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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항리(수다)사지

수항리사지 논문 解除

 

◆ 수항리사지 논문 解除

 

  이 장에서는『수항리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본인의 논문이 전국 문화원 연합회의 공모전에서 출품후 출품요강이 20여 페이지의 한정적이기에 단편적인 성격상의 논문에 대하여 제반적 이해를 위한 쉬운 설명과 또한 수항리사지(수다사지)의 모든 부분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입니다.

 

  여기에 논문헤제라는 주제어처럼 논문적 형식이나 내용에 치중치 않고 어떠한 역사적사실 단어 하나만 가지고 역사를 규명하는 단도직입적이 아닌 역사적 사실도 그 시대 배경에 부합할 수 있는 배경적 이해의 글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서에서는 고려초 송나라 문물의 유입에 배경이 되는 송나라 문화론의 역사 자체가 너무나 미흡하기에 고려초기의 역사적 사관의 이해에 본인은 당시 고려초 불교문화론에 바탕을 이루는 고려 초기 문화의 배경에 관한 역사 이야기들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고려 지방세력중 가장 큰 세력으로는 원주권 불교 문화론, 또한 원주권 문화론에 바탕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명주 사굴산 선문이 토대로 되는 관점의 이야기들을 속에서 수다사의 연계를 밝혀보고져 하는 것입니다.

 

 

Ⅰ. 수다사지 탑의 제반이해

 

1) 수항리 사지 (수다사지)의 석탑은 3층탑인가?

 

 본 논문『수항리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제목에서 3층 탑이라 명시하지 않은 이유는 현존 2개의 옥개석의 탑으로 그 기록이 문헌상으로는 1942년(소화17년)에 조선총독부 발행의『조선 보물 고적 조사자료』 P555에 기록이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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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원래에 “다다시”의 1918년판 『조선보물 고적도보11) 6권에 고려편에 평창의 기록으로는 평창읍의 동북오중(五重)석탑, 서남오중(五重)석탑, 그리고 월정사 탑등의 유리건판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으나 수다사지 기록은 없기에 1915년 이 길을 따라 답사하면서 수항리 계곡을 따라 수다사지를 방문했슬까 하는 점에서부터 의심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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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조선고적도보』는 15권의 4천점 이상의 우리나라 문화재 사진을 수록항 팩으로 일제 강점기시 일본의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가 1902년부터 1934년까지 30여 년에 걸쳐 조선을 답사하며 기록한 역사서이다.

1915년에서 1935년까지 모두 15권이 발간되었다. 1~2권은 고구려, 3권은 백제, 가야, 신라, 4권과 5권은 통일신라시대, 6권에서 9권까지는 고려시대, 10권부터 15권까지 여섯 권은 조선시대의 문화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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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논문 본문 주1)의 인용된 수다사지 세미나 리포트에서 박경식 교수는 이 책의 기록이 의심이 된다고 지적하였듯이, 1942년판 책엔 수다사지 기록이 정확한 역사인가 하는 점이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1942년판 『고적도보』는 식산과 농산국에 남아있던 자료를 모아 출간한 책이라하는데 이 부분의 역사를 이해하여 보면 당시 1939년 세계 2차 대전의 흐름속에 일본은 1941년 도조내각이 대동아 전쟁을 발발하여 ‘45년 패전 기간속에 조선 총독부가 발행한 책은 한국의 역사를 보존키 위함이라기 보다는 필자 본인은 일본의 문화재 약탈의 목록이란 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자료의 신빙성의 문제에 왜 이런 자료가 역사관할 소속도 이닌 식산과에 있었는가부터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를 가설로 설명하기 위해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봅니다.

  그 예로서 평창 아리랑의 최초의 기록은 아리랑은 진부에서 다섯 편이 채록됩니다. 이것은 당시 아리랑의 열기에 김소은의 1933년『조선구전 민요집』에 수록되어있는 평창아리랑은 신문에 아리랑을 채집해 주면 사례금을 준다는 광고로 아리랑 가사를 모집할 때 진부에서 그 기록이 채록된 것으로 진부의 기록자는 알길이 없으나 이로서 그 기록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당시 전문가가 채집한 역사 기록이 아닌 식산과에서 전국에 공문을 하달하여 채집된 기록은 아닐까 추론합니다.

