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일록(東征日錄) (금강산 유람기중 평창부분 발췌)<東征日錄>
이병윤(李秉運)
<본문중 발췌>
나는 어릴 때 관동의 경치가 천하의 최고라는 소문을 듣고 일찍이 오매불망 그리워하였다. 근자에 고성 군수 류범휴(柳範休)[주 4091] 어르신이 동도주인(東都主人)이 된 일로 인해 더욱 명승을 유람할 염원을 갖게 되었다. 1796년(병진) 1월 24일 별과(別科) 응시 차 한양에 들어갔다가, 방향을 돌려 고성 관아로 가서 풍악산을 두루 유람할 계획을 세웠다.
2월 4일. 과거시험장에 들어가니, 임금께서 선비의 풍습이 이익을 좇는다는 것으로 교서(敎書)를 여러 차례 내리면서부터, 주관하는 여러 고시관이 단속을 매우 엄하게 했다. 군졸을 거느리고 과거시험장 안을 두루 다니면서 마구 붙잡아 형틀에 매거나 형조에 옮겨 가두는 데까지 이르렀다. 끝내 선비의 습속은 고쳐지지 않았는데 별 이유 없이 과거장을 파했다가, 다시 다음날(5일) 종장(終場)을 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어제 이미 임금의 엄한 전교를 받들었는데도 과거시험장을 파하는 사태까지 이르렀고, 오늘 또 아무렇지 않게 과거장으로 들어가니, 의(義)를 나누는 것이 매우 심하여 황송했다. 마침내 신가(愼可)와 함께 과거시험을 그만두기로 결의하였다.
초7일. 신가를 전송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떠나고 머무는 때에 마음속은 종일토록 편치 않았다.
초8일. 김현규(金顯奎)–자는 노첨(魯瞻)이다.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김노첨이 먼저 동소문(東小門)을 나가 오참(午站)에서 서로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오후에 동문을 벗어났다. 이는 집과 고향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길이고 부모님의 문안을 받들 방법이 없으니, 근심의 실마리가 마치 삼처럼 얽혀 있음을 깊이 느꼈다
----<중략>-------
<평창부분>
오후에 길을 떠나 강김(江金)을 지나고, 5리를 가서 구산점(丘山店)을 지났다. 5리를 가서 굴면점(屈面店)을 지나고, 5리를 가서 상제민원(上濟民院)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반정점(半程店)에 투숙했다.
이 주점은 대관령 중턱에 있는데 초저녁에 달이 보였다. 출발할 처음에는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죽서루(竹西樓)·망양루(望洋樓)·월송정(越松亭) 등 여러 명승을 두루 보고자 했으나, 노첨이 형세상 중도에 흩어지기는 어렵다고 말려서, 부득이 죽령(竹嶺)으로 길을 잡았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 원만하게 해야 하니, 그 일이 참으로 쉽지 않았다.
17일.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았다. 아래로 굽어보니 아직 거무스레하여 검었다. 오직 쇠잔한 산과 얕은 기슭을 보니 울룩불룩한 모습이 마치 개미두둑과 같았다. 동쪽으로 바라보니 한 곳의 바다가 일렁이더니 갑자기 땅에서 붉은 기운이 반사되어 나도 모르게 마음에 드는 점이 있었다.
10리를 가서 고개 위에 도착했고, 5리를 가서 횡계관(橫溪館)을 지났으며, 30리를 가서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이곳은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汀寺)까지 20리라고 했다. 10리를 가서 진부창(珍富倉)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淸心臺)라고 하였다.
20리를 가서 모노령(毛老嶺)을 지나고, 30리를 가서 태화관(大華館)을 지났으며, 10리를 가서 사초가(沙草街)에서 투숙했다.
18일. 가랑비가 종일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출발해 10리를 가서 방림(芳林)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배로 주진(舟津)-평창 경계이다. -을 건넜다.
10리를 가서 평창읍(平昌邑)을 지나고 안현(鞍峴)을 넘어 10리를 가서 약수(藥水)를 지나니 푸른 강과 푸른 절벽이 굽이굽이 볼만한 곳이 있었다. 10리를 가서 마지(麻池)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고, 20리를 가서 배로 사천(沙川)-원주 경계이다. -을 건넜다.
