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昌의 鎭山, 魯山과 魯山城에 대하여 (2부)
◆ 노산성에서의 임진왜란 대첩이의 글을 쓰기에 앞서서
평창 魯山과 魯山城에는 지난 80년대에 세운 노산성 전적비에는 임진왜란시 노산성에서 전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한줄에 기록되는 노산성의 임진왜란사는 당시 평창군수 남천 권두문의 "호구일록" 이라는 일기체 형식의 평창 임진왜란사의 한 부분적인 역사가 밝혀지며, 잘 알려진 사실로 이 일기는 평창의 임란사를 넘어서 430여년전의 임진왜란사중 아마도 왜구의 행태에 가장 잘 묘사된 기록일것 입니다.
이제 평창인들은 이러한 평창의 임란사와 음암굴 전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노산성의 전투를 오류라 표시하지 않고 근자에 까지도 이를 기념하는 충혼제도 드리고 있다. 물론 이 땅을 수호하기에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충혼제는 시대를 넘어서서 기려야 할 평창의 자주적 기상의 일번지로 이를 위에서 잠시 언급한 "진산사상"으로 평창의 진산 노산의 노산성내에 충혼비를 세운 것은 아름다운 일이겠으나 이 비문의 기록에는 그 역사적 정확성의 가치관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이 평창인들에게 불쾌감을 자아내게 할것이 아닌지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올바른 역사정립을 가져야 평창의 역사에서 가려진 동학난과 정미의병사의 연구과제의 장이 바르게 조명될 것이란 점에서 바른 역사의 이해를 위해서 앞으로 쓰는 " 3) 임란의 노산성 대첩의 올바른 이해"란 주제와 " 4) 노산의 지질학적 특성과 이에 앞으로의 과제"에 대하여 논고하겠습니다.
한 시기에 취급되었던 역사가 새로운 사료가 발굴됨에 다시금 수정을 하는 일은 역사에서 다반사적입니다.
그러기에 임란당시 노산성 전투라는 역사는 임진난 당시 권두문 평창군수의 일기체 형식의 입란사인 "호구일록'이란 책이 번역본으로 평창에서도 출간되었기에 이젠 제법 많은 사람들이 노산성의 전투가 오류라고 알고 있으며 이에 소문도 더욱 확산되는 마당에 이 역사를 바로알고 시정되어야 하기에 논고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향토사가도 아니고 역사 연구자도 아니기에 앞으로 쓸 3, 4장의 평창의 역사정립은 본인이 쓰기에는 좀 곤혹스럽지만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 첫마디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점이라고 하였습니다. 현재의 대화라는 의미는 앞으로 미래로 향하는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결국 역사란 미래를 위한 과거의 상황을 오늘의 상황전개로 미래 투시의 미래 도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산성의 임란대첩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과거의 역사가 없는 픽션(허구)에 대한 오늘의 대화가 되며, 이러한 사실이 아닌 대화는 앞으로 어떠한 위상을 나타낼 수 있슬까 하는 의문속에 정확한 사료에 의해서 다시금 재 조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시대에 만든 허상의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주실 것입니까?? 그것은 후일 언제라도 후손들에 의해 바른 사관으로 다시 조명되고 정립될 것이기에 이러한 재 조명을 후손대에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 시대에 마무리져야 현명한 선택이기에, 이제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잘 알고계신 임란왜란 당시의 평창역사를 재 조명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많으신 이해를 바라며 최대한 역사적 사료에 의해 평창임란사를 정립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 평창 노산성에서 임잔왜란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은 역사의 사실인가??
평창 노산의 노산성은 산 1번지로 평창의 시작점으로 노산은 태백의 영봉이며 평창의 진산으로 평창인들의 정서속에 언제나 늘 마음의 고향으로 함께하는 진산사상을 품고있다. 노산을 오르면 노산성에는 옛 국사성황당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노산전투의 임란대첩비를 우뚝세워 놓았다.
일전에 본인이 밝히는 국사성황당의 이야기는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만, 전국의 모든 국사성황당은 무속인이 아닌 국가가 군, 현에 설치한 성황단으로 불교를 대신하는 통치이념으로 "국태민안'을 위해 군수가 제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로 노산의 성황사는 조선시대 평창의 치정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http://blog.daum.net/kkks1/1538 평창의 국행성황인 "노산의 성황사 (魯山 城隍祠)
국왕을 대신하여 평창의 군수가 제를 지내는 곳은 두 곳으로 사직단과 국사 성황사이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므로 고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호해주는 데 대한 보답의 의미에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사직(社稷)은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사직단의 위치는『주례(周禮)』에 잘 규정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사직, 왼쪽에 종묘’라 하였다.
