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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이효석의 [영서의 기억]속 고향이란??

 

이효석의 [영서의 기억]속 고향이란??

 

일전 이효석의 평창공립보통학교 시절의 역사를 들추며 다시 [영서의 기억]이란 책을 뒤척였다.

물론 우리는 그의 [메밀꽃 필 무렵]이란 책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시골 장에 있슬듯한 이야기로 촌스럽기 그지없고 무엇이 그리 대단한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 [들]을 읽어보면 봄의 창조의 기쁨과 이 고장 영서의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 유연한 필력에 매료되어 밤을 지새우며 여러 글들을 읽게 되었다.

 

[나의 수업시대]란 글속엔 효석의 4~6세까지의 부친을 따라 서울 생활과 (원각사 주변) 여기에 아버지 이시후씨는 조그만 仕官의 자리에서 벤자민 플랭클린의 번안작업을 하신다고 밝혔지만, 그는 한성사범을 졸업하고, 아마 그 당시 학교가 많치 않은 탓인지 진부면에 근무하다 본처의 사망으로  4살배기 효석을 대리고 서울로 이직하였던 것이다.

 

그 후 2년 뒤 진부면장으로 부임하여 다시 효석은 평창 땅을 밟게 되는데 그때가 지금의 봉평 창말(남안동) 생가이지 출생지란 표기는 타당성이 결여된 듯 하다.

 

[나의 수업시대] 첫 문장엔 7살떼 추운 겨울에 방안엔 병풍을 치고 이불속에서 엄마품에 안겨 [秋月色]을 읽고, 다시금 엄마가 읽어주는등 이 소설에 푹 빠진것이 문인으로 입문하게되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가 표현한 엄마는 친모가 강경홍씨가 아니라 둔내출신의 새 엄마로 (후일 진부로 이사하여 집안에서는 진부 할머니로 통한다) 이야기하며 진부면장인 아버지는 매일 봉평에서 40여리를 어떻게 출근하였슬까??

 

아마 이 시기는 1910년대이고, 20년대 이후 쯤에 신작로가 개설되었는듯 [개살구]라는 소설 중간쯤에 신작로라는 단어가 나온다.그 신작로로 주말이나 가끔씩 우마로 집을 다녔으리란 추측이다.

 

[산협]이라는 작품은 남안동과 봉평을 소재로 다루었으며, [개살구]에서는 박달나무로 돈을 벌고 진부면장을 각색하는, 또한 원초적인 性도 각색이 되는, 마치 나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듯한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영서의 일기]에서는 그의 자전적 글로서 고향에 대한 이해와 보통학교 시절의 같이 기숙을한 남학생과 사이에 같은반 소녀와의 추억과 그 속의 낭만,, 그 속에서 그는 성인이 된 후 서울거리에서 옛 추억의 그 소녀를 만난적이 있는데, 그녀는 옛 추억의 베아트리체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옛 꿈은 그 모습 그대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글이 재미있다.


왜냐면 나는 별로,,, 목석이지만 나의 친구들은 이제 느즈막히 동창회에 나오는 같은 반 소녀였던 그들을 마주하며, 무언가  식인 인두처럼 열기가 흐른다고 뒷 소리들이 무성키 때문이다. 하지만 효석은 그녀를 만나자 님프같은 추억의 환상의 꿈은 깨지기 때문에 만나서는 안된다라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아름다운 고향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서의 기억]속에서 효석은 나의 반생을 푸근히 싸주고 생각과 감정을 그 고장의 독특한 성격에 맞도록 눅진히 길러준 고향이 없다. 그것은 고향의 관념이 희박하고 세계주의와 또한 초라한 고향은 눅진하고 친밀한 회포가 뼈속까지 푹 녹아들 여지가 없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찾아야 할 진정한 고향을 잃어버렸다 한다.

(* "눅진하고"라는 표현의 낱말은 이효석이 쓴 단어이다)

 

고향의 생각이 일상의 생활에서 떠 오른적이 없고 자별스럽게 마음을 녹여준적도 없다. 이방인같은 서글픈 느낌에서 백석의 [사슴]을 읽고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 한다.(효석은 진부 출생으로 4살때 서울로 올라가 6살때 봉평으로 다시 이사하였으며 8~14세까지 평창에서 기숙하며 보통학교를 다녔고 다녀간 것이 고향과 향리에 대한 기억 전부이다라 서술하였고 친척도 없는 이곳에 정붙을 리도 없었던듯 하다)


백석의 시집 [사슴]의 모든 소재와 정서가 그대로 효석에게는 영서의 것이란 생각이었으며, 이 땅의 전부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고향을 옳게 찾지 못했슬뿐이며 늘 굵게 핏속에 맥치고 있었다는 진술은 그의 내면에 고향이 잠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백석의 [사슴]을 읽고 계기가 되어 그의 아름다운 옛 꿈이 살아숨쉬는 고향의 향토으로 전이되어 그의 작품은 향수적이고 낭만적이며 탐미적이고 자연적인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고향의 꿈은 아름다운 것이다.


