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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간성(干城)

[ 6,25戰史중 위기의 순간들과 월정사 소각명령의 배경]--- 1부

 

 

                 [ 6,25戰史중 위기의 순간들과 월정사 소각명령의 배경]

 

 

                                                                                                          후세백작 2013.06.25 23:24

 

6,25 전사를 읽게된 동기는 월정사 팔각탑의 제 이야기중에 월정사를 소각하라 명령내린 워커 주한 미 8군 사령관의 명령은 정당했슬까?? 왜 그런 명령을 내려야 했슬까 하는 금궁증에서였다.

 

6,25를 한줄의 글로 다 쓰진 못하리라, 그러나 6,25의 전사를 보면 국운의 사활이 걸린 아찔한 가장 중요한 부분 몇곳과 오대전투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만 발췌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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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사중 인민군이 속전을 못한 이유들,,,>

 

 

***서울 함락과 한강 철교 폭파***                                                                           

 

 6,25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초기에 인민군과 부딪쳐 보지도 않고 겁먹은 육본이 서울을 철수하고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파하여 서울의 피난민은 말이 묶였고 또한 국군도 중장비, 야포, 트럭, 실탄등을 나두고 한강을 건너 철수 했던점이 치명적 실을 가져왔던 점과 인민군이 속전 전투를 하였지만  의정부에서 서울 진입시 교통체증으로 하루 반 걸린 점과 서울서 3일간 지체했던 점, 이 부분에 추측도 많치만 다른 것이 아니다.

 

적군의 탱크 60여대는 개성- 문산-불광동이 아니라  사미천- 장파리를 거쳐 송추로 해서 창동에 들어왔다. 이것이 문산, 불광동 루트보다 주력부대이다.

 

이미 창동의 국군 조그만 부대는 철수한 상태이고 그들도 서울 진입에 앞서 국군의 반응을 몰라 쉬운말로 망좀보다가 다음날 오후 미아리 고개를 넘어 혜화동 로타리까지 첨병 탱크 3대가 서울의 반응을 보려고 순찰하였고, 이에 어떤 제제도 없이 무사창동으로 복귀하였는데 이날 6,27일 탱크소리에 놀란 시민들은 인민군이 서울에도 쳐 내려 왔다고 개나리 봇짐에 니쿠사쿠 (천박한 일본어를 써서 상스럽지만 당시의 감정을 살리기 위하여,,,)메고 한강넘어 남으로 무수한 피난행렬이 ...)

 

여기서 우리 국군은 탱크 한대도 없엇고 이 인민군 탱크를 본 시민들은 전쟁낫다더니 정말 무시무시한 탱크에 경악을 금치 못했슬 것이고, 인민군이 처 내려왔다는 소문은 꼬리를 물며 피난가야 산다는 유언비어도 확산되었슬 듯,,, 그래서 그길로 갑작스레 밤새도록 서울을 떠나는 피난행렬이 발생하였는데 한강 인도교에서 피난민 행렬에 교량 소통이 어려워졌다.

 

이미 위정자들은 꽁지를 내리고 서울을 떠나나 끝까지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은 육본을 안양으로 이전하

28일 새벽 한시 반쯤 한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인 한강교를 넘어 노량진쯤 내려가며 무전으로 폭파명령을 내리는데.... 이미 그날 오전 공병대는 다리 아래에 다아너마이트를 장착하고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 피난행렬은 다리를 꽉 메운 상태인데 가두방송은 시설도 없고 대피하라는 육성도 없이 그냥 그대로 무전을

받자마자 보턴을 눌러 한강 인도교 두번째 판은 폭파되었다.

그런데,, 앗뿔사,,,다리위엔 수많은 피난민 행렬이 서로 밀려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대피시키거나 그런 행동의 노력도 없이 시민들이야 피난을 가든 맞아죽든 상관 없었던듯,,,

 

가두방송도 없었고 대피시킬 담당자도 없었던듯,,, 이것은 마치 인천상륙작전에 허리가 뿌러진줄도 모르고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들은 전부 죽는것도 모르고 발악을 하며 덤벼들어 예정대로 서울로 진입이 어렵게 되자 인천상륙병들이 고립이 될까봐 멕아더는 다시금 군산 상륙을 감행할 생각을 하였는데,,, 이때는 이렇게 통신상의 문제가, 문제가 되었던 듯 하다.

