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이 고뇌의 강을 건너 닙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 진흙속의연꽃 04.14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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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上) - 전소과정과 불사 시작
세 차례나 잿더미…불심으로 다시 세웠다
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과 풍광이 뛰어나며 오만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 신성시 해왔다.
오대산의 중심 사찰이 월정사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고려 조선 때 화재…6.25땐 국군 초토화작전에 수난
<일제시대 월정사 전경. 당시 월정사는 근대 교육의 산실로 한국불교를 주도하는 중요 사찰이었다.>
고려 충렬왕 33년(1377)에 화재로 모두 타버린 것을 이일스님이 중창했지만 조선 순조 33년(1833)에 또다시
큰 화재를 입었다. 헌종 10년(1844) 영담.정암 스님 등이 앞장서서 중건, 대찰의 모습을 다시 회복했다.
1911년에는 전국 31본산 중 하나로 강원도 남부 사찰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억불정책 속에서도 한국 불교를 이끌어왔던 월정사는 근세 현대교육의 중심지며 포교 중심지로 활약했
다. 일제시대 월정사는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된 한암스님과 초대 총무원장을 지낸 이종욱 스님
등 주석하는 한국불교의 중심 사찰이었다. 특히 승려교육에 진력, 불교전문 강원을 설립하여 20~30명의 스님
들에게 내 외전을 전수했다. 국어 영어 수학 역사 등도 가르쳤으며 교수진에는 서경보 스님 시인 조지훈 등이
있었다. 사하촌과 멀리 강릉 등에서도 유학해 70여명이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용금루 서별당에서 생활은 동
별당에서 했다.
전후 폐허속에 스님-대중 힘모아 법당부터 마련
정화운동 마무리된 60년대 이후 불사 본격 착수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을 맞아 목욕탕 1동을 제외하고 칠불보전을 비롯한 21동의 건물과 성보문화재가
모두 잿더미가 됐다. 남과 북이 대치하는 지점에 위치한 오대산은 전쟁 전부터 격렬한 전투장이었다. 북대
미륵암과 사찰 위 회사거리 사찰 아래 동산 2구 등에는 각 1개 중 소대가 주둔할 정도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오대산이 곧바로 북한군 점령지역으로 떨어져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다 유엔군의 1차 북
진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밀려 남으로 후퇴하는 과정에 결국 피해를 입게 된다. 조계종 총무원이 펴낸〈한국
전쟁과 불교문화재〉 강원도 편에 따르면 “1951년 1월2~3일 경 오대산중은 여기저기 소각되는 산내 사암
과 민가들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피난민들로 아비귀환이었지만 월정사는 소각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소각을 면하고자 하는 월정사 대중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월정사가 가진 역사직 지역적 위치 때문
에 국군이 주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이 책은 하지만 “국군의 명령을 받은 민간인 3명에 의해 결국
22동의 전각이 불탔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의 소각을 명령한 책임자는 미8군 사령관 워커와 이를 하달받아
예하 부대에 지시한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라고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두 사람중 워커는 초토화 명령을 하달한 다음날 서부전선 시찰도중 자동차 사고로 숨지고, 김장군은 경비행
기로 이동하다 대관련 인근 발왕산에 추락사 했다고 한다. 그 후 사찰 전소시킨 업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고인의 아들이 월정사에 와 참회하고 위패를 월정사 무량수전에 모셔 놓은 상태다.
<한국전쟁 직후의 월정사. 탑만 남았다.>
전선이 오대산 위로 물러 난뒤 피난갔던 월정사 대중들이 모여들었다. 남은 것은 욕실 두칸 뿐이었다. 월정
사 대중들은 칠불보전 터 뒤쪽에 작은 토담을 지어 거주했다. 아직 복원불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부처님을 모실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휴전을 전후해 동별당 터에 18칸
60여평의 기와를 얹은 인법당을 지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스님과 대중들은 법당부터 마련했던
것이다. 당시 먹거리는 강냉이를 갈아 만든 밥이 전부였다. 목재는 오대산 전나무를 직접 고르고 다듬어 만
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스님들은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
5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월정사에도 정화 바람이 불었다. 인법당에서 함께 살던
비구 대처는 이후 따로 지내게 됐다. 인법당은 비구스님들이 머물렀다. 갈곳을 빼앗긴 대처측은 서둘러 거
주처를 마련하게 됐다. 대처측은 1957년 동별당 즉 인법당과 마주한 서별당 터에 50평 가량의 함석집을 지
었다. 공양도 법회도 전부 따로였다. 하지만 험악하게 굴지는 않았다. 당시 만화스님을 은사로 갓 출가한 관
음암 선덕스님은 “함께 공도 차면서 화목하게 잘 지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월정사의 핵심인 칠불보전 복원
불사는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1962년 정화가 마무리 된 뒤 본격적인 월정사 불사가 시작됐다.
그 이전 월정사가 국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안 이종욱 스님은 정부당국에 월정사 복원 건의서를 냈지만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1964년 1월9일 월정사에서 개최된 제1회 승려특별강습회 사진 속의 월정사. 적광전 불사가 시작되기전 모습이다.>
불사가 시작될 당시 월정사 주변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월정사 주변에는 회사거리라는 큰 마을이 있었다.
행정구역상 동산2리였던 그 마을은 260호 가량됐다. 평창군내는 유일하게 파출소를 둘 정도였다. 일제시대
오대산 나무를 실어나르기 위해 만들었던 제재소가 전쟁 후에도 존재했다. 당시 월정사 산감을 지냈던 장길
환씨는 “계림 목재 회사라는 제재소가 있었으며 일제시대 30년에 걸친 벌목으로 인해 박달나무는 씨가 마를
정도였지만 그래도 수령이 오래되고 좋은 목재가 많았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오대산 산림을 벌채하기 위
해 상원사까지 협궤레일을 깔았는데 전쟁 후에도 레일을 그대로 이용했다.
마을 주민은 많았지만 변변한 공장 한 곳 없는 시절이었다. 먹을 것도 턱없이 부족해 오곡밥 칠곡밥도 없어서
못먹었다. 깊은 산골인 월정사는 신도도 거의 없었다. 돈은 없었지만 풍부한 목재와 노동력이 있었다. 월정사
불사는 이같은 조건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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