혹자들은 그의 생활이 이국에 대한 동경이고 서구적 스타일을 좋아하며 그의 문학은 그에 反하는 서정성과 자연친화적인 모순의 대립이라 하지만, 서구적 텍스트나 꿈꿀 권리를 통해 현실을 재 발견하였고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는 한 방식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는 침묵으로 저항할 수 있는 암울된 사회에 한 개인의 이상적 동경과 꿈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향수의 문학이며 이국에 대한 동경이다.


여기서 '한국민족문화 대 백과전'(중앙 연구원)에서는 전자의 고향에 대한 향수문학이라 함은 [메밀꽃 필 무렵], [들], [분녀]등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향의 산천을 무대로한 인간자체의 고향을 그리며, 에덴과 같은 원초적 에로티시즘(primitive eroticism)으로 나타나며, 후자는 서구적인 동경과 현대문명에 자유를 갈망하는 엑조티시즘(exotisim)과 같은 동경의 세계를 서정적으로 승화시켜 독자의 작품세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이렇듯 그의 문학적 세계는 性에 대한 탐색으로 인간의 원초적 삶과 본능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서 자연과의 합일점을 발견한다.

여기서 효석은 인간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이러한 性과 자연의 친화적인 서정성이 그의 낭만적이고 탐미적이며 순수한 美 의식인 것이다.

 

이것이, 백석의 시집 [사슴]을 읽고 고향 平昌의 향토적 정서의 재발견이 그의 문학 전반부를 수 놓은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서정 또한 7~80여년이 지난 후일 후학인 우리들에게도 다감한 정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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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효석 전집 전반부를 읽으며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췌하였다.


평창아리랑(아라리)의 시발점에서..


-----< 평창아라리중 1933년 김소운에 의해 가장 먼저 채록된 가사 >--------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

 

축자왕자는 팔자도 좋아 긔차에다 몸을 실고 안동현 구경

아리랑 시리랑 아라리야 시리랑 고개로 너머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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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아래는 평창아라리의 가장 먼저 채집된 가사로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라는 한 줄의 가사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시에 견고한 고급목재의 오대산에 박달나무가 산판되어 축자나 임금 왕자의 검인 도장이 찍혀져 다 나간다라는 뜻이다.

 

당시 오대산에는 소나무보다 박달나무가 많았던듯하며 고급목재로 당연 소나무보다 값도 더 되었슬 것이고 그러기에 산판쟁이들이 선호하는 나무였으리라.일제강점때인 1930년대에는 오대산 월정사의 위에 일본인의 계림이라는 벌목회사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곳을 관대거리라 부르며 일본인의 계림이라는 목재회사가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월정사 아래엔 260여호가 살았으며 그들 대부분은 산판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이에 대한 박달나무의 설명을 하였

위 가사에 이러한 설명없이 지금의 시각에선 그리 재미없는 가사이다. 그러나 이 당시엔 얼마나 얼마나 사랑받는 가사이었고부자들의 사업이었는지가 이효석의 단편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개살구]라는 단편에는 오대산에 채벌장이들이 들어서면서 박달나무의 시세가 한창 좋을때에는 산에 베은 나무를 실은 우찻바리(우리는 예전에 4바리. 6바리란 표현을,,,)가 뒤를 이어 대관령을 넘었다.

또한 박달나무로 논 섣마지기가 더 늘어나게 되었고, 또한 학교에는 돈백 기부하여 학무위원의 타이틀도 가졌고, 조합의신용을 얻어 아들을 조합의 서기로 취직시켰라는 표현이 있다

 

[영서의 기억]에서 박달나무의 삽화는..

 

 오대산 월정사 부근에서 여름에 아름드리 박달나무를 베어내 깍아만든 행상의 떼가 온다. 함지, 이남박응 두어길 길이로 겹쳐 쌓아 그 길고 높은 짐을 진 사람들이 피사의 사탑을 이고 오는 듯...이라는 표현에서당시 "왕자축자" 가사의 아리랑의 당시의 인기를 대변하고 있다.(王자 丑자라는 것은 목재의 벌목시 검증에 합격했다는 도장을 짝은 것을 말함)

 

아마도 우리의 자연은 화강암지대라 불탑들의 조각을 화강암으로 하지만 일본은 목재가 풍부하여 목재 가공산업도 발달하여 일제 강점하에서 목기류의 생산은 이러한 일본의 영향이고 아마 안동엔 그러한 기계공장이 있었던듯 추정한다.


이로서 일전 평창아리랑의 시발점에서의 왕자축자 아라리(아리랑) 가사에 대한 본인의 논지의 설명은 적확한 것임이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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