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 적석총이라는 역사에 문제제기]
후세백작 2017.04.25 00:47
1.평창 상고사의 유적과 의의
이 두 곳의 역사를 고찰해보기에 앞서 우선 평창의 상고사인 선사시대로 부터 전해지는 개괄적 역사를 들춰본다.
강원도의 선사유적은 춘성군, 명주군, 양구군과 평창이 가장 많이 발견되며 평창 인근의 정선이나 영월은 같은 공간성의 영서의 환경이지만 정선은 북면에서 3-4점의 선사유적과 영월도 선사유적의 채집은 그리 많치 않은 편이다.
그러나, 평창의 역사는 태백산맥이라는 천혜의 자연 여건으로 영동과는 갈라졌으며 이로서 문화의 차이도 발생되는데, 서쪽으로 확장에는 산이 가로막고 물을 건너는 교통 여건때문에 문화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 곳이다.
하지만 평창은 산골짜기를 따라 구불거리며 흐르는 평창강이 퇴적 평야를 만들고 또한 물의 사용이 용이하여 주거의 입지조건을 제공하였으며, 주위를 둘러싼 산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아주는 자연적 요새지를 만들어 주었기에 평창읍내 평창강 유역의 전지역 (임하리. 계장리. 주진리. 후평리, 상리, 종부리, 유동리, 천동리. 응암리등)에서 선사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여기서 평창과 정선의 선사유적 차이는 선사시대인들의 수렵과 농경문화의 병행에서는 가리왕산, 청옥산을 위시하여 어느 곳에서든 산나물을 채취하여 춘궁기에 식량으로 대신하지만 정선은 충적 평야가 만치 않으며 광물이 나는 산이라, 대체적으로 산나물도 나지 않는 편이다..
그러기에 정선아리랑에 산나물이나, 산의 정서가 담긴 아라리는 모두 그 시원이 평창아라리인 것이다. 이렇게 평창은 산나물이 지천에 있다는 것은 토질도 좋아 농사에도 적합한 환경이란 뜻을 내포하기에 선사 시대인들이 정착하기에 용이한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가지는 것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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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영서의 인접지방과 평창의 차별성을 가지는 것이며 도돈을 돌아굽는 평창강 구릉지는 마치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지형처럼 착각할 정도로 동일한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어서 평창은 태고 이후 선사인들이 정착생활에도 용이한 기후와 토양, 강의 상류의 식수와 수렵등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는 곳이다.
이러한 평창의 상고시대에 역사유물에 80년대 평창고교 역사 선생님의 노력에 의하여 주진강등에서 다양한 석기유물을 채집하여 현 평창중학교에 보관되어 있으며, 또한 시루목 중개소 아래 밭 한가운데 자리잡은 신라 초기형 회랑이 없는 석실이나 임하리, 상리, 종부리등에 3m이상의 고인돌 약 30여기와 천동리의 농경지에 청동기시대나 석기인의 주거지등 유독 평창강 유역은 어디에서든 예로부터 고대인들이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난해에는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지에서 비파형 청동검과 동시에 고인골(古人骨)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2,500년전의 인골로 추정되며 어느 지역에서도 출토가 되지않은 고 인골로 이의 DNA 검사나 게놈 프로젝트에 의해 대륙의 이동 역사에서 우리 선조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임과 부수적으로 평창의 기후, 자연환경등이 밝혀져 평창은 대한민국의 표준 생활환경임을 자랑할 수 있슬 것이다.
그러나 인근 주변의 지자체에서는 모두가 만드는 박물관 하나가 없어서 이러한 평창의 선조인들의 천년이 넘은 유물들이 전셋방 을 긍긍하며 고 인골은 고인골 학자의 창고에 갖히게 될 것이다.
