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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기상

평창 하리 유적에서 발굴된 고인골의 그녀는 누구일까??(평창 하리 청동가 유적 - 부록 2)

평창 하리 유적에서 발굴된 고인골의 그녀는 누구일까??(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 부록 2) 

 

(이 글은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 픽션의 이야기로 사유적 사색의 가상치로 구성합니다)

 

2016년 강원 고고 연구원에 의해 평창읍 하리 240번지 일원의 석실묘 9호기중 2호분에서 古인골과 함께 매납되었던 비파형(고조선식) 청동검의 발굴되었다. 따라서 각 연구기관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바 하리 청동기 유적의 탄소 동위원소 시험결과 2,600년전의 유적, 유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일전 게시글에 하리 출토의 청동검은 비파형의 곡선이 조금 완만해지고 봉부도 작아지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하부의 검엽이 조금 작아지는 비파형 청동검으로 날씬한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청동검으로 약 2,500여년전에 오차는 100년을 넘지 않을것이란 추정치와 일치하며 이 시기는 청동기 시대이나 우리 역사에서 미루어 보면 삼국시대 이전의 고조선 시대에 해당되는 시기로 고조선의 말기의 고조산 영역은 아직 불명확하지만 우리나라 반도 전체가 고조선 시대 문화권이라 보는 해석에서 평창은 스키타이 문화권의 예맥의 후손이란 설도 가능해진다.

 

예,맥족이란 북방의 스키타이 문화의 민족으로 남하하여 춘천은 맥족, 강릉은 예족의 지역이다. 물론 고대사 연구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의 "고조선"이란 천여 페이지 책에서 보면 동예는 고조선 국가중심의 동쪽지역이란 뜻의 지명이라 하지만 한사군이 점령하기 이전에는 부여, 옥저, 동예가 존재했으며 동예는 강릉지역을 말함이다.

 

하리 유적 발굴당시 춘천 위도에서는 고인돌 90여기에 청동검  40여개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이때까지 고조선식 청동검은 국내에 47개로 북한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춘천 위도에서 발굴은 춘천지역이 과거 맥족의 부족국가가 성행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내 역사학계는 아직 고조선의 국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못 내리고 삼국시대 이전은 그저 청동기 시대, 신석기 시대로 표현하고있지만 고조선은 대략 3개 부족이 합치하는 제정일치의 국가를 말함이기에 춘천의 맥족의 부족도 고조선의 일원으로 보고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여기에 평창의 발원인 조산 태기산엔 3형제의 태기왕국의 설화가 전래되며 일부의 궁터도 확인된다. 이러한 배경이 평창에 인간의 발을 딛는 기원일지도 모른다.

 

이제 막연한 입장에서 춘천 위도와 평창 하리 출토의 고조선식 청동검의 고리를 하나 가지게 되었다. 비파형(고조선식) 검이란 돌기와 청동검 끝에는 피홈이 있는데 이는 칼을 찌르고 나서 압력의 부하를 적게하여 칼이 쉽게 빠지도록한 것등  과학이 숨어있는 검으로 펌잡이 의례용이 아닌 실전용으로 현대의 장인들에 의하면 절삭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마모된 흔적이 발견되어 의례용이 아닌 실전용이란 점이 밝혀졌다. 이러한 비파형 동검은 홍산문화 지역 단군조선의 강역, 북부여, 고구려 영토지역에서 많이 출토됩니다.

 

이제 청동검에 대한 조금의 이해를 넘어 하리 출토의 인골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하리 출토 청동기 유적의 유물들의 각 연구에서 방사선 탄소 측정결과 연대범위는 (BP)- 2590~2565년 이전의 유적으로 파악되며 피납 매장자는 키 160cm의 20대 여자로 추정된다 한다. 여자 키는 삼국시대 여러 유골에서도 145~150cm정도로 나타나기에  매장자는 10cm이상 더 큰 키에 삽자루 모양의 치아로 보면 몽골리안 계통이라 하는데 아마도 육식보단 채식위주고 턱뼈의 하악각도가 커서 턱이 넓은 외형일듯 하다

 

문제는 이렇게 장신의 여자이지만 DNA 검사등을 통해 보면 영양상태가 않좋은 것으로 나타난다 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키는 20세 전후까지 성장함에 아마도 이때까지는 건강에 문제가 없었던 듯 보입니다, 그리고 장신의 키는 유전적으로 부모도 장신일듯하며 우리말로 기골이 장대한 가계로 제사장이나 고을의 지배계급 아닌가 추정 합니다.

