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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4) 월정사 8각9층 석탑에 대한 석등의 허상은???

4) 월정사 8각9층 석탑에 대한 석등의 허상은???

 

 대개 사찰의 중앙에 불탑과 더불어 배치되는데, 법당이나 불탑 앞에 설치하여 부처님의 광명

을 상징한다는 뜻에서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불린다

 

 

 

오대산의 비로(최고)봉으로 부터 발원하여 우리나라 최대 명당이라는 적멸보궁을 돌아  30리를 뻗어

내린 장엄한 토산의 용이 주작으로 내려앉은 동대 만월산의 자락에 꽃피운 월정사.

 

월정사 법당과 국보 제 48호의 8각9층 석탑과 그 탑에 세존사리를 모시고 1,200년간 공양을 드린다는

석왕보살론의 보물 139호의 석조 보살상과 이번 중창공사에  새로이 건립된 탑파를 밝히는 석등은 월

정사 중창한 줄의 씨리즈물로 고요한 산사의 사찰에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의 실체는 허상의 꽃으로 만든 이번 중창의 경계석과 보살상에 이어 마지막으로

석등의 내면모습을 해부해 본다.

 

1,4후퇴시 국군이  소각한 칠불보전과 요사체 17채의 당우를 전란이후 미약한 대웅보전으로, 또한 70

장만허 스님과 탄허스님의 적광전 중창, 법당의 규모는  전면5칸, 측면 4칸의 큰 불당과 탑신의

해체 복원 공사이후 다시금 옛 당우만큼의 요사체및 탑의 제반적 중창을 단행하였다.

 

이때 적광전은  15m의 8각 9층 석탑의 크기의 비례의 알맞은 전면5칸의 적광전 공사가 힘에 붙였어도

가장 알맞은 비례로 공사를 단행함에 찬사를 보낸다.

또한 이 석탑을 고구려풍의 팔각당형이라는 이국적 풍의 해설이 최고 였으나  윗글에서 나는 다른 해

석인 송나라의 선진문물이 밀교적( 잡밀)인 화엄불국의 고려당시 유입되었다는 해석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신라의 효명(후일 성덕대왕)과 보천태자( 보천은 아호이며 정신태자라 함)로부터  진여원

상원사가 있다면 하원도 있었슬것이고 기에의한 하원 문수갑사가 월정사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절들 앞에 철판의 안내문에 검정글씨를 읽노라면 선덕여왕시절 자장율사가...)

다만 자장율사는  이곳 월정사를  다녀갔다는 기록만 있슬뿐. 그가 월정사나 하원 문수갑사를 건립이

중창이란 말은 어느 기록에도 찾을수 없기에 월정사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한,,,이런 해설

의 가이드 책은 맞지 않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장 " 탑의 곡선의 미" 에서 다루어 본다>

 

자 이제 월정사의 석등의 문제를 밝혀 보겠다.

등(燈) 이라 함은 불을 사용하여 어두운 곳을 밝게 하는 조명기구로서 석등은 인간이 자연속에서 개발

한  불을 관리하여 어둠을 밝히려는 욕망으로 신(神)만이 만들수 있는 ( 서양의 5대원소...火,水,土,,)

불을 인간 스스로 관리함으로써, 문명의 상징으로, 종교적인 진리의 상징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등지 인연경>에서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부처님의 진리를 비춰줌으로써,善한 길을 택하게 하는 것

이며, <조상경>" 상삼조상품 15칙"에 불자가 역리를 받아 지옥에 떨어져 돌아올수 없어도, 등유를 구

하며 부처님에게 공양한 사람은 그 죄가 사해질 것이라 하였다.

즉, 석등이라면 세존의 사리탑이나 법당등에 등밝힘의 기구로서 부처님에게  공양의 우선이다.

 

이 석등은 인도에 2기, 중국에도 2기 정도 있으나,  우리나라엔 무려 280기가 존재하기에 가장 한국적

소의 조형물이라 할수있으며,또한 능묘 석설에서는 장명등이라 한다.