비록 평창의 유물이 춘천, 강릉 박물관등에 분산되어 있지만 다시 돌아오기는 힘든 영구 전세살이를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평창의 비극의 한 점이다. 평창의 정체성과 우리의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천년 전의 상고사까지 전부 복원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현존 가능한대로의 깨지면 깨진 그대로의 유물을 사랑할 줄 아는 시민으로서 이러한 역사의 중요성이란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시행착오에 의한 평창의 정체성과 칼라의 사상과 이테올르기로 미래를 예약할 수 있고 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는 중요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의미는 태백산맥을 있는 역사의 흐름에 영서지방의 평창은 대표적 주자로 역사의 시대를 연결하는 어쩜 빛나는 면류관의 주인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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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본인은 많은 지식을 습득한 역사가는 아니지만 우리 세인들의 상식으로 평창인 모두가 의식하고 공유하자는 의미에서 평창에 박물관 건립의 취지등에 관한 다수의 글을 쓴것처럼 이제 평창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박물관 건립으로 흩어져버린 평창의 모든 역사 사료들,,, 현지에 있어야 할 고인돌까지도 관리할 수 있는 향토사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로써 평창의 역사 속에 담겨있는 문화를 자랑으로 삼아 의식과 긍지를 높여가야 할 것이다.
2. 여만리 예담과 응암리 이담에 대한 기존 사관에 문제제기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의 두 곳은 평창의 고대유적으로 사료가 충분치 못한점과 비인기 역사로 취급당하며 이해의 부족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두 곳의 역사 사료에 관하여 사가들의 기존의 학설에 反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아래에 인용한 "강원도의 선사문화"의 문헌의 여만리 강가의 "예담"과 응암리의"이담'이라는 유적을 적석총으로 서술함에 이 유적을 다른 각도로 이해해 본다.
여기서 본인은 이 글이 어떠한 사료적 학술논문이 아니고, 역사에 소통의 장으로 일반인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며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 평창편 발췌 인용
◆소재지 ; 여만리. 명칭-적석총. 초가철기시대
조사내용- 현지에서는 "일담" 또는 예담'이라 불리웠는데 평창강의 제방을 쌓는데 이용되어 현재는 사라졌다. -이상-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100 18-5
◆소재지- 평창읍 응암리 5. 명칭-적석총, 초기철기시대
현재 주변은 밭으로 응암리 4번지이나 적석총만큼은 응암리 5번지로 군유지 임야(304평)로 되어있다.
여만리 적석총은 "예담" 또는 "일담이라 하지만 이곳은"이담'이라 불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40m× 20m의 크기로 높이 1m정도로 테두리는 큰 자갈을 이용하고 안쪽으로는 잔 자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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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고 한 가운데는 잔 자갈로 만든 석곽이 있었다 한다. 마지리의 제방을 쌓기위해
이 돌을 옮겨가고 현재는 파괴되었다. 돌을 실어나르는 과정에서 큰 칼과 김해식 토기 3점이 출토되었다 -이상-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100
◆<강원도의 선사문화>란 도감 책자엔 위의 사진과 단순한 설명 더 이상도 없고 응암의 적석총은 평창문화원이 2016년에 발행한<지명지>에도 소개되어 있다
*응암리 적석총과 출토된 가야식 토기 사진.
▲ <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발행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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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 적석총이라는 역사의 오류에 문제풀이
위의 역사서 <강원도의 선사문화>라는 도록에서는 여만리의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이라 불리는 돌무지를 모두 적석총(積石塚)이라 한다, 또한 평창문화원 발간의 지명지에서 여만이의 예담은 기록조차 없지만 응암리의 이담은 상세 설명하며 전투를 위해 돌을 모았다는등 여러가지 설 중에 적석총을 제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전투를 위해 돌을 모았다는 것은 성(城)으로 간주하는 것이나 행주산성에서는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다 모았다는 기록은 있으나(그래서 행주산성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도원수 권율목사가 인근 부자들에게 도면을 주고 석차등을 만들어 줄것을 부탁하였던 바 해주 부자들이 제일많이 만들어 노비들이 등에 메고 짋어지고 행주산성으로 날리올때 부녀자들은 앞 치마인 행주치마에 담아서 일렬로 이동하는 모습에 행주라는 단어가 더 인상적이지 않켔냐는 박사논문이 더 확증적이다)
만약, 문경새재에서 조정으로 올라오는 적들에세 전투를 대비하여 돌을 모아두었다면 이해하겠으나 강가에 누적단 두 곳에 돌을 모아 전투를 대비한다는데, 강가에 지리적으로 병목현상을 가지는 요충적인 위치는 없다.