이러한 사직의 의미를 더욱 쉽게 이해해 보면, 우리나라는 농업국가로서 왕은 종묘와 사직, 두곳에 절을 할 수 있는데 사직이란 의미는 농업의 神으로 옛날 춘추시대의 농시가 잘 되던 곳의 제후인 사직씨, 신농씨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여기서 사직, 신농등의 제후가 다스렸던 중국 춘추시대를 중국 역사와 중화민족으로만 보아서는 않되며, 공자도 동이족이 살고있는 중원의 땅에 살고 싶다고 하였으며, 사직이란 먼 옛날 고대사회로부터 전해오던 역사이며 근래에도 모심기 농요에서 사직이가 신농이가 하는 2천여년 구전으로 전해오는 사설을 읊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직단은 지방 행정단위인 주현(州縣)마다 설치하얐는데, 여기서 우선 평창의 사직단을 잠시 언급하면, 조선시대 지방에 산재하였던 사직단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위치터를 향토 사학자 정원대 님이 재 조명하고 있다. 보통 사직단은 고을의 서쪽에 설치하였듯이 평창의 사직단 터도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서 보이는 평창의 들녘은 평창 들녘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점으로 단 한컷의 사진으로도 평창의 전경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빼어난 지점이다.
그러기에 평창의 사직단의 복원도 염원이지만 이 곳이 평창의 들녘과 종부 뜨락까지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즉, 평창의 들녘이 가장 넓게 보이는 장점입니다.
(이 장에서 사직단의 논고는 평창군수의 치정에 사직단과 국행 성황사와 제를 지내는 이해를 위한 것임)
그러기에 각 고을의 군수나 수령은 사직과 국행 성황사에 나아가 이 고장의 국태민안을 위해 제를 지냈다.
그러기에 이 부분에서 2015년 평창문화원 발간의 우리문화 30권 정장룡 교수의 "평창군 국구사우의 문화재적 가치" p144의 세미나 레포트에서 포교당 뒤의 중리 서낭당의 암성황신과 노산의 숫성황신의 남녀성황신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으로(접신)으로 노산성황제 복원에 중요한 증언자들의 증언이 매우 중요한 언급이라 했다.
하지만, 본인의 이해로는 각 마을에 마을 수호 성황신중에 중리는 농악대가 발족되먀 마를 서낭제시 읍치 성황신에게 제를 알림의 행사도 좋은 의미이지만 국사, 국행 성황사의 본질의 개념은 그것이 아니란 점으로 (위에 인용하는 링크의 글에 피력하였습니다)
또한 이 페이지에서 "조선 선조때 김광복 군수가 (노산성을 ) 다시 쌓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권두문 평창군수가 지사함, 우응민, 이인서등과 힘을 합쳐 왜군과 격전을 치루었던 전쟁 유적지이며 국토수호의 현장이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이러한 격전의 기록은 어디에서 따온 것일까??
인터넷 백과사전의 임진왜란 때 권두문(權斗文) 군수가 지사함·우응민·이인노 등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권두문(權斗文) 군수가 지사함·우응민·이인노 등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전혀 없었기에 사실이 아닌 왜곡이다. 그러면 이러한 왜곡된 역사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그것은 평창 스스로의 역사적 오류의 왜곡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노산에 오르면 큼지막한 비석에 "임진 노성 전적비"라 휘호를 쓰고있다. 그러나 노산성에서 임진왜란시 전투한 역사적 사료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역사적 사료는 없고 또한 남천 권두문 군수의 "호구록"이란 일기에서보면 왜병이 미탄에서 평창으로 진입하기 전에 군수를 비롯하여 전봉사 지사함, 우응민, 이인노등 군, 관민 모두가 응암굴로 피난하고 있었다. 이것이 평창의 임란사의 사실적 역사입니다.
