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백작 2015.01.05 02:43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에 저의 불만을 피력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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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한잠깬 저는 언 평창의 까페에 올라온 6,25 이전에 영국의 어느 보고서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찬양에 대하여 반론을 쓰러 갑니다.
물론 멕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훌륭한 작품임엔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우린 그 인천상륙작전의 태생시 문젯점과 또한 맥아더는 극동군 사령관으로서 9,28 수복에서 압록강까지
오르다 중공군을 개입시키는 과정에 문제에 최고 책임도 따르는 점에 대해서는 역사의 비평도 없다.
당시 미 8군 초대 사령관 워커는 패튼장군의 아들이라 맥아더는 상당히 거리감을,,,
우리가 낙동강 저지선에서 미군이 투입되지만 전투에 투입하지 말라는,,, 이것이 워커에게 맥아더의 명령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빛내기 위해서 혹 낙동강 전투는 더욱 힘들어 진것 아닌가 하는 의혹도... 맥아더의 인천상륙에
관한 다른 생각의 댓글을 달 것입니다
나로서는 맥아더도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조자 하는 것이 우리의 자주성이라 생각하며 이만,
<나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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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에 대한 우리 생각의 고찰.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미국의 대통령은 휴양지에서 AP통신의 뉴스로 듣고서는 이는 민주주의에의 도전
이라 생각하고서 곧바로 3시간의 비행으로 백악관으로 돌아온다. 이 비행기에서 곰곰히 생각한 그는 즉시
유엔군을 창설한다. 이에 일본 주둔 극동군 사령관은 유엔군 사령관직을 겸하며 6,25전쟁에 최고 책임자가
된다.
(여기서 6,25를 왜 한국전쟁이라 표기하지 않냐 하면 한국전쟁은 국가대 국가의 전투 입니다.
물론 남,북한 동시에 유엔을 가입하여 이젠 영수회담이란 용어를 꺼리낌없이 쓰지만, 6,25당시에는 그들은
북괴의 괴뢰정권이었지 한 국가도 아니었는데, 좌파정부시절에 좌똘(똘마니)들이 짧은 머리로 동란을 한국
전쟁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미국전쟁이라 하니 않는것도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인데, 또한 6,25 당시 역사는
그때를 기준으로 삼아야지 현재를 기준으로 삼는 한국의 좌똘들 행위는 어리석기 짝이 없고, 이러면서도
김구 묘소 참배라...김구 선생께서는 죽어도 북한을 국가라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미국은 한국에 유엔군 창설이전에 유엔군을 일본에서 급파합니다,
최초로 송탄지역에서 방어에 미 24사단 스미스 연대가 패전하며, 이후 스미스부대는 대전방어에서 딘 소장은
포로가 되며 이 대전 방어로 인하여 몇 일간 지체가 낙동강 함락지연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대전방어가 무산되고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은 경상도쪽 전면방어와 미군측은 전라쪽면의 경상도 방어에
섹터를 정하고 북괴군 3개 사단은 화력이 우수한 미군측 방어 섹터보다는 한국측을 겨냥하여 칠곡, 왜관에
3개 사단으로 집중 포화를 하게 된다.
이에 대항하여 우리군은 칠곡, 왜관지구에서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이 한달여 인민군의 낙동강 도하전선을
방어하였다. 당시 우리 군엔 탱크라는건 한대도 없었고 미군의 캘리중령의 전차부대의 지원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칠곡, 왜관의 전선이 고착상태에 놓이자 인민군은 영천쪽으로 총구 방향을 돌랴 당시 그 유명한 한신장군도
연대장으로 죽다 살았다 한다.
이렇게 영천이 노출되면서 대구는 적진하 일보 직전에 놓이게 되고, 대구 주둔의 각군 사령부들은 작전 반경이
좁아지자 이를 구실로 일본으로 이전 계획등,,
일본으로 각 사령부가 이전하고 쥐 꼬리같은 부산도 함락된다면 그 후에도 전쟁을 계속할런지??
이런 의구심으로 본다면 마치 이것은 후일 사이공 함락때의 예에서보는듯한 한국 함락시 준비인듯도,,,
이때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우리는 죽어도 한국을 안 떠난다고 천명하고 전쟁을 하지만 맥아더는 워커를 몹시
싫어했다.