 

< 현우경>에 의하면 권세있고  돈 많은 부자가 화려한 등 여러개를 하는 것 보다, 헐벗고 가난한 자들

이라도 진실한 마음의 등불 하나 하나가 끝까지 어둠을 밝혀주는 불타의 진리의 불빛으로 묘사되 있다. 

이는 가난한 자들이라도 골고루  한개씩 하는게  좋다라는 부처님의 생전의 말씀에  의하여 세존을

모신 법당앞 계단 중앙에 한개의 석등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고 그것이 신라 석등에서 부터 근래까

지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으나 80년대 부터는 쌍으로 하는 유행이 생겼다.   

 

 

 

석등의 전통 석등의  양식에 기본은 불국사 대웅전의 팔각 석등이 기본이며, 이는  석주의 간주석과 화

석,하대석 모두가 팔각 당형입체를 이루며 이는 신라  전통양식의 기본형이다.

또한 불국사에서 보듯 석등은 본전불사의 앞 마당 중앙에 하나만 조성되어  가난한 백성도 골고루 하나

등 공양이란 < 현우경>의 부처님 말씀을 잘 따랐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70년대 중창시의 월정사 적광전에 석등도 전통양식의 팔각 석등을 적광전 양 옆에

2기를 설치 하였으며 월정사 삼성각엔 간주석이 고복계형 ( 장고형)의 석등이 삼성각  중앙에 1기 조성

되어 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한개씩의 등을 골고루 공양하는 생각에서 옛날의 법당엔

나의 등을 설치 하였는데 아마 1970~80년대쯤에 꼭 두개씩 쌍의 석등을 설치 하게 되었다.

그 이유야 알수 없지만 돈이 많아지는 현대 사회라 두개의 석등도 모자랄까??

이것이 빈둥대는 말만은 아닐 것이라.

아마 20년전쯤 평창에서 가까운 주천 법흥사를 구경갔었는데 요사체 앞에 종은 상원사 비천무늬를 보

끼기에 바빴고, 육안으로 보는 그 종은 볼품도, 무게감도 시원하지 못 하고 상원사의 종 보다는 가

볍게 보였다.

얼마나 좋은 소리가 나는가 탕 하고 쳤더니.. 내 친구는 혼날까 도망가기 바빳고,, 그래도 그치도  종이

맥놀이 울림 현상이 한 3분 움직이는....마치 지축을 흔드는 기상의 소리가....

 

그 종의 아래엔 정치인 누구, 대통령 누구의  하사품등이 쓰여있고,  법당의 석등도 2기에 하사품이란 

있는 필체가 자리잡고 있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왜냐면 초라하기 그지없이 해 놓고 이름만

직한게...하기사 신라 진평왕도 연등회때 석등을 하사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제는 석가모니의 말씀을 거역이라도 하며 석등을 두개의 쌍으로 만드는게 유행이다.치부인가? 적선

가??  낙산사 경내의 마당엔 무려 3개의 쌍, 여섯기의 석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근래의 월정사 중창에서도  석탑에  대한 석등  한쌍을  제작한듯 한데  그 위치는 법당 양 옆으로 밀

듯 하다,  지금까지의  석탑들의 석등은 그 석탑 한 변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법당의  부처님에

대한 석등은 원래 있는데 이 거대석등의 위치로 보아선 석탑의 석등인지 구분이 애매모호하다.

 

전통양식으로 이해하여 본다면 탑파의 석등은 1기가 석탑앞에 모셔져 공양을 해야 되는것이 아닐까??

그런데 팔각구층 석탑엔 한쌍의 거대한 석등 적광전쪽으로 밀려 세워진듯 하다. 왜냐면 적광전엔 이미

한쌍의 전통양식의 석등이 있기 때문이며,  이 이 거대 석등은 사진으로  보는 나로서는 정확한 재원이

야 알수 없

지만 그 높이는 약 3,5m 이상인 듯 \하며 무게는 약 10톤쯤 나갈 것이다.

 

근래에 유행되는 석등들,,, 봉은사 불상에 대한 석등과 신흥사의 석등등 모두들 이런 거대 석등들이다.

