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에서,,
후세백작 2016.07.09 21:30
http://blog.naver.com/olivemana/220094201933
위 기사는 몇해전 뉴스의 기사이다.
이 기사는 좌똘들이(좌 똘만이들 활거 시절)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작되었다는 뉴스들에, 이를 지켜낸 반공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기사이다.
1968년에 울진,삼척지구 북괴 무장공비 침투 당시 이승복 어린이가 처참하게 살해된 사건으로, 그 때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바람에 입을 찢어 죽였다는 사실을 미디어오늘의 김종배가 당시 생존한 이승복어린이의 형 이학관씨의 증언에 문제가 있다며 딴지를 거는 형식으로 시작하여, 1968년 당시 이를 보도한 조선일보의 기사가 박정희 정부의 조작이라며 몰아 갔었고 1998년에는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김주언 등이 역시 이 사건을 정부조작으로 몰고 가는데 가세하였다.
결국 조선일보는 김종배, 김주언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하고 최종적으로 2002년에 이 보도와 당시 벌어진 평창 진부면 계방리의 승복이네집에 무장공비들이 학살한 사건이 모두 사실이라고 판결 났던 사건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 종북좌파들의 서슬퍼런 전횡으로 역사의 진실이 왜곡되거나 은폐될뻔한 소름끼치는 마녀 사냥놀음이었다.
아래 사진은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에 실렸던 이승복어린이의 시신 사진으로 조선일보는 사진 하단에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가 있고,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하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승복 어린이의 입은 그의 형 학관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복 어린이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자 무장공비가 칼을 이승복의 입에 넣고 휘저었기 때문에 저렇게 처참하게 찢어졌다고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이승복 사건은 한 시절 해바라기 뉴스쟁이들이 앵앵거리던 기사에서 조작이라는 억지주장 8년만에 조작되지 않았다는 진실을 재발견했다 한다.
본인 후세백작의 실화이야기로 그 진실을 기록합니다.
68년 겨울 울진, 삼척지구의 무장공비는 정선을 넘어 미탄까지 침투하였으며 이때 오후 6시면 싸이렌이 불고 전면 통행금지가 되었는데 어느날은 자정쯤 헬기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우리집을 강한 써치라이트로 비추는데..
당시 울집은 일제강점기 군수 관사쯤으로 좀 특이하고 앞 문이 6쪽이라 헬기는 예의 주시,,, 바로 코앞에서 비추는데 얼마나 훤한지...자다말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겁이나서 농뒤로 숨던 기억도..
아마도 무장공비들이 가정에 잠입했나, 시내 일원을 비추는 헬기의 써치인듯,,,
당시 무장공비가 얼마나 무섭고 또한 얼마나 지독한가하면,,,
군대시절 소대 선임하사는 상사로 주문진에서 무장공비를 끝내 쫒아가 사살하고 헬기타고 포상휴가를 갔다고 하는데.. 죽은 무장공비의 워커를 풀러보니 무릎까지 새까맣게 동상이 걸려서도, 그런 고통속에서도 자수하면 죽는줄 알고 저항하다가 죽었다 한다.
이렇게 사상교육이 철저한 무장공비들이 대관령을 넘어 진부까지 침투하여 속사리의 외딴집 승복이네 집을 들어가 먹을 것을 뒤지고 이때 저학년의 승복이는 학교에서 배운데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 한다.
그래서 사상교육이 철저한 무장공비들은 승복이의 입을 손가락으로 찢어 죽였다 증언하고 있는데, 이러한 순간에 그의 형은 살아서 도망쳤지만 승복이는 잔인하게 입에 칼을 넣어 양쪽으로 베어서 죽이는 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에 타당성을 가지는 이유인듯 하다.
그리고 아래에서 본인 후세백작이 증언하는 이야기는 무장공비들의 만행후 이승복 생가를 최초로 방문한 사람들이다.
( 당시 이 지역은 무장공비 출현에 의해서 통제구역으로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기에 시신의 사진은 평창군 홍보관의 사진으로 퍙창경찰서에 그 사진이 서류철에 남아 있어야 할듯하다)
무장공비의 이승복 일가 학살만행 후 그 정보를 입수한 평창경찰서의 서장과 과장 1명, 군청 담당과장과 사진사와 운전기사로 일행 5명은 경찰서장 찦차로 공비도발 후 민간이 통제된 그 참사현장엘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한다.
사진사는 공보기사로 지금은 군청의 직급의 공무원으로 편제되어 있는듯 하지만, 당시엔 임시적으로 공보기사는 위촉되는듯하고, 그는 청년으로 " 미미 사진관" 사장이었다.
"미미사진관"은 농협 바로 아랫골목 두번째 집에 있었으며 그는 앞집 이발관에서 이발하며 동네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당시 후세백작은 초교 4학년으로 이발관은 작은 집이라 그곳에서 그 공보기사 옆자리에서 이발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이다. 필자는 당시 초교생이었지만 그 겨울에 무장공비 침투로 저녁 6시면 싸이렌이 불고 통행금지가 되기를 몇 몇일이었기에 무장공비 내용에 관심이 솔깃하게 들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엇그제, 평창 경찰서장 일행이 서장찦차로 무장공비가 출현했다는 속사 계방분교 앞의 이승복 가족 참살 만행현장을 다녀 왔다는데..
