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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간성(干城)

세계적 영웅 故 김영옥 대령

세계적 영웅 故 김영옥 대령 비공개
 

후세백작 2016.08.05 14:47

 

오늘 어느 신문 사설에 초등 교과서에 실렸던 故 김영옥 대령의 영웅전이 삭제되었다 한다.

그는 이민자 2세의 미국인으로 미군 김영옥대령의 무공담과 초교 5학년 교과서에서 그의 이야기가 왜 삭제되었는지 알아 보고자한다.

 

2 년전 지평리전투의 몽클라 중령(프랑스의 현역 베를르네 중장)과 프리먼 대령(미)과 이의 상관인 2차 대전시 그 유명한 벌지전투의 명령자인 공수특전사령관의 릿지웨이 미 8군 사령관등의 영웅적 이야기를 쓰다 그냥 둔 것도 있지만, 요즘 인기 영화의 맥아더와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인천상륙작전과 흥남부두 철수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것이란 후세백작의 생각과 차라리 6,25에선 밀번, 워커장군, 리지웨이, 벤플리트 장군등의 한국사랑과 전우애가 더 다가온다.

 

2차대전에 노르망디에서 혁혁한 공을세운 세계적 영웅들의 6,25 참전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리는 일반적인 이해보다는 전술적 수세에 몰리는 미국의 입지와 이에 인물적 비교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미국 전쟁사속에 영웅으로 우뚝선 김영옥 대령을 알아본다.

 

김영옥 대령아버지는 독립운동에 도미하여 독립자금을 지원하여 생활은 항상 곤궁하였지만, 경건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노라 고 여사의 영향으로 밝게 성장하였다. 당시 미국은 2차대전시에 미군은 유색인종에 까지 징집이 확대되자 그는 지원하여, 2차대전에 유럽전선에 참전하며, 그의 능력을 알아본 장교들이 추천하여 그는 장교과정을 거쳐서 장교로 진급하였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도 전쟁중이라 일본 이민자의 2세대들 12,000명을 애국심을 증명하란듯이 유럽전선으로 보냈는데 이 부대가 442부대(일본말로 닛세이 부대)이며 1943년 소위로 임관한 김영옥이 배치를 받은 곳은 442부대 100대대 소대장을 부임하였다.전원 '니세이(2세)'로 편성돼 '미국 속의 일본'이나 다름없었다. 동양인이 백인을 지휘할 수 없다는 군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한국계 장교를 니세이들 틈에 끼어넣은 것이다. 이젠 일본계 미국인 병사들의 반발이 심하였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알고 있던 백인부대장이 타 부대로 전출을 강요했다. 김영옥을 배려하는척 했지만 실제는 전투력 약화의우려 때문이었다. 니세이 병사들이 한국계 장교의 지휘에 따르지 않을 것은 뻔했다. 하지만 김영옥은 부대장의 전출명령에 단호히 맞섰다. "이 부대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아메리칸이다. 함께 공동의 적과 싸울뿐이다."

그래서 일부에선 김영옥을 '여럿이 모여 하나(Out of Many one)'라는 미국의 건국이념에 가장 충실했던 군인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한 그의 리더십은 유럽 전선에서 빛을 발했다.

김영옥 대령은 로마와 피사 해방전의 주역으로 이탈리아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프랑스에서는 비퐁텐 해방전의 주역으로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의 무공담 하나를 소개하면,,연합군의 로마 해방에는 김영옥의 공이 켰다.

43년9월 로마의 외항인 안치오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안치오를 포위한 독일군과 장기 대치 상태에 빠졌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공격 루트를 알고 전차부대를 매복시킨다면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기에 로마해방을 목전에 연합군으로서는 로마 총작전을 세우려던 미군에게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독일 탱크 사단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정보도 없 섣불리 총 공격했다간 탱크사단의 화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독일군 포로를 잡아 독일군이 정예 탱크 사단을 어디에 배치해 두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크 클라크 미군 사령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6월6일)을 의식해 적정(敵情) 파악을 다그쳤고, 김영옥 중위가 속한 34사단도 '독일군 포로를 생포해 적정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일본계 미군으로 구성된 100대대 정보참모로 구스타프 라인에서의 뛰어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김영옥은 대대 정보 참모로 자신이 직접 적진으로 들어가서 적군을 생포해 오겠다는 작전 계획을 제출하지만 대대장은 수색대조차 수 차례 포로 생포에 실패했던 터라 "미친 소리라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적군의 경계를 뚫고 독일군 진지 영내에 침투하여 독일군을 생포하는 작전이었는데요. 이 작전에 대한 많은 논란끝에 '자살행위이지만 자원한다면 가도좋다' 는 허가를 받게됩니다. 즉, 군사적 측면에서는 성공 가능성이 전혀 없으나 그렇게 죽고 싶다면 한 번 해 봐라' 라는 의미였죠.

