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곡(蒼谷) 이현영(李顯英)
▪일시 : 1629년 4월 2일–윤4월 4일
▪동행 : 없음
▪일정
4/2일 : 원주–김화(1박)
4/5일 : 단발령-철이령-장안사(1박)
4/6일 : 시왕백천동-안양암-삼일암-표훈사
4/11일 : 표훈사-거빈굴-지불암-만경대-길상암-고원적암(1박)
4/17일 : 총석정
4/20일 : 삼일포-명파역-열산현-간성군
4/24일 : 상운역-관란정-연곡현-강릉부 객관(1박)
4/25일 : 척번대-경포대-평릉역-죽서루
4/27일 : 구산역-제민원-황계역-오대천-진부역-청심대-대화역(1박)
4/28일 : 방림역-모노현-평창군 아전집(1박)
4/29일 : 거슬현-사천천-주천현(1박)
4/30일(윤4월1일) : 송현-유현-신림역-단구역-학성관
윤4월 2일 : 회암사(1박)
윤4월 4일 : 창동
▪작자 소개 : 창곡 이현영
이현영(李顯英, 1573 -1642)의 자는 중경(重卿)이며 호는 창곡(蒼谷)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1595년(선조 28) 별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서 벼슬을 시작해 평안도 평사·지평 등을 거쳐 수찬·교리·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628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도승지·참찬관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 예조·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후금의 군사와 싸웠다. 이듬해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한 것을 자책해 사퇴했다가, 다시 이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42년 청나라 용골대(龍骨大)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볼모로 삼아 심양(瀋陽)에 잡아놓고 조선 사신의 입국을 요구하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심양에 가서 한달 동안 감금되었다가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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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악록(楓嶽錄) / 창곡(蒼谷) 이현영(李顯英)
우리나라 산수(山水)는 오직 관동지방의 금강산이 최고의 절경으로 천하에 명성이 드러났는데, 화엄경(華嚴經)에 실려 있고[주 1172] 원나라 황제[주 1173]가 선택했으며 명나라 황제도 감탄하며 칭찬했다.[주 1174]
무릇 세상의 외진 곳에 있으면서 천하의 명승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얼마나 위대한가. 매양 벗들과 같이 한번 올라 유람하여 오랜 바람을 이루고자 했는데, 세상 일이 가로 막아 내 평소 마음을 빼앗긴 것이 30여년이나 되었다.
숭정 무진년(1628)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다음해인 기사년(己巳年) 3월 체직되어 4월 1일 학성(鶴城)[주 1175] 객사(客舍)에서 관인을 교환하고 드디어 산행을 시작했다.
2일 김화(金化)[주 1176]로 향했으나 비에 막혀 야인(野人)의 객점에서 묵었다.
---------------<부분발췌>--------------
27일. 북쪽으로 가서 구산역(丘山驛)에 이르자 가는 비와 비낀 바람이 금방 일어났다가 금방 갰다. 걸음을 재촉하여 나가 대관령 골짜기 입구에 이르렀는데 골짜기는 아득하고 고요했으며 바위 봉우리는 수려했다. 시내는 세 군데의 산등성이에서 흘러 내려오고 바위는 구름 기운을 받아 대략 풍악의 구정동(九井洞)과 서로 비슷했다. 내가 배회하며 오래 있다가 말하기를 “험하고 어려운 곳을 두루 밟아 기운은 더욱 굳세졌고 지극히 멀리 가서 깊은 곳을 다하면서 뜻은 권태롭지 않았다. 이로써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심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얻은 것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고 했다.
다시 5,6리를 가서 제민원(濟民院)에 이르렀는데, 원은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정을 반도 못가서 짙은 구름들이 다시 합해져 차가운 비가 다시 세찼다. 말을 쉬게 하고 가마를 두고 도롱이를 걸치고 고개를 오르자 하늘에서 바람이 문득 불더니만 비오는 형세는 갑자기 그쳤다. 해무는 잠시 걷히고 바다는 아득해 동서를 구분할 수가 없고 처음과 끝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경포대와 망향정이 발밑에 있는 것 같고 낙산사와 죽서루가 눈앞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호수와 바다를 구경하는 즐거움을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 단지 비가 장난을 쳐서 사람과 말이 많이 엎어지고 자빠져 앞길에 경계를 하는 것이 되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하면서 내려왔다.
