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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3) 보물 제 139호 석조 보살좌상의 조형적 의미는??

 

 

3) 보물 제 139호 석조 보살상의 조형적 의미는??

 

 

 

                                           <보물 제 139호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의 석조 보살상>

 

탑신을 향해서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워 탑에 대해 공양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

있는 높이 1.8m의 보살상이다.
머리에는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으며 갸름하면서도 복스러운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가 어려 있다.

리칼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고, 목에는 아주 뚜렷한 3줄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목걸이는 매우 섬세하고 곱게 조각하여 가슴에까지 늘어지게 장식하였다.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은 얇고

가벼워 몸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은 모두 희미하다. 오른쪽 팔꿈치는 동자상을 받침으로 고이고 있으

며 동자상의 머리에 팔꿈치를 올려 놓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석조 보살상은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하여 조형상 다소 불균형스런 모습이다. 그러나 개태사
와 신

복사지 탑 공양상과 더불어 고려시대 화엄종 계통사원에서 만든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며, 당

대 불교사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석조 보살상을 알기위해  웹 문서를 찾아보면 일반적인 이 말 뿐이다.

그럼 조형적으로 다소 불균형하다고 하며 그래서 복제품엔 그에 단점을 수정하느라 이상한 조형품을 만

들었는지 이 장에서 살펴 보기로 한다.

 

   

         

 

이 탑을 공양하는 보살은 누구이며 왜 그러한 자세를 하고 있는가??

이에 해답은 최완수저의 명찰순례의 월정사 편에서 찾아볼수 있다.

 

그것은 법화경 약왕보살 본사품 제 23을 보면 알수있다.

과거 일월정명덕여래 세계때 이야기로, 일체중생회견이란 이름의 보살이 세존으로부터 법화경을

것을 듣고서는 현일체색 신삼매를 얻어 기쁜 마음에 여러가지 공양을 세존께 하였지만 흡족하지 않

아 마침내전신을 1,200년동안 소신(燒身)하는 것으로 세존께 공양하자 그 공덕으로 정덕왕국의 태자로

화생(化生)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일체중생회견 보살은 일월 정명덕 여래를 친견하게되고, 그를 본 일월 정명덕 여래는 부처

되리라는 수기를 주고서 입멸한다.

입멸하시자 일체중생회견 보살은 사리를 수습하여8만 4천의 사리탑을 세우는데, 그 탑은 높이가 三世界

요. 표찰이 장엄하여 번개(幡蓋)를 드리우고 보령을 달았다고 되어있다.

그러고도 마음이 흡족하지 않은 일체중생회견 보살은 다시 8만 4천 탑앞에서 두팔을 태우며 칠만이천세

를 사리탑에 공양하면서 무수한 중생으로 하여금 아누다락 삼막삼 보리심을 발하게 만드니 그 보살이 바

로 석가불 당시의 법화회상의 약왕보살이라한다.

 

약 십수년전에 읽은 글을 찾았다. 아마 이 의견이 옳은지는 맨 아래의 부록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왼쪽은 국보급 미를 반가 사유상인데 몸통과 목이 하나의 일직선으로 하여 얼굴은 아래로 저 먼 지평의

사유의 세계를 관조하는 모습이다.

가운데의 보살상은 몸을 조금 뒤로 제끼고 목도 조금 쳐 들며  세존의 사리를 담은 탑의 전체부위를 한

에 바라보고 싶고, 이로서 불공을 드리고 싶은 진솔한 표정이다.

오른쪽의 모조 보살상은 아마 하얀 돌로 다듬은 복제품의 보살상은 목이 아마 기형에 가까우리만큼 앞으

빼 내밀고 있다.  실상 인간은  저런 포즈는 불 가능하기에 이는 기형이다.

왜 이런 자세가 되엇는가??하는  의문의 답을 구하여 봅니다.

( 물론 여기서 나는 복사품의 가치를 하락시킬 필요는 없지만, 원품과 상이한 점의 차이를 비교하여 원품

의 조형적 의미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 기형이란 무엇인가??>

미술엔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형상화 하기엔 자연을 대상으로 있는 그대로의 구상화와 자연에 존재치 않는 일직선, 사각형등

머리속의 이지적 2차 생각을 그려낼때 이를 추상화라 일컷는다.

 

또한 구상화중에는 구상과 비 구상으로 분류한다.

