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 田 의 문 화 일 기
◈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八角九層石塔의 의의. 정 영 호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1. 序言 강원도 平昌郡 珍富面 東山里 月精寺 大寂光殿 바로 앞에 八角九層石塔이 건립되어 있다. 이 석탑은 각부 구성에 있어서 어느 塔보다도 우수하며 多角多層石塔을 대표하는 한국 유일의 석탑이어서 국보 제48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月精寺 창건과 그후 중창에 관해서는 월정사에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여 잘 알 수 있는 바 그 내용을 간단히 요점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新羅善德女王十四年乙巳 慈藏律師入此山 奉安佛頂骨于中臺寂滅寶宮 因創月精寺 建八角十三層石塔 奉安佛舍 利三十七粒…… ② 新羅聖德王入此山 重修月精寺…… ③ 高麗太祖六年癸未 信孝居士重建 ④ 同忠烈王二年丙子 信義禪師三創 ⑤ 李朝太祖元年壬午 有緣大師四創. 定宗二年庚辰 太祖幸行特賜連谷縣 土地二十結 爲寂滅香火資 ⑥ 肅宗十年甲子 淸河禪師五創 ⑦ 英祖二十年甲子 回祿自朝家 重建 同二十八年壬申 記功 純祖三十二年壬辰 泳潭·仁坡·靜奄 諸禪師七創 즉 신라 善德女王14년(645)에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동시에 8각13층석탑에 佛舍利 37粒을 봉안하였다는데 여기의 13층석탑은 기단부를 탑신의 층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聖德王이 월정사를 중수하였 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는 太祖6년(923)에 信孝居士가 중건하고 제25대 忠烈王2년(1276)에 信義禪師가 三創하였 다. 조선시대에는 太祖元年(1392)에 有緣大師가 四創하였고 제2대 定宗2년(1400)에는 太祖가 幸行하여 連谷縣의 土地二十結을 특사하여 上院寺에 속한 寂滅寶宮의 香火資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19대 肅宗10년(1684)에 淸 河禪師가 五創하였고 제21대 英祖20년(1744)에 回祿된 것을 朝家에서 英祖28(1752)에 六創하였으며 제23대 純祖 32년(1832)에 泳潭·仁坡·靜奄 등 諸禪師가 七創하였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월정사에 전해진 기록에 의하면 三國期 신라시대에 자장율사의 창건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1355년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現今에 이르러는 고 신라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이른바 창건 혹은 초창 당시의 유적 유물은 별로 조사됨이 없이 가장 오래인 유물로 고려시대의 기와편들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8각9층석탑은 아쉬운 월정사 고대 역사의 부족한 자료를 크게 보완하는 귀중한 유적 유물이라 하겠다. 월정사 8각9층석탑은 천년을 지나면서 여러 전란과 화재를 겪어 각 부분에 훼손을 보게 되었다. 더우기 6·25 동란 때 군인들의 사격 표적이 되어 상륜부의 금속제 용차와 보주등이 총탄에 맞아서 파열되었고 보개석도 8각에 여덟 모 만이 겨우 보존되고 꽃문양들은 파손된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아 동북방으로 약간 기울어졌고 오랜 세월 風磨雨洗되어 풍화작용이 극심하였다. 특히 옥개석 부분에서는 각층을 볼 때 완전한 층이 적고 파손된 층이 많았으며 각층 옥개석의 8귀 전각에 달렸던 풍탁이 거의 半 이상이 결실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든 점에서 이 석탑을 전면 해체 복원하는 사업이 결정되어 1970년 10월3일에 해체 작업이 착수되었던 것이다. 이 석탑을 해체할 때의 월정사 상황을 살펴보면 월정사 기록에 보이는 七創의 건물들은 6·25동란때 모두 소실되 고 당시 住持 장만화스님의 노력으로 법당이 새로 건축되었으며(전면5間, 長18.25m, 측면4間, 長14.60m) 이로써 8각9층석탑은 법당 바로 앞에 서있는 석탑이 되었다. 석탑 남쪽 앞에는 보살좌상이 기울어진 채 안치되었고 동쪽 에는 승방과 객방을 겸한 요사 한 채가 있었으며 동쪽 80m되는 곳에는 四天王門이 세워졌으나 단청을 못한채 좌우에 각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성하는 중이었다. 오늘에 이르러 월정사는 원위치를 찾아 건물을 짓고 경내를 정리하며 점차적으로 옛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이와같은 발전이 계속되어 옛 모습대로의 복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어떠한 복원, 경 우라도 월정사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8각9층석탑이다. 이러한 모든 점에서 석탑의 중요성은 재론할 여지가 없 다. 그리하여 이 석탑이 지니고 있는 한국미술사상의 意義를 살펴보려는 바 우선 석탑 자체의 고찰이 先行되어 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석탑의 해체 과정을 세밀히 살펴서 석탑이 가지고 있는 세부구조,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적인 架構 의장 등을 파악할 것이며 석탑 복원으로써 이루어진 오늘날의 석탑의 모습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유행된 석탑의 특성을 찾아 월정사8각9층석탑의 위상을 밝히려는 바 여기에는 이 석탑의 계보와 특징적인 면을 찾아봄으로써 석탑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를 알아보고자 한다. 한편 최근에 새로이 발견 조사된 석탑의 남쪽 일부기단에 대한 의견도 提言삼아 언급하고자 한다. 2. 月精寺八角九層石塔의 고찰 이 석탑은 오랜동안 원위치를 지키고 있으나 1970년도에 전면 해체, 1971년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석탑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수리 보완하였으므로 보수 이전의 상황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해체 당시의 석탑의 상황을 소상히 살피고 다음으로 오늘의 8각9층석탑을 고찰하는 順으로 적으려 한다. 1) 石塔의 解體 전체의 높이 15.15m되는 巨大한 석탑이므로 해체 작업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1970년 10월3일에 착수하여 8일까지 6일간 소요되었는데 해체와 실측을 동시에 시행하였다. 이때 작업의 책임 은 필자가 담당하였고 실측은 홍사준씨(전 부여국립박물관장)가 진행하였는데 이호영씨(전 단국대 박물관 연 구원)가 함께 하였으며 작업은 장한건설회사(대표 정복영)가 맡았었다. 10월3일 오전10시에 불교식에 의한 의 식이 거행되었는데 해체작업이 무사함을 기원하는 석탑 앞에서의 고축문 낭독이 장만화 주지스님에 의하여 진 행되었고 이때에 많은 불자들과 작업에 종사할 사람들이 함께 하였다. 해체작업은 제1일에 상륜부 전체와 제9층, 8층, 7층 옥개석까지 해체하였으며, 제2일에는 제7층 탑신, 6층, 5층, 4층, 제3층 옥개석까지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이날 제5층 옥개석 상면 중앙의 方形孔內에서 南面해 있는 銀製鍍 金如來立像이 발견되었다. 제3일에는 제3층 탑신석과 제2층 옥개석까지 해체하였으며 제2층 탑신석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제1층 옥개석 을 試擧해보니 1층탑신석 상면에 사리봉안 구멍이 원형 銅板으로 덮혀있고 사방에 쇠못이 박혀있는 것을 보아 사리장치가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제4일에는 제1층옥개석을 들어내고 1층탑신 상면의 銅製 두껑을 열어 불사리를 모신 사리장치를 주지실에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제1층탑신과 기단부의 상·하갑석, 면석, 하대 및 연화대석과 안상석, 지대석까지 해체하였다. 제5일에는 청동합내의 사리장치 여러 유품을 조사하는 한편 석탑의 기단 주위를 정리 수습하였다. 지하 50㎝의 탑지 표면하에는 석탑의 중심을 받기 위한 장대석 1개가 남북으로 놓였는데 길이 1.47m, 중간폭 84㎝의 큼직한 석재였다. 