 

상판 하나에 사람이 꽉 들어찬다면 어림짐작으로 약 천명은 족히 그대로 떨어지고 아래 인민군들의 사진에서처럼 옆의 상판에

파편이,,, 또한 성북동의 부자들의 검은 세단들도 파되었다. 그런 영문도 모르고 무수한 피난행렬은 앞으로 밀려서  폭파된 다리에 밀려 떨어지고 검은 세단들도 밀려 다이빙까지 하였던 것이다.

 

차량들은 전시라 차출 당하였다지만 부자들의 검은 세단은 이때 무수히 밀려 떨어져 두달에 한번 무학여고뒤 공터 철조망을 치우고 면허시험에 합격한 운전수가 해방후엔 자가용들이 없어 실직상태였다고 하더라.

 

(이 부분은 책의 글이 아니라 나의 노친 두분의 증언임)

6-2.jpg

[ 북한 선전 영상에 촬영된 폭파 된 한강 인도교의 처참한 잔해 ]

 

이 한강교 폭파로 인해서 우리는 크나큰 손실을 입는데.... 서울 주둔의 모든 부대는 중장비. 아포, 트럭. 실탄등을 버려둔채로 개인화기 정도만 가지고 한강을 겨우 건넜기에 전시의 군사적 손실이 그냥 그대로 낙동강까지 내려 밀리는 손해를 가져온 것이다.

 

↑폭파전의한강철교

 

↑폭파중인 한강철교(6월 28일 새벽 2시 15분경)

 

↑폭파된 한강철교

 

**** 트르먼의 유엔군 창설***                                                                                   

 

6,25 전사를 통해 볼때 속전속결의 인민군이 승기를 다 잡고도 놓친 몇가지 이유는??

 

그때까지 국군의 정세를 살피다가  서울 점령이 3일 늦어졌고, 또한  또한 휴가중이던 트루먼 미 대통령은 AP통신의 6,25전쟁의발발을 접하고 곧바로 백악관으로 귀대하여  “북한의 전면남침은 소련이 미국에 대해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침략을 방치한다면 공산당의 마수는 아시아 전역으로 미치게 되고, 나아가 제3차 세계대전이 유발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을 지켜내는데 미국이 적극 나서야 한다.”며 빠르고 빠르고 전폭적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그가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곰곰히 생각한 것은 아마도 그해 2월에 루즈벨트 대통령 당시 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애치슨 라인의 제한을 염두에 둔 듯하다.

애치슨 라인이란 우리가 잘 알듯 소련과 중공의 공산당에 대항하여 자유진영의 담장을 치는 것이란 점으로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과 필리핀으로 연결되는 자유수호의 전선이란 것으로 쉽게 이해하자면 미국의 앞 마당을 그린 것이란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것은 애친슨 라인 성명의 두번째 조항에 이 애치슨 라인에 제외된 국가가( 한국, 대만, 인도네시아등,,,)공산주의의 침공을 받을시 자위권을 발동하여 스스로 싸우고 유엔에 협력을 구하라는 것이 두번째 조항의 문서이다.

 

트루먼은 루즈밸트 유고시 부통령에서  잔여 기간을 대통령이 되었기에 이러한 점을 간파하였으리라. 만약 미국이 6,25에 파병된다면 이는 시민의 반대 여론에 부딪힐게 뻔하고 더군다나 영국의 6,25에 관여하지 말라는 조언에도 이러한 반발의 벽에 부딪힐게 뻔한 상황이라..

 

여기서 영국의 수상은 영국 국민 누구나가 사랑하는 처칠경이 물러나고, 영국국민들의 전쟁이후( 5월에 독일 패망으로 연합국 승리를 말함) 경재 재건을 위해 보수당보다는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을 선출 하였다)

애틀리 내각은 미국에 한국전에 개입에 발을 빼라고 충고들 하였다. 그러기이 이 충고 이전에 트루먼은 이런 시각을 간파한듯 유엔군을 창설하고 유엔군 창설중이 사전에 미 24사단이 6,25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명석한 트루먼은 미군이 아닌 유엔군으로, 애치슨 아인의 성명서에 위약이 않되게 하는 방법으로 유엔군 창설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6,25에서 잘 모르면서도 투르먼은 6,25에 적극적이지 않는 이기적 태도를 보인것처럼 느꼈었다. 그러나 트루먼의 빠르고,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낙동강 전선은 하루 아침에 밀려서 무너졌슬거라는 가정속에 현실이...