 

그런데 석실분에 피장자 옆에 청동검은 의도적으로 2분으로 부러뜨려 매장을 하였다 하여 연구 분석시 하나로 연결하여 잇지를 않고 그대로 나두었다는데, 청동검은 분석결과 사용 흔적이 있는 실전용의 칼이었다 하는데 국내 청동검중에는 마산에서 출토된 검이 뿌려뜨려 매장 한 것이 있으며 하리 유적의 청동검도 그러하다.

 

대게는 매장시 피납자의 유품을 매장하지만 왜 하리 유적에서 청동검을 뿌려뜨려 매장 했는가 하는 의문에 매장자는 20대로 추정되는 여자로 건강이 좋치 않았다면 이는 단순히 않 좋은 것이 아니라 뼈를 확인하기에 오랜시간 안좋을듯 했는데, 그러기에  사용흔적이 있는 청동검은 그녀가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좀 어려운 이해가 남는다.

 

가령 청동검은 그녀의 아버지나 남편의 것은 아니었슬까요?? 본 동검은 사용 흔적이 있다 하는데 청동검은 구리, 주석, 납의 합금으로 납은 200도C에 녹으며 구리는 800도C에 녹는 도자기 보다 적은 온도에서 만들어 지기에 칼을 갈아서 사용하진 못하는 것으로 이미 용도가 폐기되고 실전용으로는 용도가 폐기된 청동검이지만 당시로서는 귀한 보물이기에 사랑하는 아내에게나 딸에게 검이 아니기에 이분으로 뿌러뜨려서 최고의 선물을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더욱 심증을 굳게 하는 것은 매장당시 석촉을 그녀의 무릎에 곡선으로 세 점 올려 놓여있다. 연구서애 의하면 이는 똑바로 누운 전신장이 아니라 측 와장이고 석실분 길이는 140 cm인데 비해 키는 160cm이기에 무릎을 구부리는 측 와장이라면 무릎부위는 경사지게 올라갈텐데 여기에 석촉 3점을 놓은 점이다. 2호 석관묘에서 발굴된 석촉은 6점인데 만약 부장품을 매납하였다면 가지런히 놓을듯 한데 3점은 슬개골 위에 놓여 있으며 3점은 여기 저기에 있었슬까?? 그리고 여성으로서 이렇게 많은 석촉을 가지고 사냥을 하였슬까 하는 의문이다.

 

그렇기에 석촉의 문제에서 보면 우리세대에 매장 문화에서 마지막으로 유족들이 한 많은 사연의 동전 몇 닢을 관위에 올려 놓듯이, 매장자 친 인척등 주변 인물들이 먼저 가는 님에 대한 사랑의 존경심으로 자기가 애지 중지 아끼는 물건을 선물하는 풍습은 아니었슬까 하는 느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4호 석관묘중 1호 보다도 2호 석관묘는 제일 크며 나머지 석관묘는 대부분 60㎤로 목탄도 흔적이 있어 화장후 2차 매장을 하였슬 것으로 추정 하지만 2호 석관묘의 그녀는 신분이 어느 왕족의 후예나 공주처럼 특별하였기에 정성껏 매장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그녀의 남편이나 혹은 아버지는 이 지역의 족장이나 지배계층이었으며 큰 키의 그녀는 혹시나 어느 부족의 족장의 딸로서 태기왕의 공주로서 이곳으로 시집 오지는 않았슬까요?? 평창엔 가리왕산 동쪽 끝자락 진부쯤에 큰 궁궐의 흔적이 남아있고 또한 횡성쪽으로는 태기산에 태기왕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 평창의 조산은 태기산이고 태기산 준령이 뻗어내린 평창에는 이러한 맥족국가의 범위는 아니었슬까요??

 이러한 의문을 남기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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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만년전의 미탄 기화리 쌍굴의 유적에서,,

 

예전에 게시한 미탄 기화리 쌍굴의 하늘굴에 대하여 연대박물관이 시굴 조사한 자료를 2~3년전에 게시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마도 이 소식은 지난주 "평창군민신문"에서도 상세하게 보도된 바 있다.

*주) "평창군민신문"은 지난 1월 20일 창간호 발간을 시두로 격주 신문으로 발간되며 인터넷 신문은 연속 누적 기사분으로 사이트 "평창군만신문"으로 발간 됩니다.