 

  왜냐면 건축학자 “다다시”가 매년 한국에 2~3개월 채류하며 고적을 답사하고 유리건판 사진으로 남기는데, 그때까지는 우리나라의 역사 문물이 체계적으로 서술되지 않았슬 터인데 그가 조선에 오기전에 이러한 수집자료의 안내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역사학계가 전국을 대상으로 수집하기엔 부적당하였을 것이지만 식산과는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조직망을 이용하여 문화재 현황을 수집하여 다다시의 답사 안내서를 마련해 준 것으로 이 문화재 현황으로 수집된(검증되지 않은) 자료들이 식산과에 있었다는 추론입니다.

 

  여기서 한점 더 예로 인용해본다면 강점기시에 이능화 선사가 집필하고 육당 최남선이 감수한 『조선 불교통사』란 책에서는 월정사 8각 9층탑이 아닌 13층 탑으로 게제하고 있습니다. 이 탑이 13층 탑이란 점에 대하여 ‘70년 해체 보수공사시 감독관 정영호 (당시 단국대 교수)는 당 보수공사 리포트에서 13층탑이란 잘못 헤아린 결과로 탑 기단석 4매도 층수로 헤아린 결과로 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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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어쩌면 전문가에게 보고할 기록들을 현지 스님등이 탑의 식견이 부족하여

2중 기단석의 갑석과 받침석이 4매이기에 이를 포함하여 8각13층 탑으로 보고하였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또한 30년대의 기록서보다 먼저 “다다시”는 1915년에 이곳을 다녀가며 유리건판 사진에 남긴바 그 사진에는 8각9층 석탑의 사진이 보인다. 이로서 월정사 탑은 9층 탑일 것이라는 점은 확실시되나 그 이전에 탑이 9층탑이라는 정확한 기록이 없고 또한 기단석까지 잘못 헤아렸다고 단정하는 자체도 오류를 낳을 수 있는 위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다사지 탑은 기단석의 크기로 볼때 그 규모를 3층탑이라고 가상할 수는 있지만 1942년 발행한 고적도보는 대동아 전쟁당시 발행한 점으로 보아 조선 역사를 위해 『고적도보』를 발행한 것이라 할 수 없기에 그 책의 신빙성은 떨어지기에 그럼 수다사지 탑은 과연 몇 층일까 하는 문제를 객관화 할 수 있는 논증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 점이 본 논문 시작에서 입증하여야 했지만 3층 탑이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상의 구조론적 논증 제시만도 6~7 장이 소요되기에 공모잔 기준이 20p의 한정적이라 언급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2) 조형의 구도적인 그래픽으로 삼층탑임을 확인하다.

 

 현재 옥개석 2개의 탑을 3층탑과 5층탑으로 그래픽화 하여 보았습니다.

아래의 그래픽은 본 논문에서 탑의 생명선이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3층탑에는 앙각을 76도와 5층탑에는 81도로 잡아서 그래픽하였으며 이때에 기단석과 상륜부의 복발12)은 원래 비율 그대로를 유지하였다.

 

 노반의 상부는 몰딩재처럼 2중턱을 가지지만 현 탑의 상부에 있는 노반의 부재는 하단의 폭이 넓고 상단은 라운드형으로 폭이 작기 때문에 노반과 복발을 겸한 약식으로 보는 것이다. 두 탑의 그래픽에서 기단부와 상륜부의 노반의 크기가 동일하게 그래픽하였는데 3층 탑의 노반은 탑신석의 비례적인 앙각보다 폭이 작아 노반의 앙각 안쪽에 위치하며 3층 옥개석 상단이 노반의 폭보다 여유가 생김을 볼 수 있다.

 

 또한 5층 탑에서는 탑신석과 노반의 비례가 알맞은듯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7, 9, 13층 탑에서는 노반과 상층의 탑신석이 딱 맞아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현상을 가지지만 여러 탑을 관찰하면 3층 석탑에서도 맞아 떨어지면 안되며, 노반이 작아 상층 탑신석의 폭보다 작아 공간이 있슴을 볼 수 있기에 이 그래픽을 통해서보면 수다사지 탑은 3층탑이란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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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상륜부의 복발은 일반 반 원구의 복발도 아니며 노반과 복발이 축소화되어 하나로 치석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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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탑과 5층탑의 가상적 비교)

 

3) 사잇돌 3매에 대한 논문과 세미나에서 연구 비교

 

 본 논문에선 아래에 인용하는 리포트의 박경식 교수의 연구와는 견해를 달리하여 논문에 게시한 본인이 작성한 도표에 의하여  초층 탑신 부재의 하변이 98cm이고 여기에 중간 부재를 빼내면 하층 부재의 상면은 102cm이기에 이것이 서로 맞아야 하며 또한 하층 부재 아랫변이 124cm이기에 상층 기단 면석의 폭 124cm와는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중간 부재는 아래 1층 갑석과 사이즈가 맞음을 볼 수 있다. 