 

 

김영옥 중위는 자원병인 아카호시 일병과 둘이서 작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는 작전 지역 일대 항공 입체 사진 수백 장을 놓고 지형을 머릿속에 담았다. 적진에 침투하려면 아군의 참호·철조망·지뢰밭을통과한 다음 그 반대 순서로 적군 지뢰밭·철조망·참호를 통과해야 했다.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밤10시30분쯤 철조망을 뚫고 포복으로 통과한 뒤 적진으로 들어가 대치하던 2명의 독일군을 총으로 위협, 생포해 동이 틀 무렵 포복으로 철조망을 통과하며 아군 진지로 무사히 귀환 하였다.

 

김영옥 소위가 낮은 포복, 지뢰제거등으로 독일군 부대를 들어가 두 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데리고 다시 독일군 영내 철조망을 넘어 귀한하는,,,당시 포로를 생포해 독일군 영내를 탈출하는 광경을 클라크 사령관은 쌍안경으로 보고 있었다.클라크 대장은 "넘버 원!!"을 외치며 내 휘하의 500만 군인중 제일이라 칭찬하였다 하는데.. 아마 이러한 광경은 세계전사에 빛나는 영화장면 같은 것이다. 복귀한 김영옥에게 클라크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부관의 댕위 계급장을 떼어  대위 김영옥의 어깨에 달아 줍니다.

 

 

 

 

김영옥이 잡아온 포로를 심문해  독일군 탱크부대가 없다는 진술에 연합군은 5월 23일 '버팔로 작전'으로 명명된 총 공격을 개시해서 포위망을 뚫고 6월 4일 로마를 해방시킵니다. 이와 함께 앞, 뒤로 전선이 형성된 독일군의 구스타프 라인도 무너지게 되었죠. 김영옥의 작전 성공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이틀 전인 6월4일 로마에 입성했으며 이로서 이탈리아 전선의 판도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작전으로 이탈리아 정부는 전쟁 후 이탈리아 최고 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김영옥 대령에게 수여하였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최고의 군인이다." -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 중령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 최고의 군인이다." - 마크 클라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

 

 

▲김영옥 중위가 1943년 이탈리라 남부전선에서 세운 무공으로 이탈리아 주둔

미 5군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준장으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고있다.

<출처; 국방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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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중령은 모국 한국의 6,26전사에서도 빛났다) 


 여기서 한가지 사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에 유럽 남부측면의 리베리아 반도의 로마를 탈환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가세하였듯이 맥아더의 트레이드 마크인 인천상륙작전에서,,,

당시 인민군 3개 사단의 총력전에 낙동강 전선을 교착상태가 되었으며..데이비드 선이 무너지면 미군은 일본으로 건너가 작전을 펴겠다는등,,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과 때를 같이하여 다부동 전투등으로 미군과 국군은 낙동강전선을 돌파하여 서울로 진격하기에 이른다."게이" 미 기갑 1사단장은 우리 1사단장에게 "씨유인 서울"이란 말을 남기고 서로 자기부대가 먼저 서울 입성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 그 결과 인천상륙에 맞춰서 미군과 한국군은 서울에 입성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후 북진엔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올라온 대규모 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역으로 뒤집어 생각한면,,,낙동강 전선은 처음엔 고전을 면치 못하였지만 이 전선의 막바지엔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트릭으로 북괴군 3개사단의 힘을 쭥 빼놓은 상태가 가상된다.

 

그렇다면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낙동강 전선에서 정공법으로 밀고 전선을 북으로 올리진 못했슬까?? 그렇치는 않으리란 생각에 다음으로 맥아더와 아몬드에게 나는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는 글로 분석을 해 보겠습니다.

 

 오히려 위에 언급한 게이 미기갑 1사단장, 밀번 미 1군단장. 워커, 리지웨이. 벤플리트 8군 사령관등 2차대전의 쟁쟁한 주역들의 전쟁에대한 사명감과 한국사랑을 그려 보이겠습니다.

 

김영옥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 국방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위로 전역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부모님의 나라인 조국 한국을 돕기 위해 다시 군에 입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최전방 전선으로 달려갔다.1951년10월 미 육군7사단31연대1대대장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서도 그는 수 많은 전투 신화를 만들었다.

 

그가 1대대를 맡았을 때 병사들 사이에는 패배감이 만연해 있었다. 북진하다 함경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맞아 연대장까지 잃으며 궤멸되다시피 했던 31연대에는 '장진호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중공군에 대한 공포감이 가득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대대 분위기를 180도 바꿔 놓았다.


김영옥은 늘 최선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모한 짓도 서슴치 않았다. 금병산 전투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는 능선을 팔짱을 낀 태 왔다갔다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복돋워 주기도 했다.구만산·탑골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뒤  남이섬 인근에서 벌어진 금대리 전투 때는 적진 30㎞를 4시간만에 관통하는 야간 행군을 시도해 승리를 낚았다.