구상이란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방적그림이고 비 구상은 구상을 데포름( 변형)하여 그리는 것이다. 이 비구상의 데초름의 한계를

넘어설때 이는 변형이 아니라 기형적인 시각의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인체의 조각은 우리는 외형을 바라 보지만, 그 조각은 피부속의 세겹의 근육과 그 이전에 뼈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

이 뼈의 연결이 무리가 없이 이어져 있슬때 완만한 조형품을 나타낼수 있는데,  아래의 복제 조각은 그 속에 N자의 뼈를 이룬다.

이는 뼈른 자르고 별려 조각하여야 하는 기형에 가깝다.만약 머리를 쳐 들지 않고 위의 사진의 미륵 반가 사유상이나 로댕의 칼레

의 시민에서 처럼 고개를 숙였으면 이는 기형의 뼈는 아닐 것이다.

 

해부학적으로 척추는 쌍S곡선을 이루며 그 곡선중에 위의 흉추의 에스 곡선의 각도는 일반적으로 15도 인데 이를 넘어서고도

얼국을 자연스럽게 들수 있다면 이것은 신체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기형이란 이야기이다.

 

서양의 다비드 상이나 비너스 전신상이 유명한 이유는 조형적으로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이지만 그 속에

첫째 조건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발목의 내측 상과에서 목의 중앙으로 이르는 가상의 축이 수직으로 균형을 잡아주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복제품의 보살상의 조각은 힘의 균형이 경사를 지니는 사선을 보여 주고 있다. 왜 그리 되

었슬까??

이는 원품이 보살상을 가치 하락적 이해로 그의 수정분 조각을 하다 우(憂)를 발생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상단의 웹문서의 비평중에 "이 석조 보살상은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하여 조형상

다소 불균형스런 모습이다. " 라는 말의 의미를 한번 곱씹어 보자.

 

아래의 원래의 보살상의 앞이 올라간 좌대를 모조품에선 바르게 평면으로 유도 하였다.

그 결과 몸이 전반적으로 앞으로 쏠려 ( 어깨가 둔부보다 앞으로) 불안적 느낌을 준다.

과연 원품의 석조 보살상은 무슨의미인가부터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보살은 위의 약왕보살론 처럼 8각9층 석탑과 매치를 이루어 부처님에 대한 불 신자의 하나의 세계를 표

현하여 화엄 불국의 신자들에게 이 모범적 스토리를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보살강은 석탑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며 가슴속에 와 닿는 모습으로 공양으로의 염원을 나타내

고 있는 것이다.

 만약 아래의 사진처럼 탑파의 한 부분만 보고 다시 윗부분을 처다볼때엔 아랫부분은 기억력속에서의 이미

지를 윗부분 볼때 합성시켜야 되는 것이다.

이 월정사 석탑과 보살상의 매치는 한눈에 사리탑을 바라보며 공양을 드리는 마음을 그린것이다.

그러기에 석조 보살상은 약간 뒤로 젖혀지게 만들었고,  하체의 린치가 조금 작을듯 하게 만들었다. 또한

연꽃 좌대의 앞 부분이 올라간 형상으로 오른쪽 무릎의 린치와 각도를 자연스럽게 매치를 이루었다.

 

아마 이 부분이 월정사 석탑의 핵심부분인데 어느 누구도 아직 이러한 뜻을 헤아리지 못한듯 하다.

석굴사 본존불의 조망을 위한 높이가 172cm으로 김대성의 키는 짚신의 높이 2cm 를 뺀 170 cm라는 김익수

선생님의 논문에서처럼 옛 선인들은 매치를 이루는 뜻있는 조형을 꾸몄습니다.

이 월정사의 탑과 보살상도 위 석왕보살의 드라마틱한 공양을 소재로 불신자들에게 귀감이 될 스토리의

무대의 장을 마련한 것입니다.

즉 하나의 세게관과 한ㄴ눈에 조망하고 공양을 드리고 싶은 보살이 이 탑의 주인인 것입니다.

 

바로 아래의 사진에 원래의 보살상의 아취형으로 뒤로 졎힘은 바로 탑의 전반부를 한눈에 조망하고픈 뜻

이 담겨지고,  무겁고 육중하게 보이는 묘관을 수직으로 내려 눌리는 모사품보다 약간 경사지게 비스듬히

힘을 빗겨 내리는 얼굴의 여유있는 미소,세상사의 모든 근심 걱정을 뒤로 밀고 오직 1.200년동안 불공을

드릴 그 미소는 신라의 귀족적 조각상도 멀리하고 백제인의 미소도 절반만 취한듯,,,

코의 길이도 짧고 박약한듯한 모습이지만 그것이 우리 중생들의 표정잉 아닐까 하는  실 생활의 모습과

연게하고져 하는 조형미는 아닐까 한다.