한국주둔 워커 중장은 2차대전에 이름을 날린 패튼 대전차 군단의 사단장으로 패튼장군처럼 시원한 면모에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맥아더의 인물이 아니기에 거리감이 있었는지 몰라도 맥아더의 성격엔 그의 부관이었던
아이젠하워를 대하는 투의 일화를 연상해 볼 수 있다.
당시 워커 장군은 유엔군 병력 증강을 요구했으며 유엔군엔 미군이 증파되며 멕아더는 워커장군에게 이 병사들은
실전전투에 참가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실제 전투에 참가치 않는 병사라.. 우리가 보기에도 당혹스런
명령이다.
만약 앞으로의 인천상륙작전시 일시에 공격하려는 준비였슬까?? 만약, 그런 병력이라면 뭐하러 서둘러 투여
했슬까?? 이 절박한 순간에 쓸 수없는 후방 군대라니...
또한 맥아더는 자기를 찍는 사진까지도 검열을 철저히 하였고, 우리는 그의 특유의 인상과 맥아더 썬그라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모든것은 어쩌면 국민의 지지와 병사들의 기억에도 호감을 가지는 전략적 이득이 있는 것이라 그렇게 비판할
것은 아닐것이지만 썬그라스는 필요시가 있겠지만 일상에서 군율에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과 그 이후에 대한 나의 생각.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판단에 승률이 5천분의 1밖에 안된다고 워싱턴도 반대하며 군산이나 원산등의 상륙작전을
타진했지만 맥아더는 수도 서울의 회복이란 명제아래 전사에도 길이 남을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한국군 병사의 칠미도 등대를 접수하고 인천 주변엔 무수한 폭탄을 떨구며 월미도에 상륙하였다.
이때까지 군사전문가들의 기억속엔 2차 대전시 노르망디 상륙을 기억할 것이다. 노르망디 해안에 공수부대의
낙하산 투여 6천명중 3천명이상이 제자리에서 죽었던 기억이 상륙이란 작전에 이들의 머리를 뒤 흔들고 있었슬
것이다.
상륙작전이란 이만큼 힘든 것이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며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여 김포비행장을 접수하고
청와대에 태극기를 꽂기에 이르며 서울 탈환의 9,28 서울 수복을 맞이한다.
전장에선 다른게 없다. 승리만이 최고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금 낙동강 전선으로 돌아가 보면 맥아더는 이 치열한 전투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증강
병사를 전투에 참가치 말라고 아꼈던 것일가?? 그렇다면,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에 최소한의 유지만 원했던 것은
아닐까??
왜냐면 낙동강 전선에서 승리하고 육로로 서울 수복에 이른다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구상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인천상륙작전의 최대의 효과를 보기 위해선 인민군이 낙동강에 골몰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일까??
당시 모택동은 북한 참모진에게 낙동강 전선에서 중요한 것은 상륙작전의 기습을 감행할 우려가 있어, 인천등의
허리를 찔릴 허가 있으니 후방부대를 빼지 말라고 충고하였건만 인민군으로 볼때는 낙동강만 건너면 눈앞이 이제
석자쯤 남한 함락이 경각이란 생각에 후방부대고 본방부대고 모두 낙동강에 투입할 수 밖에 없는 욕심이었슬
것이다.
이제 맥아더의 또 하나의 문제는 그 어려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며 서울 수복으로 후방 보급로 차단아래 칠곡,
왜관엔 B29기로 융단폭격을 가해서 인민군 3개 사단의 태반을 죽음으로 내 몰고 서울로 진격에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며 왜관의 다부동에서 수원까지 8시간에 공격하며 올라가는세계 전사에 유래가 없는 진 기록도 남겼다.,
이것은 즉 후미가 진공에 가까운 인민군들의 수적인 한계를 의미한다. 이리하여 연합군은 38선에 다다르자 미군은
주춤거렸다. 이 선이 얄타회담에서 미,소가 남,북한을 분리하여 관리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백선엽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38선을 넘어 북괴군 섬멸과 한반도 통일의 염원을 달성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아마 이런 생각은 모든 국민이 동조할 수 있는 국민적 정서였으리라.
그래서 미군측의 동조를 구하고 국군은 제일 먼저 38선을 넘어 북으로,,,
평양을 확보하고 청천강을 건너고 적유령 아래 운산까지에 이르렀다. 이제 고개너머의 수풍댐을 접수하면 더
이상도 없는 한반도 끝가지인 통일인데..