역사적 근거도 없이 역사라고 쓰는것은 왜곡이다. 그러기에 비석의 뒷편의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에서 "임진노성전적비"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란 것은 간단하게 입증이 됩니다. 노산성에서 임진왜란 때 권두문(權斗文) 군수가 지사함·우응민·이인노 등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곳이란 서술이 사실이 아님은 당시 임진왜란시 평창군에서 이를 겪은 당사자인 평창군수 남천 권두문이 쓴 "호구록"에 보면 임진년(1592년) 8울 7일부터 9월 13일까지의 일기체 형식으로 그 첫날인 8월 7일자 일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호구록의 내용을 일부 간추려 소개하면,
<8월 7일>* 영동지방의 왜적이 모두 큰 재를 넘어 무기와 장비를 정비하고 형세를 정찰하였다는 보고를 받는다 (*주 ; 여기서 큰 재는 성마령으로 이해되며 성마령을 넘어 미탄에 입성한것으로 파악된다)* 지봉사및 여러 군관들이 말하기를 응암 화험굴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군기와 장비도 그만하면 비록 많은 적이 온다한들 겁낼것 없습니다.그러니 내뜻도 그러하다(권두문 군수의 답)하고 응암굴로 가기로 하였다.
이날 밤을 타고 정선으로부터 선발대가 입군(入郡)하였다.급기야 배를 불러 강녀, 주, 고언영및 노비 45명을 굴에 들게하고 지사함과 품관 지대성, 우응민, 지대용,지대명, 이인서, 이대충, 충주서 피난온 최업, 우윤선및 관속 백성 수백명등이 함께 굴로 들어갔다. (*주; 지봉사는 지사함 장군을 말하며 장군이란 칭호는 별호이고 정상적인 명칭은 무관의 전봉사이다, 그는 한해 500명 뽑는 무관시험에 300등으로 합격한 무관임)
<8월 11일>
* 미명을 기해서 왜장(倭將)이 반대편에 포진하니 왜병은 산의 위, 아래로 가득차고 왜군이 외대를 오르려 하니 아군이 이를 차단하고 양군이 일진일퇴 치열하게 공방하는데 활과 돌에맞아 쓰러지는자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지사함 우응민, 이인서, 지대충등은 모두 총알에 맞아 쓰러지고 ~(중략)
이렇게 응암굴은 적의 손에 들어가고 권두문 군수와 아들 주도 체포되어 포로가 되어 군내면 관아로 잡혀가게 된다.
위의 호구록의 역사서에서 보면 임란당시 권두문 군수와 지사함, 우웅민등이 8월 7일에 응암굴에 들어간 날자와 이때 왜병은 미탄쯤에 출정하였다는 기록과 또한 11일 지사함등 여러 품관들이 응암굴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로 본다면 지사함등 여러 품관들은 응암굴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역사에 서술되어 있다. 그러기에 역사는 정확한 사료위에 사실을 기록하여야 하는 것이나 노산성이서 왜구와 격전은 객관적 사실 기록은 없는 픽션으로 역사 서술자의 욕심의 오만함에 기인하는 왜곡이란 점입니다.
여기서 오만이란 본인의 표현이 아니라 역사 왜곡에 대한 역시서들의 논리적 표현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야기에서 몇가지 궁금한 점에대한 추가 기록을 합니다.
당시 평창군에 관속이나 군졸은 몇 명이었슬까 하는 점으로 이는 이후 18세기 중엽에 그려진 해동지도에서 보면 평창군은 원호(호구수)는 1,680여호, 동오군(東伍軍) 120명, 감영군 34명으로 여기서 동오군은 지방으로 파견하며 마치 화랑도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며 훈련하는 중앙군대이며 임란시 평창의 감영군은 34명 내외이며 관헌의 노비는 노비. 관속등의 남,녀 모두는 약 40여명으로 이러한 숫자는 조선 초기의 기록에서도 동일한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시 평창전사는 호구록에서 대굴령을 넘어왔다는 오류와 번역상에 서강을 동강으로 표기하는 등오류를 나타내지만 이 호구록의 평창에서 발간하게 되는 것은 권군수 12세 손인 권태하씨(2013년 작고. 명동성당 장로)가 제 1회 노성제를 다녀가며 호구록에 관심을 가지고 원본은 규장각에 있지만 사본이 집안이 남천문집내에 있는 것을 90년대쯤 집안의 한학을 하시는 어른과 함께 한글판으로 번역 하여 평창에서도 출간하여 위 일기의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잇는 분들이 많으며 따라서 노산의 노성임란전적비는 거짓이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며 더욱 확산일로에 있는만큼 이제라도 우리는 정사를 받아들여 수정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임진왜란당시의 平昌戰史는 많은 가식적 이야기들이 있지만 본인은 정론의 평창전사 과정을 밝혀 놓은 바 있습니다
개괄적 내용으로
http://blog.daum.net/kkks1/1055 "임진왜란시 平昌戰史 "
http://blog.daum.net/kkks1/385 [평창 제1의 기상,,, 제 33회 노성제에서 임진왜란시 항일전 연출]
권두문 군수의 "호구록"은 임진왜란을 생생하게 겪은 당사자의 일기체 형식의 기록이며. 임진란시 평창의 역사는 전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호구록은 왜구의 평창 진입에서 퇴각날자까지. 또한 정선으로부터 들어온 점과 영월을 거쳐 원주 감영까지의, 영원산성(치악산) 전투까지 이어지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위에 링크한 "임진왜란시 平昌戰史"를 잠시 언급해보면.. 임진란에 조선 정벌군 16만명에 강원도를 배정받은 4번대의 시마즈 가문은 1만 4천 명의 군대를 조선징벌에 보내게 됩니다.