그러기에 적은 사방 팔방으로 흩어져 지나간다면,,, 옛 사람들이라고 이렇게 어둡지는 않습니다. 다만 학자들의 이론에 구조적으로 뻐져드는 마치 매너리즘적 논리성이 현실을 무시했기에 이런 경우를 설명하는듯 합니다.
응암리이나 여만리의 천변의 장강에 흔한 돌을 굳이 모아서 전투 대비를 할 필요가 상식에 위배된다. 또한 역사에서 모두 적석총이라 하지만 이 두 곳의 돌무지들은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3) 여만리 예담의 대한 문제제기
평창의 여만리는 지리적으로 강과 산으로 막힌 퇴적지의 평야로 내왕의 입구는 시루목 아래의 여울이나 배로 강을 건너야 한다. 장마로 강물이 불땐 송개산 중턱을 타고 상리로 나올 수도 있다.
장맛비가 강물이 불면 여만리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 가란다. 이미 배는 묶이고 늦기전에 송기산을 타고 집에가는 힘든 하교이지만 취미도 없는 과목을 수업하던 시간에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은 여만리를 비상시 송개산 허리의 산을 타고 넘는 것을 초교때부터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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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증에서 시시한 일상의 이야기를 들춰봅니다만 이 이야기에 이유는 지난시절 고향의 추억이 제일 만은곳이 이 두 곳 여만리와 응암리이기에 지금 그곳을 답사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기억하고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겨울철이면 여만리 강에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는데 추운날이면 이 돌누적단 앞 밭의 옥수수단 하나씩 불을 지피는, 언젠가는 원뿔형 돌 누적단을 한번 오르는데 친구왈,,, 뱀 조심하라한다..그래 뱀이 아마 나를 물려고 입을 벌리면 벌린채로 얼어 죽을꺼야 하고 응수하던 기억도 ,, 황덕불이라 그러지요, 때문에 돌 누적단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돌 누적단은 8~90년대 언젠가 제방으로 변해버렸고 사진 한 장 구하려도 없지만 생생한 기억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만리는 교량이 놓이기 전엔 배와 겨울엔 섶다리로 건너다녔는데 더 옛날엔 아마도 여만리를 통행하자면 시루목 개천의 징검다리가 가장 먼저이고 다음으로 여울 바로 위가 강물을 건너기에 가장 수월한 곳이다.
이곳을 건너면 돌장광을 지나 밭터 사이에 돌 무더기가 그보다 좀 적은 무더기와 나란히 있었다. 역사에선 이를 적석총이라 하는데 총(塚)자는 무덤이란 뜻이다. 그렇다고 설령 옛 조상들은 냇가에다 무덤을 쓸 일이야...아마 조상이 본새 청개구리였던 모양일까??
예담을 혹자들은 뙈담이라고도 하며 몽고군 항쟁정도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방어막 정도로 추정도 합니다만,,뙤담의 뙤는 오랑캐를 말함에 몽고군 항쟁시 몽고군이 쌓았을 것이란 추정에,,원뿔형 방어막은 왜 필요한지??
여만리 강을 건너서 들어서는 입구에 위의 설명대로 돌무더기 두 개의 누적단은 서낭단의 예전엔 서낭단이었어야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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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규모는 큰쪽의 누적단은 현 제방 높이쯤으로 전국 어디에도 이보다 큰 누적단은 없슬듯 하다. 이 돌들은 강 부변의 큰 호박돌로 모두들 산화철 성분이 흘러나오고 씻기지 않고 이끼가 덮어서 검게되에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중요한것은 주진쪽의 방향의 위의 무더기가 더 높았으며 이러한 구(丘)을 만듬에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모구(旄丘)라 하는데 이러한 서낭당이 정형이며 이로서 태백산의 민족정기를 잇는 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4자성어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뜻은 여우가 구릉을 향해 머리를 향한다는 의미이지만 어쩜 언덕을 향하는 바램은 인간의 이상인듯, 과거 고구려에서부터 우리의 역사에 임금도 장수도 모두 깃발로 상징하지만 서낭당의 모구에 꼽히는 깃발은 인간이 높은 하늘을 향해 제를 드리는 것이다.
