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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의 理解』 인터넷 책 단원별 보기

『平昌歷史의 理解』 인터넷 책 단원별  보기

[제1장] 평창의 상고 지리지.pdf
1.28MB
[제2장] 평창의 유물과 유적.pdf
1.29MB
[제3장] 평창역사의 고찰.pdf
5.25MB
[제4장] 평창의 역원제.pdf
1.14MB
[제5장] 평창의 우통수.pdf
1.45MB
[제6장] 평창의 의병과 동학.pdf
0.56MB
[제7장] 율곡의 고향 판관대.pdf
0.79MB
[제8장] 문수성지 오대산.pdf
4.20MB
[제9장] 평창 유람의 역사.pdf
1.39MB

●  저자 ; 高 柱 浩 

 주관 ; 평창문화원 (2023, 12, 15 출간)

『평창역사의 이해』의 책을 누구나 바로 쉽게 볼 수 있도록 전자 책을 올렸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지만, 역사 탐구의 목적은 이 땅의 미래의 만들기 위함으로 지난 과거로부터 이곳 지형, 지리를 이용한 생활의 인문역사를 살펴봄으로서  평창의 특유한 정체성을 찾아 미래의 생활을 예시하기 위한 미래의 역사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즉  역사는 미래 예시의 길잡이로써 오늘, 역사는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역사는 날로 새로워 집니다.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문헌의 정보량이 많아지고,  유적. 유물이 발굴되고 과학의 발전에 의한 DNA, 천문학등 과학의 힘으로 역사를 밝히기에 역사는 날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동 책은 평창의 지역사도 과거에 이야기를 구슬한 역사의 비 논리성등을 타파하고 미래 지향적인 가치관의 신경향의 사관으로 서술하였읍니다.

 

책을 집필하면서 여러 문제들을 봉착하였는데, 이 문제들을 고찰합니다.

● 사수현

그 예로는 평창지명 중 사천강의 유래에 고려시대의 사수현에서 유래되었는데 그럼 사수천의 모델은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서, 사수현 부분의 위치는 서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 책 p76 페이지에 사수현에 대한 고려사를 인용한 내용으로 "고려 성종은 종질 욱을 사수현으로 귀양보냈다"고 기록한바 고려의 사수현에는 사수천이 있는데, 사수현은 한반도 내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명이 변한 고장도 없으며 사수현은 중국  공자의 고향 취푸에서 북쪽 50리에 위치하며 현재도 사수현이 있으며 그곳에 관통하는 내를 사수천이라 합니다.  성종이 종질을 귀양 보내는 곳은 외국이 아닌 고려의 자국내로  이해하기에  사수현은 고려 지명으로  중국 대륙에 있는 것이다.

◀ 고려사에 나오는 고려의 지명들로서 한반도에 있는 지명은 순천, 교하, 청주(淸州)해주 뿐이지만 중국 대륙에는 위 지명들을 다 찾을 수 있다.

 상고사

본인의 책에서 산동반도 아래가 고려의 땅이라고 주장하면 국뽕이라 하기전에 강단사학은 물론 재야 사학자들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의 역사는 모두 거짓이며 삼국이나 고려는 모두 중국 대륙 동쪽 연안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이는 중국의 25사에서도 또한 천문학의 일식현상으로도 밝혀집니다. 참으로 엄청난 이야기이지만 현 교육부 산하의 교권은 일제 식민지 사관에 헤메는 강단사학이라 우리도 그렇게 배웠지만 현재의 학생들도 엉터리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역사는 앞으로 연재해 쓰겠습니다.

필자의 관심은 단군역사로 지금 요하문명과 홍산유적 중 하가점 하층 문화는 고조선이 직결 되는 문제로 아직도 가장 아이러니한 역사는 시안(장안)의 많은 피라밋, 그 중 몇 기는 이짚트 피라밋보다 높은데 이는 모두 고조선 유산인데 중국은 봉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는  아직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은 각 제후국들의 역사는 짧다. 삼국지의 위, 촉, 오나라는 30, 40, 50년만에 망란 형편없는 나라들로 중공 공산당은 더 형편없기에 와해될 것이다. 따라서 그때는 피라밋을 정밀 조사하면 고대 고조선 언어부터 모두다 나올 것이다.

