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 청동기 유적을 고조선 시대인이라 표현한 이유서]
후세백작 2016.09.22 13:
◈ 평창 청동기 유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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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 대하여 문화재이지만 그 등급과 현장 보존인 지 이전등의 심의가 내일 열린다. 청동기 시대 유골이 함께 출토된 점이나 또한 매장지가 고구려의 장군총이나 이러한 시기보다 7-800년 이전인 듯한 점과 청동검도 반 뿌려뜨려 역사에서 영원불멸하다는 순장제 이전의 묘이다. 또한 14기 묘중 대다수가 50cm 정도의 사각 매장 묘인데 2호기는 전신장으로 어떤 매장법이 파각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심의에서 유물 이전과 출토지 복귀가 아닌 출토지 670평의 보존명령이 떨어지고 출토품 현장 보존 심의가 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얼마 전 신라 석실 한 기가 시루목 중계소 아래 밭에서 확인되고 철망에자물쇠까지 채워 보존 한다는데, 하리 청동기 유적은 그보다 상한대이고 매장 문화도 연구할 가치가 있슬 것이다.
그 보다 우리 일반인들은 2,500여년전에 이 고장 지배자가 고조선식 단검을 차고 다니는..평창 역사의 시원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그리고 본인의 글에서 청동기시대를 고조선 시대인으로 이야기하는 것은우리역사에서 고조선의 실체가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 않기에 모호한 점도 있다. 하지만 출토된 청동검은 라오닝식, 또는 고조선식 비파형 청동검이다.
과연 이곳이 고조선 영토였는가 하는 점은 역사에서 증명하기 어려운 점도있겠지만,,, 고조선 후기 시대의 옥저, 동예등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삼한의 접목인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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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청동기 유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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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자에 매납한 이 비파형 청동검은 고조선 시대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고조선 시대의 국가하의 역사가 아닐까 사료됩니다. 일전의 글에서 묘족은 역사는 전혀 모르지만 조상은 치우천자라 믿고 그들의 시청앞 광장에 4층 높이의 치우상을 조각했단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고조선 시대 역사는 모든 사람들이 단군이 시조이고 고조선(옛조선)이 우리의 모태로 생각하고 알고있다.
그래서 기원 후에 출현하는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의 조상들은 고조선인 아닌가 하는 점에 역사규정에 지금도 정립할 수 없어서 그러한지 삼국 이전의 출토 문물은 청동기, 철기시대로 표현해야 함도어패는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 구리시는 고구려 영토라면서 광개토태왕비 모조품도 시청 앞에 건립하고 아차산엔 온달산성의 사적이 있다. 하지만 단양 영춘에도 온달산성이 있다. 어느 쪽이 진짜 온달산성일까?? 이래도 아무런 문제가 야기되지 않는다
허난설헌은 강릉의 초당이 생가였다고 누구나 잘 안다,,, 그런데 전라도에서는 자기네 문화라 우긴다. 더욱 심한 것은 우륵은 제천과 충주, 경상도 3파전으로 자기네 문화라 주장한다. 이런데 유독 평창은 호재들도 발로 차버리는듯 하다,평창은 참말 많은 소재들을 주변에 다 놓쳤다. 정선 아리랑의 대부분의 원조는 한치 뒷산 청옥산의 평창아리랑이고 옛날에는 정선 아리랑도 평창과 같은 공간성에 후렴이 없었다.