 

 

 나는 모사품의 가치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우리나라에 80년대에 제일 비싸게 들여온 조각품은 활쏘는 브르델의 모사품으로 용인 삼성 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사품도 진품과 식별이 곤란한데 위의 모사품은 원품의 의미도 모른체 원품을 비난하고 그를 수정

하려다 상체는 앞으로 쓰러질듯. 그의 가치를 논하고 싶은부분은 없지만 원품을 이해하기 위한 소재로 채택한다.

 

아래 사진에 좌대를 평면의 연꽃으로 만들고 보살상을 세우니 노란색 수직선에서 몸의 전체는 앞으로 기울고 얼굴은 수평을

바라본다. 그러면 팔각구층 석탑의 보륜, 보개까지의 15M 중 오른쪽 노란 사선처럼 2-3개의 탑신부를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그 부분을 기억속에 저장하며 위을 바라볼때 그 기억을 살려 합성하는 어려움을 원래의 보살상은 조금 뒤로 졎혀서

한눈에 탑을 전부 바라보고 공양을 드리는 모습이다.

 

이때 하체가 길면 뒤로 젖힘에 약간의 무리가 따르고 또한 오른쪽 무릎을 굽힘에 지면과의 공간의 뜸을 좌대의 경사로 지지한 것이다.

 또한 오른쪽 팔꿈치가 동자승에 자연스럽게 얹혀 그 힘이 지면으로 흐르는 것이다.

모조품에선 오른쪽 무릎이 뜨기 때문 그를 좌대에 닿게하니 자연 몸이 앞으로 기운 것이고, 또한 오른쪽 무릎을 괘지 못하고 팔을

들고 있기에 자연 몸에 힘의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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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의 축이 기울었기에 그에 따른 몸과 왼팔의 빈 삼각형도 기울어 지는 것이다.

 

 

 왼쪽 사진은 100M 스파트할 주자처럼 엄척이나 불안한 모습에 머리에 쓴 묘관은 얼굴의 반 정도로 무게감

때문에 둔탁한 모습을 감상하게 된다,

원품에선 이 묘관이 경사로 흐르기에 이 무게감응 사뿐히 처리하였다.

왼쪽의 사진은 맨위의 노란막대가 수직으로 있는 사진보다 조금 더 돌았는데 앞으로 좀더 기울어져 있다.

회화의 그림은 평면도라 2차적 면만 충실하면 되지만 조각은 입체의 3차적 면이라 위 아래등 각 방향에서

균형이 충실히 잡히지 않으면 이런 사고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모뉴멘트적 조각이라 세워놓았는가??

 

 

오른쪽의 뒷 모습은 그냥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할지는 모르나 몸에비해 머리부분은 레슬링 선수같은 느낌

이다.또한 원품의 모습에는 얇은 천에 가는 중닌데 비하여 두터운 천을 입은듯 그 맛이 다르다.

 

물론 이 부분의 느낌은 석불사 입면 여래상들의 간다라적 기법의 천의 빗살을 보시면 그 느낌이 다름을 알수

있으리라.

 

다음으로 4)장에서는 아래의 그림에서 보는 거대한 석등의 허상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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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랩>

 

 그러면 약왕보살(藥王菩薩)은 누구인가??

 

중생은 병들어 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에 중생이다. 이렇게 중생이 병들어 아파하고

있기 때문에 유마(維摩) 거사는 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병들어 신음하노라고 한다.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

어 아파하지 않으면 그 병의 뿌리를 잘라낼 수 없기 때문이다.

병의 뿌리를 잘라내어 중생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결국에는 성불의 길로 인도하고자 원을 세운신 분이 양

왕보살(藥王菩薩)이다. 이 분의 산스크리트 명은 바이사쟈 라자(Bhaisajya - raja)이다. 바이샤자란 양약을 일

컫는 말이며 라자는 왕이라는 뜻이니 바로 약왕인 것이다.

일러 병 고치는 약을 제공하는 데서 으뜸가는 보살로, 제35항에서 말한 일광 또는 월광보살이 모든 제난을

거하는 보살이라면 이 분은 그 외연이 좀더 좁혀진 병에 대한 처방이 으뜸가는 보살이다. 뿐이랴. 약왕보살은

자신의 몸을 남김없이 태워서 부처님께 바치는 소신 공양(燒身供養)의 정신을 치열하게 보여준 분이었던 것이

다.

