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마을 유래와 강절부(강소사)님 이야기
후세백작 2014.10.01 01:03
후배님이 오셨구료,,,지난번 후배님들과의 산행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후배님은 鷹岩(매응, 바위암)리 출신 아마 4년 후배이죠??그 날 산행에서 언 후배 왈 매화의 뜻을 아십니까?? 하고 묻길래 나는 농담으로 평창에 남쪽 지방으로 가장 먼저 매화꽃이 만발하는 이름없는 산촌이예요. 그리고 먼 옛날 당시로는 제 또래 처녀가 네명 있었구요. 라며 답을 하였다..그랬더니, 그 후배 왈 그건 오답이란 뜻으로 웃으면서 420년전 임진왜란때 이 응암리는
매의 화를 입어 매화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정답은 아닌 것을 본인은 잘 알고 있다..
임진왜란때 평창의 관, 민은 왜구에 대항하여 항전하다 이 응암절벽의 민굴, 관굴의 외대, 월대에 피신하여 왜구들에 발각되어 군수는 포로로 잡혀가고 그의 부인은 지조를 위해 푸른 강물에 투신 자살한다.
그래서 적장은 전투를 잠시 중지하고 비록 적진이지만 이러한 절개를 감탄하며, 시신을 건저서 그들의 장례 방식인 롸장을 하려 묻고 예를 표한 다음에 전쟁을 계속 하였다는 아름다우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이 기록은 당시 평창군수 남천 권두문의 임진왜란 당시에 평창군수로서 겪은 "호구록"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임란 때 적장을 끼고 낙화암에 다이빙한 논개의 이야기는 잘 알지만 이 이야기는 생소하리라.
그러나, 임란사엔 영월의 고씨동굴이 발각되어 의병을 주도하던 고씨 형제가 체포되며, 고종원의 처 조씨 부인이 동굴내 물에 투신, 자결하여 지조를 지킨 이야기와 낙화암보다 더 까 파랗고 더 푸르게 깊은 응암굴에서 강절부(강소사)님의 투신의 슬픈 이야기는 오늘도 전해져 오고 있다.
평창사람들은 강절부님을 권 군수의 후실 부인이라 격을 낮추고, 또한 강소사란 이름을 부르나 당시 조선시대의 후실부인은 지금의 후실이라는 명분과는 사뭇 다른 점이다. 물론, 서른두 살의 강소사 부인은 젋었다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 있으나 당시 본 부인은 군수의 고향인 영주에서 노환의 노모를 봉양하느라 따라 움직일 수 없었으며 후실 부인은 지금과 같은 놀이문화의 위치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권 군수의 아들 "주"도 아버님을 도와 평창에 기거하다가 왜구에 대항하다가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 당시 문화에선 이율곡 형제들도 아버지 이원수 공의 판운수운 시절 아버지 배에 같이 승선하여 다니며 아버지 일을 보좌하는 것을 볼 수 있다(본인의 글,,율곡의 고향은 평창입니다에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평창 사람들은 지금 "강소사"라 부르지만 기실 광해군은 그의 순절의 인품에 "절부"라고 추승하였다. 그러기에 강소사라 부르는 것보다 임금님이 내려준 휘호의 강절부님 이라야 예의 표시에 합당한 존어이다.(광해군 4년에 경상감사의 상소로 절부(節婦)로 추승 정려되어 그의 고향인 영주시 구성공원내에 정려각이 세워졌다)
아래의 시는 ,,,
저는 시인은 못 됩니다만 일전 저의 글에 삽화 처리정도의 자작 시적인...
!!!!!!!!!!!!!!!!!!!!!!!!!!!!!!!!!!!!!!!!!!!!!!!!!!!!!!!!!!!!!!!!
"" 강절부 님이시여....'"
후세백작
님은 꽃다운 청춘에....
못다핀 꽃 한송이련가??
낙화암보다 더 푸른물에
한줄기 연꽃으로 피어남을
후대인들은
뉘라서
그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리요.
님의 연닢은
절개산 아래 감아도는 사천강에서
언제라도 다시 맺을 꽃봉우리로
우리는
기다리고 있답니다.
!!!!!!!!!!!!!!!!!!!!!!!!!!!!!!!!!!!!!!!!!!!!!!!!!!!!!!!!!!!!!!!!!!!!