좌우에는 이 장대석보다 약간 폭이 작은 장대석을 배치하였으며 이 3개의 1m 四方相距에는 큼직한 잡석의 외곽석이 있었던 것을 확인하였으나 군데군데 빠져나가서 몇 개 정도밖에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제6일에는 상륜부에서 탑신부 기단부까지 실측이 완료되었다. 이상과 같이 6일간에 걸친 해체와 실측 작업을 적었는데 특히 실측에서 살펴본 세부와 새로이 발견 조사된 부분과 유물 등을 상륜부부터 탑신부 기단부 순으로 각부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륜부 상륜부의 최상부에서부터 살펴보면 鍮製의 ? ?珠 鍮管(竹節과 같음) 龍車 鍮管 ?蓋 鍮管 순서로 ?柱에 끼어 연결되었고 9개의 ?輪사이에는 9개의 鍮管이 받치고 있었으면 仰花는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는데 8판의 연꽃 문양이 상·하층으로 半球 주위에 양각 배치되어 있다. 양화석의 치석과 조각이 매우 정밀하여서 석탑의 탑신 부 치석 솜씨와는 월등하게 다른 평가를 하고 싶었다. 이 앙화석 밑에 있는 복발은 3층 8각대석 위에 半球形 으로 조성 중적하였는데 화강암 1석으로 조성하였다. 치석한 솜씨로 보면 앙화석에는 미치지 못하나 비교적 정성을 들인 느낌이다. 상륜부의 찰주는 水鐵製로 전체의 길이 4.3m인데 하부는 굵으며 상단에 올라갈수록 점차 가늘어졌다. 찰주는 석탑의 9층에서 8층옥개석 밑까지 내려가서 박혔는데 여기에 鐵片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상륜부의 해체는 鍮製의 ?이하 보개까지 하나하나 위로 올려 뽑아내고 보륜 이하 제9층옥개석 과 탑신석 밑 제8층옥개석까지를 한꺼번에 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륜부의 당시 상태는 처음 석탑을 건립할 때의 조성품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여졌는데 다만 보개만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에 수리를 거듭한 후적이 있었다. 그것은 보개의 8각에 부착시킨 透彫牧丹花形이 떨어 져 나간 花形殘片 금속에서 볼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ㆍ25동란시 군인들의 총탄에 파손되었다는 부분 과 오랜 세월에서 자연적으로 손실된 부분을 살펴보면, 보주 한면에 斜線으로 7cm정도 총탄에 맞아서 깨어 졌고 4개 鍮管들이 管口 혹은 管身에 역시 총탄으로 인해서 파열되었으며 龍車도 下孔부분이 파열되고 水煙 도 四羽의 中孔管 下口가 총탄에 파손되어 있었다. 보개는 8각8면의 7각에는 牧丹花透彫 금속이 떨어져 나가 고 동남쪽 1각만이 牧丹花透彫가 原形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에도 총탄을 맞은 흔적이 있으나 극히 적은 편이 었고 7개 花形은 풍우에 의한 손실로 보였다. 여기서 수면, 보개, 9륜부의 형태를 살펴보면 수연은 十字로 羽 形을 달았는데 4枚 羽形을 중앙의 찰주에 끼우는 鍮管에 부착하였으며 羽形面에는 당초문을 투각하고 주연에 는 10개의 작은 원형을 투각하였다. 4개 羽形面의 문양은 똑같은 당초문을 배치하고 있다. 보개의 형태는 8각에 花形을 달은 8면으로 이루어져서 一見하여 마치 天蓋가 없는 어린이모자를 연상시킨다. 보개의 수직 8면이 같은 문양을 보이고 있는데 그 한면 을 보면 하면에는 좌ㆍ우2區에 인동문양을, 중간과 양쪽 귀퉁이에는 구름문양을 배치하였으며 상면에는 6엽의 연화문이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었는데 그 연화문들은 5판의 작은 원형의 子房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仰面에는 변형연화문이 옆으로 나열되었고 그 상부 중앙에는 중간에 山形과 그 좌우에 작은 구름문양과 모(角)마다 약 간 큰 형태의 구름문양이 있고 그 구름문양 위에는 牧丹花形이 달려있다. 牧丹花形은 透彫이고 仰面과 수직면 의 문양들은 모두 압출되어 문양을 노출시키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임시로 보개를 만들기 위한 압출틀(압출기계)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고 상륜을 만드는 冶工이 이러 한 보개틀이나 수연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보개를 찰주에 달기 위하여 8각에서 弧形鐵 이 중앙의 찰주공에 연결되고 찰주공에 접하는데는 鍮製의 8葉花形 2매를 엇바꾸어 호형철 밑에 끼웠는데 이 것은 지상에서 보개 안쪽을 바라보는 것을 기준하여 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보개 수직면 하단에는 구름문양의 하부 주연, 인동문양의 하부 주연에 각각 작은 구멍이 있어서 보개 전체에는 32개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아마도 이 구멍들에 매달아 놓았던 장식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그 유품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어떠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보개 내의 弧形鐵에는 각 귀퉁이마다 작은 형태의 풍탁이 있었던 듯 圓孔鐵이 부착되어 있으나 해체시에는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복원시에는 새로 조성하여 부착하기로 하였다. 보륜은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는데 두께가 얇으며 원형의 보륜 9개가 같은 간격으로 꿰어져 있는데 밑 부분은 큰 편이며 위로 올라가면서 다소 작아졌다. 이들 圓輪外邊面에는 8곳에 鍮製八瓣蓮花形을 2매로 중첩하고 圓輪에 철못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이 연꽃문양이 9개의 보륜에 길이로 8列이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어서 표면 장식의 美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역시 금속제의 상륜이므로 보개가 장엄할 뿐만 아니라 보륜의 금속 장식에 있어서도 아름다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둘째, 탑신부 탑신부에 있어서 제9층으로부터 제1층까지의 각층 옥개석과 탑신석들을 一見할 때 탑신과 옥개석의 높이와 직경이 최하층에서 최상층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축소되면서도 균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8각의 隅棟이 弧形으로 양쪽 귀가 높아있고 상층 탑신석 괴임이 하층 옥개석과 동일석으 로 조성되었으며 처마는 안쪽으로 약간 경사되어 있어서 빗물이 안쪽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하였다. 옥개석 하면은 수평을 이룬 처마인데 안쪽에 낙수홈이 8각을 따라 마련되어 있어서 역시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한 의도임을 곧 알 수 있다. 낙수홈 안쪽에는 상·하에 直角 中間地가 弧形이 되어서 마치 목조건물의 두공을 상징한 것같이 보인다. 8각옥개석을 한층만 볼때에는 木造八角亭子같은 느낌이 풍기는데 석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목조보다 다소 짜임새가 부족하나 각 층마다 8각 건축물을 9층까지 중적한 목조건물의 느낌을 주고 있다. 옥개석에 있어서는 2매석으로 이루어 진 것과 1매석으로 조성된 것이 있는데 제1층에서는 남북으로 2매석, 제3층에서는 동서로 2매석, 제4층에서는 남북으로 2매석이며 다른 각층에서는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다 만 제8층옥개석과 제9층탑신이 동일석으로 이루어져 8층옥개석 위에 9층탑신이 돌출된 형태이다. 장엄에 있어서는 풍탁이 8각마다 달려있는데 종류는 大·中·小의 3종이 있어서 제1층∼3층에는 대형풍탁, 제4층∼6층은 중형풍탁, 제7층∼9층까지는 소형풍탁을 달았다. 그리고 보개 안쪽에도 소형풍탁을 달았었다. 이와같이 풍탁이 장식된 것을 생각해보면 본래의 풍탁은 모두 80점이었는데 해체 당시에 남아있었던 풍탁은 불과 1/3이었다. 모든 풍탁의 모양은 上挾下廣을 보이고 있으며 腹部가 약간 부르고 八菱面이면서 扁鐸이다. 이 풍탁의 정상면에는 중앙에 水鐵로 매다는 고리가 관통하였고 풍탁 안쪽에는 十字形鐵이 있으며 그 아래에 風鐸舌이 杏葉形으로 바람을 받게 되었는데 풍탁과 舌은 鍮製로 되어있다. 