 

이 약왕보살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이다. 본사란 본생담(本生

譚) 또는 본생(本生)과 같은 말로 전생의 인생살이를 일컫는 얘기이므로, 이 품은 바로 약왕보살의 전생이야기

랄 수 있다.

옛날 일월정명덕여래(日月淨明德如來)가 계실 때의 일. 일체중생 희견보살(一切衆生憙見菩薩)은 그 여래의 설

법을 듣고 감복한 나머지 1만2천년 동안 수행한 결과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알맞게 몸을 나투고 그에 적합한 가

르침을 펴는 현일체 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온 몸

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할 것을 맹세한다.

그러고는 오랜 세월 동안 향기가 나는 향목(香木), 향초(香草) 등을 먹고, 또한 향기나는 향유(香由)만을 마시면

서 일상을 살아간다. 이는 썩어문들어질 색신(色身)을 버리고 향기나는 몸인 향신(香身)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희견보살은 자신의 몸을 천의(天衣)로 감싼 채 다시 그 위에 향유를 바르

고는 이른바 소신 공양을 거행한다. 그러나 죽음은 또 하나의 삶으로 이어지는 법. 그는 환생하여 일월정명덕 여

래 앞에 다시 나타나 재회의 감격을 맛본다. 그러나 만남의 기쁨도 잠시뿐, 부처님은 이제 이승을 떠나겠노라고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잘 와주었도다. 나는 오늘밤 열반에 들터이므로 나의 법을 그대에게 맡기노니 널리 세간에 펼칠지니라""

 

 

그것은 오직 자유, 해탈, 해방을 위한 공양이기에 깨달음보다 더한 실존이며 가장 소중한 공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희견보살이 약왕보살의 전신이라고 세존이 숙왕화보살에게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다짐해 두었던가.

""만일 뜻을 세워 부처님의 지혜를 얻고자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손가락, 발가락 하나라도 좋으니 그것을 등불로

밝혀 부처님 탑에 공양해야 하나니라. 그것이 가장 귀중한 공양이나니라.""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별로 치병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만일 마음의 병이 걸린 사람이 이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면, 그병은 즉시에 소멸하여 영원한 생명을 깨달은 인간이 될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만 있을 뿐이다.



약왕보살과 월정사의 공양 보살상


어느 때곤 늘 푸른 수다한 아름드리 나무가 하나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오른 월정사의 전

나무 숲길에는 상긋한 바람 소리가 번뇌를 떨구듯 귀전을 스치는데, 그 번뇌 다하여 사라져버린 청정한 공간 월

정 도량(月精道場)에는 이체로운 팔각구층탑이 우뚝 서 있어 낯선이의 발걸음을 붙들어 맨다. 그런데 바로 그 구

층탑 앞에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을 공양 보살상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머리에는 묘보관을 쓰고 감발은 귀 밑으로 드리워졌으며 몸은 아침 햇살 처럼 눈 부시다.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

쪽 무릎을 곧추 세운 채 그 위에 손을 얹어 뭔가를 공양하는 모습이다. 그 보살상은「약왕보살본사품」에서 약왕

보살의 전신인 희견보살이 부처님의 사리탑 앞에서 자신의 양 팔을 공양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약왕보살로 추

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강릉 지방의 신복사(神福寺)와 한송사(寒松寺)에 이와 비슷한 보살상이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일대

가 약왕보살 신앙과 관련이 깊던 터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속리산 법주사에는 봉발 석상(奉鉢石像)이 있는데, 이 석상을 가리켜 희견보살이라고도 일컫는다. 두 손으로 향로

발우〕를 바쳐들어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으로, 그 형상이 마치 머리에 향로를 얹고 소신 공양을 올린 희견보살을

연상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주사의 희견보살상은 전신을 태워 공양하는 입상(立像)이고, 월정사의 보살상은 뒷날 그가 사리탑 앞에

서 양 손을 태워 공양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좌상(坐像)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자신의 살을 태우는 고통으로 얼굴은 비참하게 일그러지고 몸은 이리저리 뒤틀릴 법한데 월정사 약왕보살은 곧은

 자세로 탑을 우러를 뿐더러 얼굴에는 살폿한 미소가 주르륵 흐른다. (참고문헌 : 김현해, 법화경요품강의, p. 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