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주한 미 8군 사령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후세백작 13, 06, 23
그리고 후임에 매쉬 리지웨이 중장으로 강력한 사슬작전으로 중공군의 침공을 막아내고 적들을 38선 북방으로
구축(驅逐)한 일등 공신이며 그가 유엔군 총 사령관으로 영전되자 그의 후임엔 밴플리트 장군으로 그는 어느
사령관보다 한국을 이해하려 애쓴 사령관이다. 맥아더와 리지웨이, 밴플리트는 6·25전쟁에서 큰 축을 담당했던
미군 지휘관들이다. 모두 명장(名將)임에 분명하다. 이들을 빼놓고서는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워커 사령관은 1950년 10월 2일 유엔군이 38선을 통과 북진하자 중공군은 곧바로 한국전쟁에 개입했으며,
중공군에 밀려 미 24사단이 후퇴하며 고전을 면치 못할때. 그의 아들 샘 워커 대위가 후퇴 작전중 큰 전공을
세웠는데, 이는 끝없는 추위와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모든 전선은 계속 패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모처럼 아군이 큰 승리를 했고 그 주역이 아들 샘 워커 중대장이라니 워커 사령관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본국으로부터 수여되는 은성 무공훈장을 직접 아들의 가슴에 달아주기 위해 의정부로 가서 신산리 감악산 부근의
영국군 부대를 가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그 적성계곡엔 당시 영국군 1개 대대가 중공군에 전멸하고 지금은 영국군
위령비가 있지요.
워커 사령관은 사망전에 유엔군 극동사령관 멕아더가 워커중장을 대장으로 정부에 상신 중이었으며, 그래서 그에게
별 네개의 대장진급이 추서되었으며 이로서 미국 최초의 부자의 육군 대장이 탄생되었으며 아들 샘워커 대장은 미
육군의 엘리트로 차기 육군 참모총장도 유력시 되었는데 카터의 주한 미군 철군론에 반대하다 예편 되었다 한다.
우리는 주한 미군의 철수에 반대한 미군 참모장 싱글로브 소장의 예편만 알았지 카터의 정책에 반대했던 샘 워커
대장은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정면으로 반박했던 싱글로브 소장은 카터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에 명하여 본국
소환으로 예편되었지만 그의 월남전의 야전군으로서의 경험속에 주한 미군 철군론에 반대한 진정한 용기에 감사한다.
또한 76년 뜨겁던 여름날 판문점 도끼만행사건때 대통령의 직접 명령으로 공수특전단의 곧바로 들어가 나무를 베어
버렸지만 이때 미군 사령관은 일본가 있고 부사령관은 남부 순찰로 부재중 싱글로부 소장이 직접 상황을 지휘하고
즉각 오끼나와와 필리핀의 공군기를 불러들였고 미 본토의 아이다호州에 있는 폭격기를 공중급유를 다섯번이나 시키며
한번도 쉬지않고 촌각을 다투어 대구 비행장으로 불렀다 한다.
또한 미사일도 전진배치시키는등 일전불사의 태세를 갖추었다.
김일성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도끼만행사건에 대하여 사과했다 한다.
북한은 지금도 햇볕정책보다 이러한 강성 스타일의 정책이 주효하리라.
나의 글중에 일본이 2차대전에 패망하고 항복할때 맥아더는 일본천왕의 불알을 거세 시켰어야 하듯이 이때 야욕의 괴수
김일성의 혀를 한치 잘라 받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여기서 수다로 戰史를 한술 더 이해하자면 추위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후 38선 앞에서 미군은 주춤거릴때 이승만의
종용을 받고 진격하게 되었다.(최근 밝혀짐) 이때 국군이나 미군도 겨울 장구를 제대로 준비도 안한채 밀고 올라가게되어
추위에 고전하였는데 50년 그해는 더욱 추웠다 한다.
또한 1950년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하기 위해 대만해협으로 미 해군 제7함대를 급파하였고,
같은 해 8월 4일, 마오쩌둥은 소련정치국에 중화인민의용군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전쟁에 개입할 것임을 보고하였다.
8월 20일 저우언라이 (周恩來)총리는 UN에 "한국은 중국의 이웃나라이므로...중국인은 한반도 상황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내용을 통보하였던 것이며 1950년 10월 8일,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군 다음 날, 마오쩌둥(毛擇東)은 중화인민해방군
북방지역군에게 중화인민의용군 휘하로 편입하여 한국을 침공할 것을 명령하였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이 개입하기에는
이미 늦어 침공가능성이 적다고 의사를 밝혔고 중공군은 만주에 30만, 압록강변에 10~12만명의 군이 포진해 있으며
그중 반 정도가 압록강을 넘어 남진할 수도 있으나 "공중지원 없이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UN군은 중공군 동계작전에 압도되어 평양과 장전호를 내주고 미 해병 1사단은 흥남철수를 하기에 이른다.
