 초창 기단으로 볼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그렇다면 월정사석탑은 2층 기단이 아닌 3층 기단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필자는 최근 논문에서 월정사 석탑의 지하기단을 지상부 석탑과는 별개의 것으로 이해했었으나지하기단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결과 현존석탑의 기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위 논문에서 보면 정영호 박사의 3층 기단석론이 언급되며 현존 석탑의 기단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한다. 물론 필자는 이 논문을 신임하지는 않는다이 논문은 월정사 탑의 조성시기 연구로서 왕순식론이나 고려 불교등 여러 이해도 상반되고 본인이 추구하는 탑의 조성 연대와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논문에서 정영호 박사의 월정사 팔각탑은 고구려 팔각 목조탑의 계승이라 주장하였지만 그의 사후 2~3년 내로 경찰 임용고시 등에서 송나라탑의 영향이안 문제가 기출되었다.

여기에 필자는 15년 전 글에서 송나라 선진문물의 유입이라 하였는데 위 박사 논문도 고구려탑을 논하는 것은 현 우리나라 학문적 카르텔을 나타내고 있다.

7) 지하 유구의 석재는 현재의 탑의 초층 기단석인가?

  지하 기단은 지상 기단과 연결된 초창 기단으로 볼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월정사석탑은 2층 기단이 아닌 3층 기단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지하기단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결과 현존석탑의 기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주) 20의 인용글에서는 박사 학위 논문이랍시고 낱말 이해의 범위가 단정하지 못한데 1단 글에서는 초창기단이라면 3층 기단의 논리가 성립된다.에서는 초창기단이라면 창자의 뜻이 뭔지 모르지만 옛날의 기단이라면 이란 뜻으로 생각했는데추가적인 검토결과 현존석탑의 기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라는 뜻의 해석에서 본인의 결론인지 학계의 결론인지 알 수 없다하지만 결론은 본 탑은 3중 기단석이란 결론이다이점이 가능할까?

8) 3중 기단석은 월정사 탑의 조형상 불가능하다.

홍대한의 논문에서는 2중 기단석은 월정사 탑의 2중 기단석에 도피안사 탑을 예시하였지만그 탑의 시기에서만이 아닌 점은 월정사에서 멀리 가지 않고 수항리사지 탑이나 진부 탑골 삼층석탑도 2중 기단석이고문제는 월정사 탑이 2중 기단석인데 이를 3층 기단석으로 아래 초층 기단석을 더 추가한다면 초층 기단석에 받침석과 초층 기단석 그리위 그 위에 초층 기단석 갑석을 올리고 현 탑이 모두 올라가야 한다.

이때 받침석과 갑석은 문양을 가지는 판석으로 치석하기에 두께를 가진다그리고 메인이 되는 초층 기단석 두깨는 현 초층 기단석보다 높이가 작은 조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면 10cm 이하의 판석으로 갑석을 올려야 한다면 힘을 받는 역학도 있지만 조형의 미도 갖지 못하기에 이러한 3층 기단석으로 만들려면 2층괴 3층의 기단석 높이가 자연 증가되어야 한다.

그러면 1층 기단석이 2층 기단석이 되고 그 아래 1층기단석이 있다면 그 높이는  8cm이하의 얇은 기단석을 만들어 넣을 때 수직으로 상륜부까지 무게를 2m의 넓이내에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봉착된다. 또한 삼산화 문양이 도학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여러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바 이러한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3층 기간석을 운운하고 있다.

따라서 월정사 탑은 2중기단석 이상의 3중 기단석의 조형적인 그래픽은 모순이 되고 또한 1,200여기의 탑은 대부분 삼층 석탑, 5, 7, 9층 11(묘적사 탑으로 원래는 13층 탑으로 보인다) 13층 탑으로 탑신부 층수는 제작각이지만 모든 탑의 기단석은 지대석위애 단층 기단석이 주류이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미관상의 상륜부와의 밸런스나 하모니의 균형을 위한 2중 기단석에 3중 기단석을 갖을 의미는 없다고 본다.

또한 위 사진의 지하 유구 좌우측 사진은 전혀 다른 치석을 가지고 있으며싸이즈는 모르지만 사진애서 형태를 볼때 각 부재들이 팔각의 부재는 아닌 것이다.

남쪽 사진에서 팔각이 아니라 사진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위의 판석 3매는 탑 전체의 무게를 받치기에는 빈약한 두께이고 오른쪽의 기단석은 직각이고 우주를 치석치 못했으며 부재의 면이 다듬지 못하고 본 탑의 연화상의 문양을 치석치 않은 전혀 다른 석물로 크기에도 걸맞지 못한 듯 삼층오층 석탑의 부제인 듯 하다.

따라서 지하 석물은 이전의 어떠한 탑의 유규인 것으로 판단된다그리고 2,000년 토층 시굴공사에서 토층은 3개층으로 확인되었다는 점은 지표면을 높이는 객토를 한 것으로 월정사의 지형은 물이 급어도는 안쪽으로 형성되는 퇴적층으로어라연 아래의 나전리에서부터 장전골수항골등을 타고 오르는 깊은 골로 양변에는 가리왕산두타산백적산등 해발 천여 m의 준봉들의 깊은 골을 타고 오르는 비구름은 이곳 비로봉까지의 백두대간에 집중 호우를 뿌리는 산간지형으로 거거의 월정사는 범람의 가능성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계속적으로 현재는 약 1m 여 돋아진 상태로 보인다그러기에 지하 잔존의 유구는 옛 탑의 유구로서 그 위에 다시 현 탑을 세운 것으로 추론된다.