(사천강은 지금의 평창강 입니다)
응암리 강절부님의 투신 현장엔 한국인보다 일본 관광객들이 단체로 찾아오곤 한답니다. 아무리 전쟁 속에서도 강절부님의 투신에 조선에 이런 여인이 있다고 감탄하며 전투를 중지하고 예를 지내주는 적군이기 이전에 인류애의 아름다운 미덕은 아마 일본에선 크게 귀감으로 알려진 듯한데 이 소식을 들은 권두문 군수 12대 직계종손의 (고) 권태하 님은 일본의 친구 역사가에게 부탁하여 고니시 유키가와(소서행정)의 문중 역사서를 찾아 당시 이 강절부님의 기록을 찾아 본다 하였는데 아쉽게도 지난해 5월에 타계하시었다.
아마, 이 이야기는 4번대 시미즈 번주나 4번대 총사령관인 모리 요시나리 다이묘의 역사 속에서 찾아보아야 할 듯.
우리는 조그만 동네 어귀에도 여러 비각들이 있다. 하물며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 충절을 지킨 한 여인의 슬픔을 기리는 비각 하나 있는가 ?? 일전, 강소사 무덤의 위치를 확인코자하는 평창분들의 노력도 있었고 천동에서는 강소사의 진혼제도 드린 바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응암리를 매화란 지명으로 사용하곤 하는데...
매화는 평창의 남쪽 봄이 먼저 찾아오는 따뜻한 마을로 매화꽃 만발하는 동리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며, 또한 임란당시외대와 월대굴에 교신을 하던 매가 발각되어 매의 화를 입었다는 이야기도 와전된 오류의 이야기 입니다.
(2017,02,03)
<매화마을 지명 변천>에 대한 타당성의 논리를 구사합니다.
<매화마을 지명 변천>
<평창문화> 2015,12,30 평창문화원 발간. p26을 인용합니다.
이 책에서, 현재 법정리명이 "응암리"가 "매화마을"이라 불리며 "매화낙지형"이라 전한다. 우리나라에는 "매화마을'이라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곳이 매우 많다. 대부분 매화 꽃과 연관있는 마을이며 그렇지 않는 경우는 무덤 또는 선사사대 유적과 관련있는 마을도 있다.
평창읍의 매화마을은 매화낙지형이라 전하는 마을이지만 특별하게 매화꽃과 관련된 유래나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선사시대 유적과 관련지어 조사하였다.
① 평창읍 남부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지형이 '매화낙지형'이라하여 매화마을이라 부른다.
②임진왜란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이 매화마을 강건너 자연동굴에 피신하고 매를 이용하여 교신하여 전투하였다하여 "응암굴"이 라 한다. 이때부터 마을이름을 응암리라 한다.
③매화는 임란당시 권두문군수가 매를 이용하여 하여 교신하였는데 왜인에게 매가 발각되어 화를 입었다 하여 매화마을이라부르는 어원도 있다.
④응암굴 전투이후 마을에 매(응)자를 써서 "응암리'라 부르고 있으나 '매화마을"이라는 지명은 응암굴 전투 훨씬 이전부터 부르는 마을의 고유명사이다.
실제 이 마을에 "이담(예담)"이라는 돌무지 무덤이 있었으며, 1999년도 강원대학교 유적조사단에 의해 민무늬토기, 바퀴날, 돌도끼 등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으며~~~~중략.
또한 응암 입구엔 큰 묘가 있어서 멧둔골이라 하였으며 이것이 변하여 매동골 등으로 불리다 발음상으로 매화마을로 불리게 된 것은 아닌지 추정하며 이것은 ①번과 상관관계가 성립하리라 본다.
************************************************************* 끝***********
위 인용부에서 보면 현 응암리는 임진란 전에는 매화낙지형에서 유래하여 매화라 불렀다 한다.
그러면서 평창읍의 매화마을은 매화낙지형이라 전하는 마을이지만 특별하게 매화꽃과 관련된 유래나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면 과거 이 동리에 매화꽃이 만발하였거나 아니면 매화에 얽힌 어떤 이야기가 있어야 매화낙지형이라 보는 것같다. 하지만 이 글의 저자는 이 글 앞에서 풍수로 29개의 평창의 명칭이 있디고 전제로 밝혔지만 정말 풍수는 모르는
오류의 글이다.
