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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기상

평창 역사 박물관 건립은 평창인들의 관심입니다]

[평창 역사 박물관 건립은 평창인들의 관심입니다]

 

후세백작 2016.10.03 22:38

 

  일전 강원고고 연구원에서 평창 하리 청동기유적에 심의 결과가 어떤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인 것일테고 최종은 문화재청의 결심심의일것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이 자체가 문화재이며 그러한 심의는 유적지 폐쇄냐 보존이냐등 문화재 등록 씨리얼 넘버들일 것입니다.

 

  이번 평창 하리 청동기유적 양적으로 적은 수요이기에 문화재청의 박물관 설립만을 기다리기 보다는 기초 자치단체의 의결을 통한 지역 박물관 설립이 더 유효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국보나 보물등의 유물을 보존하는 박물관 설립의 최종 인가엔 아마 문화재청의 심의 의결이 있어야 할 것이란 점이며. 문화재청은 각 기초자치단체의 건의는 없고 다만 도 자치단체의 심의사항을 받기에 군 자치단체의 의결로 도 자치단체에 심의를 받아야 문화재청에 신청되는 사항일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평창 지역 주민들의 건의등으로 평창 자치단체장의 결심후 의결이 가장 빠를 듯 합니다. 군 자체단체가 주도하면 용의스럽지만, 그러기엔 지역사회 주민들의 생각과 관심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브산장님이 일전 언급처럼 가칭 <범 평창 역사 연구회>등을 발족하여 선지적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모여, 이를 모체로 하여 <평창 역사 박물관>의 건립 추진 위원회를 발족하는 방안입니다.

 

  그리고 이를 추진키 위해서는 평창문화원과 평창군청의 절대적 지원속에 평창 기초자치단체의 결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이 주도하는것 보다 관이 주도하는 성격이지만 그 모체는 민심의 협력이 있어야 좋을것이란 생각입니다.

여기에 혹 일전 저의 친구의 조언처럼 너만 잘났다고, 그런 예산 어디있다고 하는 편협은 무시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영월의 김삿갓 문화나 정선의 아리랑은 풍족한 가운데 창출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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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를 잠시 언급하면 정선 아리랑은 너브산장님이 잘 아시는 사북의 어느 청년이 유학시 안델센의 인어공주를 바라보며 나는 고향에 무엇을 위할까라는 생각에 집착하여 미친듯이 아리랑을 수집하였고 또한 연규한씨( 당시 정선 부군수)등 몇 사람의 생각에 강원대에 정선 아리랑 부속단체까지 이루며 성장한 것입니다.

 

  전 글에서 정선은 성마령에 2012년인가 정선에서 미탄으로 아리랑이 전래되었다란 시비의 예를 들었는데 미탄아리랑을 들고가 고맙다 해야할 넘들이 날강도 소리를 하는데 정선 아리랑은 얼마나 많은 짝퉁이론이겠습니까??

 

  한가지 더 한다면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구름 막 모여든다"" 란 가사를 고려말 임금님을 걱정한다는 600년전의 노래인데 이것이 최고 오래된 것이군요 하고 김연갑이 연 부군수에게 묻고 답이 없자 그럼 그것이 정설입니다 하는 웃기는 이론들,,,

아무리 무식장이라도 임금님 걱정이 그러한 문장입니까??

모든 아리랑은 1인칭 단수현재이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삶의 이야기 입니다. 여러 이유로 이는 청옥산에 나물뜯으러가서 먹구름이 몰려오면 1,200m의 고산이라 비가될지 눈이 될지 애틋한사연을 담은 노래라는 것입니다.

 

너브산장님이 잘 아시듯 정선 아리랑에 "도원가곡'이 정설입니끼?? 저의 이야기엔 정선아리랑의 제 이론의 모순이 무척 많이 있습니다.본인 후세백작도 평창출신의 평창인으로 무엇이 그들보다 모자라서 가만히 있으면 바보가 되는, 그러고 또한 관이 하는 일에 내가 뭘 하고 가만히 있으면 주변이 체가고 당하는...좀 원색적으로 표현한다면 낮잠자다보니 당하여 우를 겪는데, 가만히 있으면 않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평창인들의 낮잠론을 거론해 볼까요??

내가 똑하면 너도 똑할텐데 내가 뭘,,, 관이 알아하겠지라는 수동적 행동 말입니다.

 

이러한 느슨한 행동엔,,,아우라지 뗏목엔,, 기실 월정사에서 내려 흐르는 오대천에서 구절리에 높은 산이 더 많아 오대천이 뗏목의 발원지라야 하는데,,평창인들은 이러한 아라리 가사가 있었습니까??

 

분명 채집이 않된 것입니다. 너브산장님도 월정사 위의 일제 강점기시의 "회사거리"를 잘 알고계시지요.기다리고 있으면 누가 해줍니까?? 지금 바로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분명 저는 평창아라리의 제 이론을 규명할 것입니다. 그러기엔 정선이 도용해가서 제대로 사용하였으면 괜찮지만 그것의 이론을 날조한 부분들은 깨야 할 것입니다.그러기에 작금의 정선은 태백 영서의 아리랑을 제 논리를 훼손하는 무리배이다 그리고도 뻔뻔스레 정선 아리랑이라 한다.