앞 뒤 20여리에 걸쳐 나무 숲 색이 짙푸른 가운데서 나오니, 산 아지랑이는 점점 흩어지고 계곡의 바람은 싸늘해 상쾌하기가 9월의 가을 같았다. 서쪽으로 큰 시내를 건너 황계역(黃溪驛)에 이르렀다. 역은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4월에 얼음이 비로소 녹았으며 8월에도 눈이 날렸다. 거주하는 사람들은 감자를 심고 귀맥(鬼麥)을 갈아 식량으로 삼았으며, 약초를 캐고 석청을 팔아서 생활용품을 구했는데 그 생활이 매우 가련했다.
또 27,8리를 가서 독산원(禿山院)에서부터 성야(省野)를 지나 오대산을 바라보니 운무가 아득하여 비바람을 막고 있었으니 하늘과 땅이 비밀리에 감추어 둔 신령스러운 신선의 집이 아니겠는가. 사람 사람마다 능히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바로 오대천(五臺川)을 건넜는데, 시내의 근원은 상왕봉(象王峯)·지로봉(智爐峯)·만월봉(滿月峯)·기린봉(麒麟峯)[주 1221]의 4개 봉우리 사이에서 나와 넘쳐 힘차게 흘러 월정사(月精寺)를 지나 금강연(金剛淵)과 합해 정선(旌善)경계에 이르러 희복천(希福川)과 백여리를 지나 비봉산(飛鳳山)을 보듬고 영월군에 이르러 죽령강(竹嶺江)으로 들어갔다. 대개 이 물은 색과 맛이 보통 물보다 뛰어났으며, 한강이 여러 물갈래를 받아들여 이 물이 중파[中泠][주 1222]의 역할을 하는 것이 중국의 양자강과 같다고 양촌(陽村)[주 1223] 권공(權公)의 기문(記文)에서 말했다.[주 1224] 저물녘 진부역(珍富驛)에 머무니 푸른 나무가 하늘에 연이어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렸다. 또 8, 9리를 가니 청심대(淸心臺)가 있었으며 매우 넓게 펼쳐져 있어 올라 둘러보고 곧 대화역에 이르러 묵었다.
28일. 새벽에 출발해 숲 그늘에 들어서니 가지마다 앵무새 울음소리요, 골짜기 마다 냇물 흐르는 소리였다. 30여리를 가서 방림역(芳林驛)에 도착하니 역에는 상수리나무가 즐비했다. 다시 고개 하나를 넘고, 시내 하나를 건너니 물은 푸르고 모래는 수정 같았으며 사람 그림자는 가로로 비끼어 자연스럽게 그림 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종에게 말을 먹이라고 명하고 모노현(毛老峴)을 넘으니 고개 서쪽에 큰 시내가 있었는데 남쪽으로 40여리를 흘러 다시 북진(北津)이 되고 평창을 지나 거슬산(琚瑟山)[주 1225]을 보듬고 다시 100여리를 흘러가 죽령강이 합하여 흘러 형세가 자못 호탕하고 크다고 이른다. 갑자기 가는 비를 만나 평창군의 아전 집에서 묵었다.
29일. 날씨가 비록 갰으나 바람은 오히려 사나웠으며 정오에 이르러 안정되었다. 드디어 가서 거슬현(琚瑟峴)[주 1226]을 올라 노릉(魯陵)[주 1227]을 바라보니 산은 스스로 창오(蒼梧)[주 1228]의 눈물을 금하지 못하였다. 몇 리를 가서 사천천(沙川遷)에 이르자 돌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있고 나무들은 무성했다. 석양은 산을 가로 지르고 푸른 아지랑이는 절벽을 감돌았으며 시내는 흘러 출렁대니 이 또한 감상할 만했다. 주천현(酒泉縣)[주 1229]에 도착하여 밤에 고기 파는 집에서 묵으니 하늘이 맑아 물 같았으며 강의 달은 흘러 빛났다. 흰 안개가 주위를 덮어 흐릿한 것은 마치 호수의 빛이 하늘에 닿은 것 같아서 혹 거두었다가 혹 펼쳤다 하니 그림 같은 누각 수 칸이 소나무 숲 가운데 은은하게 비치는데 곧 청허루(淸虛樓)[주 1230]라고 이른다.