그러나 그곳들의 거대 석등들은 본체의 규묘에 비례하여 무리하지 않는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월정사의 8각9층탑에 대한 석등은 석탑이 15m인데 비하여 석등이 3,5m를 넘는 석등으로 그것

석탑의 상단부의 보륜, 보개를 제외한 각 층의 면석의 비로 볼때는 배꼽이 배의 1/3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거대 석등이 탑의 중간에 세워지면 그 탑은 보살상과 석등에 포위되는 형이라 석등이 법당앞으

밀려가지 않았슬까??

 

이는 ( 석등과 보살상의 부피가 커진것은) 곧 기존의 법당과 8각9층 석탑을 작게 보이는 요소들이 되었

다. 세존보다 보살들이 잘 먹고 산다는 뜻일까??

나는 이 점을 거부하기에 지금까지의 글을쓰고 있다.

 

 

* 맥놀이 현상은 소리의 간섭의 영향으로 그 중간파의 연속됨으로 마치 거울앞에 거울을 비춰서 연속적

  거울모습이 보이는것  같이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리는 현상으로 천재 수학자 맥스웰이 그 값의 방정식

  을 구하였다.

 

 

 

위 사진이 새로 제작된 팔각 거대 석등이다.

나로서는 실물은 보지 않았으나,  이 사진으로 보는 석등의 장중미는 있으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양식적,

미적(美的) 결함을 검토해 본다.

 

이 석등의 옥개석및 화사등은 팔각이며 간주석은 이형으로 용(龍)을 오브제로 채택하였으며 하 지대석도

으로 조각되었다.

용을 채택한 조각으로는  비석의 상단귀두석에 용이 구름을 뚫고 자연스레 휘 감는 조각상은 있지만 <아

사진 참조> 석등엔 균형적 美를 맞추기 곤란한 점들이 있는듯 하다.

 

위의 왼쪽 사진이 이 석등의 전면부인듯 하며, 용의 머리와 앞 발들이 마치 목이긴 학처럼 조각되어 있는

용의 머리가 하늘을 승천하는 기상이 아니라 축 늘어지고 두마리 용이 키스를 하듯 보인다.

물론 용의 머리부분을 이런 형으로 그린 그림들도, 조각들도 있긴 하지만 처진 용의 도식적 형상보단 의

백백 하늘로 승천하는 좌청룡의 기상을 조각함이 옳치 않을까?? 龍은 龍 다운 모습이라야...

 

위 석등의 사진을 보면 네마리의 용이 2열 종대로 나란히 보이는데 이것은 하 지대석의 용 두마리와 그라

데이션처럼 느껴지는 그 위의 간주석의 용 2마리가 줄 맞춰 나란히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도식적인 장식기법으로 실상 용들이 존재한다면 이리 훈련이 잘 되었슬까?

아래의 비석사진의 용처럼 구름을 뚫고 들락거리는 용처럼 모든게 자연스레 보여야 좋치 않을까 한다.

 

미술과 조형에서 이런 질서는 매너리즘( 자동기술)이다. 즉 미학적으로는  아무 의미없는 장식적 기법인

이다. 또한 용아래의 둥그런 구슬은 무엇일까??  용의 놀이기구인 여의주일까 아니면 용의 비늘일까,

하늘의 구름일까?? 물론 용의 비늘의 형상화일 것이다.

그런데 종과 횡을 맞추어 너무나 가지런히 놓았기에 도식적일뿐 의미가 상징화되지 못하였다.

 

더욱 가당치 않은 것은 용이 아마 장고형쯤( 고복형)의 간주석 기둥에 붙어 박제된 느낌이다.

왼쪽의 사진에 하 지대석의 용이 꿈틀 살아 숨쉬는듯 하지만 장고형의 간주석에 딱 접어놓은듯한  용을

있다. 360도 구부려진 용이 어찌 살아 있슬수 있슬까??

그게 살아있다면 기형인 것이다. 아마 죽어 박제를 해야 구부려질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

반의 감상에서 비주얼적(시각적) 느낌의 버플을 느끼는 것이다,< 기형의 의미는 이미 전장의 석조 보살

상에서 논 하였다>

 

또 한 부분의 이야기는 이 석등의 팔각등의 한 면엔 세호가 내려오고있다. 이 세호(細虎)는 가는 허리의

호랑이란 의미로 의미의 기록은 전혀 찾아볼수 없지만 아마, 등을 지키는 가는허리의 즉 날렵한 호랑이

란뜻이 아닐까 한다.