현 응암리가 풍수적으로 매화낙지형이란 점은 더욱 쉽게 이해하자면 응암굴(외대와 월대)의 절벽에 올라서 이곳 현 응암리를 내려다 본다면 천동리 여울에서부터 반 원형으로 굽은 절벽과 물을 돌아서는 응암리는 마치 만개한 매화꽃이 봄비에 떨어진 모습같은 지형으로 이를 풍수적으로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한다.
그러기에 유래나 자료가 있어야 할것이 아니라 이곳 지형 자체가 매화낙지형이다. 또한 풍수란 보는 이의 주관적 사상이기에 위 2개 명칭외에 낙화부수형(落花浮水形)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로서 ①번의 매화마을의 유래는 풍수적인 매화낙지형에서 연유한다면 옳은 표현이다.
그러면 ②③번에서 임진란 당시 매의 화를 입어서 매禍라 하는것이나 응암(鷹巖)이나 똑 같은 내용을 구사하고 있다. 매응(鷹)자의 매의 바위라든가 아니면 매가 많은 절벽의 표현이 라면 다른 입장이지만, 여기서는 임란때 전투에 응암굴의 상,하굴을 매에 의해 연락했다는 이야기에서 한문의 매응 자를 따서 응암리라 하는 것이나, 임란당시 교신용 매의 발각으로 굴의 위치가 적에게 발각되어 화를 입은 것이러는 한 점의 말 꼬리 차이인 것이다.
본문의 ②③번은 동일한 범주의 내용인데 아래 문장에서 이 글의 저자는 ③번의 매의 화를 입은 것만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러기에 이미 답은 해결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이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돌무덤이나 메둥골이 음운현상으로 매화마을이 되는 연관관계등 이상향 방향으로 흘렀다. 아니, 자기가 문제를 내고서 제 스스로 틀리는 멀쩡한 우를 발생한 것이다.
이제 저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응암이나 이 근처의 사람들은 임란때 매의 화를 입어 매화라고들 하고있다. 그러면 여기서 420여년전 임진란때 이 전투 현장을 지휘했단 남천 권두문 군수가 그의 눈으로 직접보고 친필로 서술한 평창임란사의 한 부분인 "호구록(호구일록- 원주 감영의 왜병의 호랑이 굴에서 살아 나왔다는 뜻)에서 매의 화를 입었는지 당시의정확한 기록을 보자.
호구록 8월 10일자를 보면 왜병이 백봉령을 넘어 미탄을 거쳐 멧둔제를 넘고 종부를 통하여 평창에 진입하고서는 약수에 본영의 진을 치고서는 아마도 평창관헌들의 잠입을 찾고 있었던듯 하다.
<8월 10일자 호구록>
이미 평창군민은 군수이하 모두들 응암굴로 피난하여 항거하고 있던차에 응암굴 아래에 왜병 두 명이 숲속에 숨겨둔 반기(盤器)를 보고 때려 부수고 물로 뛰어 오르려고 할때 지대성(品官)이 술에 취해 굴에서 아래로 왜구들에게 활을 쏘려하자 권 군수는경솔히 활을 쏘지말고 적이 반쯤 올라왔슬때 돌을 내려 굴려라고 했지만 지대성은 그대로 활을 쏘았다.
그러나 바로 맞지않고 한놈의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자 처음엔 굴에 사람이 없는줄 알았는데 기겁을 한적들은 다시 물을 사이에 두고 (강건너) 30여명을 데리고 와서 아우성을 치니 굴속의 사람들은 모두 혼빠진 사람들처럼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지대성이 일찌기 매 한마리를 길렀다. 굴벽에 매를 들고 앉으니 왜들이 매들 달라고 한다. 나(군수)는 매를 주라고 명령하였다.
매를 놓으니 훨훨 푸른 하늘 구름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미 날은 저물었다, 적들은 물러 갔으나 산의 앞뒤에 복병을 시켰다.
중략~~
바로 이 장면이 매의 화를 입었다고 전하여지는 실제사건 입니다.