각층 옥개석의 파손 상태는 상하층 모든 옥개석에 조금씩이라도 손상이 있었는데 파열되어 탈락된 부분이 큰 옥개석, 균열을 보이고 있는 옥개석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다소 불안정한 형태라 하겠다. 이러한 가 운데서 전체 탑신의 미관을 크게 손상시키는 옥개석 4石만을 지적하여 새로 조성해 중적하기로 결정하였는 데 그 대상은 제9층옥개석, 제6층, 제2층, 제1층 2石의 4개층의 옥개석재 5石이었다. 한편 탑신석의 형태와 당시 상황은 각층 8면에 모두 양우주를 각출하였는데 제1층 탑신석에는 8면 중에 동· 서·남·북 4면에 직사각형(길이 28.5cm, 너비 13cm, 깊이 9cm)의 감실을 개설하여 특징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탑신석 구성에 있어서는 1석으로 조성된 탑신석과 2석으로 이루어진 것이 있는데 제1층탑신석이 2석으로 이 루어졌고 제2탑신석이 동서로 2석, 제3탑신석이 남북으로 2석으로 이루어져 초층부터 3층까지가 2석이며 나 머지 제4층부터 제9층은 1석으로 조성되었다. 그런데 제1층탑신석에서 상면에 사리공을 시설하였음을 조사 하였는데 중앙의 사리공을 시공하기 위하여 석재는 북동측에 비켜서 2석으로 이루어지게 하였다. 역시 당시 사리봉안과 建塔의 기발한 意匠을 생각하게 한다. 하층부분에서 2석으로 조립한 것은 당시 석재를 운반하는데 불편을 생각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며 제4층에서 제9층까지 올라가면서 1석씩으로 조성, 중적하였음은 석재가 적고 운반이 용이함을 감안하여 그렇게 치석한 것으로 추측된다. 탑신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제5층 옥개석 상면의 方形孔內 발견 銀製鍍金如來立像과 제1층 탑신석 상면의 원형 사리공내에서 발견한 사리장엄구 등은 論外로 하거니와 사리공 등의 시설은, 여래입상을 봉안한 제5층 옥개석 상면의 方孔은 너비가 13.2cm∼14.2cm, 폭이 16cm∼16.5cm, 깊이 16cm인데 내면의 치석은 정밀한 편이 아니었다. 이 여래입상을 南面하여 모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제1층에 서 제9층까지의 중간인 제5층에 봉안한 데에는 불교의 교리나 立佛의 불상과의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는 것이다. 方形孔의 뚜껑은 銅板인데 사방이 19.5cm, 두께 0.2cm 크기이며 네귀에 못으로 고착시켰다. 方形 孔內에는 불상 이외에 부수된 유물이 없었다. 밑바닥에 보를 깔았으나 낡아서 만질 수가 없었다. 제1층 탑신석 상면의 사리공은 직경 32cm, 깊이 19cm이며 銅製 원형의 뚜껑은 직경 53cm, 두께1cm로 네군데에 못으로 고 정시켰다. 이 안에서 朱色舍利 14顆를 봉안하기 위한 많은 사리장엄구가 발견 조사되었던 것이다. 셋째, 기단부 기단부는 8각9층의 높고 화려한 탑신부와 상륜부의 작품에 비하여 重厚堅實하고 믿음직한 느낌을 준다. 특히 상·하기단에 각기 2중의 甲石을 겹쳐놓아 장중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기단부에 대하여 지대석은 견고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제1층탑신을 받고 있는 상층기단 제1갑석은 1석으로 조성하였는데 직경이 2.1m이며 8각의 각면 길이가 균일 하지 않고 각 면마다 달라서 최단 길이가 88cm인데 대하여 최장 길이는 91cm나 된다. 갑석의 두께는 23cm로 상면에 2cm높이의 탑신괴임이 마련되었고 하면에는 內曲되어서 상층기단 제2갑석과 접하고 있다. 상층기단 제2갑석은 4매석으로 짜여져 8각을 구성하였다. 직경 2.5m, 두께 35.5cm인데 상층기단 제1갑석의 兩角面이 각 면에 따라 길이가 다른 수치와 같이 최단 길이는 1.06m∼1.07m이다. 4매석으로 8각을 이루었으므로 각 석 재가 상접한 이음에는 銀裝으로 연결해 놓았다. 형태는 상면에 5cm의 괴임을 각출하고 하면에는 2.5cm높이의 받침을 마련하여서 상·하 갑석의 구분을 지어놓았다. 상층기단 면석도 8각인데 4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직경 1.95m , 높이는 58cm이다. 각 면에는 양우주가 각출되 었고 면석의 각 면 폭은 역시 일정하지 않아 제일 짧은 폭이 87cm, 제일 긴 폭이 99cm이다. 면석 상면에는 4石 을 連接시킨 네 군데에 銀裝을 끼었는데 두 석재가 이어진 곳에는 진흙과 강회를 혼합하여 안으로 발랐으며 갑 석이 모인 중앙 공간에는 진흙과 큼직한 돌을 넣어 적심을 마련하고 있다. 하층기단에 있어서 제1갑석은 그 형태가 상층기단 제1갑석과 비슷하나 직경이 2.5m, 두께 29.5cm이고 兩角間 의 폭은 98cm∼1m이다. 4매의 화강암 판석을 결구하여 8각을 이루었는데 連接部에 銀裝을 사용하지 않고 있 으며 4매석의 중앙 공간은 큼직한 석재를 넣었고 이 大石 주위에는 흙으로 다졌다. 하층기단 제2갑석은 직경 2.65m, 두께44cm인데 8각 상면의 각 변에는 重瓣蓮華紋을 장식하였다. 이 갑석도 4매의 화강암 판석을 결구 하여 8각을 이루었는데 중앙 空地를 흙으로 메꾸어 놓았다. 하층기단 면석은 직경 2.3m, 높이 21cm인데 8각의 각 면에는 2구씩의 眼象을 장식해 놓았다. 북쪽면의 안상이 파손되었으므로 새로운 보강이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중앙 공간에는 잡석과 진흙으로 가득차게 하였다. 지대석은 4매의 화강암을 결구하여 8각을 구성하였고 각 석재가 연접된 곳에 銀裝을 끼었는데 부식이 심하였다. 직경 2.82m, 높이 39cm인데 동북쪽 귀퉁이가 약간 내려앉아서 석탑이 전체적으로 그 방향으로 약 3도 기울어져 있었다. 이 지대석 위의 흙을 제거할 때 圓板 갈피에 꽂았던 것으로 보이는 길이 5cm, 폭 3cm의 鍮板 금속이 출토되었는데 前面에 불상, 후면에 ‘卷八’의 銘이 있었다. 지대석을 제거한 후에 한 부분을 지하 1m 原土까지 파내려가 보니 잡석과 진흙으로 空地를 메웠으며 석탑의 중심점에서 지대 외측에 1m 정도 확장 除土해보니 석탑의 중압을 방지하던 외곽석이 북서남에 몇 개가 남았 으나 동측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다져진 본래의 지대는 다치지 않고 파손되어 침몰, 기울어진 부분만을 수습하여 지대를 정리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석탑의 적심석 3개를 정리한 후 외곽석을 기준하여 내측 除土 空地에 네 목도 혹은 두 목도의 巨石들을 배열한 후 강회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복원시 지대석을 설치할 높이에서 강회다짐을 充塡한 후에 탑 중심점을 8각지대석 중심과 일치시키고 부호를 넣은 석재를 기단부에서부터 조립하였다. 이때 하층기단 안상 면석에 북쪽 면석의 안상석이 파손된 것을 새로 조 성하여 보충하였다. 이로써 석탑의 복원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월정사 8각9층석탑의 해체와 실측에 따른 세밀한 검토의 대략이다. 본래의 계획은 해체 후 지 반을 다지고 年內에 복원할 예정이었으나 새로 조성할 부재가 증가되었으므로 이렇듯 많은 부재의 新造가 쉽 게 이루어질 수 없어 복원설계를 변경하여 다음 해인 1971년도에 복원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때 해체한 상륜부는 별도로 사찰에 보관시키고 화강암으로 조성한 탑신부와 기단부들의 모든 석재들은 석탑 위치에서 서쪽의 광장에 일괄 보존 조치를 취하고 越冬하여 다음해인 1971년에 복원작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2) 석탑의 복원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본래 1970년도 10월 석탑 해체후 복원 組立이 계속 되었어야 할것이나 여러가지 사정 으로 인하여 다음해인 1971년으로 넘겨졌다. 1971년 9월 26일 ∼ 9월 30일, 10월 8일, 11월 11일 ∼ 11월 23일 도합 19일간에 걸쳐서 석탑의 부재를 조립, 복원을 완료하였는데 기단부를 단단히 다지고 오랜동안 굳혀진 다음 탑신부 복원에 착수하였다. 19일간의 복 원 기간이라 하더라도 계속적으로 작업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몇 번을 중단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파손된 석탑재를 새로이 조성하여 보완하고 금속상륜부의 결실로 수리와 부족한 풍탁 등을 수리, 신조, 보완하는데 시일이 많이 걸린 것이다. 탑신부 조립 작업에 있어서 두 번이나 중단하여 공백을 갖게 된 것은 사찰측에서 발견 유물을 모두 원상 복구 하여 탑내에 봉안하자는 것을 금속품들은 모두 산화되고 있으니 朱色舍利만은 신앙의 중심이니 별도 寶器에 봉안하고 다른 장엄물은 따로이 보관하자는 필자의 설득에 따라 수정병에 봉안하였던 주색사리만을 본래의 사리 圓孔에 봉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제5층 발견 여래입상도 사찰 측에서는 원상 봉납을 주장 하였으나 필자의 설득에 의하여 모조 立佛像을 봉안하기로 결정하여 이 보조입불상 제작에 시일이 걸린 것이었다. 