이 석등의 완전 입체 조각의 두상만으로는 세호라 할수 있슬까??

부조나 릴리프가아닌 완전 조각상의 호랑이를 세호(細虎)라 할수 있슬까??

 

농담으로 한마디 덧붙이면, 저의 선조의 묘소에 석물 설치시 망주석의 길다란 세호를 보며 석공에게 아

저씨,,, 이게 무슨 동물이예요 하고 물으니 다람쥐란다... 배고플때 내려와 꿀참 도토리 주워 먹으라 붙여

조각했단다. 무엇을 조각하며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참 우서운 일화이다.

 

월정사 전경 사진으로는 확인이 않 되는데 팔각형의 뒷면엔 세호가 올라가는 형일까??

내가 아는 양식으로는 그러면 않 된다 세호는 좌우에 한쪽(좌)의 석등에선  올라가고 다른쪽 석등에선 내

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팔각등의  빈 면을 장식하고들 있다.

그래서 한쌍의 호랑이면 지키기에 충분할것을 네마리의 용이면 서로 먹이 싸움뿐( 언제나 농담은 활력소라,,)

 

이러한 중대한 문화유산의 공사에 앞서서 전문 조각가의 모형도 제작과 이에 심의가 미필된 느낌

이다. 우리는 이러한 조형품을 천년후 후세까지 전할수 있슬까??

우리시대를 못 넘길 문화적, 조형적 가치가 없는 우리의 미학이고 문화의 양식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이 이를 진정한 문화적 가치의 유산으로 받아들일까??

다시금 자문해 보아야 한다.

 

 

 

 

< 사진 설명>

진천의 보탑사 대웅전 앞의 석등은 전통양식을 따른 팔각석주의 팔각등으로 본전 앞 중앙에 1기만 제작 설치 하

였다.어느 건설사의 노력으로 다층 대웅전을 건설함에 지금의 유행으로 석등을 양쪽에 2기의 한쌍을 제작함엔

그리 힘들지 않았슬텐데...

현우경의 부처님 말씀대로 가난한자도 모두 한개씩의 등을 공양하는 의미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또한  경남 고성의 달마선원의 용 석등의 사진은 월정사 석등과 비교해 볼때 분명 둘의 사이엔 누가 먼저인지

한쪽이 모사( 이미테이션)된듯한 기분이고 아마 달마선원의 석등이 먼저 제작된듯 하다.

 

 제일 아래의 용의 조각 사진은 묘적사의 공적비이며,< 묘적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하고 효종의 북벌 계획시엔 

승병으로 위장한 군사들의 주둔 사령부로등의,, ,>

비문의 면석의 윗 부분으로 두마리 용이 하나의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모습인데, 구름과 용의 비늘이 대조적

으로 드러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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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근래의 중창중 조형물들중 이전의 팔각구층 석탑 난간석의 문제와 석좌 보살상의 허상과 이 글,

석등의 허구를 고찰 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은 이형이 아닌 우리 문화중 가장 아름다운 탑인것을 쓰며, 과연

우리는 탑에서 무엇때문에 탑의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는 탑의 생명선은 무엇일까??

또한 역사적으로 보는 월정사는 모두들 선덕여왕시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점을 소

상히 그려 보겠습니다.

아울러 월정사 이야기 3편을 스크랩 하여 첨부하는데... 이는 아주 찾기 힘든 글로 어느 스님의 6,25 전후

의 상황을 두편, 또한 70년대 중창시 감독학자님의  얼정사 팔각구층석탑 해체 보수 공사시의 세밀한 리

포트를 스크랩 하여 올립니다.

또한 아울러 이 일련의 월정사 중창에 관한 저의 느낌의 글들이 공사에 고생하신 여러분들의 노고를 성

토함이 아니라 진실에 가까워질 저의 월정사 사랑이란 점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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