아버지와 형은 중상을 입고 살아났지만 일가족 4명의 시신은 마당에 참혹스레 나딩굴고 있는데 겨울인데도 흘린 피 탓인듯 악취는 코를 찌르고 특히 승복어린이는 잔인하게 죽였다 한다. 그 모든 현장을 일일이 사진찍은 공보기사는 그 흉폭한 인상때문에 몇일 째 식사를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공보기사 임무는 원래 좋은 일도 기록하지만 사고 현장에선 시신들의 알몸을 전후 좌우 모두 돌려찍어 초기 검시성 증거자료를 남기는게 일반화의 의무이듯, 그 사진사는 모든 현장을 사진찍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야기중에 서장이 명령으로 앞면 사진도 찍었다는데, 얼굴은 너무나도 잔인하게 죽였기에 그 혹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한다.
그래서 아마 위의 사진(조선일보에 게제되었던 사진)은 최초 증언자인 공보기사의 사진 아닌가 합니다. 또한 기자든 민간이은 당시속사리 안쪽으로는 통제되었기에 시신의 사진은 오직 평창군 공보관의 사진이 유일하다고 사료한다.
(이 이야기들이 후일 설마 지어낸 이야기로 착각하면 오산이고, 본인 후세백작은 38년전의 이러한 이야기를 듣던 그 현장들도 기억속에서 정확히 스케치할 수 있다. 그리고 혹 평창분들은 그 미미사진관 사장을 잘 아실것이다)
그래서, 당시 무장공비의 승복이네 가족 만행사건의 현장사진은 통제구역으로 이 공보기사가 촬영한 것이란 생각이며 서장일행 방문은 승복이 아버지가 아랫마을로 피신하면서 제보에 의하여 서장일행은 현장을 방문하고 아마 곧바로 시신수습을 나섰다면 당시 군 작전지역으로 통제상황하에 속사리 골짜기엔 기자단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던 마을은 아니었던 것이고, 기자들이 마음대로 현장 사진을 찍을 분위기는 아니었던듯 하다.
이런 생각에 이승복 만행의 현장 모든 사진들은 아마도 이렇게 찍은 사진들이란 이야기로 이 기록들은 평창군청 공보실 자료나 당시의 평창경찰서 조사기록에 남아 있어야 정상이란 점이다.
그래서 요즘식으로 따진다면 이승복 만행의 모든 사진들의 소유권은 평창군청 공보실이라야 할 것이란 점으로 이 사진들은 평창경찰서장의 입회하에 그의 지시대로 공보기사가 촬영한 공적인 사진이란 점이다.
이승복에 관한 기사가 허위라는 주장은 이승복에 관한 어느 기사에 자료가 충분치 못하여, 아니면 혼동으로 타 사진이 올라올 수 있었다면 그것을 미끼로 본 승복이 만행사건을 조작이라 엎어치는 종북들, 그 사진이 오류일지 몰라도 그렇다고 이승복의 반공정신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서야..역시 그들도 북과 닮은꼴로 역사를 왜곡하는 어거지로 우기는 점이랴
한 시절, 아니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냉전 이데올르기의 사회에서 두메산골의 한 소년에게서도 공산당이 싫다는 반공소년을 만나볼 수 있는, 각 초등학교엔 이승복의 동상이 세워지는 반공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또한, 승복이네 집 그자리엔 초교생들의 수학여행의 답사길로 수 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던 반공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시절에 종북좌똘들의 부질없는 생각에 전국에 각 학교에 동상들은 철거들되고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조작사건으로 내 몰렸다가 다시 복권되지만 이미 동상들은 없어지고...
여기서, 좌똘들은 법적인 판결도 나기전에 자기들 주장대로 이승복의 동상을 모조리 철거한 범법에 가까운 행동들이다.
그러기에 반공소년의 상징 이승복 어린이의 매장은 우리의 역사를 매도하는 것은 아닌가??
왜. 반공의 고장인 평창인들은 분노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는가??
자유수호의 애국지사들은 분노하지 못했는가??
지구상엔 20여년전쯤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뻬데스트로이카의 자유화 물결이 밀려왔건만, 식량원조도 떼어먹고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으로 아사되는 북한을 동경하는 좌파라 지칭하는 종북 똘만이들,,,이젠 그들이 종남을 하도록 권유해야 제 정신이 아닐까??
그렇치 않으면 종북 똘만이들 마음은 다른곳에 있으랴..
그것은 현 체제를 붕괴시키고 자기네 집권과 통치의 망상의 허욕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냉전의 무장공비가 난행했던 그 시절의 역사는 잘못이라고 파기한다고 지워질 것인가??
우리는 더 크게 이승복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먼 후일 통일이 와도 한 시대의 동, 서 냉전의 역사는 우리에게 공산당의 잔학성을 알려주는 역사로서 존립되고 반공이라는 교훈은 잊어서는 않 될 정표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시대가 변했다고 역사는 필요없다는 식으로 전국의 모든 초교 운동장에서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을 끓어 내리던 좌똘들의 행동들처럼 시대가 변했다고 없어져야 하는 역사는 아니란 점이다.
먼 후일 통일이 되어도 과거의 분단의 역사를 역사의 교훈으로 새겨야지 경솔하게 지워서는 않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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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초교 때의 글을 50년 후에 쓰면 다분히 보태어 쓰는 것이라고 생각키 때문에, 그러면 필자의 생후 18개월때의 기억 정확하게 그려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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