 

 

  

 

(左) 수다사지 탑 전경                         (右) 부분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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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박경식 교수는 탑신 받침석이 타 부재라고 문제삼고 있지만, 본인의 논문에선 이 부재는 2층 기단석 아래의 받침석이란 점이기에 중간 사잇돌이 아래에 내려가 2층 기단 받침석으로 가면 정상이라고 주창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지난 세미나에서는 이와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 고고문화 연구원"에서 주최한 “평창 수다사지 활용방안”이라는 세미나 리포트로 "수다사지 삼층 석탑과 석조유물"13) (딘국대 박경식 교수)편에서 위 사진의 별석 3점에 대해서 리포트 p76에서 의문을 제기한 점을 아래에서 인용합니다.

또한 2중 가단석일 경우 갑석과 받침석의 크기 순은 하층 기단 갑석이 가장크며 그 크기순은 하층기단 갑석> 하층기단 받침> 상층기단 갑석>상층기단 면석인 점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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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주1)과 동일. 수다사지 세미나 자료집

(인용부) “평창 수다사지 활용방안p 76

'' 강원대학교는 본래부터 이 부재가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데 *7) 이후 조사에서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8) 이 부재는 상층 기단 갑석과 이의 상면의 별석으로 조성된 초층탑신 받침석과 묘하게도 비례가 맞아 본래의 부재로 착각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지니고 있다.

즉 실측조사를 진행한 결과 각 면의 길이는 상층기단이 154cm, 판석형 부재는 하단부가 132cm, 중단부가145cm, 상단부가 129cm, 초층 탑신 받침부다 97cm인 점을 고려할때 이 부재는 다른 석탑의 갑석일 것으로 충분한 여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판석형 부재에 조출된 부재의 상면에 조출된 낮은 각형 1단의 받침 길이가 129cm인 반면 초층 탑신부 하단의 길이가 97cm인 점을 고려할때 이 부재는 다른 석탑의 갑석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8) 따라서 상층기단 갑석에 조출된 호각형 3단 받침부중 가장 상면에 조출된 받침 길이가 102cm인 점을 보면, 초층 탑신의 받침부의 길이가 97 cm여서 이 부재가 다른 석탑의 것이 분명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인용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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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주 3의 책 p79

8) 주 5와 같음

9) 왜냐면 이반적으로 석탑의 구성하는 부재의 수치를 보면, 받침부의 너비에 맞추어서 상면에 놓인 부재를 치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29cm를 가진 받침 상면에 97cm의 너비를 지닌 받침이 놓일 경우 불균형을 초래할 것으로 판단된다.여기서 주3)은 강원대학교 박물관 「평창군의 역사와 유적」1987 pp68~69

주5)는 강원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적 분포지도 - 평창군」2004. p363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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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박경식 교수와 본인의 견해는 양분되지만 본인의 견해를 달리하며 역으로 대입하여 보더라도 모순되지 않는 상호관계의 설명으로 본 논지에서 사잇돌 3매중 가운데 판석을 빼 내어야 하며 이 판석은 아래로 옮겨져 2층 기단 받침석으로 가야함을 주창하는 것입니다.

 

4) 사잇돌이란 표현은 오류인가??

 

  본인의 논문이 수상 이후에 일반 카페의 탑을 주제로 하는 링크에 게시한바 탑을 1,400여기 답사하였다는 분의 댓글에 이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아래의 인용부들은 어떤 잘잘못의 비난성의 시비를위해 재인용하여 게시한 것이 아니라 이 댓글자들만이 아닌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의 탑에대한 본 논문의 이해가 이러한 잘못 이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본 논문의 이해를 위해 비교되는 반면교사로서의 역설적 모습으로 본 논문을 이해하고자 함도 본 논문 이해에 도움이 되기에 이를 무기명으로 인용합니다. 이점 또한 댓글자님들의 앙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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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1단은 상층기단 갑석 (맨 아래부재)

2단은 별석괴임 1 (가운데 부재)

3단은 별석괴임 2 (연화문이 조식된 부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별석입니다.

현재의 상태에서는 그렇습니다그런데 이해가 안되는 건 노란선 맨 아랫돌은 답사객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하층기단 갑석(혹은 하대갑석)과 상층기단갑석(상대갑석)으로 알고 있는 부재입니다.