지대성은 왜구들에게 화살을 먼저 날리어 피난하고 있던 정동굴이 노출되었고, 이때 왜군은 지대성에게 매를 달라고 하니 권군수는 주라고 하였는데, 매를 놓으니 훨훨 하늘로 날아 갔다고 당사자는 기록하고 있는것이지 매로 인하여 화를 입는것은 아닌 자세한 현장 기록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래의 주소에 <호구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현장에 매가 있었고 또한 정확한 기록을 찾지못한 후일에는 매의 화를 입었다고 변형된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만, 당시 지대성이 기르던 매가 훈련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상험굴과 하험굴(외대와 월대)에서 교신을 하자면 두명의 조련사가 있어야 할텐데.. 그러면 왜구들이 굴을 쳐다보자 지대성은 왜 매를 가지고 굴벽에 나와 앉았는가 하는 의문의 답을 구해 봅니다.
뜨거운 여름날엔 응암과 대상리의 산 위에는 매가 하늘을 빙빙도는등 매가 많은 지역으로 응암굴에서 지대성은 매를 풀자 하늘로 날아 갔다는데 이것으로 본다면 훈련이 안된 듯한 매이고 왜구들을 공포를 자아내는 매를 몰고자한 의도인것 같습니다.
http://blog.daum.net/selamatdatang/13215921
(위의 주소는 권두문 군수의 13대 직계 종손 (故)권태하님이 한학을 하시는 집안 어르신 분의 도움으로 호구록을 한글로 번역하여 그의 블로그에 수록한 "호구록" 영인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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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임란사의 사색>
물론 이 장에서 평창임란사를 거론할 것은 아니지만, 위 호구록을 보면 왕세자를 잡으로 함경도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라는것과, 동강이란 오류도 있지만 왜군은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대관령을 넘어 후평쪽에서 들어왔다는 설은 오류이다.
당시, 왜구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권 군수의 추정치인듯 오류입니다.
또한 왜구들이 평창을 쳐들어 오자 노산에서 방어하다 응암굴로 피신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응암굴에 軍旗와 石車를 준비하고 있었던 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임란당시의 평창전사"라는 저의 글에는 당시 평창전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란당시 모리 요시나리의 4번대는 시마즈가문등의 14,000명의 병력이 강원도 정복의 임무를 받고 쳐들어 온 것이다, 시마즈 가문 왜구들은 가장 악명높은 군대이다(후일 정유재란때엔 전라도에서 코및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가져가 결제받는 충성의 악렬분자들이다)
모리 요시나리 이하 시마즈번의 4번대는 주 공격루트로 왜구들의 본대를 따라 문경새재를 넘어 올라오다 한양 목전에서 우회하여 강원도의 김화-춘천- 간성-삼척-백봉령을 넘어 정선-평창-영월을 거처 신림에서 강원감영인 원주를 마지막에 접수하는 작전술이다. 현대전은 라인전이지만 옛날에는 포인트대 포인트 즉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전투를 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는 우회하여 한양을 공격할 수도 있지만 안시상보다 더 높은 성을 쌓은 이유는 만약 안시성을 우회하여 한양을 공격할경우 뒷치기를 당해 양수겹장의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왜구 4번대도 원주도영을 공략하기 위해서 강원도를 한 바퀴돌며 잔가지부터 먼저 치는 전술에 시마즈 4번대는 14,000명의 병력으로 점령지 각 지역에 얼마씩 떨어지고 정선서 멧둔제를 넘어 평창으로 들어올때는 약 4천명의 병력이었고 이들은 멧둔제에서 웃상리를 거쳐 종부를 넘어 약수에 진을 치고 평창을 접수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졸 나수천이 종부에서 왜구를 죽이고 조총도 포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구의 전황의 정보도 없고 아마도 대관령을 넘어 들어올 것이란 예측에 응암굴로 피신한 듯하다. 물론 지사함, 지대성은 응암옆 마지에 지씨들의 집성촌을 이루기에 그곳 출신인듯 하여 응암굴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슬듯 하지만 최소한 피난을 갈때는 적의 공격루트와 퇴각루트등도 예상했어야 했다.