인간이 (이 서낭당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규모고 또한 두 개의 누적단으로 정형이란 점인데. 제방돌로 사용할때 이러한 역사의 의미는 모르고 그 전경사진이나 실측의 기록도 남지 않고 그 동네 친구들도 사진기가 귀한 시간대라 사진 한 장 없어서 좀 아쉽다)
아마 조선시대에는 이 누적단 서낭단 위에 적색과 백색 아니면 오색의 깃발이 나부끼었슬 것이다. 이것이 요즘 시각에선 무당의 굿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이 앞을 지나갈땐 큰 소리도 잡담도 금했을만큼 신성한 장소로 마을의 상징적 존재였다.
지금으로선 어디 어디 서낭당이 대표적이라 하지만 예전엔 여만리 서낭당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원뿔모양의 두 개의 쌍 돌 누적단 적석총이 아니라 서낭당이다.이로서 위에 인용한 한림대의 역사도감은 서낭단을 돌 누적단이라고 오류를 하고있다.
돌 누적단이 서낭당이란 입증적 요소를 하나 더 첨부하면 그 옆엔 당집이 있었는데 1972년도인가 종부다리도 내려앉는 홍수에 서낭당의 당집은 유실되었고 새마을 운동시기라 다시 복원되지 못하고 여기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지내던 아름다운 모습의 문화는 단절되고 돌 무더기의 서낭당도 그 역사이야기는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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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이 점(당집)에 관하여 내용을 알고 계신 분들은 수고스럽지만 멘트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또한 이 문화도 잃어버린 평창의 위대한 역사이고 서낭당의 의미도 모르면서 겉으로 서구식과 종교에서 볼때 가치없는 무속으로 폄하하지만 기실 오늘도 우리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전통문화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장독대 뒤에 성수를 떠 놓고 시험 합격하라고 비는 마음이나, 굿을 하든, 백일불공을 드리던 기도하는 이 모든 것은 기원의 하나로 모두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기원제인 것이다) 역사 문화위원님들은 이에 고증도 있어야 좋다는 생각입니다.
4. 응암리 이담에 대한 고찰
위 사진에서 응암리 적석총은 BC 200~AD라 표시하는데. 당시에는 산에다 묘를 쓰는 것이 아니라 평지에다 쓰곤 하였다(삼전동 적석총, 각 고분들,,) 하지만 응암리 이담이라 불리는 돌담식의 돌 누적단은 적석총 형태를 끼고 있지만 한 시기에 이루어진것이 아닌듯 하며, 또한 이상한 것은 적석총 특성상 평지에서 만들어야 하지만 여만리 예담과 응암리의 이담은 모두 강 가장자리 천변의 지역에 있는데 이들은 큰 장마가 지면 수몰지역이다.
이곳에 적석총이라는 무덤을 썼다면 고대인들은 마치 청개구리가 냇가에 어미 묘를 쓰고 걱정하는 愚人(어리석은)들이었단 말인가?? 이건 史家들의 오류라는 모습일뿐,,,
응암리는 전체 가구가 대략 20가구이다. 한때 평창군 인구가 10만일때나 지금 4만일때나 응암지역의 인구수는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하며 그렇다고 더 많은 가구가 늘어날 공간도 없는 실정이라면 이 적석총의 주인은 어떤 촌장이었슬까??