후렴이 없다고 재미없는 것은 아니라 이 지역 태백산간의 메나리조 아라리(아리랑)는 가락이기 전에 삶의 소리라. 평창 아라리는 정선처럼 외부의 작용에 의해 근자에 후렴을 다는 산간의 메나리조 아리랑의 짝퉁이 아닌 평창아라리는 지금까지도 후렴이 없이 부르는 전통성의 맥을 이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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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청동기 유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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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평창아리랑이 가락 이전에 삶의 소리라는 본인의 논리의 제반적 이론은 본인의 다수의 글 참조바랍니다)
또, 하나 평창의 잃어버린 역사에 판관대를 문화재로 상정하려는 준비에 좋은 안건이지만 평창인들은 판관대의 역사가 아닌 스토리로 인하여 율곡의 고향을 상실시켰다. 평창읍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50여년전에 송어를 양식한 원조이고 지금도 송어의 원산지의 보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봉평의 메밀꽃 축제는 메밀 국제학술회의까지 개최한다. 그런데, 그의 주체인 가산 이효석 선생은 4살에 아버지를 따라 진부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고, 아버지가 진부 면장으로 부임하며 봉평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봉평생활 2년만에 8살에 평창의 보통 공립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경기고보에 진학하며 서울 생활을 하게된다. 봉평에는 2년간 의붓 어머니와
살았던 것 밖에 없고 그의 자서전같은 "영서의 기억'을 보면 평창초교에 입학하여 6년간 초교생활이 그의 유년기의 정서인 것이다.그래서 평창의 지주환 시인님등이 효석 문학의 밤 3회를 열고는 박동락씨편에 봉평으로 이사간 것이다. 또 하나, 천동엔 도마치 입구에 김삿갓의 차남 익균이 살았었고 그의 무덤도 천동리 고, 강병준님 밭 주변에 있다가 언젠가 이장해간듯한 이야기도 있다. 익균은 가장으로 아버지를 모시러 대구, 진주등지를 쫒아 다녔고 화순서 타계 후에 3년이 지나서야 소식을 득고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 천동리로 모셨다 한다.
그런데, 익균은 천동리로 이사하고 폐허가 된 영월 삼옥리 옛 화전터에 아버지 김삿갓의 묘를 썼을까?? 우리가 아는 김삿갓의 일반적 스토리엔 상식을 위배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는믿고 있는지, 속고 있는지 나로서는 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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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청동기 유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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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려고 지금 이러한 이야기들을나열하며 평창의 잃어버린 소재들을 일일이 이해가도록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번 “평창읍 하리의 청동기 유적“에 관해서도 잃어버린 평창의 유산에 들어가는 아픔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고조선 역사책을 검증이 안되어있다 하면 덮어 두시고 인터넷 구글어스에서 중국의 시안 (서안, 장안)을 스카이 뷰로 클릭해 보십시요. 시안 주변엔 평면도이기에 사각 스케어(삼각 뿔 모양)응 무수히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조선의 피라미드 입니다. 시안은 중국의 고도로 중국 최초의 서울이며. 당시에는 한족이 아닌 조선족이 살았던 것을 분명히 느끼실 것입니다.
지난 65년도 중국은 단 한 기의 피라밋 발굴 조사에서 3일만에 강제 철수하였는데, 이곳에서 김치의 발효문화도 나온 고조선의 유물이기에 중국정부는 강제로 폐쇄시킨 것이며 지금도 천 여기의 피라밋을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조선을 우리의 역사가들은 아직 청동기 시대라고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도 주체성이 없는것은 아닐까??
역사의 주체성이란 ?? 위에서 언급한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영토를 확장한 위대한 위인이이라 하며, 이런 자랑을 할때는 같은 입장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로 들어간 것은 우리가 소홀히 하고 부족해서 총체적 난국으로 당한 것이라고는 하지 않고 일본의 강탈이라는 이중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광개토태왕의 자랑만 하고 있는것은 우리의 주체성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추체성이 있는 민족이라면 아픔을 참고 나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스스로 노력하여야 하지 언제까지나 일본 탓만 해서야...
그것의 하나가 일제가 만든 조선사편수회는 한국역사를 조작하려는 역사가관이며 이에 사환이던 이병도가 해방이 되고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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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청동기 유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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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식 역사로 고조선이 없는 역사를 만들었다고 언제까지 이병도를 매도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우리 역사가들에겐 앞으로도 고조선 역사는 이야기 되지 않을듯 싶지만 본인 후세백작은 고조선 단군의 자손으로 단군역사를 자랑하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나 혼지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부가 다 그러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주체성있는 민족이라면 남 탓만 하고 있을것이 아니라 우리도 묘족의 예처럼 스스로 개척하여 돌파구를 열고 단군 자손임의 긍지를 표출하는 것이 발전적 문화라 생각하며 본인 후세백작은 위 본문의 청동기 유물을 고조선 인으로 바꿔쓰는 주체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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