 

기화리 쌍굴유적은 평창인들에겐 생소할 수도 있는 평창 상고사인데, 이 유적은 2007년 연대 박물관의 시굴조사와 연구에 의해 탄소연대 측정으로 58,000년 정도전인 구석기 중, 말기 시대의 선서인들의 유적으로 한탄강에서 애슐리안 도끼등의 구석기 유물이나 평창 도돈리에서 밀개, 찌르게등 뗀석기(타제석기)등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지만 미탄 기화리 쌍굴의 하늘굴에서 출토된 유물은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특이점은 동굴내에 19종의 동물의 뼈가 부스러져 잔존하는데 그 중에는 현존 우리나라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코뿔니와 원숭이  등의 뼈도 함께 발굴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화리 쌍굴유적은 인간의 도구엔 뗀 석기와 그에 상대적으로 인간 생존의 식량으로 동물은 먹엇다는 흔적을 가지고 있는 점입니다. 이것이 한탄강 구석기의 막현한 유물보다 상대적인 인간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구석기 시대 인류는 농업이 아니라 유실수나 수렵, 어업에 의존하는바 동굴속에 잔존하는 코뿔이나 호랑이등 맹수를 당시 석기인은 어떻게 사냥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유물로는 각 동물들의 잇발과 손가락뼈등이 집약적으로 발굴되는 것은 화강암 동굴에서 석회질의  뼈가 오래 보존된다는 사실에 기인하여 발굴조사를 하였던 바 손가락 뼈나  잇빨의 뼈가 단단한 구조이기에 오래 보존도 되었겠지만 유물의 뗀석기류를 볼때 당시 석기시대인들애게는 사냥도구는 자연적인 몽둥이나 돌멩이등 이상은 없었던 듯하기에 사냥을 하고 맹수를 잡아 먹자는 못했슬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뼈들의 유물을 보면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닌 약육강식의 대상체로 먹고 먹하는 세계에서 맹수들고 버린  부스러기 머리나 손가락등 주워먹고, 어쩌다 사체를 먹고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점입니다. 어쩜 인간은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힘이 아니라 머리엿고 그에는 언어를 가졌기에, 언어가 있어야 사물을 구획지으며 사고력이 발달하는 머리의 지혜로 세상을 차진한듯 하다.이렇게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말 유적은 상대 개체 유물까지도 발굴되어 인간의 살았던 환경등을 유추해 볼 수 있기에 실감나고 중요한 유적이라 생각하며 글을 마칩니다.이 장의 글은 본인의 주관적인 해석의 가상세계에 글로 이점 유념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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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기와 철기의 역사>

 