 

아리랑이 그렇게 군 단위로 분활되었던가?? 그 명칭은 영서 아리랑이라야 옳은 것이다.

아라리는 가락이기전에 이 지방 선인들의 삶의 표출이기에 그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여야 역사는 전달되는 것입니다.

 

영월과 김삿갓의 연관의 이야기는 저가 이해하기엔 너무나 곤혹스럽습니다. 그러면 천동에 김삿갓의 둘째 아들 묘는 지금은 이장되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다음글로 바로 하겠습니다.그리고 영월에서는 당시 문화원장 박영규 옹이 하동 답사를 통하여 학계에 건의하여 김삿갓 문화제가 이루어지는 등그 시발은 장대하지 않고 예산지원도 풍족하지 안았으며 단지 몇사람의 노력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봉평 메밀꽃 축제 전신이 평창의 이효석 문학의 밤이었지만 그대로 지금까지 평창에 안주하였으면 봉평의 국제 메밀꽃 심포지엄등의 여러방향으로 이끄는 아이콘이 계발(啓發)되었슬까도 자답해본다.이러기에 官이 주도하기보다는 民이 참여하여야 하는 것이란 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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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평창은 호재의 소스들을 다 놓쳐버리고 이제 정말 좋은 자연의 향기 물씬 풍기는 백일홍 축제...이것도 잠시후면 시들까?? 이런 우(愚)에 앞서서 民이 주도로 콘텐츠를 계발하여야 하는 생각도 보지만...

 

그래서 앞으로<범 평창인 역사 연구회>를 발족한다면 창립 취지서등의 글은 아주 간결 명료한 취지문을 작성하여새로운 아이콘으로 평창의 브랜드를 명품화 시키고 영서의 역사 박물관의 메커로, 또한 모든 국민이 정통성을 부여하는 배달민족,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의 고조선 박물관 설립에 뜻있는 모든 분들에게 서한 또는 맨투맨식 회원을 모집하는 모든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역사박물관 건립 추진시에 제반 토탈적인 플랜도 구성해야 할듯 합니다.그럼 아래에선 평창 하리유적의 고조선 시대와 고조선 국가의 이해를 잠시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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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국가 형성과 명칭의 문제>

 

이번 평창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적은 피장자의 지위가 임금이나 어떤 역사적 고유명사가 없는 고대유물로 미사리 선사유적, 전곡리 유적등 "리"단위의 표현으로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으로 표기될듯 하다.

 

2,500여년전의 BC5세기의 유물로 추정되는데,,,이는 비파형 청동기의 말기에 세형 청동기로 변하는 과정의 시기로 지금까지 학계의 중론으론 비파형 청동기는 고인돌에서 미송리 토기와 함께 발견되는 고조선 유물로 간주된다.그러면 고조선이란 국가는 어떻게 형성되었슬까??

 

먼 옛날 북방의 예맥족이 한반도로 남하하였으며(북방은 추운 겨울이면 영하 30도도 되는데 원시인들은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슬텐데 그 추운곳에서 왜 살았슬까 하는 의문에...본인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4-5천년 이전에 그곳은 살기좋은 기후였는데 빙하기 도래라든가 추워져서 남진을 하게된듯)

 

예와 맥의 원시인들은 원시 공동체의 사회등으로 생산하지만 잉여물건이 없어 사유재산은 없고 토템신앙의 영혼도 없는 사회였다. 여기에서 인구가 불어나며 번성해지고 생산이 많아지며 사유재산화하는 계급주의가 발생되며 인근 부족들과 마찰로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게 되고 그러던중 조선(지역명으로 이씨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른다) 이 크게 세력을 떨추며 예와 맥의 흩어진 부족을 규합하여 초기 국가를 이룩하는 것이 고조선이다.그러기에 고조선은 배달민족이 아닌 재정일치의 초기 국가를 형성한 것이란 점이다.

 

오늘이 단기 4,349년 개천절이다.

기원전 2,333년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이 개국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국정 공휴일이다.그러면서도 단군왕검(단군은 제사장의 뜻이고 왕검이 이름으로 고유명사이다)의 고조선사는 아직 우리역사의 정사로 설정이 않되었지만 우리가 흔히 혼돈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조상이 단군이다라고 말하면 잘못 말하는 것이다.