10리를 가서 아치현(峨峙峴)을 넘고, 10리를 가서 주천창(酒泉倉) 관저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5리 남짓 가서 샛길을 따라 20리를 가서 갈동(葛洞)에 도착해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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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이병윤의 <면재집> 권2 「동정일록」을 저본으로 하였다. 이 책은 1896년에 5권 3책으로 간행되었다
------------------<이해및 감상>------------
◆ 10리를 가서 고개 위에 도착했고, 5리를 가서 횡계관(橫溪館)을 지났으며, 30리를 가서 월정가(月汀街)에 도착해 정오에 말을 먹였다.
5리를 가서 횡계관을 지났으며 하는 기록에서 관은 역과 관의 역관을 지칭하는 것으로 선자령으로 횡계 고개마루 정상을 올라서서 5리를 지나서라는 위치적 서술은, 현 싸리재의 횡계 초등학교부근의 위치이며, 현지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횡계역이 구 고속도로 휴게소 부근이라 하지만 그곳이 아니란 점으로 다음으로 또 한 선비의 표현에서도 이곳 싸리재(축현)을 들고 있다.(다른 선비들의 산수 유람기편에서는 횡계 산등성이를 올라서라고 산등성이란 표현만 하는 문장은 3개의 유람기에 서술되어 있다)
◆ 10리를 가서 진부창(珍富倉)을 지나고, 10리를 가서 거억흘점(去億屹店)을 지났다. 물가에는 돌부리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고 청심대(淸心臺)라고 하였다.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 진부역은 거문리 앞 거커리로 고지도에 마방이 표시된 곳이라 주장하지만 고 지도는 비율적 스캔이 안되어 비례적으로 부정확한 바 점으로, 정원대가 주장하는 거문리앞 거커리의 진부역은 당시 조선선비가 지나면서 눈으로 보고 "거역홀점"이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거커리의 마방 표시 지역은 말에 야물을 줄 수 있는 사설 주점이란 뜻이다.
이번. 필자가 얄 열편의 조선 선비들의 산수(금강산) 유람기 평창부분 발췌는 일전에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책에서 방림역이 오류라고 방림주민이 문화원을 찾아와 진정하는 소식을 듣고, 그럼 기존의 주장하는 터에 대한 역사적 사료는 무엇인가 하는점의 조명이 미비하기에 필자가 알고있던 조선 선비들의 금강산 유산록을 소개하며 그 속의 문장에서 방림역을 고찰하였다.(동 책의 발간은 평창문화원이기에 방림 주민은 문화원에 찾아와 정원대의 책에서 방림삼거리터 주장은 오류라고 진정하였다고 들었다)
그 몇일후 어느 통화에 통화자는 역사단체의 진부역 답사버스에 올랐다고 하길래 어디를 가냐고 물었더니 청심대로 간다더라고 한다.
그러면 청심대에서 진부역 고찰에 이해가 미진하다면 진부역 고찰을 해 줄테니 청심대 내려서 읽어 보세요하고 바로 쓴 글이다. 이렇게 필자는 정원대의 인문지리 증보판까지 오류를 낱낱히 파악하고 있었다.
정원대의 인문지리 책에는 많은 역사가 잘못되어 있는바 본인은 이미 모두에 대한 비평글을 기록하였다(아직 비 오픈) 그런데 정작 저자는 자기 책의 오류를도 잘 모르고 있다..
평창의 인문지리책 초판본에 오류가 있다고 동 책을 수정책을 내겠다고 군청에 쫒아가 예산을 다시 달라하여 아마도 수정판 책을 낸다고 감히 예산을 누가 줄 수 있는가? 그러기에 증보판이라 했는데 증보판 책에서도 초판본의 오류들이 다수 그냥 올랐다. 한번의 실수는 어쩌다 할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모르고 오류의 논고를 하는,,,이러고도 평창의 역사서를 또 쓴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국가예산으로 하는게 한심스럽다.
그 하나의 예로 저자는 필자와 함께 지난해말 용평면에서 율곡의 고향마을 세미나를 하였는데, 그러한 사람이 동 책에서 율곡 남매는 6남매라고 여섯명을 차례차례 서술하였는 바 수정판에서도 동일하게 6남매 그대로 오류의 기록을 하고 있다.
율곡의 형제는 4남3녀의 7남매로 정원대가 주장하는 6남매는 오류로서 명백한 오류인바 증보판에서도 수정도 안 된점으로 자신의 책의 오류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증보판 오류는 초판본보다 더 많을듯하다.
필자는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평창 역사의 정립이란 대명제에 앞으로 필요한 시점에서 평창의 인문지리 책의 오류에 대하여 모두를 밝힐 것이다.