이렇듯 한달 이상의 공백기간은 시공자 측에서 원석을 가져다가 보완할 탑재를 치석한 것이 수치의 미달로 재차 서울에 서 석재를 운반하여 치석 조성하는데에 이 공백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탑신부 복원에 있어서는 석탑의 본래 석재들을 그대로 다시 사용하되 부득이 파손된 석재들은 새로 조성하여 보 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제1층 옥개석의 2매석과 제2층 옥개석의 1매석, 제6층 옥개석 1매석, 제9층 옥개석 1매석 도합 4개 옥개석의 5개 석재를 새로이 조성하여 사용하였다. 옥개석 8귀퉁이에 장식한 풍탁도 본래의 것 을 될수 있는 한 그대로 달도록 하였는데 부족한 것은 새로이 조성하여 달았다. 새로운 모조 풍탁은 대형 8개, 중형 11개, 소형 30개이다. 그런데 소형 풍탁 30개 新造分에는 상륜부 보개 안쪽에 없어진 8개 풍탁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제1층 탑신 상면에 사리 14과를 봉안하는데 있어서 새로이 조성 봉납한 寶器는 純金製舍利甁, 純金製舍利 盒, 銀製外函, 銀製緣起文板, 純金製世尊全身舍利經牌, 純金製香爐인데 이들 新造 寶器를 사리공에 봉납하기 전 포장한 순서는 다음과 같다. 즉 순금사리병에 朱色舍利 14과를 봉안하고 백지로 막았으며 또한 백지로 병을 싼 후, 순금4각 향합에는 前日에 나왔던 粉末香을 넣고 蓋封하였으며 순금향로에도 香紛을 채웠다. 이렇게 한 후에 은제외함에 순금사리합을 넣 고 순금합 內에는 다시 순금사리병과 순금사리경패를, 은제연기판은 은제외함 밑에, 순금향로는 은제외함 앞에 두되 褓로 이들 봉납품들을 포장하고 공간에는 香木으로 보충하였다. 이때 사리공에 봉안한 일시는 10월 8일 오 전 11시였다. 봉납이 끝난 후 본래 덮었던 동판 뚜껑으로 덮고 본래와 같이 덮고 황을 끓여 부어 고착시켰다. 당 시 봉납한 모든 金銀製寶器들은 장만화 주지스님의 말에 의하면 강릉시내의 불신도들이 信心을 담아 만들었다 고 한다. 그리고 제5층 옥개석 상면에 봉안한 순금제여래입상과 은제도금판불좌, 황동제사각함은 서울의 독실한 신도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봉납의 상황은 은제도금 불좌에 순금제 여래입상을 모신 후 황동제사각함에 봉안 하고 5층옥개석 상면의 方形孔에 봉납하고 鉛水로 옥개석 상면과 같이 注鉛하였다. 봉안 일시는 11월 18일 오후 3시 40분이었다. 상륜부 보개에는 牧丹透彫 7處를 보수하였으며 작은 풍탁을 안쪽에 새로 조성한 것을 달았고 竹節鍮管이 파열한 부분은 수리하여 다시 사용하였으며 龍車와 寶珠의 총탄 흔적도 수리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이렇게하여 석탑의 전면 해체복원작업이 1971년 11월 23일에 모두 끝났는데 月精寺八角九層石塔을 오늘에 이 르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月精寺 大寂光殿 앞뜰 원위치에 건립되어 있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인한 화염 때문에 각 부재에 손상이 심하 나 그 형태는 원형을 잘 갖추고 있는 것이다. 석탑의 구성은 일반형석탑과 같이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부를 세운 형식인데 이 塔은 一見하여 8각형의 평면을 이룬 점이 특이하게 보인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평면이 4각형에서 벗어나 多角形으로 되고 층수도 多層으로 변하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 석탑도 그런 종류에 속한다고 하겠다. 기단부는 4매로 결구된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지대 위에는 1단의 角形 괴임을 각출하고 있다. 하층기단 면석은 4매석으로 짜여졌으며 각 면에는 2구씩의 眼象이 음각되었고 그 위의 하층기단 갑석도 4매석으로 결구 되었는데 갑석 상면에는 연화문을 조식하였다. 蓮華紋은 複葉 伏瓣인데 각 모서리에 1판과 각 변에 3판씩으로 도합 32판이 돌려졌다. 갑석 상면에는 각형의 낮은 괴임을 조출하여 그위에 괴임대를 받고 있는데 이 괴임돌은 1단으로서 4매 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다. 괴임돌의 형태는 하면은 圓弧를 그리고 측면은 굽을 돌렸으며 상면은 경사로 인하여 각 모사리에 合角이 뚜렸해졌다. 그리고 그 頂面에는 1단의 낮은 각형괴임을 각출하여 상층기단 면석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4매석으로 짜 여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었다. 상층기단 갑석도 4매로 결구되었는 바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받침이 조 출되고 측면은 조식이 없으며 頂面에는 1단의 각형괴임을 마련하여 윗 부재를 받고 있다. 그리고 상면은 하층기단 갑석의 상면과 같이 경사가 있어 각 모서리의 합각이 뚜렸하다. 갑석 위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괴임돌이 놓여져서 탑신을 받고 있는데 이 괴임대의 모양은 하면에 각형받침과 斜角받침이 조출되고 상면은 약간의 경사로 각 모서리 의 합각이 뚜렸하며 중앙부에 낮은 각형 1단의 괴임을 각출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각층의 身·蓋石이 別石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부재의 규모의 大小에 따라 1石 혹은 2石으로 결구된 것도 있다. 초층탑신은 각 면에 양우주가 정연하고 8면 중에서 4방에만 직사각형 龕室形이 마련되었는데 남쪽만은 그 규격이 크고 나머지 3면은 작다. 또한 각층의 탑신석에서도 각 면에 양우주가 각출되었는데 감실형은 마련되지 않았다. 각층의 옥개석은 모두 같은 형식으로서 동일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바 하면에 추녀가 수평으로 전개되고 낙수홈이 음각되었으며 받침부는 각형과 큼직한 弧形, 각형의 순으로 정연하게 조출되었다. 낙수면은 평박한 편 이나 각 모서리의 分角線은 예리하고 전각부에 이르면서 反曲되어서 각 전각의 반전과 잘 어울리어 경쾌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바 전각의 下端에 풍경이 달려 있어서 이 석탑을 더욱 장엄하고 경쾌한 조형으로 보이게 한다. 상륜부는 全部材가 完存한데 露盤, 覆鉢, 仰花, 寶輪까지가 石製이고 그 이상은 金銅製로서 寶蓋, 水煙, 寶珠등이 완전하다. 각 부재는 보륜이 9輪인데 이들을 관통한 ?柱는 8층옥개석까지 이르고 있으며 각 보륜석의 측면에는 8處에 8瓣의 금동제 연화문을 二重으로 장식 부착시키고 있다. 이 석탑은 상·하의 균형을 얻었고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고려시대 多角多層石塔의 대표라 하겠다. 현재 이 석탑 앞 에는 보살좌상(보물 제139호)을 안치하여 공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유례는 江陵 神福寺址石塔(보물 제87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고찰 내용에서 이 석탑의 특수한 양식을 종합해 보면 첫째, 전체적으로 보아 석탑의 평면이 8각형을 이루고 있어 과거 先代의 사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특징이다. 둘째, 층수가 다층인 것도 주목되는 것이니 통일신라시대에도 淨惠寺址 十三層石塔(국보 제40호, 경북 월성군 안 강읍 목산리 소재)과 같이 다층을 이룬 것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方塔이므로 8각형인 月精寺塔과는 그 의장이 다 르다. 그러므로 이 석탑은 多角이고 多層인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셋째, 相輪部材까지 完存한 희귀한 例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각 부재가 小形이기 때문일 것이니 이런데도 이 석탑에서는 부재가 하나도 경실되지 않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상륜의 대표라 하겠다. 넷째, 기단부에 있어서 하층기단에 眼象을 조각 배치하고 蓮華잎를 마련한 것은 화사하고 장식적인 의장이 있음을 알 수 있겠고 상층기단 괴임대와 탑신 괴임석이 끼어져 있는 점도 특색이다. 