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에 神이 빚어 놓은 앞, 뒤가 지면에 붙지 않았던 조그만 돌멩이에 용암이 줄어 잔 주름을... 조각칼로 골을 판것과는 쉽게 구분되는 ,,, 누가 보아도 돌멩이 부피가 줄어들며 터져서 갈라진 홈이란 것을 쉽게 느낄수 있다. 아래의 금구몰니의 거북이 돌의 등살 주름도 위의 수석과 같은 주름으로 이해를. 금구 몰니는 풍수사상에서 당대 금시 발복의 재물운의 대 길지( 명당)임.
2013,10,7
평창의 명당은 어디일까요?? 풍수 이야기 함 할까욧??
물론 적멸보궁 따라갈 명당은 없는듯 합니다. 비로봉에서 청룡과 백호는 두 겹으로 적멸보궁을 감싸고 주작은 줄기차게 30여리쯤 내려와서 월정사 뒷산에서 멈추는 대 명당이죠. 가히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뭍힐만한 곳이죠.
그리고 휴전선 철책선 아래 어느 임진강가에 경순왕묘가 있는데 어느 지관의 글엔 그곳이 사방 70리를 놓고보면 대 명당이라 김씨가 천만 인구랍니다. 저는 그곳 위 초소에서 근무하여 자주 내려가 뛰놀던 곳인데 그곳 인근 지리도 훤하지만 나로서는 지금 기억으로도 그렇게 명당인가 하는?? 아마 풍수설은 이 이후의 시기에 확산되었슬텐데... 그와 상관없이 우연히 명당자리를 차지한 모양인지??
또한, 20년전 예산의 남연군묘를 가 본적이 있는데 수덕사 가는 길에서 우회전 하여 차를 몰고 시골길을 들어가는데 훤한 대낮인데도 무척이나 겁이나던 기억이...남연군묘를 기준으로 하면 우측의 백호의 산이 무척이나 겁나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돌아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힘찬 용트림속에서 천자가 나는가 하는 생각이...
평창읍내 명당들은 어디들에 있슬까??
명당이란 대체로 지관들의 주관적 이야기이기에 제가 아는 모든 것은 다 쓰지 않겠습니다만.... 평창 최고의 명당은 어디에 있슬까??
십년 전쯤 평창엘 가니 택이 일요일에 일직이라 군청 민원실엘 놀러갔다 나오는데 민원실 문 옆에 유리 장식장 안에 모형도가 있었는데 나가다 말고 얼핏보니 그 모형도는 명당인지라 다시 들어와 이런 것 뭐하로 만들었냐고 물었다. 왜냐면 그 정도 모형도 제작비는 오백을 넘어가니 쓸데없이 예산들여 명당 모형도 하나 제작하는가 했더니...
택능이에 답인 즉,,, 그 모형도는 사실이고 들뜬 고개 옆에 대학교 짓는 곳이란다. 이사장님 왈 남동향이라 그렇지 그곳이 정 남향이면 우리 대학교 들어가긴 어림도 없다는데...대 명당엔 욕심있다고 아무나 임자가 되는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왜 대학교는 그 좋은 땅에서 골조만 앙상하게 남기고 지금껏 흉물로 되었슬까요??
부도처리 이유야 있겠지만 지관이 지나다 한마디 한다면, 이곳은 금계포란의 FM 정형인데 너무 무거워 폭삭 주저 앉았다고 꿍설거릴수도,,,
그럼 후세가 꼽사리 끼지요. 천년 비기에 대 명당은 시간이 도래되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타임이 않맞었었냐 하는 엉터리 논리도,,,
그리고 평창의 명당은 유동의 평창이씨 시조묘일 것입니다. 물론 정숙공파이지만,,그러기에 많은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그 산줄기 위에 300년된 장군대좌혈의 묘가 있답니다.
평창에선 방치골의 산세에 명당자리들이 가능하고 토질도 최우수 토질이겠지요. 이어서 남산 정자각을 오르는 곳...200석띠기 부자도 있지요?? 내 국교 2핵년때 기억에 그 분은 짐바리 자덩거 끌고 다니시던데 마치 금복주 트레이드 마크같은 인상의 관상도..
이 산엔 500석띠기 명당도 있다 하는데 그곳이 바로 금 거북이 진흙속으로 입수하는 금구몰니형입니다.
철은 물속에서 공기중에서도 부식이 되지만 금은 가장 오랫동안 견고한 물건이라 진흙정도야..오히려 위장술정도 아닐가..이는 당대에 500석띠기 금시발복이라 여러 명당중엔 가장 욕심나는 최고의 명당 아닐까 히는.. 아직도 이런곳이 남아있어요. 아니 그보다 평창엔 지관도 없고해서 그런가??
당대에 500석띠기 부자가 되고싶은 분,,물론 명당은 임자가 따로 있다지만 조용히 저에게 오세요. 믿음이 간다면 알궈 드리겠습니다. 욕심한번 내 볼까요?? 당대에 500석띠기 부자가 되는데...
그런데, 혈의 명당이란 암장이나 이장도 이퀄(=) 관계가 성립됩니다.
암장하고 봉분을 하지 않아도 금시발복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주위를 전부 다치게 하는 폐단도 많치요. 조선 명종때 최고의 풍수가 남사고는 욕심이 나서 조상묘를 이장하였는데 다음에 더 좋은 곳이 나오니 그곳으로,,, 이렇게 열번을 이장하고 패가 망신 하였답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유형의 부자들은 돈버는 일만 하는 돈의 노예일뿐 사회적인 인간 가치는 거의 멈춘듯하게 보이지들 않습니까??