기사년(1629) 6월 하순에 서강(西江) 강정(江亭)에서 쓴다.
※ 원문에서 모노현(毛老峴)은 원작자가 지명 오류한 것입니다.
"모노현(毛老峴)을 넘으니 고개 서쪽에 큰 시내가(현재로서는 주진 강) 있었는데 남쪽으로 40여리를 흘러 다시 북진(北津)이 되고 평창을 지나 거슬산(琚瑟山)"의 원문에 문맥상으로 모노현은 이현(梨峴/ 뱃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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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주 ]
1171) 이 자료의 번역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창곡집(蒼谷集)』 권4 「풍악록(楓嶽錄)」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 저본은 1958년 창곡공파보소(蒼谷公派譜所)에서 간행했다,
1172) 화엄경(華嚴經)에 실려 있고 :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장안사(長安寺) 비문(碑文)에, “금강산(金剛山)의 뛰어난 경치는 다만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경(佛經)에도 기록되었으니, 『화엄경(華嚴經)』에 말한, ‘동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천의 보살로 더불어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설법(說法)했다.’ 한 그것이 바로 이곳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1173) 원나라 황제 :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지정 정해년(1347, 충목왕 3)에 지금 자정원사(資正院使)인 강공 금강(姜公金剛)이 천자(順宗)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한 다음에 이 재 위에다 종각(鐘閣)을 세워서 종을 매달아 놓고는 그 옆에 승려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종 치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우뚝 솟은 종각의 단청 빛이 눈 덮인 산에 반사되는 그 경치 또한 산문(山門)의 일대 장관이라고 할 만하였다.[至正丁亥 今資正院使姜公金剛奉天子之命 來鑄大鍾 閣而懸之于岾之上旁廬桑門 以主撞擊 屹然金碧 光射雪山 亦山門一壯觀也]”라는 기록이 있다.
1174) 명나라……칭찬했다 : 태조 때 권근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금강산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절경을 읊은 시를 명나라 황제인 주원장에게 올리자 명황제가 권근이 지은 시를 보고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온다.
1221) 상왕봉……기린봉 : 권근(權近)이 지은 「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 기(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에 “강원도의 경계에 큰 산이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함께 우뚝하다. 크고 작기가 비슷하면서 고리처럼 벌렸는데, 세상에서는 오대산(五臺山)이라고 부른다. 봉우리의 가운데 것은 지로(地爐), 동쪽은 만월(滿月), 남쪽은 기린(麒麟), 서쪽은 장령(長嶺)이라 하며, 북쪽은 상왕(象王)이라 한다.”[江原交界, 有大山, 五峯並峙, 小大均敵而環列, 世號爲五臺山. 中曰地爐, 東曰滿月, 南曰麒麟, 西曰長嶺, 而北爲象王.]라는 기록이 있다.
1222) 중령(中泠) : 중국의 샘물 이름이다. 중조고사(中朝故事)에, “이덕유(李德裕)가 경구(京口)에 사신으로 가게 된 사람에게 돌아올 때에 금산(金山) 밑 양자강에서 중령수 한 잔을 떠오라.” 한 일이 있었다. 강물이 함께 흐르면서 그 물만은 특히 어울리지 않고 찬 맛을 그대로 간직한 것을 말한다.
1223) 양촌(陽村) : 권근(權近 1352-1409)의 호이다.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1224) 한강은……말했다 : 권근(權近)이 지은 「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 기(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에 “서쪽의 누대 아래에 함천(檻泉)이 솟아나는데 빛과 맛이 보통 물보다 낫고 물 무게도 또한 그러하다. 그 물을 우통수(于筒水)라고 하며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서 한강(漢江)이 되고, 바다로 들어간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모인 곳이나, 우통수가 중령(中泠)이 되며 빛과 맛이 변하지 않아서 중국의 양자강(楊子江)이 있는 것과 같으며, 한강이라는 명칭도 이 때문이다.”[西臺之下, 有檻泉涌出, 色味勝常, 其重亦然. 曰于筒水, 西流數百里而爲漢江, 以入于海. 漢雖受衆流之聚, 而于筒爲中冷, 色味不變, 若中國之有楊子江, 漢之得名以此.]라는 기록이 있다.