국군은 영변을 지나 운산에 이르는데, 도로엔 피난민도 인적도 없는 이상한 분위기에 중공군 한명을 포로로
잡아 백선엽 장군이 직접 심문하여 보니, 이 포로는 장개석의 국민군이 포로로 홍군으로 편입되어 남부 광동에서
10월에 북한으로 넘어 왔다고 한다.
광동에서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10월에 북한에 잠입한 중공군이라면, 모택동은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예견했고
미국이 상륙작전에 성공하자 북한은 쑥대밭이 되라란 겉도 잘알고 있었던듯, 곧바로 중공군이 출동해야 10월
중으로 북한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북한의 지원요청 이전에 모택동은 이미 6,25에 개입하고 북한이 평화통일 되기 이전에 한반도의 마지막
땅이라도 버팀목을 마련한 것이다.
모택동은 10월중으로 중공군 대 부대를 한반도에 잠적시킨것은, 만약 한반도가 통일이 되고나서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개입했다면 이것은 국제전 양상이기에 모택동은 빠른 선택을 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 10월엔 우리는 평양을 접수하고 마치 통일이나 되는 듯이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였고, 또한
맥아더도 평양을 방문하였다.
북한이 남침하였는데 우리의 힘이 더 세다면 북한의 공산당을 밀어버리고 통일을한들 누가 뭐라 그러겠는가??
대통령이 평양 주민들의 환영도 받고 북진하는 국군에 사기도 진작시키며,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전선에서
한 달내로 한반도 통일로 가는 전세에 누가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맥아더의 평양 시찰은 좀 유감인듯,
그는 이 전쟁의 유엔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쟁지역 어느곳이나 찾아가 볼 수도 있지만, 미,소의 얄타 13차 회담의
마무리에 소련을 연합국에 가담시키며 38선 이북은 소련이 관장한다는 합의는 당사국도 아닌 미,소 그들끼리의
약속이지만 인민군의 남침은 도발이지만, 만약 6,25전쟁에 승리하며 한반도는 하나로 소련의 북한 관장의 콧김이
없어진다면 그들은 가만히 있슬까?
맥아더는 최소한 이 부분에 본국의 의사와 또한 스스로의 고민이 있었어야 한다.
맥아더는 최고사령관으로서 그 짐을 벗을 수 없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으로 그의 전술등의 탁월성을 인증 받지만, 150만 중공군이 추위를 무릎쓰고 땅개미처럼
달려붙는 것은 인천상륙의 성공으로 38선을 넘어 질풍처럼 진격하는 유엔군에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북한의 앞막이
한번 해주는 댓가로 수직적 종속관계를 가지는 이득과, 이 보다 중요한 계산은 중공은 자기 영토 변방에 자유진영
보다는 공산국의 울타리라 더욱 경제적이고 효과적이란 판단 때문이었슬까??
오히려 이 보다는 단순하게 북한이 무너지면 다음은 일제가 삼켰던 만주벌판이 문제가 되는, 즉 중국내 필드에
불꽃이 번질까 하는 의구심에 총알 하나에 머리 하나 들여박는 인해전술로 밀고 내린것이 타당한 논리일 것이다.
중공군은 6,25에 150만명이 출동하였다.
그들의 게임은 삼국지를 방불케 하는 것이 아니라 삼국지의 전투 그 자체였다. 아니 그 이상으로 인해전술이란
용어도 만들었다.
여기에 대항하여 맥아더는 원폭으로 평정하려 노력하였다.
이에 본국의 워싱턴에선 트루먼이 그를 해임했고 다음으로 유엔군 사령관엔 클라크 대장이 임명되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이 부분을 못내 아쉬워 한다.
그러나 이 부분도 후세백작은 다른 생각을 한다.
당시 맥아더는 만주에 핵폭탄을 투하하려 하였으나, 만약 투하하였다면 중공이 항복하였슬까??
50Kg의 원폭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떨어지며 이 원폭으로 20만명이 죽었다. 당시 이 원폭은 지상 500m에서
터져서 최대반경의 최대효과를 낸 성공적 투하였다.
또한 나가사끼엔 원폭투하 1차 지점이 아니었다.
인근 고쿠엔이 대상목표였으나 그날 시계등이 좋치않게 되자 팻맨이라 불리우는 원폭을 수중 바다에 밀어넣고
귀향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조종사는 편대를 잃어버리고 홀로 나가사끼에 투하하는등 원폭투하에도 큰 부담감이
따르는 것이다.