 

 

(질문 1의 답)

  이러한 댓글에 무조건적 반격보다는 본인은 미술 전공자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예전에 미국 어느 미술전시회에 출품준비에 화가들은 밤을세워 작품을 손질하는데 뒤상이란 화가는 쓰레기장에서 그 용도가 폐기된 소변기를 주워와 잘 닦어서 이를 작품으로 출품하여 전시장에 꺼꾸로 걸고 제목을 "샘" 이라 붙였다.

 

  감상자들은 이를 보고 미술 전시회에 왠 변기가 나오냐고 의아해 했지만,, 이제는 사용이 종료되어 쓰레기장에 간 것은 그 용도의 폐기이기에 이제는 더 이상 변기가 아니란 점이고 지금은 전시장에 작품의 용도로 기능을 하고있기에 변기가 아닌 작품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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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기발한 발상의 뒤상을 보고 백남준은 사깃꾼이라 하지만 그것이 논리상으로 통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본 탑의 별석 3점이 한 부분에 들어간 점에서 이는 모두 각 부재가 제자리에 있을때는 갑석이고 받침석이지만 여기서는 그 기능을 상실하였기에 갑석이고 받침석이라고 부르면 위배되는 표현입니다.

 

  각기 제자리에 있슬때는 갑석으로 또는 받침석으로 그 효능을 다하지만 이곳에 3매가 제자리가 아닌 곳에 잘못와 있슬때도 갑석이고 받침석이라 한다면 가운데 사잇돌은 받침석이나 또는 갑석이기에 이를 갑갑석으로 표현해야 합니까?? 귀한 손님 오셨다고 방석 두 장을 깔아 줍니까??

 

  만약 갑석이 이탈하여 다른 곳에서 받침석으로 쓰인다면 그는 갑석이란 고유명칭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잇돌 3매는 그 고유 기능을 상실하고 있기에 사잇돌이라 표현하였으며 그 위치를 찾아가서 제 기능을 할때는 사잇돌이라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별석이라고 한문으로 단어를 구사하면 정답이고, 사잇돌이라고 한글로 쓰면 오류라는 이야기는 무지의 야유이지 학술적 논쟁의 댓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댓글자는 객관화의 데이터 자료를 만들어 정확한 기술로 오류임을 입증도 못하며 이를 오류라 하면서 소양도 없이 그 자체가 진짜 오류를 범하는 문의에 답을 어떻게 하야 할까요.

 

그러기에 이러한 점에 일일이 대응 가치도 없고, 그 진짜 오류는 본 논문을 정확히 해석하지도 못한채 무조건 잘못만 따지려는 의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위의 1, 2, 3행의 질의에서 가운데 부재와 아래 부재는 상대갑석과 하대갑석이라고 누구나 답사하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논문에선 가운데 부재가 2층 기단석과 폭이 같기에 하대 갑석이 아니라 하대 갑석위에 올려져 2층 기단 받침석으로 놓여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관적 어림짐작보다는 객관화된 치수들을 이입하여 본인의 관점은 이러합니다 하면 상대의 논리는 오류임이 증명되는데 아래의 문의들은 한결같이 본문에 주장에 논문은 읽지도 않은듯하며, 또한 사잇돌 3매의 올바른 치석에 관해서 누구도 본인보다 먼저 주창한 점도 없으며, 본인이 논문에 그런 생각을 먼저 하고 있었다 하면 그건 김일성식 억지란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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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탑에서 앙각이란 용어사용은 오류인가??

 

(질문 2)

논문에서 말하는 생명선인 앙각의 각도가 삼층탑일때 76도 오층탑일때 81도라고 합니다. 별석괴임이 유존한다면 앙각이 76도 보다 높은 80도 정도(확실하지는 않지만) 가 되어 삼층탑이 아닌 오층탑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결국 논문의 근간을 흔드는 격이 됩니다

 

(질문 2의 답)

 앙각의 개념을 전혀 모르며 자기 판단기준의 논리성이 없는 질의입니다.

일반적인, 건축학에서나 군사학에서도 널리 쓰이는 앙각에 대하여 본인이 이 논문에 앙각의 단어의 사전적 의미까지 설명할 필요야 있겠습니까??

  정작 탑을 하시는 분들은 체감효과란 범위도 모호한 단어를 즐겨 사용하지만 그 단어는 주관적인 의미이지 사실을 구체성있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가진 단어는 아니란 점이며 이 단어를 대신하여 앙각이라 표현하면 탑의 기본요소들이 보다 정확해 지는 것입니다.