규수의 사스마현(현 가고시마)의 "시마즈 가문"은 센코쿠(전국시대) 말기 큐수의 다른 다이묘들을 거의 제압하여 큐수의 통일의 목전에 도요토미의 중재를 거부하자 토요토미는 20만의 대 병력을 보내 큐수를 정복합니다.
큐수는 싸우기 전에 항복하고, 토요토미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대신 사스마번을 보장받게 된다. 이 진압의 출정에 나선 모리 요시나리는 도요토미의 똘만이로서 큐슈지방의 시마즈 가문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공로로 부젠국(고쿠엔지방)의 그는 天殃(천왕)으로부터 감원감사 자리를 약정받고 강원도를 정벌합니다.
4번대도 본대의 뒤를 이어 문경새제를 넘어 한양으로 오르다 강원도로 대 회전하여 김화를 처음 침입하여 일부는 춘천을 진압하며 본대는 간성에서 다시 회전하며 강원도를 돌아서 원주의 강원감영을 쳐 들어가는, 이러한 병법은 힘들어도 바로 원주로 쳐들어갈 경우 사방에서 공격받기에 라운드 전법으로 주변부터 제압하는 방식으로 삼척의 두타산성도 접수하며 백봉령을 넘어 정선에 이르자 정선군수 정사읍은 일본 넘들의 썽미에 제 마누라도 보장받지못할 항복을 하지만. 평창은 권수 권두문이하 군, 관미이 모두 합심하여 애장의 항복 권유서신을 들고온자의 목을 베고 항전에 이른다. 하지만 중과부적의 적군에 일단 모두 피신하였다가 후일을 도모키로 하고 응암굴로 숨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불의의 왜구에게 항전의 기치를 높인 자세는 목민관으로서 군수의 올바를 지침인 동시에 죽음을 담보로 왜적에게 대적하는 군, 관민의 숭고한 정신은 높이 기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창 임진왜란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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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을 지나는 사스마번의 왜구들은 정유재란시 전라도지방을 휩쓸며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에게 확인결재하는 악명을 떨친 왜구들입니다. 시마즈 가문은 자기네가 대장으로도 못나서고 외부 영입의 모리길성을 따라 나서는등 그것은 아마 반란으로 도요토미에게 찍힌 점을 만회하고싶은 충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인지 또는 언젠가 농담으로 미국의 전라도는 저 먼 병방의 오하이오라면 일본의 전라도는 나라에서 제일먼 큐수지방이라 그들이 이러한 기질을 나타내는 것이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은 이미 임진란에 강원도를 쳐들어오며 김화로 나온 춘천의 조방장(지역 무관 사령관격) 원호의 목을 베에 장대에 메달고 시내에 세워 놓았다 한다.
이러한 악랄한 자들이 호구록에서 권군수의 포로로 원주 감영으로 압송되는 본대가 원주 신림에 다다르자. 이미 지나간 선발대가 주민들의 목을베어 여기저기 장대에다가 걸어 놓은 야만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쪽바리들이 평창을 제압후 부녀자를 폭행하는 비 인륜성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4장에서는 평창의 노산의 지질학적 이해에 관하여 논고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아마도 평창인들에겐 생소한 이해일듯하지만 또한 중요한 우위를 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주교 뒤 하리의 옹달샘과 중학교 뒤 중리의 샘이 현재 마르고 샘물이 흐르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정확히 알지 못하여 잠시 이 글이 미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의 문제는 현재의 상황설명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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