나의 주변 어느 노인왈.. 칠순 노인네가 또 땅 300평은 45억 주고 샀다고 나에게 직접 얘기하길래 난 뒤돌아서 그 노인네 1년에 1억이면 머슴부리고 재맛게, 멋지게 살텐데 돈 쓸줄은 모르고 .아들 부자 만들어 주는데 그렇치 않아 지금도 반 건달인데 자식 건달 만들것 같지않냐고 말하곤,,, 이러한 부자들의 폐단도...
평창엔 유동, 방치골, 남산, 노성산 끝 .... 이곳들은 험준하지 않고 동산처럼 여러 모양을 낼수있어 음택의 명당을 내포하는 곳입니다. 노성산 서낭당 아래 쑥 들어간 곳에 지금도 잘 관리되는 묘가 옛날 거수기라던 고, 이우현 의원님의 조상님 묘이지요 그곳을 일제시대 일본 풍수가의 글에서 보면 곰의 배꼽형이라 하고, 노성산의 정기를 끊기위해 상수도공무소 위의 봉우리에 철항을 때려박는..그래서 평창읍으로 내려뻗는 태기산 정기를 절단하고자 하는...
이것이 일제 강점기 쪽바리들이 조선사편수회 만들어 조선의 민족정기를 끊기위해 자행한 일입니다. 그 철항을 뽑으면 그 아래 끊어서 다시 박았기에 아래 철항들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지관들의 주관적인 설로 아직 평창엔 몇개의 명당이 남아 있슬거란... 남산에도,, 살구실에도,,, 약수에도,, 대학교 세우다가 중도하차하고 뭐한다는등,,, 이제 다시 무언가 들어온다는데,, 아마도 그곳은 死者의 땅일듯,, 양택으론 않맞을지도,,, 또 하나의 명당은 정말 지관이 없는듯,,,양쪽땅으로 갈라지고 철조망이 혈의 중심으로 내려 쳐져있더만,,,
그리고 언젠가 컴에서 본 사진하나... 하일 앞 동네 놀러간 사진에 그 뒷산이 하일 앞산이라 하는 ,, 이 산은 책상형으로 주작의 안산으로는 매우 훌륭한 산이 될 수있어 그 반대편에 분명 그러한 명당을 찾을 수 있슬것 같은.. 아마 잘만 쓰면 5대 안쪽에 큰 인물이... 안산이 책상형이라고 큰 선비형이라는... 풍수는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평창에 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쓰지 않겠습니다
잠시, 배꼽잡는 멘트 하나하면,,, 옛날 "터"라는 책이 유행하고나서 추석이라 고향가는 길에 양평 어디쯤 밭 한가운데 현수막에,,, 장관묘자리.... 1억 국무총리 묘자리..... 3억 대통령묘자리.......5억 글쎄요.. 이 묫자리를 사는 사람에게 수억 꿀떡 먹은 지관이 하는 말,,, 이곳에 이장을 한 후에 3대손에서 중출한 인재가 나온다 하니 한없이 기쁠 것입니다. 미친넘들,,, 지랄하긴,,, 나이 60인데 앞으로 3대후라면,,,지넘 죽고 내 죽으면 어떻게 알련고,,아마 최대의 사기같은...
하기사 언 대통령은 선친묘를 용인으로 이장했다지요. 밤 2시에 하관하고 바로 다음날(아마 5월쯤) 오전 그곳에 따라붙은 친구에게서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선 대통령 욕심은 있구나 하고 느꼈는데 그래서 대통령 되었슬까요?? 아니, 그보다 언 대통령 후보는 조상묘는 이름있는 가문이라 풍수쟁이들 입에도 오르내리는 묘인데..칼이 200개나 꼽혔다지요. 진짜인지 모르지만 남을 이렇게 잔인하고 뭉겨서 대통령이 었었슬까 하는?? 명당에 묻혀도 탈...
그러면, 옛날 이야기 하나 하지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종묘에 모셔지는데 그의 부인 한씨는 임금이 되기 전에 죽어서 종묘에 오를 수가 없답니다. 이성계는 역사서들에 둘째부인 강씨를 사랑하고 그의 아들 방번, 방석을 극진히 아끼고 세자 책봉도 하는데, 강씨부인의 아버지는 고려말 장관급이라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시에 정보싸인도 있지 않았슬까 추정합니다만,,, 강씨 부인은 욕심에 자기 아들을 임금으로 하기위해서 한씨부인의 묘를 파서 시신을 아차산 제일 악혈에 묻었답니다.
200년 후 종묘사직에 이성계 부인의 위폐가 모셔지지 않은 문제가 불거지자 기록에 의하여 이는 강씨부인의 모함이었으며, 한씨 부인의 유골은 아차산의 악혈에 이장하였다는 기록에 의해서 지관 2명을 풀어 3일만에 봉분도 없는 땅을 파서 시신을 수습하였다 한다. 그렇다고 후실 부인이 종묘에 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자기 아들이 임금이 되길 바란 것이고 그렇게되면 혹
종묘에 오를 수도,,
그리고, 강씨부인의 묘인 정릉을 이성계 사후에 방원은 태종이 되어 보기 싫다고 미아리고개 넘어로 이장하였는데, 이 묘를 파서 시신을 건져서 어디론가 버리고 이후 기록도 남기지 않아서 지금의 정릉은 시신이 없는 빈 무덤뿐이다. 당시의 임금은 (물론 강씨부인의 후손 방계는 없다) 이 악독한 계비 강씨부인의 묘를 찾아 백벌징계한 것이다.
명당은 이래도 탈,,, 저래도 탈,,,
그러고 저러고 "금구몰리'란 금 거북이.. 냇가에가서 글싸한 짱돌하나 줘워다가 애노그 물감으로 선을 좀 긋고 접시위에 올려서 안방 선반위에 잘 모셔두면 당대 500석띠기 부자가 될련지 누가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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