다섯째, 탑신부에 있어서 각 옥개석 하면의 처리가 각형과 호형 받침으로 특이하게 이루어졌으며 각층의 체감율이 적으나 기단부가 안정되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또한 상륜부재의 장식이 마치 공예탑의 일면을 보이고 있어 석탑 전체를 장식적인 형태로 보이도록 하고 있는 점도 이 석탑만이 지니고 있는 특이성이라 하겠다. 3. 高麗時代 石塔의 특성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先代에서와 같이 석탑은 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예배 대상이었으므로 그 數에서나 조형미에 있어서 당시 불교적인 조형미술의 중추를 이루는 것이었다. 즉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에 따라 불교적인 造營이 거의 고려 일대를 통해 국가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이러한 불교적 조영의 다양한 성황 속에서 그 중심을 이루는 석탑 또한 특이한 면을 보이어 많은 특수형식의 석탑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려시대의 석탑에 관하여 나타난 현상을 정리함에 있어서는 우선 석탑 건립이 前代에 비하여 전국 적으로 확산 분포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신라는 삼국통일과 더불어 거의 고려와 상응하는 영역을 지 내하였으나 현존하는 신라석탑은 지역적으로 볼 때 대체로 경주 부근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밖에 것도 대략 옛 영토 인 영남지역에 편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의 옛 땅에도 약간의 遺例가 있으나 소수에 불과 한 형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는 數적으로는 개경 부근이 우세하나 그 유례는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포상의 변화는 九山禪門성립 등 시대의 변화에 따르는 것으로 일반적인 추세는 왕실불교적 입장에서 출발한 불교가 수백년을 지나면서 보다 보편화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좀더 고려의 상황에 결부시켜 본다면 다 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고려의 석탑 건립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국가적인 조영이라 하겠으 니 고려시대 역시 불교가 국가적 종교, 왕실불교로서 번영하였음은 물론 前代로부터 이어지는 호국 불교적 성격은 國初부터 많은 국가적 사원의 창건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王都인 개경에 十大寺刹을 건립한 것이나 都城안에 70區의 佛寺가 있었다는 기록들은 불교국을 연상케 하 며 고려의 불사건립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建塔을 생각해야 할 것인 바 개경의 7층석탑, 서경의 9 층탑, 경주의 황룡사 9층목탑 중수, 익산의 왕궁리 5층석탑등은 모두 국가적 조영인 것이었다. 한편 고려 시대의 건 탑에 있어서 좀더 주의를 끄는 것은 순수한 지방세력 혹은 현지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사실이다. 경상북도 醴泉의 開 心寺址五層石塔의 명문, 서울 경복궁의 淨兜寺五層石塔內 발견 造成形止記등에서 알수 있듯이 고려는 많은 경우 그 지방민의 발원에 의하여 석탑이 건립되었다고 믿어지는 것이니 이러한 경우가 오히려 고려시대 석탑의 전국적인 분 포에 좀더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 석탑의 전국적인 분포나 그 건탑에 있어서 토착세력 참여의 가능성은 바로 고려 석탑의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前代의 王都 중심의 일률적인 건탑양식에서 벗어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의 토착세력이 건탑에 관여했을 때 과거의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제나름대로의 특징이 반영되어 곧 다양성있는 건탑의 양상을 보일 것이니 실제 이 시대의 석탑은 그 조형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 이래 전통양식을 계승함과 동시에 지방적 특색이 가미되어 다양한 조형을 이루었으니 이같은 석탑의 지방적 특색이란 신라시대에서는 그리 두드러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前代에 비해 현 저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고려석탑의 새로운 양상을 대략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고려시대의 석탑은 지방적인 특색을 현저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고려시대의 석탑은 前代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양각색의 새로운 특수한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첫 번째의 특성인 지방적 특색을 현저하게 나타내고 있는 점을 고찰해보면, 예컨데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 지방 에서는 신라시대 석탑의 계통을 충실하게 계승한데 대하여 백제의 고토인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백제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예가 많다. 그리고 평안도 지역에서는 고구려 시대의 평면 8각의 예를 따라 8각석탑의 건립을 많이 볼 수 있다. 즉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익산의 彌勒寺址石塔(국보 제11호)을 모방하였고 충청남도 지역 에서는 부여의 定林寺址石塔(국보 제9호)이 백제 시대에 건조된 석탑인데 이곳 전라북도나 충청남도 지방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렇듯 前代인 백제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라 특히 새로운 요소로서 百濟塔系의 양식을 가미한 고려석탑이 곳곳에 세워졌던 것이나 몇 기를 例로 들면 다음과 같다 . 전라북도 지방에 있어서 益山王宮里五層石塔(보물 제44호) 井邑隱仙里三層石塔(보물 제167호) 金堤歸信寺三層石塔 沃溝竹山里三層石塔 충청남도 지방에 있어서 扶餘無量寺五層石塔(보물 제185호) 扶餘長蝦里三層石塔(보물 제184호) 舒川庇人五層石塔(보물 제224호) 公州鷄龍山男妹塔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 몇 기의 유례가 있으나 생략하거니와 위의 석탑들을 살펴보면 이들 백제석탑계의 석탑은 특히 옥개석의 양식에서 모두 板石形의 낙수면석이고 대개의 경우 그 밑의 받침부가 별석으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목조 가구의 일면을 보이고 있는 점이여서 一見하여 익산미륵사지석탑과 부여정림사지5층석탑의 각부를 모방하고 있 음을 알 수 있어 백제석탑계의 고려석탑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백제 故土에서만 볼 수 있는 백제석탑계의 고려시대 석탑의 건립 현상은 물론 고려의 불교가 前代인 신라 시대에 비하여 보다 대중화되고 불사 건축과 그 미술이 아울러 先代의 중앙 집중에서 벗어나 좀더 지방에 까지 파급되고 한층 토착화되어 각기 그들 나름대로의 특색이 나타나게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두번째의 특성으로 前代에 없었던 각양각색의 새로운 특수한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인데 특수한 형식이란 사각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의 형식에서 벗어나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특수한 형식이 加味되는 것 을 말함이다. 