우리 단군 후손들은 위대한 민족이다. 미국 인디언이나 잉카, 아즈택문명도 만들었고 다뉴세 문경은 요즘 레이져로도 조각하기 힘든 동판을 철도 없는 당시에 피리밋도 고조선 후예들의 작품이고 기자 피라밋에 스핑크스도 동양인 상으로 훈족이 지배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계적 유적 요하문명과 고조선을 여러차례에 쓰도록하며 본 책에서 또 하나의 문제는 평창을 예맥의 맥족 고을이라 하였다. 그런데 엇그제 평창 역사서 한 권을 찾아 보게 되었다.

  『길위에 역사』(글. 사진- 김진백. 공동조사- 정원대) 책을 보았다. 동 책은 평창역사의 주류가 아닌 부분의 조명으로 평창역사를 저해하는  큰 오류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책의 인용부에서는 역사학자 조법종의 글을 참조하였다는데 조법종은 조선일보 기사에 "무서운 아이들" 세대로 역사 팔아먹는 강단사학자이다. 지난해에는 전라도 천년사 35권 사서 출간에 총 책임자로서 일제만 추종하고 중국 쪽 문헌들은 인용도 않는 이러한 오류문제로 전라도 국회의원 모두가 분개하여 올바를 역사 조명을 위해 일년간 강단사학과 재야 사학에게 바른 역사를 찾으려 토론을 하였는데 조법종은 강단사학자들의 대표로 경상도, 전라도는 인본 야마토 정권의 식민지인 임나일본설로 역사 팔아먹는 장본인이다.

길위에 역사란 책에서 이런 황국사관의 친일 식민사관 주의 자의 글을 참조했다니.... 

 앞으로 강단사학이 무엇인지 ,,, 아니 잠시 설명하면 강단사학은 고조선 글을 쓰면 연구비 반환하라고 연대박사는 감사원가서 감사 조지라 하고, 다른 놈은 중앙학 연구원에 전화해서 연구비 반환받으라 하는 등  윤내현 교수는 북한의 이지린의 책을 보았다고 강단사학자놈들은 국정원에 신고해 국정원에도 끌려가는...그러며 그들은 고조선과 고려 연구논문은 학위 인정 안해주는게 현 우리 역사게의 실제 모습이다.

 정원대는 『평창의 인문지리』 책 에서 『길위에 역사』 책을 17번이상 출전하였다고 인용부를 찍었는데. 세상에 다른 책에 똑같은 내용이 있다고 체크하는 이상스런 책은 처음 본다. 또한 『길위에 역사』 책에서는 글, 사진은 김진백이고 다만 공동답사자로 정원대라 기록하고 있는데,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는 김진백, 정원대의 책이라고만  소개하고 내용도 없이 17번씩이나 인용했다고만 쓰는 참으로 우스운 책으로 알고보니  『길위에 역사』 책이나  『평창의 인문지리』책의  내용은 평창역사에 상당히 반하는 오류들을 하고 있다. 

 『길위에 역사』 책의  오류들 

  『길위에 역사』 책에서는 "우리는 알타이어족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랄 알타이에 계통에서 우랄과 알타이는 전혀 틀린점으로 유라시아권은 모두 알타이어계통이다.

 평창, 횡성지역은 예나 맥의 역사가 기록되지 않아 예맥의 지역이 아니다라고 서술하였다.

예맥은 예 맥 조선 또는 예. 맥. 구리라 하여 예족과 맥족은 환웅족과 함께 고조선의 주체로서 이 경우는 민족단위의 예맥을 이야기 한다. 3개 부족이 법과 제도등을 가지는 공동체 사회를 이루었기에 이는 민족으로서 국가명으로는 (고) 조선이라 한다, 하지만 강원도에서 예족이나 맥족이라 함은 하나의 종족으로 보아야 한다.

  『길위에 역사』 책에서는 예 맥의 개념을 모르고 서술하기에 평창 횡성지역은 맥족, 또는 고조선이 아니라 한다면 중국 화하족인가?