9. 석조보살상은 탑과 같이 조성하였는가?

동 세미나에서 질의에 답으로 정영호 박사는 석조보살상은 탑과 하나라고 하였다 즉 같이 조성한 것이란 뜻이다하지만 필자의 이해로는 탑과 보살상의 조각 수법의 양식의 구현은 확연히 구분되는바이러한 점은 앞으로 논문으로 대처한다.

                    월정사 구층탑 기단부                                                               ▶ 월정사 구층탑 석조보살상             

         ◀임실 진구사지 비로자나불상 좌상 월정사탑 석조 보살상                  ▶ 석조보살상 앞면이 위로 올라가 있다.

월정사 탑 기단부의 복련은 장방형의 도형으로 공간이 없게 치석하였으나 석조보살상은 마름모 형의 복련으로 간격이 떨어져 있는데, 아래의 "진구사지" 좌상의 복련 사이의 공간은 세형의 겹복련을 뒤로 바쳐 새겼지만, 월정사 보살상에 겹복련은 볼륨이 넓게 조식하였다. 이러한 복련의 도식화 레터링에 큰 차이를 가지며 따라서 조형의 미도 차이가 난다. 일반인이 보아도 월정사 탑과 석조보살상의 복련의 조각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석조보살상은 탑보다 이전의 시기애 조성되었던 것이로 판명된다.

  이 점에 정호영 박사는 월정사 탑과 석조보살상은 하나라고, 즉 같이 조각된 것이라 하였지만 분명 다른 조각양싱을 보이고 있는바 탑에 학자들은 역사적 양식의 편년적 고찰만 할 뿐이지 실제 각 도형의 비교 연구하는 기록은 하나도 없고 한국사나 탑의 탑의 학문은 유학이 필요없기에 논문심사등에 다소  권위주의적인  카르텔 체제를 희석하여야 한다.

  이 논문의 요지 중에 하나는  2,000 년 지층 조사시 사진에 보이는 기단석의 탑은 아마도 황룡사  9 층탑은 최고 큰 목조탑을 불태우듯 석탑읜 파손된 듯 하다. 그래서 병란 이후에 다시금 월정사 탑을 재건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금강연에서 보살상들 주워왔다는 이야기에서 보듯 예전 탑에 마치 한송사지 보살상같은 시기의 마련한 보살상을 탑전 공양상으로 갔다 놓았으며, 또한 공양상은 묘관이 젖혀진 모습으로 이때 바닥은 수평이 아니라 올라가게 되어 있다. 앞의 바닥을 올려 세워야 공양상은 고개가 떨어지지 않고 전면으로 탑신상을 바라보는데 탑을 바라보는 이것은 조형상 탑과 한세트의 포즈가 아니란 점이다.

이러한 정밀한  내용의 범위 내에서 월정사 탑의 조성시기에 대한 논문을 마련하겠읍니다.

 지금까지 탑의 여러 논문들의 한계를 극복하여야 하는 점으로 탑의 조형성과 고려의 역사를 바탕으로 더욱 자세한 점은 논문으로 대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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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우리의 역사학게는 일제의 일본인들이 왜곡한 황국사관에 의한 역사로서 반도 안의 역사로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교육부등 모든 역사단체는  황국 신민사관을 따르는 강단사학으로 반도 사관을 추종하는 왜곡된 역사로 여러 논문에서 월정사는 왕건 개국지 명주지방 호족 왕순식에 의해 월정사가 지원을 받았다는 역사는 필자로서는 곤심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 고조선, 대진국(발해, 발해는 당나라가 쓴 용어이고 국호는 대진국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 만주에서 양즈강 일때에 역사이고,  하나의 예증으로  고려의 수도는 개경, 서경 등 3경으로 기록되는데 우리는 개성으로 알고 그러면 묘청의 서경천도는 개경에서  평양은 북쪽인데 왜 서경천도라 했을까요.  묘청의 서경 천도는 북방 정책을 펼쳐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취지인데 고작 백여 리 평양천도라 하며 김부식은 이러한 묘창을 죽였다.

 말이 안되는 역사이며, 고려사 왕건조에는 왕건이 배를 100척 만들라 명령했는데 한반도에서 100척의 배가 당장 필요했을까? 김유신이 경주에서 싸운것도 아니고 

그러면 삼국사기 기록에 신라와 당나라는 7차 전쟁에 모두 신라기 승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잇는 당나라 수도 서안(장안)과 경주는 지금 구글어스에서 바다로 직선으로 제어보면 1,800km 즉 4천 오백리, 아마 현대전에서도 7번 싸워야 할 명분이 없을 텐데 참으로 한심한 소설들을 배웠다.

신라는 양즈강과 패수로 당과 접하는 이웃나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유신도 역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중국에서 싸웟으며 우리 역사는 모두 잘못이다.

필자는 올해에 평창의 역사를 정리하고 내년부터는 고조선사부터 많은 부분을 서술하겠읍니다.

필자의 책 <평창 역사의 이해> 책에 하리 청동기 유적에 옥과 환옥의 사진이 있는데 이 유물들이 멕시코 아즈택 문명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유물이 맥족의 유물인데 김진백, 정원대의 <길위에 역사> 책에서는 평창은 맥족이 아니라 마한쪽에서 피신온 부족으로 추정하는데.. 조상도 모르고 역살글 하겠다고,,웃기긴,,마한도 우리 민족이 맥족이다.한다. 우리의 조상 고조선은 예, 맥, 구리의 3부족 연합공동체였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