1225) 거슬산(琚瑟山) : 원주 주천현(酒泉縣) 북쪽에 있다.
1226) 거슬현(琚瑟峴) : 주천현 경계에 있는 거슬갑산(琚瑟岬山)의 고개이다.
1227) 노릉(魯陵) :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이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봉된 칭호가 노산군(魯山君)이었다.
1228) 창오(蒼梧) : 창오(蒼梧)는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어 이곳 기슭에 묻혔으므로, 전하여 왕을 장사 지낸 곳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노릉에 단종을 장사 지냈다.
1233) 와유(臥遊) : 산수화(山水畫)를 감상하며 유람을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금(琴), 서(書), 화(畫) 삼절(三絶)로 유명한 남조 송(南朝宋)의 은자(隱者) 종병(宗炳)이 노년에 병이 들어 명산을 유람하지 못하게 되자, 그동안 다녔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걸어 놓고는 누워서 감상하며 노닐었던[臥以游之] 고사가 전한다.
(자료문의; 경상대학교 장원철 교수 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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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산수기행을 하였습니다. 불교 문화권에서 산은 神의 영역으로 이해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유교권 문화에서 산은 인간의 땅으로 조선 사대부들은 평생에 한번이라도 산수기행을 하며 저마나 글로서 표현한 유산기(遊山記)는 약 500여편 있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유교권 문화에서 산은 인간의 영역으로 이해하였고 산이 인간이 사는 땅에 기원을 이루는 점으로 이해하였으며 산을 통하여 배움과 호연의 정신을 기르는 도장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평생에 한번 가 보고 싶어했던 곳은 금강산이며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연천을 지나 금성현으로 해서 가는 코스와 원주서 인제로 넘는 코스, 그리고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서 금강산으로 올라가는 코스로 구분됩니다.
그중 선비들은 금강산 유람후 대관령을 넘어 영부독로(후일 강경로/ 관동대로를 타기에 횡계. 진부. 대화. 방림에서 오원역( 횡성-안흥사이0로 넘엇고 또 한편으로는 방림에서 뱃제를 넘어 주진에서 배로 건너 평창을 지나며 ㄷ어떤 기록에는 평창에서 영월쪽으로 나가는 길에는 다리가 3개 있었다고도 표현하는등 이러한 산수기를 통하여 당시 평창 여러부분의 역사도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이헌상은 풍악록에서 금강산의 절경을 만취하고서 돌아가는 길에 피곤도 하였으리라만은 평창을 이렇게 아름답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시 고개 하나를 넘고, 시내 하나를 건너니 물은 푸르고 모래는 수정 같았으며 사람 그림자는 가로로 비끼어 자연스럽게 그림 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 고개하나 넘고 시내하나 건너니에서 고개는 뱃재(이치재)를 넘어 주진 강을 건너 평창땅에 돌아드니 아름다운 자연의 동화 그림속의 사람들 모습, 이 어찌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정말 한편의 멋진 시상속에 평창사람들입니다.
과거 조선의 선비들은. 그래도 말년에 말타고 가마 가지고 군수나 관랄사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유람하던 선비들은 천재들입니다.
과거에 3년시 대과는 약 30명, 즉 1년에 10명 뽑합니다. 요즘 검사 똥강아지 같은 넘들을 기삼백 뽑죠,.. 그러면 조선 선비들은 검사 나브랑이들의 10분의 1로 보시면 않됩니다. 1/10으로 환산하면 않됩니다. 천명중 상위 30번 이하는 전부다 떨어지는... 그러한 사람들인지 천재적 글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갑자기 가는 비를 만나 평창군의 아전 집에서 묵었다.
29일. 날씨가 비록 갰으나 바람은 오히려 사나웠으며 정오에 이르러 안정되었다. 드디어 가서 거슬현(琚瑟峴)[주 1226]을 올라 노릉(魯陵)[주 1227]을 바라보니 산은 스스로 창오(蒼梧)[주 1228]의 눈물을 금하지 못하였다. 몇 리를 가서 사천천(沙川遷)에 이르자 돌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있고 나무들은 무성했다. 석양은 산을 가로 지르고 푸른 아지랑이는 절벽을 감돌았으며 시내는 흘러 출렁대니 이 또한 감상할 만했다.
