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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전국문화원 연합회 주체 공모전 논문부분 특별상(국사편찬 위원장상 수상) 논문
수항리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 (별지 부록)
부록 1) 수항리사지 가람배치도
부록 2) 수항초교에 있는 장대석
부록 3) 기단석 별석 1점의 문제
부록 4) 수다사지 탑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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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수항리사지 가람배치도
(2010년 위성 사진에 의거 하였음)
(석불 3매의 위치는 증언자님들의 증언에 다소 부정확할 수 있음을 양지 바랍니다)
위의 가람배치도는 수항리 마을의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여 작성한 바의 기록으로 다소 정밀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본 폐사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를 기록한 것입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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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람배치도상으로 볼 때 탑 뒤로 10m뒤에 불전이 있었던 주초석이 3단형으로 10여 개 있었다고 답사객들의 기록도 있지만 증언으로도 확인되는 바 증언자를 통해서 주초석이 매립되었는지 반출되었는지 확인은 가능한 듯 하며, 또한 측후방에는 요사채(승려들이 거주하는 집) 이 있었고 뒤에는 좌측편으로 고인돌 1기가 있었는데 도난 당하였는데, 이번 (8월 18일) 증언에서도 밭 주인 김삼수 씨는 일을 하면서 약 10명 정도가 고인돌 위에 둘러앉아 식사했다는 정도의 크기를 증언합니다.
부록2) 수항초교에 있는 장대석
인터넷상의 개인 글들엔 무수히 많은 글에서 수항초교에 당간지주가 옮겨져 있다고 하며 위 “수다사지 활용방안“*) 세미나에서는 당간지주 난간석 아닌가 추론하지만 본인이 밝히는 것이 이 이론과는 상이 합니다.
『조선고적도보』에 근거하여**) 수항리사지의 석불 3점과 수항리사지 탑, 당간지주가 있었다 하지만 원본인 1918년도 출판된『조선고적도보』책 6엔 수항리사지의 사진은 한 장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 책은 목록에 순서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에 실리기에 『조선고적도보』전체를 확인하였음)
하지만 3층 석탑은 그 일부 탑이 현존하고 석불 3점은 위에서 밝혔듯 김종근 옹의 증언과 6, 25 이후 군인들이 큰 절로 가져 간다라며 트럭에 싣고 갔다는 증언에 의해 석불 3점의 존재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당간지주의 존재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곳을 휘감는 여울은 그 앞이 산으로 막혀있어서 옛날부터 수항리사지를 건너오자면 증언들에 의하면 아래쪽 현 다리가 세워진 위치로 건너다녔고 하지만 엊그제 답사 시(8월 18일)에도 그곳을 건너기엔 7~80cm 이상 깊이를 건너야 할 듯 하며, 진부쪽에서 수항천(오대천)을 건너 구릉을 넘어오는 곳도 깊이는 만만치 않은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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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평창 수다사지의 재조명” 주제발표 자료집. 강원고문화연구원 자료집 주제발표 “평창 수다사지 삼층석탑및 석조유물” p76.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평창읍의 오층석탑 두 기와 월정사의 여러 사진을 1918년 『조선고적도보』 6권에 수록하며 이는 1915년도 이곳을 다녀갔지만 월정사에서 오대천을 따라 12km 아래인 이곳은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추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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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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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간이 존재했다면 본전불의 정면인 남쪽은 수항천이 깊고 강을 건너서는 산이 가로막고 있기에 이 방향을 제외한 동, 서, 북의 모든 방향에서 수항천을 건너올 수 있으므로 당간지주 위치도 이곳 경작지의 남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의 어디인가엔 당간지주 석물이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수항초교 앞에 방치된 장대석 2점. 사진에서 보듯 안상무늬가 가로형으로 새겨져 있다)
수항초교로 옮겨진 장대석은 30×38×290cm와 154cm로 당간지주 부재이기엔 가늘어 부재가 아님을 알 수 있고, 앞의 증언자 김종근 옹이나 이번에도 김정숙(79세) 여사의 증언에서 위 두 개의 장대석은 수항초교 입구에 세웠으며 나머지 서너 개의 장대석은 계단용으로 사용하다가 그 위치에 묻고 시멘트 계단을 하였다 한다.