평창역사의 바른 정립이 필자의 역사추구의 이상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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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과거 시험이야기>
위 본문의 조선 과거 시험장의 진풍경은 어쩜 이 나라의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듯하다. 그것은 한 나라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위정자들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위정자들의 안이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정말로 국가와 국민의 장래를 바라는 마음인데, 이를 이해하기위해서는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등을 죽이고 국가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것은 그의 말을 빌면 조선의 혁명이 안착이 되지않고 다시 혁명이 일어난다면 국민은 도탄에 빠질것이라는 위험에 처하기에 이방원은 이러한 서슬퍼런 노력은 일개 왕으로서의 영욕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사명감으로 느껴진다.
조선의 이성계는 당시 백만 조금 넘을듯한 팔도 이나라의 평화와 백성을 위한 노력이었지만, 고려 왕건도 같은 마음이었슬듯하다. 아래에 인용하는 왕건의 훈요십조란 백성이 도탄에 빠지거나 위기에 처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훈요 십조를 남겼다. 모두들 아는 단어이지만 훈요십조의 제8항을 다시한번 보도록 한다.
훈요8조: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외(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후백제의 합병)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徭役)을 면하거나, 혹 왕후·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하지만 요즘 말로는 지역적인 편파라 하겠지만 그는 삼국을 처음으로 통일하면서 후대 왕들의 성흥과 이땅의 평화를 위한 마음에 후대왕들에게 10계명의 훈요십조를 남겼던 것이다.
이렇듯 왕의 지위에 오른 대부분의 왕들은 정말 만 백성을 위한 마음이었고, 또한 만 백성을 위함에 최선의 정도의 하나는 교육과 과거의 공평이 대업의 하나로 여겼던듯 하다. 그것은 과거제도가 조선 역사의 전면에 한 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성종때 경국대전의 법령반포로 중앙집권화를 하였다는 말은 뒤집으면 그간은 중구난방의 시대였으며 하나의 법령 반포는 경상도나 전라도 모두 동일한 하나의 법적 조항아래 균등했으며, 이러한 시대사가 조명되면서도 훈구세력의 자손만대 지위를 보장받는것은 문제로 대두되었고 성종조에서는 조광조의 사림파가 등용되며 급기야는 위훈삭제까지 하게되었다.
나아가 조광조는 이상주의로 혁신을 주장하며 그러한 정책의 하나로 과거제를 폐지하고 현량과를 신설하였다. 현량과란 과거 시험에의해 선출되던 인재양성이 선출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아무래 선출방식의 인재등용이란 아무리 객관적 노력을 기울여도 주관적 관점이라고 오해의 여지는 있슬터인바 중종때 삼부수장과 우찬성 고형산은 조광조를 이상주의에 현량과의 이론적 배경을 요구하자. 그는 근거를 제시 못하였으며 이로서 조광조의 이상주의는 혁파되었다.
( 우찬성 고형산은 필자 문중의 어른으로 영월 고씨동굴의 고종원 형제의 증조부로 한 집안에 타의 존경이 되는 위인이 있슬시 의병장으로 추대되는 경향이 있기에 고종원 형제도 의병을 하기에 지역세력이 가담할 수있었다. 또한 고형산은 종 1품에 우찬성시 고향 횡성에 계신 노모가 편찬으시기에 사표를 고향으로 돌아가자 조정에서는 우찬성보다 3단계 아래인 강원 관찰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관찰사 임기 1년안에 자비로 관동대로(서울~강릉의 경강로로 현재도 경강로임)을 닦았다. 종래의 길에서 도로가 생기고 병자호란시 청나라 군대가 배로 주문진항에 삽시간에 서울로 들이닦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중종이 대노하자 횡성의 고형산 묘 봉분은 파헤쳐지고 남아나질 못했다. 그이후 중종은 경강도로가 오가는 사람과 물자가 많아 국가경제에 이바지하는 힘이 크다고 고형산의 사후에 사방 십리의 사패지와 위열공의 휘홀ㄹ 내렸다 한다. 이러한 익장공 고형산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인물이 되자 그의 후손들은 의병모집에 의병장이 되는 것이었다. 현 영월 고씨동굴 입구에 고종경 임진 창의비문이 있는바 아래 비문은 명문울 못쓰고 고씨 가문 족보를 쓰는 베껴 기록한 바 영월도 글쓰는 사람이 그렇게 없는가??)
위 선비들의 과거 시험장에 임금은 중종으로 과거시험장의 분위기는 말이 아닌듯 하여 임금이 직접 기강을 잡으려고 군기반장 노릇을 하는 기 현상의 풍경도..