이 돌 무더기를 헐어서 제방에 사용할때 각기 다른 층에서 토기등이 출토되었다는데, 그러면 주거 공간이었슬까?? 알 수 없지만 지표 조사가 되었다면 적석총 안에서 나온것은 없는 듯 하다. 그러기에 적석총이라 함엔 무언가 이상하리란 판단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사각 박스형이 아닌 강물의 범람쪽인 위쪽과 강쪽의 두 면만 조적한 “ㄱ"자 형태의 돌 누적단이다. 이를 돌무지 적석총이라 할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이 점에 의문점을 요약하면)
1, “ㅁ'자 형의 돌 무지가 아니다.
2, 위치하는 장소가 바로 강 옆으로 영서 산간지방에 하루 600mm 까지의 지역적 폭우로 흥전천 물이 불면 8~9시간내에 강물 이 도착하는데 범람할 수 있는 위치 에 적석총을 쌓았다면 본인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3, 단층으로 적석총처럼 반듯하지도 못하다.
4, 이곳이 제방용 돌로 사용되어 헐릴당시 나온것은 항아리 서너점뿐이다.
출토 위치도 적석총이라면 중앙부에 있어야 할텐데 3개 층으로 달리 나왔다 한다.
만약 이곳이 적석총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슬까?? 본인은 이곳 천동에서 응암 도돈까지 답사를 하지 않고도 지리적 지형등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본인은 여기서 하나의 가상적 추론을 한다.
이 지역은 응암리 위쪽으로 그곳을 굽어도는 여울물이 장마로 불어난다면 유속도 빠르지만 물은 90도 굽어돌며 마을을 잠식할 수 있다. 이곳 아래의 마을에 제방은 그냥 아카시아 뿌리로 흙의 침식을 방지하는 정도이며 굽어도는 여울물의 유속에 응암리 맨 위쪽 부분이 유실될 수도 있고 물의 범람은 두 가닥으로 나누어 들어올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응암리란 마을은 없어질 수 있는 위기에 봉착될 수 도 있다. 그러기에 물이 두 가닥으로 흐르면 마을 안쪽이 범람하는 문제와 또한 응암리 선단의 흙이 유실되면 아래 조금 저지대 응암리는 매번 침수를 겪는 문제등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사행천의 사방사업의 유실 방지를 위한 “ㄱ"자형 제방 축조란 점이지 이곳이 조그마한 마을이 당시나 언제나 그 공간이 2~30 호를 넘지 못한 촌락일텐데 융성한 촌락이었고 촌장의 무덤의 적석총이라면 이점도 이해가 곤란한 것이다.
그러기에 촌락을 수몰에서부터 방지하는 일종의 사방사업은 아니었슬까 의문 합니다.
이로서 잃어버린 평창의 문화와 유적 두번째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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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부록 고대 신앙의 성립과 제반 이야기
적석총의 고구려의 무덤양식입니다. 적석총은 고구려에서 시발되어 백제문화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백제초기 적석총은 송파의 삼전 지하차도 위에 있다. 이 적석총은 초기 적석총으로 별로 크지 않은 돌로 3단을 쌓았는데 그리 높지않고 4각 스퀘어 모양을 취하고 있다.
4각 묘에 대해서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지만 본인은 지구상의 4각 묘들은.., 우리가 잘 아는 광개토태왕비나 장군총, 마야, 아즈택 문명의 신전이나 이집트 기자 피라밋, 그리고 서안의 미 발표분 피라밋 천개정도는 존재합니다.
왜 이 묘들은 자연스럽게 둥근 모양이 아니고 4각 뿔의 피라밋 형태를 추구하는가 하는 점의 공통점에 상당한 의문을 가진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과 원형, 그리고 지역적 여건에 따르는 자연형등 몇 개 않되는 도형에 4각형을 취하는 것은 어쩜 보편적 견해일지 모르나 미술과 문화의 특성중의 하나는 비쥬얼 싸인의 시각적 언어이지만 이를 기억적으로 소화하여 일련의 시리즈 형태로 발전해 나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면, 인간의 발전 역사는 이러한 계통적 추구에 의한 것으로 이어져 오고있기 때문에 이 모든것이 하나의 문화권에서 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본인은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쉽게 중복하면 이집트 피라및이나 서언의 피라밋, 마야 아즈택 신전들 또한 장군총등 모두 사각형의 신전들로 이는 하나의 계통에 의한 것이란 점이며 이집트 역사에 나오는 여인들의 그림은 서양인들이 아닌 바로 나의 이웃 처녀들 같은 느낌이다)
여기서 고구려 문화의 정체성에는 종묘, 사직과 더불어 동남방의 별자리로 보는 영성신앙(靈星)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엔 영성문화가 없는 중국 것이라 하지만 고구려 문화엔 영성신앙의 영성제도 우리 문화의 저변에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응암리 적석총과 출토된 가야식 토기 사진.