 다음 글은 평창에 방림- 영월간 국도 공사 도로에서 발굴된  후평리, 주잔리, 방림리의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물을 게시합니다.참고로 윗글의 고조선 식 청동기 유물은 2,600년전으로 B.C 6세기경의 유물로 이후 약 2~3백년 후에는 철기문화가 시작되어 청동기와 철기가 혼용됩니다.
우리 상고사에 고조선은 일찌기 중국보다 먼저 청동기 시대를 개척하였으며 고조선은 중국 최초의 국가 주나라보다도 130여년 앞섭니다, 이러한 흔적은 사마천의 사기에 동이족은 얼굴이 외계인 모양이고 한족을 만나면 무참하게 내려쳐 죽였다 합니다. 그리고 시안의 주변에 피라밋 천 여기를 지금까지 중국정부는 통제하고 있지만, '60년대에 피라밋 한 기를 발굴조사 3일만에 금지하고말앗으나 당시 조사단장 장 박사는 양심의 한 장의 리포트에 외계인 같다, 발효음식 김치가 나왔다 하며 이는 보나마나 고조선 문화이다라는 짤막한 리포트를 남겼습니다. 그것은 역사가로 인류 문명에 한 역사를 지우는 거대한 사건에 당사자가 되기보다는 양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만, 여기에서 외계인 같다는 모습은 청동기 투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개인적인 사견을 그려 봅니다.
고조선으 청동기 문화 말기에는 철기시대가 병용되었지만 원래 철기는 흙이 누런 색은 철을 함유하고 있어 그렇듯 자연에 가장 많은 광물로 채집도 용이하여 그 제련법은 B.C 3,000년전에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사이의 이라크의 힛타이트 족이 발명하여 단 한가지 방법으로 현재 제철소에서도 동일한 제련법을 사용하지만 철기 시대는 청동기 시대 이후에 도래되었습니다.
그것은 목재의 화력이 철의 용융점 1,580도까지 오르지 못하여 철을 녹이기에는 목재의 화력이 약 200도 모자라기에 제그보다 제련법은 까다롭지만 8~900도의 온도로 청동을 주조할 수 있기에 구리, 주석, 납의  합금의 청동기 문화가 먼저 도래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에는 고구려 영토에서와 한반도 남부 삼한에서 철을 생산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한의 철은 다음 글 '평창 후평리-주진리- 방림듸 청동기, 철기유적"의 사진에서 게시할 후평리 유물의 사진인 철촉, 철겸편, 철재삽날의 사진을 보시면 현재의 철기문화의 도구와는 좀 거리가 있는듯 보입니다.  본 연구 보고 리포트의 사진에는 철 유물의 특성이 주철인지 편철(철 알갱이를 키로 쳐서 골라서 달구어 두두려 작개 붙이는 철)인지도 모르지만 당시에 목재의 화력으로 주철의 철을 녹이기가 함들어,, 아마도 조금의 철을 녹이기에 목재가 타며 숯이 되는 알불에 의존한듯) 후평리 철재도구 사진에서 보듯 철재 도구는 작는 유물로 희소하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인의 견해로 보면 삼한의 철기 생산은 완벽한 철의 다량 생산은 아닌 것입니다.
일전 강원문화원 연합회의 논문 공모에 수상작 중에 양양에 16세기경의 철로 만든 철비(鐵碑)가 기단석에 접합부에 물이 차 녹이 쓸어 무뎌진 철자를 해석하는 금석학 논문이 입상되었는데 당 논문의 박사님에게 철의 생산은 삼한시대는 소규모이지만 완전한 주물이 아니기에 강도도 좀 약할 것이고 녹이 많이 쓸고 산화되어 부식이 잘 되는 철이며, 세계 역사상 지금과 같은 주철은 10세기의 송나라에서 주철을 생산에 의한 것이기에 철비석은 이 이후 완전한 주물 기술이 터득된 이후이며,  양양이 철의 산지로서 철비를 생산하였슬 것이란 이야기를 하였던 바 논문에 이 부분이 기고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고려는 그러한 선진문화를 수입하였기에 일전 북한 문화재의 남한 전시 계획에 고려 개국 왕건의 철 전신상이 전시품목에 있었는데 계획이 무산 되었습니다. 아마도 전시되었다면 얼른 달려가 큐레이터가 왕건의  철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들어보려 하였건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또 한나의 예를 보면, 12세기 월정사 팔각 구층 탑의 상륜부의 화려한 보륜 장식은 철이 아닌 청동장식으로 그 시기(12세기)에도 철의 주조에 기술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던듯 합니다.
이러한 자세한 이해의 글은 본인의 "수항리사지 탑 논문 해제"의 글에서 기고 하고 있습니다.아마도 역사서에는 그래 탐탁치 않은지 철의 기원의 역사를 다루는 책은 없습니다만 이래서 이러한 글은 본인이 생각하는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이러한 청동기와 철기 문화의 이해하시고 평창의 청동기 철기시대의 상고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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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의 앞으로의 연구과제는??

 

 물론 이러한 광대한 제목에는 한강 상류의 조그마한 촌락인 평창고을에는 과거 선사시대의 주거에서부터 참으로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잇는데 이러한 역사를 다시 정립해야되는 문제는 평창아라리등 여러 역사의 정립의 문제가 가로 놓이는데 그 하나씩 모두 정역의 역사로 서술할 것입니다.

 

이글을 쓰며 월정시 8각 9층 탑에 대해 본인은 예전에 많은 부분 논고하고 월정사 중창의 허실까지도 기록하였습니다.

그에 연유하여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은 이란 논문으로 특별상의 국사편찬위원장 상도 받았자만,, 본인의 그러한 연구는 월정사 탑에 기인 합니다. 당시 국사편찬 위원장은 심사위원장으로 수상식장에서 본인의 앞 자리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인사에서 본인은 실명의 이름으로 인사하니 후세백자기란 아이디도 알고 계신데.. 아마도  당시 5등상인 "평창의 국구사우" 논문이 그 일년전 출품에서 본인의 블로그에서 처음 지목한 국구사우터의 논란으로 실격하고 (다시 출품해서 규정상 동일 논문이 두번 출품은 안된다는 말도 있던데,, )하여튼 말이 많았슬듯 하여 그런지 본인을 잘고 있는듯 하였다.  