이러한 예는 물론 佛國寺多寶塔이나 華嚴寺四獅三層石塔과 같이 이미 신라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四獅石塔의 양식을 계승한 충청북도 제천군 한수면 송계리의 獅子頻迅寺址石塔 (높이 4.5m, 보물 제94호)이나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내의 掛石里四獅三層石塔(높이 3.5m, 보물 제540호)의 유례 에서 볼 수 있듯이 先代의 異形탑파의 양식을 계승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이 러한 신라적인 이형석탑의 예는 사실상 극히 한정되고 대개는 개별적인 것에 그쳤는데 비하여 고려기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은 새로운 유형을 이루는데까지 진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이르러 나타나는 특수한 양식으로서 전체적인 변화를 보이는 예로는 다음에 열거하는 바와 같이 사각형의 범주를 벗어나 多角形 또는 多層으로 발전하고 있는 형태이다. 그런데 이러한 석탑에서 대략 팔각 형의 석탑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유형으로도 볼 수 있다. 그에 비하여 6角인 元廣寺址六角七層石塔이나 같은 육 각이지만 석재가 일반적인 화강암이 아니고 靑石으로된 金剛山六角多層石塔은 좀더 특이한 형이라고 하겠다. 이제 사각형의 범주를 벗어나 평면이 多角으로 변한 석탑의 유례를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月精寺八角九層石塔(국보 제48호,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월정사 경내) 金山寺六角多層石塔(보물 제27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경내) 永明寺八角五層石塔(평안남도 평양시 경상리 금수산) 廣法寺八角五層石塔(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광법사 경내) 普賢寺八角十三層石塔(평안남도 영변군 북신면 하행리 묘향산 보현사 경내) 栗里寺址八角五層石塔(원위치는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현재 일본 대창미술관으로 옮겨져 있음) 元廣寺址六角多層石塔(평양大同公園內→間似亭六角七層石塔→평양驛前石塔, 원위치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元廣寺址) 한편 이들과 같이 평면이 6角 혹은 8角이 아닌 圓形의 평면을 보이는 석탑이 있으니 전라남도 和順郡 道岩面 雲 住寺의 圓形多層石塔 (보물 제798호)과 圓球形石塔은 그 좋은 유례라 하겠다. 이 절의 남쪽 낮은 계곡을 따라서 곳곳에 크고 작은 각종의 석탑과 불상이 배치되어 있어 이른바 千佛千塔이라 일컫고 있으니 이것은 道詵國師가 하루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에 의한 이름인 것이다. 이곳에는 양식이 다른 석탑이 산재하여 일반형 사각형탑 이외에 모전석탑, 이형석탑 등 18기의 석탑이 있는데 이와같이 많은 석탑을 집중적으로 건탑한 것은 다른 곳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으니 아마도 前代에 볼 수 없었던 조탑신앙을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곳에서 실례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고려시대에 볼 수 있는 풍수설의 유행으로 山谷間으로 佛寺와 建塔을 유치한 실제의 예, 지방세력의 건탑사실등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아 이곳의 유적은 크게 주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금산사 6각다층석탑은 형태가 6角이어서 특이할 뿐만 아니라 그 건조석재에 있어서 또한 특수하니 이 석탑 과 같이 고려시대에는 靑石으로 조탑하였기 때문에 재료상의 문제에서 빚어지는 또 하나의 특수성을 지니는 「靑 石塔」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유례를 통하여 알 수 있겠다. 이 청석탑은 재료의 특수성에서 가능하였다고 믿어지는바 얕은 층위를 다수 누적시키고 세부에 섬세한 線刻을 겻들이기도 한, 공예적인 기교가 엿보이는 하나의 유형을 얻고 있는 것으로 이미 신라말의 건립으로 추정되는 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보물 제581호)에서 先例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청석탑의 건립은 고려시대로서 그 유례는 다음과 같이 여러 基가 보고되고 있다. 武陵里多層石塔(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桐華寺念佛庵多層石塔(대구광역시 팔공산) 法華庵多層石塔(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大谷寺靑石塔(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神心寺多層石塔(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法住寺汝寂庵多層石塔(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속리산 법주사 여적암) 普門寺靑石塔(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치악산) 蒼龍寺多層石塔(충청북도 충주시 직동) 고려시대에 이르면서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적인 석탑은 전체적인 변형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인 면에 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석탑의 탑신부에 연화석 등으로 괴임대를 마련하거나 기단 갑석 자체가 연화대석으로 이루어지고 또는 각층에 괴임석을 끼워 마치 공예탑과도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 등 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데 이들의 괴임대는 형태상으로 보아 석탑을 웅장하게 나타내려는 것 이라기 보다는 역시 공예적인 특수성을 보이고자 한것 같다. 기단부에 있어서 연화대로 이루어져도 마치 불대좌와도 같은 작품을 보이는 것은 앞서 6각, 8각등의 변형석탑에서 언급한 바 있으며 이들의 연화기단부도 일종의 공예탑적인 일면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다각의 연 화기단부는 신라말에 건립된 到彼岸寺三層石塔(보물 제223호,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관우리 도피안사 경내, 865년 건립추정)에서 볼 수 있으니 이것 또한 주목해야 될것으로 생각한다. 또 8각원당형의 기단부는 강원도 月精寺八角 九層石塔, 평양의 永明寺八角五層石塔, 大同郡 栗里寺址八角五層石塔, 妙香山 普賢寺八角十三層石塔등에서 볼 수 있는 바 이들 지역이 모두 도피안사3층석탑이 서있는 철원과 가깝다는 데서 지방적인 특성을 또한 살필 수 있다는 점이 주의를 끈다. 그리하여 그 연원은 철원에서 다시 상대로 올라간 고구려에까지 높여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바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제 열거하려는 괴임대를 끼워 넣은 공예탑들도 일견하여 강원도의 한 지역에 치우쳐 건립된 느낌을 주고 있으니 이것 또한 이 시대 특성의 하나로서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몇 基를 열거하면, 開心寺址五層石塔(보물 제53호,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부동, 1010년) 春川七層石塔(보물 제77호,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 求禮論谷里三層石塔(보물 제509호,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면 논곡리) 橫城鴨谷里三層石塔(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압곡리 상용곡) 興國寺址石塔(경기도 개성시, 1021년) 妙香山普賢寺九層石塔(평안북도 영변군, 1044년) 서울弘濟洞五層石塔(높이 3.5m, 보물 제166호, 현재 서울 경복궁내, 1045년 추정) 神福寺址三層石塔(높이 4.55m, 보물 제87호, 강원도 강릉시 내곡리) 등을 대표로 들수 있겠는데 이 가운데서 서울홍제동5층석탑과 신복사지3층석탑에서는 탑신부에까지도 높직한 괴임돌을 1단씩 끼워 놓아 조형상 특이하고도 흥미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부분적인 변형의 예로 泉谷寺址七層石塔(보물 제309호)을 들 수 있고 고려시대에 하나뿐인 특수형 석탑 으로 敬天寺十層石塔(국보 제86호)이 있으나 같은 遺例가 없으므로 여기서는 論外로 하겠다. 4. 