(*'고구려의 사상과 문화" 연구총서 2005 p48 )
사직의 社와 稷 의 神은 물론 영성제는 일종의 농경의례로 농사의 전 과정을 모의 반복하는 의례로 어떤일을 흉내내면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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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흉내내는 주술로 가령 가뭄에 주술로서 마른땅에 물을 뿌리면 실제로 비가 내린다는 "모방주술"로 지금도 우리네 마음속에서도 이러한 동일한 생각까지의 저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고대국가에서는 종묘와 사직, 영성(靈星)숭배 사상은 어쩜 당연한 믿음이지만 이것은 대략 土神들이며 또한 여기에이 모든 우주의 근간인 하늘의 神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북방 샤마니즘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로 우리나라에서는 잊혀져 가는 문화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을 보이게 하는 깃발이기도 하며, 우리 마음의 평화의 염원을 펄럭이는 깃발에 실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중요한 영적 도구이다.
성황당(서낭당)의 서낭신은 민간 신앙이라고 하는, 기복신앙(祈福信仰- ‘비는’ 문화)의 중심에서 오랜 세월 모셔져 온 것 같습니다.
서낭당은 성황당(城隍堂)과 같은 뜻이며 지역에 따라 천왕당이나 국사당등으로 불리는데,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콘모양의 돌무더기를 쌓은 누석단(累石壇)과 신성시되는 신수(神樹) 또는 장승으로 이루어 지는데 오색헝겊을 걸어놓은 서낭나무와 누석단으로 구성된다. 또한 서낭당은 당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누석단과 신수를 말하는 것이며 당집과 입석(立石)의 형태로도 구성된다.
마을에 하나씩은 서 있던, 당산(堂山)나무와 서낭당..오색 천을 걸어 바라에 날리던 모습, 마치 요즘 TV에서 보는 티벳 어느 산간마을처럼,,,서낭당의 서낭신앙은 마을수호라는 기능으로 서낭당은 지역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전쟁시 석전(石戰)에 대비하여 쌓아놓은 돌무더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실제적인 기능보다는 마을수호, 액운퇴치, 소원성취 등을 기원하는 민간 종교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호신으로서의 성황은 조선시대도 널리 신앙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성황은 국행(國行)성황과 민간에서의 성황으로 나누어 지는데 국행성황에는 호국(護國)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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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마을 어귀에 서낭당에서 마을 수호와 전염병 예방의
기원등 祭儀의 고사를 지내고 빌며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의 문화는 우리 생활속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70년대 새마을 운동에 구 시대 유물로 사라진듯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엔 아직도 그에 대한 믿음의 신앙은 남아있다.
(의료 과학이 발달되기전 옛날엔 전염병은 중국이나 노르망디 에서 페스트란 전염병으로 수천만 명씩 죽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나라엔 구한말 콜레라등이 끊이질 않았다 한다)
먼 길을 걸어갈때, 아니면 강가의 놀이에서도 돌을 쌓아놓고 무엇이든 잘 되라고 바라는 마음과, 그보다 좀 더 이해하자면 뒷뜰 장독대에 새벽에 기른 정화수를 올려놓고 두손 모아 빌며 기원하는 마음은 기복신앙으로 서낭신앙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네 사회는 오색 천의 깃발과 누적단에 당집의 서낭당은 꺼려하면서도 진정 마음 한 구석엔 인간사의 심정을 하늘에 맞기는 신앙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돌 누석단과 고목나무의 서낭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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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당과 기복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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