 

 하지만 본인은 특별상을 취하하려고도 하였던 것은 일등상을 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일등상의 논문 범위에서 결론은 노사신의 묘의 난간석을 지정 문화재로 하자는 건의이지만 본인은 우리나라 탑의 양식 중 새로운 조형 양식의 이론을 창출하였는데 단 문제는 본인은 지역 문화원 원장등의 타이틀이 아닌 자영업자란 구분일까 하는 의혹에 수상 포기도 하려 하였건만,, 본인으로서는 이러한 연구속에 월정사 8각 9층 탑에 대한 애착과 연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평창에는 우리민족 문화유산중에 가장 큰 획을 긋는 민족문화유산의 상원사 동종과 월정사 8각 9층 석탑이 있습니다. 

상원사 동종은 현존 최고의 동종으로 동조의 표본으로 비천상도 천하 일품의 부조입니다. 이러한 동종은 예종의 명으로 영주 누각에서 세조가 기거하는 상원사로 옮깁니다. 자그마치  5~6톤의 무게를 그 당시로서는 이 운송도 대 역사일듯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으로 우리나라 역사 시작이래 가장 오랜기간동안  1,200여기의 불탑이 조성되며 그 중 가장 빼어난 조각으로 불심을 드리우는 하나의 세계관을 구현한 조각품인데 과거 정양호 선생은 우리나라 탑의 학자로서 동 탑은 이방형으로 고구려 풍으로  북방형이란 논리를 구사하며 이후 이단 취급으로 오늘에 까지 이르지만 본인은 이미 여러 논고도 하였지만 언제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은 우리나라 국보 405개중 가장 많은 부분의 석탑 28개가 국보로 그 중에 가장 화려한 탑으로 자리매김하는 조각의 미학적 우수성의 글을 쓸 것입니다.

 

* 위의 이야기중에 본인의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논문은 전국문화원 연합회 논문 공모전에서 특별상(3등 순위로  역사편찬 위원장 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당시 평창향토사 위원장 이경식의 "평창의 국구사우 당위성"의 논문은 문화원 연합회장상(순위 5등의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런데 지난해 평창 화원의 연간 발행지 "평창이야기"에서 책의 첫 장엔 우수상이란 큰 타이틀에 사진까지 실으며 " 국구사우" 논문을 수록하였다. 하지만 동일한 공모전에 그 논문보다 두 단계 위인 3등상인 본인의 논문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는 동 책의 맨 뒷부분에 수상 타이틀도 삭제된체 실었다. 이는 본인이 요구해서 문화원의 "평창이아기" 책자에 건의하여 수록된 것이 아니라 당시 문화원측의 요구로 게시되었는데 이러한 편견에 본인의 논문은 않실었으면 문제될 바 없지만 같은 공모전의 두 논문을 이러한 편견적 차이로 실은 점에서 본인의 인격을 실추시킨 점을 지적한다.

 

또한, 매번 본인의 글에 본인의 본명을 쓰면 인터넷상에 평창만 검색하면 본인의 이름이 아마도 7~8백번 떠돌아 다니기에 그것도 우스워서 닉의  후세백작을 사용하고 있듯이 본인은 자랑도 부귀영화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른 문제, 이 장에서는 나의 고향, 나의 정서의 일부인 평창의 역사에 바른 문제를 제시 할 것입니다.

 

본인은 남들처럼 입바르게 향토사학자라고도 자처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평창의 역사의 큰 줄기의 오류,, 예를 들어 노산성 임란 전적비의 거짓문화등 ,, 이러한 점에 이해를 못하신다면 그 끝까지 자세하게 기록할 것이며 또한 평창엘 찾아와 역사 연구에 세미나를 한 박사나 학자들의 연구는 고맙지만 그들이 답사도, 증언 채집도 없이 밝히는 논제에 오류들은 지식팔이의 추태로 이런 오류를 집중하여 한 권으 책으로도 만들겠습니다.

 

왜냐면 다음 먼 후일 다른 학자가 평창의 역사를 들춰 인용할때에 이러한 오류의 기록들도 모르고 인용할 수 있는 범위가 있기에  평창 역사의 오류들은 그 원론의 문제를 다시 제시하며 정립된 역사를 서술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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