( 휴가지 고향에서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곰곰히 생각하고 그제서야 쏘련을 이해하였던듯,,, 그러나 그의 재빠른 행보가 인민군의 속전에서 20만 인민군의 공격에 숫자적으로 1;7의 열세이지만 우리의 무기로는 쏘련제 탱크를 잡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부산까지 함락이란 어찌보면 초 읽기의 경각에 재빠르게 대응한 트르먼이 한국을 구하였던 것이다)

 

트루먼은 곧바로 유엔군을 창설하며, 창설도중인 전쟁 발발 5일만에 한국전에 이미 최초로 미군 1개 연대가 전투를 하게 되었고  또한 미 24사단이 일본서 너와 패전하면서도 대전방어에서 3일을 지연시킨게 낙동강 방어의 준비의 타임을 맞추었던 것이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에 트루먼의 재빠른 행동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패망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6,25발발후 아군은 후퇴하여 우리가 매일 이야기하는 낙동강 오리알만 남았다.

적은 이미 포항까지 내리밀고 대구가 적의 코아래 놓였고 서부에선 진주를 함락하고 마산진입이 촌각에...이때 대구엔 미군 사령부, 미 각 군단 사령부, 한국군 사령부, 사단 사령부들 ... 옹기종기 다 모여서 서로 작전을 펼수있는 반경이 좁아서  하마터면 미 8군이 일본서 한국으로 오자마자 전쟁수행의 반경이 좁아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는 소문들도....

 

 

***워커라인, 낙동강 방어선***                                                                                    

 

이때 미군의 지원으로  겨우 낙동강 방어선에서 힘겹게 진격하는...

낙동강 방어선에 미군과 전군이 투입되고 1사단 섹터에 백선엽 사단장이 지형정찰을 하던중 (당시 한국군은 지도 한장 없었다 한다. 그 이유는 일본어 지도를 넘겨받아 백 장군이 현 외한은행 본점지하 측지부대를 만들었는데 6,25 서울 함락과 동시 급히 수하느라 지도한장 못꺼내서 한국군은 지도한장없이 전투를 하던중이라) 다부동이란 동리를 지나게 되었다. 이름이 이상해 알아보니 "다복하고 풍요로운 마음"이란 뜻이었다.

 

백 장군은 이곳이 빈촌이지만 왠지 포근하고 길한 느낌에이곳에 진을 치고 대구를 잇는 낙동강을 사수하리라 마음먹었다 한다.  북의 화력앞에 힘없이 무너진 중부전선과는 달리 왜관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저지의 우리 전선의 마지막 보루라는 의미에 끝까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50년  8월 이곳만 뚫으면 적화통일이란 야욕이 눈앞어 어른거렸슬 적 3개 사단을 끝까지 방어 하였다.

 

다부동의 1사단의 견고한 방어에 적 3개사단은 영천등 다른곳으로 분리하여 계획을 이전하는 실수를 범하였다.이로서 한국 1사단의 수훈 갑으로 낙동강 방어와 북으로 진격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때 그의(백선엽 장군)의 수기중 한토막을 정리하면...미군 전차부대와 공조하여 연합공격을 하기로 하였는데 지친 국군이 제때에 전투를 하지않자 전투부대장의 모멸에 백선엽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마치 반공영화의 한토막같은 이야기를 한다.

 

내가 앞장서 나갈테니 나를 따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대한 남아로 싸우자.

내가 앞장서 나갈테니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만약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은 나를 쏘고 너희가 물러서면 내가 너희를 쏘겠다.

나는 권총을 세워들고 장병들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갔다.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우렁차게 함성을 지르며 내 뒤를 따랐다.

한번 기세가 오른 병사들은 거짓말처럼 용감했다.

어렵지 않게 고지를 탈환했다.

<다부동전선의 유학산 고지탈환시>

 

이곳에 처음으로 전차전이 등장했으며 이 일이 있은후 미 25사단의 마이켈리슨( 후일 주한 미 사령관 역임) 전차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다부동 전투는 인민군을 쳐 부셨다 한다.(마이켈리슨은 키크고 미남의 멋진 중령이었다)

 

그 더운 8월 한달간의 다부동전투는 세계전사에 빛날 방어전으로 대구를 목전에 둔 인민군의 패배였다.

워커 주한 미 8군 사령관은  2차대전 당시 유명한 패튼대전차군단 휘하에서 군단장으로 독일군의 집중공략의 벌지전투에 지원한 장군으로서도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의 승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전쟁 초기에 쌍방의 주 관심은 부산이었다.  부산은 당시 한반도 유일의 물류거점으로 대한민국을 지탱하던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사수하여야 했고,  반대로 북괴가 부산을 점령한다는 것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6,25 발발후 한달만에 낙동강전선에서 북괴의 목표는 오로지 부산의 함락이었다. 