이는 조광조의 현량과가 혁파되고 과거 시험의 엄숙한 권위도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임금은 과거의 공정성이 나라를 살리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행동을 하였다. 당시는 중종이 과거시험장이 어떤 측면에서인지 문란하다고 시험장에 날뛰고 돌아다니며 형조에 가두었다 한다. 아마 지금 조용한 가운데 컨닝은 할지 몰라도 이러한 시험장은 없다. 옛날 사람들이 더 문란해졌는데 그 이유의 하나는 과거제도의 병폐의 문제가 노출되는듯 합니다.
당시는 중종이 과거시험장이 어떤 측면에서인지 문란하다고 시험장에 날뛰고 돌아다니며 형조에 가두었다 한다. 아마 지금 조용한 가운데 컨낭은 할지 몰라도 이러한 시험장은 없다. 옛날 사람들이 더 문란해졌는데 그 이유의 하나는 과거제도의 병폐의 문제가 노출되는듯 합니다.
조선시대의 전체적 역사 흐름에 가장 문제중 하나는 이러한 과거제의 문제이다.
조선초 훈구, 사림의 기용과 인재 등용에 문제가 종내에는 사색 당파와 붕당정치로 치닫고 종파는 자기내 이익을 위하는 정치술을 부리고, 임금이 하는 일이냐고는 주머니에서 사약을 꺼내는 붕당정치의 꼬붕으로 청소부로 전략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과거제는 성공을 거둔 제도가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혁신적인 인재등용이 아니라 붕당에 당파싸움만 얼룩지는.. 그래서 모함하면 바로 귀양살이 가는등,, 인재등용이 제 능력을 갖추지 못한 문제가 국가 위상에 반영되어 그 고리가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과거제도가 권위를 가지는 양반 통치의 한 방법이 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나마 좀 바른길로 들어섰으리라.
성종때 경국대전에 법으로 과거제 실시가 반포되었지만, 이후 숙종시대 속대전에 의하면 경기지방에서 과거제는 폐지되었다한다. 과거제는 한 지방에 국한되지않고, 전체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또한 김삿갓이 백일장 장원 급제하였다는 글의 원문도 없지만, 일개 郡에서 백일장이라하면, 이는 과거시험을 뜻한다. 그런데 숙종때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면 이후 순조시대에 영월에서 백일장은 없었어야 하는 점이다.
또한 율곡의 부친 이원수 공은 강릉에서 한양에 과거를 보러 다니기에 거리가 멀어 중간지점인 봉평 백옥포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하는 우수개 소리에 문제는 두가지로 그 하나는 현 장평으로 다니는 길은 없엇고 조선때는 대화에서 청심대를 넘어 진부로 다녔딩[ 봉평은 왕복 벡여리를 더 가져야 하는데 길이 멀러 중간지점이란 논리는 비 논리로 판명이 난다.
또한 과거의 사마시나 중광시등 초시는 각 지방을 돌며 향시로 선출하여 성균간 유생의 자격이나 진사, 참봉이 되고 햔양에서 과거시험은 3년마다 본과의 대과 시험을 왕앞에서 치른다. 그러면 이원수공은 초시 급제 기록도 없는데 이는 글쓰는 사람의 무식의 소치일뿐이다.
이렇듯 과거제도에 대해서 우리는 잘못 알고있는 비상식도 많거니와 조선이라는 한 나라는 인재등용이 바른 정치의 시작으로 알고 위정자들은 노력을 하지만 이 부분이 미진하여 고른 기준으로 인재등용을 하지 못하엿기에 왕은 허수아비가 되는 붕당정치의 폐혜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되었다.
어떤 학자는 붕당정치가 상당한 기술의 정치론이라 예찬하지만 그것은 긴 이야기가 아닌 위에서 언급처럼 간단한 상소의 소차로 모함하면 그에 입증은 없고 귀양보내는 로봇 임금에 붕당은 서로의 이해득실만 파고 들어 조선은 몰락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기에 한나릐의 기강의 시작은 인재의 고른 등용방법이 국가의 수명에 영향을 끼친 점을 볼 수있다.
그러기에 위 예문의 이병운이란 선비도 평생 학문만 하였으나 조정에 나가지는 않았다.
월정사 유람기에 김창흡, 그의 형 창협등 6창으로 불리는 형제는 조선시대의 문인으로 부친 김상헌이 사사되자 장자만 현직에 있다가 이후 영의정까지 오르지만 아래 5형제는 모두 관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산수유람으로 일관하였다.
조선이란 나라는 시대사적으로 많은 소모와 낭비를 가진 비 합리적인 나라로 보여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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