이 장대석 부재는 5~6개로 당간지주가 아님이 명확히 확인되며 당간의 난간석으로 사용되었다기에는 현 우리나라 당간 50여개 중 난간석을 만든 당간은 하나도 없으며 5개 정도는 당간지주 고정용으로 익산사지 당간지주에서처럼 당간지주를 잡아주는 통석으로 된 것은 찾아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장대석들은 2중 기단형으로 그 안에는 안상을 조각하였으며 가로형으로 안상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당간지주라면은 세로로 세우기에 안상이 부적합하다. 그보다 당간지주용 장치의 조각을 한 것이 아니지만 으로 두께가 당간지주용엔 부재로서는 굵기가 가늘게 보인다. 또한 당간이 세워진 곳의 난간석도 아니다.
석조물에서 안상이란 시대적 구분의 척도는 되지만 그 문양자체에 불교사적이나 어떤 중요한 의미는 갖지 못한다. 다만 안상의 역활은 그림에서 면 분할시 무미한 곳에 힘을 가하는 장식적 기교로 나뭇잎의 문양기법은 좀 틀리지만 동양이나 서양에서도 옛날부터 공히 사용하는 장식 그림으로 벽지나 화폐에서도 나타나는 일종의 굽도리나 띠장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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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문화재 검색사진
80년대의 사진에서 보면 그때까지도 탑 위쪽에 장대석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중앙의 큰 장대석은 다른 사진에서 보면 탑의 난간석과 평행함을 볼 수 있는데 이로 유추해 본다면 아마도 법전의 난간석이 제자리에 있음을 추정해 본다.
이런한 불법전 난간석은 원주의 법천사지에서 잘 나타나 있다.
(수항초교에 있는 작은 장대석으로 용처를 알 수 없읍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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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작은 장대석에는 아래의 사진에서처럼 사선으로 자르고 안쪽으로 원형 홈에 한편에는 사각의 혼을 파서 아마도 사각은 쐐기를 고정하는듯 하며 이 석재의 용처는 파악하기 힘들다.
부록 3) 기단석 별석 1점의 문제
수항리사지 탑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된다. 사진으로 보면 검은 부분의 공간이 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줌 브라우저(밝게하기)로 아래 사진으로 작업을 해 보았습니다.
탑의 중간 별석 1매(중층 기단 갑석으로 이전되어야 할 부재)는 남쪽에서는 이격이 없는데 북쪽 방향에서는 16cm의 이격공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양 끝의 절단면이 잘 절단되고 다듬어진 점으로 보아 아마도 제작당시에 어떠한 결함 때문에 이격시키고 그 안에 오각형의 별석 부재를 끼워 넣은듯 하다. 이때에 입구의 16cm보다 안쪽이 사다리꼴로 좀 더 크게 만들어 빠져나오지 않도록 하였을 것인데 지금은 플래스틱 재에 시멘트를 입혀 메워서 안쪽 크기를 계측하지 못하였습니다.
(별석 이격 사진/북쪽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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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4) 수다사지 탑의 위기
( 이 글은 지난 8월 18일 현지 답사시에 올해에 객토를 하고 당근을 경작하는 경작지 안의 수항리사지 탑이 수해시 붕괴 위험성이 높기에 이를 평창군청등에 알리기 위해 본인의 블로그 “후세백작의 지평”에 게시한 글입니다. 이 글이 수항리사지의 내용이기에 참고로 올립니다)
(2018년 8월 18일 현재 경작지내 수항리사지 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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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보면 경작지 밭에서는 객토로 인하여 탑에 위기 봉착의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본 논문 앞의 타이틀에 있는 사진은 지난해의 것으로 객토를 시행하였고 이미 지난해에도 몇 차분의 흙이 민가로 유실되어 평창군청에 사지(寺址)로서 객토의 부적법성에 평창군에 제소되었지만 올해에는 객토 위에 당근을 경작하며 수많은 이랑의 밭고랑이 물살의 힘에 쏠리는 현상을 초래할 것이 예상된다.
위 사진 ①에서 보면 수항리사지 탑은 만여 평의 밭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맹지인데 사진 오른편의 밭고랑들은 가로로 되어 가운데 탑으로 내려가는 수로가 중앙 수로로 밭 오른편의 수천 평의 빗물은 이곳으로 흘러내려 탑의 북측 난간석 중앙부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내리는데, 탑의 북쪽 면엔 객토로 인하여 이미 경작지가 탑의 바닥까지 올라온 상태에서 빗물은 탑 난간석을 돌아 사진 ③ ④로 갈라져서 탑을 돌아 사진 ⑤ ⑥의 천변 둑으로 흘러내린다.