여기서 3부족이 하나의 법 제도아래의 국가를 만든것은 국가 구성윈인 민족의 계념이지만 민족 이전에는 각기 종족으로  한반도 전역이 고조선 시대에도 예 맥은 일반의 통설이 아닌 필자의 책에 DNA 데이타에 의한 동 만주에서 함경도 쪽으로 남하한 점은 종족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예족과 맥족의 기원과 차이점에서 모든 유물에 중심은 무덤속에 있다.  이렇듯 맥족은 석관묘, 피라밋이고 예족은 토광묘이 차이점을 가지며 요즘 밝혀진 춘천의 중도 유적은 세계 최대의 유적지인데 좌똥구리 도지사가 생색낼려고 까 문지르고 놀이 문화를 하였는데 요즘은 덜컹거린다 한다.

물론 평창지역이 맥족의 부락인 점은 근자에 하리 청동기 유적에서 나왔는데, 꼭 이 유적만이 아니라 용황리 미황리 토기등이 있으며, 앞으로 고조선은 예맥 조선이라 하는바 여기서 예맥은 민족으로서 고조선의 구성을 뜻하고 예, 맥은 종족으로서 종족은 현연적 씨족사회로서의 예맥을 뜻하는바 평창은 맥족으로 만주 집안현의 서단산 문화로 역사로서 이해는 매장풍습에 의한바 맥족은 석실묘. 예족은 토광묘를 사용하고 있으며 중부권에서는 呂자형 주거지 등도 고구려 양식이다.

그러면 평창 하리의 돌널 무덤과 중도유적 그리고 하가점 하층 무덤의 동일시와 평창 하리 무덤은 고조선 양식이며 유물 비파형 청동검도 고조선 것으로 여기에 필자의 책애서 환옥의 사진이 있는데 이는 중도 고인돌에서 또한 멕시코 아즈텍 고인돌에서도 있다. 이는 본인이 본 바이며 앞으로 고조선 무텀의 양식과 특진, 옥이와 환옥에 대하여 정확한 제시를 하며 서술합니다.

 『길위에 역사』책에서 역원제에서도 알 수없는 즉 오류들을 가지며 또 하나의 문제는 거슬갑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도돈의 오도산(일명 거슬갑산)에서 기우제를 지낸것으로 기술하는데. 실록에서  거슬갑산 기우제는 두 편이 나오며 이는 주천현에서 지낸 것이다. 

  역원제

조선시대 평창의 산업으로 역원(驛院)의 탐구. 우통수는 한강의 시원으로서의 고 문헌 자료들과  동학과 평창 의병의 역사는 의병은 독립군의 전신이고 모체로서 평창 선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투혼의 애국의 역사는 아직도 한 줄 조명이 없었다. 

 판관대 

신사임당의 잉태지로 알려진 봉평의 판관대는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이 세미나에서 잉태지를 역사화하는 우(愚)를 범하였지만, 그리고 율곡과 신사임당의 생애사에 이은상 이하 여러 학자들의 연구는 비 역사적이고 오류적인 기술에 필자는 최초로 판관대를 역사로서, 율곡의 어린시절의  고향으로서 서술을 하였읍니다.

 오대산권 불교

 9층탑의 문제 

오대산권 불교문화의 서술에서는 종교의 신앙적인 점이 아니라 오대산권 불교는 조선조 불교의 맥을 잇는 제일의 원찰로서의 평창 역사로서 조명하였으며,  역사책으로서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들은 추후 논문으로 작성합니다.

월정사 탑이 13층 탑이었다는 주장에 지난번 탑의 정비 작업시 현장엘 다녀갔는데 탑의 상륜부를 청동이 아닌 금동으로 새로 단장하여 올렸는데 하루가 늦어 싸이즈를 실측하지 못하였지만 상부 사진으로 확인해 볼때 필자의 주장은 맞기에 이에 대하여 논문으로 상세하게 기록할 것이며. 물론 필자는 개인이고 어떠한 학회에도 가입하지 않는 개인이기에 논문의 인증은 어렵지만 다만  필자의 블로그엔 평창사람들보다 많은 학자들이 다녀가고 있다.