 

아직 정사는 아니지만 고조선 1대임금에 단군 왕검에서 마지막 47대 임금은 단군 고열가이다. 여기서 임금은 이해력의 단어이고 당시 재사장으로 이집트의 파라오같은 절대 통치자를 이야기 한다)

 

이렇게 개천절을 단군이란 공식명칭을 쓰면서 국경일이 되어잇지만 아직 정사에서 고조선은 취급을 못하고 있다.역사의 태동에 문자도 없던 시절의 규명에 중국, 일본 역사까지도 들어 맞아야 하는데 아마도 중국측이 틀려서 확실한고조선의 위치나 연대에 어려움이 있는듯한데 아이러니하게 단기 4943은 정확한 수치일까??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을 이해하고자하면,,,한반도엔 예, 맥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며 생산 공동체에서 잉여물자에 게층이 생기고 인근 부족들과 마찰속에 전투가 되고 이런 반복속에 비파형 청동기 후기에 평창 비파형 청동기는 세형으로 변모하게 되는것은 아마도 이 청동검이 장식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성에서 갑작스런 무기로 자주 쓰이며 자꾸

옆날은 줄어들어가는 것이다.

 

이 동검을 BC 5세기로 보고있으며, 이후 BC3~2세기경엔 세형동검으로 변형되며 또 한편에서는 고조선은 일찌기 철기문명이 시작되었다. 이때 고조선 인접의 중구 연나라는 고조선은 교만하고 사납다는 미명아래 고조선을 침략하지만 (BC3세기경) 철기문명의 고조선은 그들을 물리치고 내부 결속도 강화된 강력한 국가로 출범하게 된다.

 

이때 중국대륙은 진,초,연,제,한,위,조의 7개국으로 진나라의 시황제는 초와 제나라의 연합으로 연나라를 삼키고진시황제는 중국대륙의 천하를 통일한다.

그리고, 진시황이 죽자 한나라가 커지며 연나라의 땅은 북방 흉노가 밀고 내려와 연의 유민은 고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이때, 고조선은 많은 유민을 받아 내부 결속후 철기 무기등으로 부강한 나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후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나 철기무기와 끈기로 장기전이 되며 고조선의 장수들이 한나라로 들어가며 고조선은 패한다. 이것을 지켜본 사마천은 한나라 장수들은 전쟁에 패하여 사형당하지만 고조선 장수들은 한나라로 유입되었다는 기록도 남긴다.

이것이 역사학자들의 고조선사 정설로 제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보면 비파형 청동검은 고조선 형이라 하면서도 고조선의 영역밖이라면 그것은 예, 맥족의 부족사회의 시기일수도 있슬지 모르지만 , 그래서 남쪽 아랫지방의 고조선 영역밖의 당시로서는 진국이라 하는데 그곳의 고인돌은 아직 고조선 국가에 포함이 않 될 수도 있었겠으나 중부권의 태백산간지역과 시기적으로 세형동검으로 변모하는,, 즉, 검으로서 활용도가 많아 폭이 줄어든 평창 하리 유적의 청동검은 당시 고조선 사회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비파형 청동검 중에도 고인돌에서 아온 예성강 이남이나 아니면 춘천 중도의 고인돌 청동검이나 우두동 등의 비파형 청동검의 시기가 상대로 올라갈수록 예나 맥족의 ,,, 아직 고조선 국가에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이러한 이유로 저는 평창 하리의 비파형 청동검유적의 피장자의 유골을 고조선인이라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이제, 만약 문화재청에서는 국가적 시기가 아닌 문화 발달사적 용어로만 쓸수 없는 입장을 이해하였기에...평창 하리 비파형 청동검은 문화재청에서는 동일한 용어로 문화재로 인가기 될테지만,,,그 이후 평창은 이 유적의 브랜드화로 고조선인의 용어를 씀에는 역사적 규명에서도 어패가 아니란 생각이다.

 

만약 막물관이 건립된다면,,,유적지에 2-3층의 박물관을 짓고 1층은 엘레베이터, 게단실외에는 석실보존지역으로 관람하며, 시물레이션 영상자료가 나오면 그와 동일한 고조선인 밀납인형의 조각품으로 장식하며 2층은 향토사 박물관으로, 3층은 영상자료센터로,,, 이런 플랜도 좋치 않을까요??

 

더 나아가서 박물관으로 전시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그 뒷산에 한시간 거리의 산책로를 만들고 요소요소에 당시의유물,,, 시물레이션 이야기들을 테마로 공원화하여, 또한 정상부엔 창공과 평창을 들녘을 내려보는 피장자의 환히라든가 하는 관람자등의 인증 샷의 볼걸리 촬영거리등 다양한 아이콘을 창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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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8 00:48

 

한반도의 인류는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이주를 시작했다. 신 교수는 중국 랴오허 서쪽 지방에  정착한 민족을 ‘맥족’, 랴오허 동쪽부터 연해주에 터를 잡은 민족을 ‘예족’, 한반도에 남은 민족을 한족’이라고 주장한다.

약 5000년 전에는 한족과 맥족, 예족이 다시 뭉쳐 고조선을 건국하고 한국민족이 탄생했다. 세 부족은 혼인을 통해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됐다. 신 교수는 이를 가리켜 ‘언어, 지역, 문화를 매개로 결합한 인간 공동체’라고 소개하며 “한국민족의 자생적 형성에는 고한반도에서 생활한 초기 신석기인이라는 뿌리 깊은 배경이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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