月精寺八角九層石塔의 系譜와 특징 앞장의 高麗時代石塔의 특성을 論할 때 첫번째 특성인 지방적인 특색을 말하면서 「평안도 지역에서는 고구려시대 의 평면 8각의 예를 따라 팔각석탑의 건립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하였으며 두번째 특성인 각양각색의 특수한 형식 을 말하여 평면 8각을 지적하면서 「월정사8각9층석탑이 도피안사3층석탑이 서있는 철원과 가깝고 그 연원은 철원 에서 다시 上代로 올라간 고구려에까지 높여 잡을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월정사 석탑의 8각과 9 층의 多角多層塔의 계보를 지역적으로는 평안도지방에, 시대로는 고구려에 上限을 두어 고찰하고자 한다. 고구려시대 建塔에 관하여는 「三國遺事」塔像 第四 遼東城育王塔條의 「傍有土塔三重 云是佛塔 起木塔七重」이라 는 기사와 高麗靈塔寺條의 「此下有八面七級石塔」의 기사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즉 育王塔의 기사는 지금의 중구 동북부 遼陽지방으로 추측되는 곳에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었으며 그 곁에 탑파가 있었는데 이 탑이 三重土塔이었던 것을 聖王의 信心 발원으로 7층목탑을 건립하게 되었고 그후 다시 그 높이를 줄 이다가 목탑이 썩어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탑사의 기사는 이 사찰의 창건 설화로서 僧 普德이 항상 평 양성에 살고 있었는데 山方老僧의 부탁으로 涅槃經 40여권을 강의한 후 城西 大寶山 巖穴下의 禪寺에 이르니 神人 이 와서 이곳에 거주하라 하며 錫杖을 앞에 놓고 그 땅을 가리켜 말하되 이 속에 八面七級의 석탑이 있다 하므로 발 굴하니 과연 그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精舍를 세워 영탑사라 하고 이 곳에 살기 시작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기록에서 育王塔에서의 「起木塔七重」이라 한 것은 7층목탑을 가리킨 표현이겠고 靈塔寺에서의 「八面七級 石塔」이라고 한 것은 8각7층석탑일 것이다. 그리고 育王塔條의 「云是佛塔」은 역시 불사리탑으로 탑파를 일컫었 을 것이며 「土塔三重」이라고 한 것은 3층토탑을 말함인데 당시의 토탑이 어떠한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기록내용을 정리해 보면 고구려의 탑파는 木塔, 石塔, 土塔이 건립되었고 층수에서는 3층과 7층이 있었으며 형태는 8각의 평면을 구성하기도 하였었는데 여기의 土塔은 혹시 塼塔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한편 문헌에는 없으나 일제침략기에 발굴 조사되어 고구려의 사원지임은 물론 塔址가 밝혀져 고구려 탑파의 존재를 실증한 유례가 있으니 평양시 동쪽의 淸岩里寺址에서 8각전의 8각기단과 평안남도 大同郡 林原面 上五里寺址에서 8각당의 기단부가 조사되어 목탑지 임을 알 수 있었다. 평양 청암리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38년에 실시하였으며 그 조사보고서가 발행되었는데 이 조사보고서에 의하 여 寺址의 여러 가지 상황과 특히 8각목탑지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대동군 상오리사지의 발굴조사는 1939년에 실 시하였는바 청암리사지 발굴보고와 같은 조사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아 유감스러운 일이나 부분적인 간략한 소개가 있으므로 개략적인 상황을 짐작 할 수 있다. 즉 1937년 상오리사지 발굴조사때 현지 조사에 참가했던 齋藤忠씨의 증언에 의하면 청암리사지 8각殿址와 똑같은 8각전지가 있고 그 동·서·북에 법당이 배치되었다는 것인데 역시 여기의 8각전지도 8각목탑지였다는 것이다. 8각탑에 대해서는 앞에서 문헌상으로 살펴본 영탑사의 8각7층석탑에서 이미 그 개념이 點頭되고 있다. 그러므로 기록이던 실존 유구이던 고구려의 탑파에서 8각형의 평면을 이룬 탑파는 하나의 양식으로 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후 후대 왕조에 이르러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전국적인 확산으로 석탑도 전국적으로 분 포되고 건탑에 있어서도 토착세력의 참여로 지방적인 특색이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을 때 신라의 옛 땅에서는 신 라 석탑의 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였고 백제의 옛 땅에서는 백제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예가 많았다. 특히 평안도 지방에서는 평양의 永明寺八角五層石塔, 大同廣法寺八角五層石塔, 大同栗里寺址八角五層石塔, 妙香 山普賢寺八角十三層石塔, 元廣寺址六角七層石塔 등과 같이 평면이 8각으로 구성된 유래가 많은데 이것은 평안도 일대가 고구려의 옛 땅이었으므로 8각탑의 연원이 前代의 고구려 탑파 양식을 따라 평면을 8각으로 구현함으로써 지방적 특색을 나타내는 당시의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강원도 철원지방은 본래 고구려 영역으로 평안도와도 가까운 지역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도피안사3층석탑은 신라하대인 景文王 5년(865) 건립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석탑의 탑신부는 4각형 평면이나 기단부에서는 8각형의 평면을 이루어 하층기단 면석에 안상이 장식되고 상층기단 괴임대와 갑석 하면에 伏蓮과 仰蓮을 조각 장식하여 마치 불상 대좌와도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어 주목을 끈다. 이렇듯 앙·복련의 불대좌식 기단은 고려시대 건립인 평양의 영명사8각5층석탑이나 대동의 율리사지8각5층석탑, 묘 향산 보현사8각13층석탑, 대동 광법사8각5층석탑, 대동 원광사지6각7층석탑등에서 모두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고려시대의 석탑은 기단뿐만 아니라 탑신부까지 전체가 기단부의 평면과 똑같이 8각 혹은 6각인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는 신라 하대에서는 도피안사3층석탑과 같이 기단부에서만 평면 8각을 이루고 있다. 이때는 전체 8각 의 평면을 이루게 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서 도피안사 석탑은 하나의 과정을 보이는 좋은 실례라고 하겠다. 조형미술의 발달이란 이렇듯 순리적인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이는 표본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석탑의 양식사적인 변형 과정을 생각해 볼 때 고구려의 평면 8각, 다층의 층수가 후대에 이어지는데 신라하대의 도피안사3층석탑에서 기단부의 조형을 8각 그리고 연화불좌대형으로 시도하였고 고려시대에 이르러는 팔각 다층 의 양식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월정사8각9층석탑은 그 계보를 바로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바라 하겠다. 도피안사와 가까운 지역이고 고구려 옛 땅에서 유행하던 多角多層탑의 建塔양식이 이 월정사석탑에서도 나타나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월정사8각9층석탑의 특징을 생각해 볼 때 이미 앞장의 「석탑의 복원」(Ⅱ-2)에 서 이 석탑이 보이는 특수한 양식을 종합해본 바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요점만을 적어보려고 한다. ① 석탑 전체의 평면의 8각이다. ② 층수가 多層이다. ③ 상륜부재가 금속으로 완전하다. ④ 기단부에 연화좌를 마련하였다. ⑤ 옥개석 받침이 角形과 弧形이다. ⑥ 기단부에 있어서 하층기단 갑석 위에 상층기단 괴임돌, 상층기단 갑석 위에 탑신 괴임돌이 끼어져 있어 상하 2중의 갑석으로 보인다 이밖에 세부적인 면이 있으나 다음 結語에서 이 석탑의 意義와 위상을 논할 때 첨가할 것이며 최근의 상황에 대해 서도 提言으로 一言하고자 한다. 5. 結語 및 提言 이상과 같이 月精寺8角9層石塔에 대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살펴보았다. 이 석탑은 고려초기에 건립된 후 여러 차 례의 재난을 당하면서도 의연하게 오늘에까지 그 원형을 잘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석재의 파손이 있어 서 1970년 10월에 전면 해체, 1971년 11월에 복원하였다. 