가량 원폭 하나로 30만을 죽일 수 있다면 일본에 6개도시 투하의 예정처럼 제2, 제3의 원폭을 투하한다고 중공이
항복했겠는가??
이 물음에 답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원폭을 그리 간단하게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역사에 큰 우를 만드는
것이다.
미국이 일본에 원폭투하시엔 전 일본 70개 도시를 6개월간 융단폭격으로 폐허시켰는데도 일본은 항복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본군은 대동아전쟁에 패하고 만주에 약 500만이 존재할뿐인데 이것이 미국으로선 눈에 가시가
되는 것이다.
5월에 독일도 패망하였지만, 작은 고추 대가리 일본은 항복하라는 외교적 루트에도 아랑곳하지 않자 미국은 얄타
회담에서 소련을 연합국으로 들러리 세우고 또한 소련에 핵폭탄의 개발에 성공헸다는 점도 알린다.
아마도 비밀보다는 핵의 사용에 세계 공론화 인식이었던 듯 하다.
이렇게 패망에서도 굽히지 않는 일본에 2차대전 고리를 끊기 위해서 필요악으로 원폭을 사용했다면, 맥아더의
만주에 핵 투하계획이란 이 일본 투하시와는 형평성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점이다.
당시 일본은 크게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듯이 독일, 이태리, 일본 이 세 나라의 전제 군국주의의 야욕는 세계 평화
질서를 깨트리고 특히 일본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버마등 아지사 존의 모든 국가들에
원흉으로 이의 제거가 국제적 딜레머로 빠지는 것에대한 반격이라면 만주에 핵 투하계획이란 우리나라 한 국가의
내란격인 6,25이지 이걸 쫘똥시끼들은 한국전쟁이라고 ,,,
{한국전쟁이라 표현한다면 6,25당시 북괴가 한 국가라고 격상시키는 아주 나쁜 발상이다)
핵 폭탄을 한 국가의 내란격에서 사용한다면, 그래서 만주에 미국이 핵 폭탄을 투하했다면 이후 세계의 역사는
지금으로선 추정이 불가능한 역사로 변하였으리라, 그것의 최소한의 이해는 지금 북의 핵개발에 대해 I,A,E,A나
미국은 코도 벙긋해선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것는 선행으로 마음대로 사용하고 후발 주자에게 개발을 하지 말라고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미 대통령트르먼은 루즈벨트 대통령만큼이나 명석한 위인이기에 그는 일본에는 핵을 사용하였지만 그의
이름으로 내란격 한 국가내의 전쟁에 핵을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슬 것이다.
핵의 사용이란 국제적 전쟁을 야기하는 시발로 생각하고 그 진원지 맥아더를 본국 송환, 제대시킨 것이다.
우리는 트루먼은 비겁자이고 맥아더의 만주 핵 투하계획에 미련을 가지는 것은 맥아더는 역사에 대역죄인이 되던
말던 우리에게 득만 생각하는 이율배반적 생각이지만 그것은 위의 설명대로 이 후세백작이 미국대통령이었더라도
만주 핵 폭탄 투하는 승인불가란 점이다.
그렇다면 맥아더는 용장(勇將)이었으나 지장(知將)은 못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에 맥아더는 그의 사색적 한계가 없음을 이 후세는 지적하고 싶다. 왜냐면 그의 유엔군 총 사령관으로서
더욱 명철한 판단을 하였더라면 이 땅에 중공군의 발자국이 없었슬 것이며 그러기에 고통스럽고 한 많은 이념적
전쟁에서 소모적 전쟁을 덜어줄 수도 있지 않았슬까 하는 생각이다.
위의 이야기에서 보면 맥아더의 판단과 생각보다는 모택동의 판단과 기회의 타이밍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것으로
본다면 맥아더는 모택동의 한 수 아래임이라 생각한다.
어쩜 인천상륙작전은 이에 대응하는 인해전술이란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맥아더와 모택동의 대결이란 점입니다.
이 두사람은 6,25에 피할수 없는 숙명론을 가지고 잇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맥아더 대신 이 후세백작이 유엔군 사령관이라면 다른 관점에서 6,25를 파악하고 다른 양상의 전쟁으로
6,25를 치렀슬 것이란 생각이다.
이 후세백작의 생각이 잘못일까요??
(여기서 만투 핵폭탄 투하계획은 당시로선 비밀이라 어떤 양상인지는 잘 모르지만 핵 폭탄 투하에대한 일반론적인
경우에 파생되는 문젯점을 이야기 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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