이때 장전호에 고립되 추위에 동사당하는 미군병사, 내 아들을 구출하라고 미국의 모든 신문들은 약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내 아들 구하라고는 기사로 연일 대서특필 되었다.
미국의 시각은 이러한 때에 또다시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 빼앗기게 되었다.
이렇듯 한국전쟁에 미국의 정가는 물론 군부도 미국 시민들도 크나 큰 걸림돌로 등장하게 되었다.
게다가 미8군의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 군의 사기저하를 불러오게 되고 이러한 차질에 맥아더 장군은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후 이로 인해 발생한 방사선 낙진지역을 중공군의 보급로 차단에 이용할 것을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곧 워커장군의 대체로 투입된 카리스마적인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후속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유혈이 낭자했던
미8군은 곧 다시 회생하기 시작했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재 수복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 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다시 북진했으나 대대적인 공격이
없는 참호를 중심으로 한 진지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맥아더 후임으로 리지웨이 사령관이 영전하자 그의 후임엔 밴 플리트 사령관이 부임하였고 그의 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2세는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 아버자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그는 B-29 폭격기를
타고 전북 군산의 옥구 비행장에서 발진,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 야간 폭격을 한 뒤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52년 4월의 폭격 작전에서 행방불명이 됐다. 이로서 밴 플리트의 외아들 지미 중위는 한국전에서 산화하였던 것이다.
위의 장군들은 한국전쟁에 특별한 인연을 맺은것은 父子간이 한국전쟁에 함께 참전했으며 죽음을 넘어선 노블리스오브제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중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미 34대 대통령 선거의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걸림돌이 생긴것은 그의 아들 죤 아이젠하워는 아버지의 후광이 거셌지만 그에 편승하지 않고
나름대로 군인의 영예를 쌓겠다는 마음이 강해서 1952년 한국전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의 영웅답게 아들의 입장을 받아들였다.그러나 강한 전제조건이 붙었다. "절대
적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죽거나 부상하는 일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북한군이나 중공군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아들에게 “네가 포로로 잡히면 나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 말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한국 전선으로 향하려는 아들에게 ‘적군에 잡히는 상황이 생긴다면 차라리 자살을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셈이다.
우리네 같으면 그의 아들은 보안대쯤에서 무소태평 할텐데...빽도 않쓰고 대통령의 아들로서 전장터에서 불리하면
먼저 죽으라 하니..거참,,,
한국전에 아들 죤 소령을 찾아온 미 대통령 당선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한국에서 전선을 지휘하는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아이젠하워 당선자의 방한 공식 일정을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 한국 주둔 미3사단 일선 대대장으로 근무중인 존 아이젠하워의 보직 이동을 단행한 이유는
미 대통령 당선자의 아들이 적군에 포로로 잡힌다면 미국의 국가 이익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였던
것이다.
전선에 보낸 아버지였다. 말하자면 서로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들을 잃은 밴플리트 장군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아들에 관한 보고를 했고, 대통령 당선자는 공식적으로
“단지 포로로만 잡히지 않는 것이 내 희망”이라는 말을 건넸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의 아들 빌 대위는 일반 소총 중대장을 지원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3차례나 부상을 입고 결국
휴유증으로 사망한다.
이렇듯 미 장성의 아들 142명이 6,25에 참전하여 35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오히려 적군인 마오쩌뚱의 아들 마오안잉(毛安英)이 자원 입대하자 새 어머니인 강청이 만류하자 마오쩌뚱은
"마오(내가), 아들의 죽음이 무서우면 누가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겠는가?"
마오안잉의 엄마는 국민당에 붙잡혀 "남편을 배반하라"고 권유받았으나 끝까지 배신을 하지않은 부인의 자식이라
마오는 끔찍히나 사랑했었는데 1950년 11,25일 중국군 총 사령부에 소이탄 100여발이 떨어지며 사망하였다.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거론되자 마오는 딱 잘라 말했다. "중국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것이니 그냥 조선반도에
두라" 하였다.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자기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는 아주 많습니다"
벤플리트 사령관은 외아들 지미중위를 잃고 말 하였답니다
" 모든 부모님은 저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벗을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비록 마오는 적군 중국의 주석으로 남의 전쟁에 그의 자식을 내려놓는,또한 자식으로서 더욱 솔선수범한 모안영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아름다고 고귀한 희생정신이다.
미군 고위급 지휘관들은 그랬다. 늘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을 기울였고, 개인과 자신의 가족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정신에 충실했다. 나는 영문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나중에 그런
곡절을 알고 난 뒤에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미국 고위층 인사들의 정신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
-----------------------------<이상은 백선엽 장군의 이야기 중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