             

                 18-2.jpg

       [부산이 목전에 있다고 독려하는 북괴의 선전포스터 ]

 

또한 이때 곧 대구를 함락하고 부산까지도 밀고가면 곧 승리는 눈 앞에 다가왔다는  김일성의 메세지를 들고 모택동에게 찾아간

북한군에게 모택동은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한다.

 

30일간 공격에 무너지지않는 다부동전투를 보면 마군은 계속적인 지원을 할 것이며 또한 우회하여 인천이나 남포로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으니 인천주둔의 예비병력을 아끼라고 모택동은 조언하였지만 힘에부친 인민군은 인천주둔의 예비사단도 전장으로 투입하고 인천은 공백상태에서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이때 프리킷함에서 인천에 발을 내딛는 맥아더는 주변 40Km반경에 공중폭격을 가해놓아서 인민군이 얼신도 못하게 만들고 상륙작전을 성공하며 인민군들의 공세는 곧바로 허리가 잘리고 수세에 몰려 후퇴를 하며 9,28 서울 수복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낙동강 전선에 미군은 주로 서부를 담당하게 되었고 요즘 불거지는 노곡리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잇다.

하지만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대전전투에서 패하며 홀로 길을 잃고 대구까지 찾아 가는도중 35일간 산속을 헤메다가 민간인들에게  세번 도움을 청하였던바 냉소적이였고 마지막 세번째 민간인은 인민군에게 신고하고 몇푼 현상금을 타먹어 그는 포로가 되어 3년 고생을 하였다 한다.

 

당시 인민군들이 감시가 무섭다고 이렇게 부역을 하던 민간인들....

그리고도 요즘도 좌파들은 서북청년단이 민간인을 학살하였다고들 생때를 쓰는데....이렇게 한 부락이 전부 인민군에 부역자이고 동조자라면 그들 모두 처형해야함도 마땅하리라.

프랑스는 2차대전 종전후에도 나치에 협력자들을 끝까지 찾아 재판에 회부하는데 우리도 이 딘소장을 인민군에게 팔아넘긴 민간인을 끝까지 찾아 재판을 하였어야 했다.

이것이 다시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12-8.jpg

 <국군 1사단의 늠늠한 모습,,,, 북한 에미나이 동무사끼들,,, 맞짱한번 뛰어볼래...>

 

***멕아더의 인천상류작전***                                                                                        

 

 2년전인가 나는 맥아더를 싫어한다고 했다.

뭐, 요즘말로 좌빨이라던가,,, 그패들이 맥아더 깍아내리기 한다는데 나는 그들과 같은 생각은 아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참으로 위대한 승리였다.

 

하지만 그의 허세...

그리고, 6,25 초기에 낙동강 방어선(일명 워커라인)에서 하마터면 내려밀리고 낙동강 오리알 될뻔 하여도 맥아더는 워커가 싫어서 충분한 지원을 하자 않았었다 한다.. 맥아더의 이러한 편견들과 허세에 대하여 이 후세는 결국 칼을 들어야 하겠다.

<2부에서>

 

 

*** 국군의 군사작전권 소멸***                                                                                        

 

 패튼대전차군단의 장남 워커장군은 대구작전본부들이 일본으로 가서 전쟁을 하자는 의견들에 나는 한국을 떠날 수 없다. 죽어도 한국에서 죽겠다고 하던 그가 중공군 개입에 아직 38선 이남으로 내 밀리지도 않았는데 우커는 오대산 월정사 천년 고찰을 불 태우라고 명령한다...

 

아니 그 독일병장 나치들도 파리를 불 태우지는 않았는데...

가슴의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글,,

기대하시라,,, 2부에서.

 

평창중고등학교 22,25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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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만추의 가을은 조금 남았는듯,,,,,

칭구덜,,, !

블랙박스는 벌써 신호음 끊겨지는 비상상황이라,,,

만추로 가는 슬살한 가을날에 블랙박스 신호음은 뚝,, 후드득, 후드둑 다 끊어져가는 비상상황이라

낼 모레 백운대 구경가자며 조금 운동하면 뭐 혹시 블랙박스 신호음이 살아나지 않을가 하는 꽁수는 버려야 한다.

근 착각이야... 자연에 순응들 하시게나.

 

이제 할 수 있는건,,,

내간 남이든 외간 녀이든 무슨상관이라.

블랙박스 신호음은 해석 좀 해 봐야 할게 아닝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