당시로서 평창의 관문은 대관령 쪽으로 길과 정선쪽, 그리고 영월과 원주 쪽의 세 갈래로 응암굴의 위치는 천동리 강 건너 지금의 도로는 아니고 천동에서 응암을 건너 마지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이곳은 적을 기다려 항전하기엔 적격의 요새이지만
숨어서 은폐하기엔 위치상으로 관문의 길목이라 적당치 못하였다.
왜구는 정선으로 넘어 오지만 이를 대관령을 넘어 온다고 오판했어도 그들의 퇴각로는 어디일까 추정하고, 정선보다는 령을 넘어서 대륙쪽으로 영월이나 주천쪽으로 갈것이라 판단했어야 하고 그래서 그 길목인 응암굴은 오판이란 점이다.
후일에서 본다면 당시에 가장 안전한 지점은 왜들이 미탄을 넘기전에 조동을 거쳐 청옥산이나 가리왕산 쪽으로 피신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물론 이 부분의 글은 역사를 탄하자는 의도는 아니고 후일 우리가 전술적 개념을 배우기 위해서 가설을 하는것이다.
평창군민이 항전을 하여 전투하기에 당시 전투로선 응암굴이 요새의 적지이다. 하지만 당시 아군의 병력은 30명도 안되고 평창군 오면의 총 인구수는 3천이 안되며 평창시내는 4-50여호쯤이라, 4-5천의 왜구에 대항하기엔 중과부족으로 꽁꽁 숨는다면 왜구들중 일부는 잔류하여 더욱 민폐를 당할듯 하다.
(평창진입 왜구가 4천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평창을 지나 영월을 지나 감원 감영인 원주를 저수하려 영원산성 (치악산)을 공략할때 왜구는 3-4천이란 점에서 유도된 수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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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윗글의 "평창문화"란 책에서 저자는 생략된 응암리 지명에 대한 고찰의 어려운 역사 글의 글쓴이에겐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이 글에서는 풍수를 논리적으로만 보았지 응암리 지형 자체를 이해 못한듯하다. 예컨데 우리의 역사에서 산이나 지역 이름은 그 동리에 특수한 바위나 지리적 모형, 아니면 효자. 효녀라도 특징적인 이름이 붙여지지만 그 대부분은 풍수에 입각한 이름들이다. 시골사람들이 한문도 배운적이 없는데 풍수를 어떻게 아느냐 반문하자만 그사람들도 조상의 묘는 풍수에 배치하게 쓰곤한다. 1920년대 강점기시대에 평창시내는 제방을 축조하여 시내가 반 이상이 더블어 생겨났다. 그리고 평창을 상리. 중리. 하리의 명칭을 붙이는데, 당시 사람들은 상리, 중리, 하리보다 한문의 뜻을 담어 좋은 의미의 지명은 왜 못썼슬까 하는 의심 이전에 이 평창 시내를 풍수적으로 떠내려가는 배 舟형으로 보고 하나의 배 안에서의 하나에 대한 유기적 관계로서 上, 中, 下里의 풍수에입각하여 쓴 것이지 한문의 순서로서 위, 아래 구분인 상, 중, 하로 3등분 구분 배열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엉터리 풍수책이 유행하여 묏자리 잘 쓰면 음덕을 본다는 욕심의 풍수만 생각하는데 풍수란 양택이 더 중요한듯하다. 과거 70년대에 평창은 수해로 종부다리 기단 하나가 내려앉게 되는 수해에 제방이 무너지고 평창읍내는 근 절반이 물로 차게 되었을 때 강점기 시절에 왜인들이 건축한 집들은 하나도 물이 차지 않았다. 그들은 양택의 풍수도 더 쾌적한 환경을 위해 음택보다 더 중시한 사례이다. 언젠가 읽어본 일본인의 평창 풍수책은 지금에 풍수장이들은 쫓아가지 못할 정도의 내용이었다. 이러기에 지난해 평창문화원에서 발간한 지명지를 읽으며 여러 이야기와 뜻을 접할 수 있고 방대한 자료를 채록하여 쓴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만, 이 두터운 책의 지명 유래엔 풍수에 입각한 설은 하나도 없다. 만약 풍수가들에게 평창 옛 지명지의 각 이름들엔 풍수적 언급이 하나도 없다면 그들은 무엇이라 답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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