석조보살상의 문제

탑과 보살상은 한 셋트라고 고, 정영호 박사는 주장하였는데 이는 한눈으로 보아도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탑에 대한 박사들은 역사적인 거시외에 조형에 대해서는 까막눈들이다. 필자의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을 찾는 고찰을 잘 보고 공부들 하시라.

보살상의 양 복련과 탑 기단석의 복련은 하나의 문양이 아니고 조각 정 끝의 차이도 느낄 수 있다. 이 점도 옥신4각신 하기에 앞으로 필자는 조각 기법상의 차이를 정확하게 그려 낼 것입니다.

또한 2.000년 탑 지표작업의 이유를 알았으며 박사는 2중 기단석이 아니라 3중 기단석이라며 이러면  탑의 최고의 학자엔 내가 발표한 이론들이 문제가 되니 그냥 지반 확인 작업을 중단하였다 한다.

 이 탑에서 3층 기단석을 우선 그래픽으로 그려 보시라, 그게 가능한가? 학자도 아닌 일반인이 이러한 논리의 주장을 한다고 우섭게 타부하지 마시라.. 필자는 평창에 역사를 논한 10명이상의 박사 모두들 헛다리 짚는 오류라고 지적하였기에 필자는 박사는 무엇하는 박사들인지 잘 모르겠다

오대산 사고

오대산 사고는 산속의 암자인 영감난야에 자리 잡았으며 이곳은 바람과 불, 물의 삼재(三災)가 없는 지역이기에 여기에 사고를 지었다고들 알고 있는데. 기실 이 이야기의 역사는 선조가 강원관찰사에게 오대산에 사고를 지으라고 명하였으며, 사명당에게는 밀직군등 80명을 내려 주면서 건축을 명하였다.

이때 관찰사는 사명당에게 상원사를 헐고 그 자리에 사고를 지으라 하니 사명당은 영감난야는 바람과. 물, 불의 삼재가 없는 오대산의 명당이라 하며 영감사에 오대산 사고 자리로 결정하였읍니다.

사명당은 월정사 법당을 4년간 재공사를 하기에 영감사에서 숙박하였기에 영감사의 주변 산세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로서 관찰사에게 영감사는 삼재가 없는 곳이라 하여 오늘날에도 상원사는 유서깊은 사찰로 있게 된 것입니다.

동학 

 필자의 책에서 동학의 개요에서 정읍의 동학항쟁과 전봉준에 대하여 일반적이지 않게 서술하였다.

 고보애서는 동학이 아니라 봉기였고 전봉준은 대원군의 자운궁에서 식객생활을 3년 했다한다. 따라서 고부 동학은 동학의 본 뚯을 갖자 못하고 대원군의 왕권 옹립을 주도하는 전봉준으로 보아야 한다.

2019년 국무총리는 종로에서 전봉준 동상을 제막하고 매년 5월 10일을 동학 혁명의 날로 비 공휴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하지만 동학은 혁명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는 아니다. 또한 고부봉기는 폭정에 의한 민중의 시련의 분출이지만 사발통문을 대단한 것으로 설명하는바 사잘통문이라면 모든 사람의 힘을 합한 것은 좋치만 주모자를 색출하지 못하도록 모두가 돌려서 작성하였다 한다. 하지만 강원도에서 시작한 의병은 구국의 길에 개인의 목숨을 아껴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학에는  동학도 100여명의 목숨을 앗나간 영해 교조신원운동을 깃점으로 잡아야 한다.

노암사 절 

 1912년즘 세키노 다다시가 찍은 동북 오중석탑은 일제의 고적대장에서는 노암사 오중석탑이라 기록하였다. 현제 이 절의 위치를 중리 돌 체험관 아래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현 두만여울쯤,  평창의 1910년대 측지지도에 강변에 (동책 p91 지도) 탑의 기호가 하나 있는데 이곳이 노암사 터로서 이후 제방이 축조되고 제방안으로 탑만 이전하였다. 따라서 노암사지 주변은 소나무도 아닌 강변의 냇가 옆이다.

앞으로의 본 책에 대한 이해의 글을 하나하나 쓰도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