오른쪽의 수천 평의 밭고랑은 가로로 되었지만 왼쪽의 빗물의 수로는 중앙으로 흐르는데, 만약 태풍이라도 닥치고 태백산 산간지역의 집중호우가 100~200mm의 장대비가 쏟아진다면 중앙 수로는 물이 넘치고 탑쪽으로 경사지에 유속에 가속이 붙으면서 탑 북쪽 전면을 때릴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물이 탑 전면에서 양쪽으로 갈라질 때 밭 왼편의 수로는 수직으로 흐르기에 물의 흐름에 방해를 주게 되고 이로써 오른편에는 물먹은 흙이 쌓일 수 있다. 그러기에 이 흙더미가 탑에 압력을 가하든가 또는 오른편의 물빠짐에는
유속의 힘으로 지층까지 파고 내려갈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탑에 어떤 압력이 가해진다면 가상할 수 없는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사진 ⑤는 왼편의 3~4개 수직의 밭고랑 물이 둑으로 흘러내리는 것이지만 사진⑥에서는 더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려서 사진 중앙의 노란선의 토양의 높이에서 5~60cm 패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지금 현재는 비닐로 바닥을 처리하였지만 올해에 강수량은 얼마만큼인지 이렇게 유실된 흔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동편의 밭 아래엔 지난해에도 비가 많이 오지도 않았을 텐데 농노 길을 건너 민가 마당으로 몇 차분의 흙이 유입되었다 한다. 현장을 가서 보면 그만한 비가 온다면 탑으로 흘러내리는 물과 흙의 양은 더 많으리라 추측합니다.
사진 ⑤ ⑥에서처럼 밭 고랑을 넘어 범람하였다면 올해 비가 얼마나 왔다고 이렇게 되었슬까?? 이에 문제는 메인 수로가 작기도 하지만 직류로 하강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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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한 말 한번 쓰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책에서 미국 남부의 면화밭은 밭의 이랑이 가끔 꺾어지게 만들어서 빗물 속에 토양과 양분의 유실을 방지한다. 그러나 이 경작지는 구릉지에 배수로는 빗물이 많을수록 유속이 빨라지게 만들었고 사유지라 하여도 사적지로서의 탑에 대한 계도가 없었기에 배수로에 대한 배려도 없이 경작지를 만들은 것이 문제이다.
과연 올가을이라도 태풍 한번 만 온다면 하루1~200m 강수량에 동 탑은 무사히 견뎌낼 수 있을까?? 이것이 지난해와는 다르게 올해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하는 수항리사지 탑의 위기 봉착이란 점이다.
이곳이 지방 사적지로 사유지라도 경작자의 점착력이 약한 배사토의 객토의 문제 과실을 따질 것인가 아니면 주무 자치단체인 평창군이 비상대책을 강구해야 함이 우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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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방문엔 정원대 님과 동향을 했다.
정원대님은 한때 이 지역에서도 근무를 했기에 잘 알고있는 사이인데 주초석이 3단형이라는데 어디쯤 있었느냐고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한다. 본인은 혹시 이 탑이 3층이었는지 아니면 5층 아니었던가를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한다. .
경작지 반쪽 수천 평의 배수로가 탑을 향해 내려가는 것은,, 고의성이야 없었겠지만 만약 탑이 저의 집이었다면 잠을 잘 수 없어서 배수로를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곳이 사유지라 답사객들도 환대받지 못하고 탑도 여러모로 몸살을 앓는 듯 합니다. 하루빨리 정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 이 글을 씁니다.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자장율사의 말년의 수행처인 천년고찰 수다사를 잘 가꾸어 보존치는 못하고 우리 시대의 이름으로 이렇게 역사에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역사기행으로 찾아오는 답사객들에게 천년을 넘어서는 수다사지로 거듭나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또한 지난 세미나에서 이곳이 학자님들이 명백히 밝힌 “수다사” 였던 바 명칭도 또한 자장율사의 “수다사”로 개정해야 옳은 것이라 생각함며 이 글을 마칩니다.
두어 번 이곳을 동행해 사유지 소유자와 연락하고 안내해 주신 정원대 향토사학자님에 감사 인사를 표하며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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