당시 해체 복원을 진행하면서 그 과정과 세밀한 검토에 서 이 석탑이 지니고 있는 특징을 살펴보고 나아가 한국 石塔史에서의 意義를 찾고자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을 살 펴보고 이 석탑의 系譜를 찾아보았다. 그리하여 한국미술사상 이 석탑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집약 정리해 본다. 첫째,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까지 전체가 완전하며 原形을 잘 갖추고 있어서 고려시대 석탑 연구에 기준이 되고 있다. 둘째, 고려시대에 유행한 多角多層石塔의 대표적인 것으로 각 부의 가구는 고려시대 異形石塔 연구의 귀중한 모본 이 되고 있다. 셋째, 그 系譜를 고구려의 多角塔에 둘 것이며 하나의 지역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석탑으로도 주목된다. 넷째, 이 석탑의 이후 계보는 漢江을 따라 하류에 이어져 조선전기의 水鍾寺八角五層石塔(제7대 세조 12년, 1466), 妙寂寺八角多層石塔(제11대 중종초년대인 1∼16년, 1506∼1521)에 계승되고 있다. 다섯째, 앞장에서 언급한 이 석탑의 특징적인 면들은 한국미술사상 그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여섯째, 1970년 10월 탑신부 해체시 사리장엄구가 발견 조사되어 사리장치법의 연구는 물론 여러 장엄구는 당시 금 속공예술과 기법 등 여러 면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朱色舍利 14과의 친견은 아직까지 前 無後無한 바라 하겠다. 이와같은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한국미술사상 월정사8각9층석탑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하겠으니 한국의 塔婆史 연구는 물론이요, 古代 건축사, 공예사, 조각사 등을 연구하는데 이 석탑의 모든 내용이 하나의 기준이 되고 귀중한 사료가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의 위상은 가장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남쪽 앞의 석조보살좌상에 대하여 과학적 보존, 대좌의 수습 등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던 상ㆍ중ㆍ하 대석의 발견과 함께 석탑 南面의 塔區 혹은 기단과도 같은 일부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것은 1970년도 석탑 해체시에 는 알수 없었던 것으로 새로운 발견 유구인 것이다. 이 유구가 석탑의 기단부로 확인된다면 이제까지 이 석탑에 대한 「細長, 不安定」 등의 표현이 가셔질 것으로 생각되어 이에 대한 조사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韓國美術史上 月精寺八角九層石塔의 意義」에 대한 토론 요지 朴 慶 植 (檀國大 史學科교수) 학계의 원로이시고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에 많은 연구업적을 남기긴 선생님의 글에 아직 학문이 모자라는 제가 감 히 토론자로 나선다는 것이 죄송스럽고 두렵기도 합니다. 월정사팔각구층석탑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팔각구층석탑으로는 남한에서는 유일한 예라는 것과 이 유형 의 석탑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또한 양식적인 문제와 더불어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바 있습니다. 때 문에 선생님께서 이 석탑에 대해 여러 면에서 밀도있게 고찰해 주신 점은 이 석탑의 현상을 파악하는데는 물론 이 방면을 연구하는 모든 이에게 퍽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학문이 짧은 제가 감히 선 생님의 글을 토론한다기 보다는 그간 지녔던 의문점 몇 가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그간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은 1970년에 해체 복원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고, 단편적인 글에서 그 일면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선생님의 논문에서 해체 복원에 따른 전체적인 상황과 당시 수습된 부재에 대한 세밀한 고찰이 진행되어 이 석탑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금동상륜부재에 대한 세밀한 고찰과 사리장치의 출토상황, 새로 끼워 넣은 부재에 대한 부분은 차후 석탑의 해체 복원과 이에 따 른 조사가 얼마나 치밀하고 밀도있게 진행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좋은 제시라 생각됩니다. 둘째, 선생님의 논문을 보면 사리장치가 5층옥개석 중앙상면, 1층탑신석 상면에서 각각 출토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 출토된 사리장치는 건립시 동시에 봉안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시기에 봉안된 것인 지가 문제가 됩니다. 만약 후자의 예에 속한다면 이 석탑은 중수된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선 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셋째, 일반적으로 다각다층석탑은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논 문을 보면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 선생님의 견해 역시 이 보다는 백제계 및 신라계 석탑에서와 같 이 前代에 건립되던 고구려 탑으로의 회귀라는 면에 더 강한 의견을 표출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저의 짧은 소견 으로는 단지 송나라의 영향으로 건립되었다면, 이 계통의 석탑이 전국적으로 건립되어야 하는데, 알려진 바와 같 이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건립을 보이고 있고,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은 그 남방한계선이라는 점이 과연 송나라의 영향이 전부일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이는 고려시대의 특징적인 석탑이 전국적으로 건립되는 것과는 분명 차별화되는 현상으로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도 이 석탑의 계보에 대해 철원 도피안사삼층석탑에서 고려시대에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건립되는 다각다층석탑에 있음과 더불어 상한을 고구려에까지 높여 잡고 계십니다. 더불어 이같은 현상을 백제계석탑의 예 를 들어 논증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월정사팔각다층석탑을 비롯한 다각다층석탑 특히 팔각다층석탑 계통의 석 탑을 「고구려계석탑」이란 용어로 정착시켜도 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넷째, 선생님께서는 고려시대 석탑의 건립에 있어 국가적인 조영과 순수 지방세력 혹은 지방민의 참여라는 2가지 면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은 어느 예에 속하는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디섯째, 고려시대 석탑의 특성 중 「공예적인 특수성」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사실 이 용어는 석탑과 불상과의 관계 에서 신앙상의 위치에 대해 중요한 단어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팔각다층석탑의 경우는 기단부에서 연화문의 조식으 로 인해 이같은 표현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선생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이들은 한결같이 불상대좌의 형 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따라서 이같은 유형은 단순히 공예적이라기 보다는 塔과 佛이 항시 신앙의 대 상으로 同格의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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