옛날에는 도돈서 강변으로 대상리. 대하리로 돌아가는 길은 비탈이 물로 바로 떨어지는 곳이 많아 도로가 아니었으며, (천동 앞이나 하평 미륵땅도 같은 지형수준) 천동이 하평은 강 건너편에서 가기가 용이하지만 도돈서 내려가는 길은 천상 거슬갑산을 올라가서 대하리와 판운 사이로 내려 다니는 것이다. 이렇게 옛날에는 대개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 산마루로 다녔다 합니다.
그렇듯이 도돈 옥녀봉을 끼고 거슬압산 뒤편으로 넘어다니면 도돈서 대상리로 돌아다니는 것은 거리를 배로 단축시킬듯 합니다. 이 아래 강은 그림에 한폭같은 느낌입니다.
위 지명의 사천(沙川)은 대하리와 판운지점 사이이지만 평창읍내를 흐를때 평창강이라 하지만 일전까지는 사천강이라 불렀습니다. 지명에 모래 사자가 들어가는 것은 하류보다 상류지방에 많은데 사천강, 사현(沙峴/입탄)등.. 물론 하류퇴적은 당연히 모래이지만 상류에 종부뱃터거리에백사장등 귀한 모래톱들을 지칭하는듯 합니다.
또한, 다음으로 소개할 선비는 주진서 배로 건너 평창을 지나며 바로 평창남부의 천동, 도돈의 경치에 감탄을 합니다.
아니; 멋진 금강산을 보고 오면서, 이곳이 멋지다고 하는 이유는 무얼까?
필자는 어느날 도던 거슬갑산(거슬압산) 어느 카페에 앉아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평창의 경관을 감상하는데...
중도마치 아래 절벽에 상굴과 하험굴엔 임란때 평창 선인들의 항전의 함성이 들려오는듯도 하고 고즈넉스런 풍치에 매료되었다.
다만, 옥에 티는 아양정 아래의 적벽에 터널을 뚫은바 멀리서 바라다보니 그 아름다운 경관에 쥐구멍을 내고 새까만 쥐새끼들이 들락거리는듯 하는데. 1km를 돌아서 길을 만들었으면 안될까?? 인간을 편리케 하는 이러한 문명의 이기는 오히려 인간 감정과 정서는 무시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적벽을 노래하던 이태백은 쥐새끼 들라프락거리는 적벽엔 다시 오지 않은지 오래입니다.
조선의 선비들이 감탄하던 평창의 옛 모습을 우리는 똑같은 시상을 느낄 수 없슬 것입니다. 문명의 이기 때문에...
이것이 문명일까??
참으로 아쉬운 마음으로 거슬갑산을 내려 왔습니다.
여기서 평창의 풍광에 조금 보탠다면,,,
산방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는 평창,,,
우오의 햇살이 따갑게 내려쬐는 모습은 스펙터클한 장관을 이룹니다.
멀리 장암산과 대화의 남병산, 청룡산이 병풍을 치고 내려앉은 평창!
이곳을 보았다면 다시한번 보고픈 풍광입니다.
또한 주진 장암산 중턱에서 30여리 멀리 백덕산, 수정산까지 광홀한 공간
이 아름다음도 글로서는 부족하고 오직 눈으로 감상하여야 할 듯 합니다.
또한, 하평 막국수집 뒷편 묵은 밭에 올라서면...
이곳은 조선이 농업국가로 농업의 신을 받들고(사직씨) 임금을 대신하여 고을 태수인 평창군수가 농사를 짓던 사직터인바 이곳에 올라서서 필자는 와~~하는 함성을...
야~.. 여기가 바로 평창 일번지다.
누구나 이곳에 올라서면 이러한 함성을 자아낼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서 보면 노산뒤로 송계산까지 평창시내와 종부 산방산아래의 유동까지 넓은 개활지의 들녁이 한눈에 보이는 장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평창에서 고개 돌리지 않고 한눈으로 볼수잇는 가장 큰 지형은 이곳에서 바라볼때입니다.
어안렌즈 사진기로 찍는다면 무척 재미있슬듯 합니다
( 풍악록 2부에서는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 學이 뭐니도 모르고 그렇게 우기는...
방림역 편에서 위지보정의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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