그의 리더십 아래 면모를 일신한 1대대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면서 '무적의 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뛰어난 전술은 수안산 전투에서 적진 사이를 돌파하는 위험한 작전을 짜게됩니다. 작전이 성공하면서 수안산 전투는 중부 전선을 북으로 60km나 밀어 올리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오늘날 휴전선이 중부전선에서 북으로 불쑥 튀어오르게 한 것입니다.

 

<중부전선에서 북으로 밀려 올라간 모양의 지금의 휴전선. 출처: 아름다운 영웅 >

미 육군대령으로 전역한 '커널(colonel·대령)김'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전사(戰史)를 새로쓰게 한 위대한 군인'으로 각인돼 있다. 프랑스 동북부 브뤼에르 지방 등 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킨 지역에서는 '카피텐 김'이라는 동양인 장교의 이름이 아직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또 한국전쟁 당시의 김영옥 소령은 그가 거두고 보살핀 수백 명 전쟁 고아들로부터 평생의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종전후 그는 사업가로 변신하지만 요즘 울 나라에 유행하는 무인세탁의 코인세탁사업으로 번창하지만 그는 6,25가 터지자 조국을 위해 재입대해 조국에 6,25에서도 숱한 불패의 전투신화를 만든 그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부상으로 40여 차례 수술을 받았다. 이로서 그는 유럽의 불패신화를 중공군을 향해 재현하며 중부전선의 주역이 되었고 조국은 그에게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31년 군 생활을 마감하며 그가 더 추앙받는 이유는 미국의 정, 재계의 러브콜을 마다하고 사회봉사에 33년의 여생을 받쳤다. 가정폭력 피해여성, 고아, 입양아, 노인 청소년, 빈민등 인종의 벽을 초월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자신을 받쳤다. 미국은 그를 기리기 위해 중학교 하나의 이름을 김영옥 중학교로 명명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렵사리 수록했던 그의 전기가 교과서에서 삭제했다.

그 이유의 하나는 미국 시민권자이기에 한국 차세대 모델의 역활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복수 여권국을 폐지하여야 하고 교과서엔 라이트형제, 노벨, 오드리 햅번, 잭웰치, 아메리칸 인디언의 시애틀 추장까지 숟한 외국인이 수록되어있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는 타당치 못하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미군 장교로 6,25에 참전한것이 못마땅하다는 이념 논쟁때문의 편견일 것이란 점이다. 글쎄 이념논쟁에 우리민족의 자랑인 영웅마저도 희생당해야 한다면 좌 똥싸게들은 인류에도 무시된 막장인생은 아닐까?? 전 세계를 통틀어 3개국(한국·프랑스·이탈리아)에서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김영옥이 유일하다.

이탈리아 ‘최고십자무공훈장’과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십자무공훈장’ 과 한국의 최고 무공훈장인'태극무공훈장"을 73번째로 수여하였으며 미국 ‘은성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세계 전사에 한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신화를 남긴건 우리가 잘 아는 성웅 이순신의 23전 23승 이외엔 흔치않은 기록으로 김영옥 대령뿐인듯 하다. 또한 여기에 앞으로 미국의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이 미 의회를 통과하여 추서될 날을 기다린다.

 

김영옥 대령은 2차대전당시 미군 장교로 이태리. 프랑스 전투와 우리나라의 6,25 참전하여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영웅적인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 이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전설적인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미국 내 백인주류 사회는 물론 그를 아는 모든 이에게 본보기이자 지도자로서 존경받고 있다.

2011년 미국최대 포털사이트인 MSN에서 선정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에 미국 독립전쟁의 총 사령관인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과 남,북전쟁의 남군의 리, 북군의 그란트장군, 2차세계대전의 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아이젠하워와 당시 남 태평양 사령관과 한국전당시에는 유엔군 사령관을 역임한 더글라스 맥아더와 같이 미국역사에서 전쟁영웅 16인의 대열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외로 16인의 영웅에는 한국전 초기에 대전방어에서 빨갱이같은 주민의 신고로 3년간 포로가 된 미24사단장 제임스 딘소장과 월남전의 전투기 조종사 존 메케인 상원의원과 존 케리 해군장교(상원의원, 국무장관). 걸프전 사령관으로 흑인 최초로 육참총장을 지낸 노먼 슈와츠코프등이 있다.

 

한민족이 낳은 전설적인 영웅이자 인도주의자였던 그는 이민자의 자식이란 당시 미국사회의 멸시와 가난, 인종차별의 멸시를 극복하고 세계무대로 향하여 기상을 떨친 인물이며 보장된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약자를 위한 봉사와 박애로 평생을 살아온 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청소년들에게 알리는 것이 민족적 자긍심과 도덕적 모랄일텐데, 이것이 삭제되었다하니 씁스무레한 느낌이다.


 

<故김영옥 대령, 1919. 1~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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