 

  앙각은 물체가 수평면에 각도를 이루는 고유값으로 건축에서도 쓰이는데 탑에선 아직 언급조차도 않되었던 생경한 용어라 하는 것은 사실 기정 사실일테지만 그러기에 탑의 학문은 눈어림 학문이란 비판을 면치 못할것이란 점입니다

 

  위의 질문에서 앙각이 기단부 높낮이에 따라 틀려진다는 내용인데 그런 이야기는 마치 궤변이며 탑에서 앙각이란 옥개석 기울기의 고유값으로 별석을 받치던 기단석을 높이던 이 고유값(탑애 설정한 기울기 고각)의 각도는 변함이 없으며 이 기울기의 앙각을 만든 요소는 옥개석과 탑신석의 높이 비례란 점으로 탑의 일반적, 보편적 앙각의 값은 본문에서 도표로 밝히고 있습니다.

 

 

  본인의 논문을 열 개정도의 부분으로 나누어 이런식으로 조목조목 연구가 아닌 오류찾기를 하고 있지만 오려서 이런 비논리적 문의에 본인은 하도 어이가 없어 담을 금하자 그런 댓글이 옳다는 분위기인듯 탑을 1,400여기 답사한 사람도 이런 오류의 반박 게시글에 예리한 눈이라고 멘트하는 등,, 하지만 누구 한사람 옮음이 어느쪽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멘트했습니까?? 그러기에 그곳엔 오류만 살고 학문과 정의는 죽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논문은 오류의 도배인듯 따발총처럼 떠들지만 그 총알는 정작 본인을 향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총구는 모두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감정으로 올바른 해석을 했다면 총구는 삐뚤어지지 않았슬 것입니다. 그래서 오류가 아닌 정상으로 보았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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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3)

어떤 문의에 앙각이 무엇인지 설명좀 해달라는 댓글에 그야 사전 찾아보면 될것인데... 무반응이자 두 번째 댓글에선 책을 복사하여 올렸는데 그것은 전탑에 사선을 긋고 이것이 앙각이라며 우린 이렇게 배웠다 한다.

그러면서 본인이 주창하는 조형론은 옛날에도 있었고 우리는 이렇게 배운다며 본인 혼자만의 것아 아니기에 본인에게 공부를 더 하라 한다,

 

(질문 3의 답)

  우선 이에 답을 하기 이전에 공부를 더 하라는등 그것은 이 논제는 아닌 저해성의 비 교양적인 언행이기에 유감을 표시합니다.

그리고 댓글중에서 전탑에 앙각의 사선을 긋고 유독 사선만 빨간색으로 그어진 복사에 대해서 그것을 인정시키고자하면 그 그래픽의 인용 책의 제목부터 서술해야 인정할 수 있는 문건으로 그 인용부를 찍지않은 것은 이 글이 의미의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수 밖에 없습니다.

 

 앙각이라고 빨간선이 혹 싸인펜으로 다시 그렸는지도 모르지만 그 빨간선을 오늘 그렸다해도, 책의 출처가 없어도 다 좋습니다.

학문이란 한 사람이 독창적으로 소유할 수도 없으며 또한 탑의 조형론이란 선학자들도 충분히 생각해 보았슬 것이고 연구도 했슬 아주 쉬운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개념입니다.

 

 

  그러기에 댓글에 게시한 그래픽 탑의 앙각과 옥개석의 곡선에 대한 그래픽은 충분히 공감합니다만, 본인의 조형론에서 구체적 이해의 기본은 이러한 앙각, 옥개석 곡선의 값, 그리고 탑의 모든 사이즈등 제원산출을 기초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댓글의 빨간사선의 앙각이란 그림에서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계통적 학문을 얼마만큼 이루어 나갔으며 이를 탑에 적용하여 얼마만큼 탑을 이해하였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지 단순히 제원산출의 일부분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구조적 조형주의는 아니란 점입니다.

 

  본인으로서는 댓글속의 출처도 모르는 작은 그림 한 장에 앙각의 답을 가리기에는 부적절하지만, 또한 그래픽의 설명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넓게보면 이 그곳엔 이러한 구조주의적 조형론의 체계적 발전은 없었슬 것이라는 점입니다.

 

현재 2017년 기준, 국보로 지정된 남한의 문화재는 315호 국보중 가장 많은 분야는 탑으로 30개의 국보가 있지만 그 탑들에 사이즈등 제원은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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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은 약 10여년 전에 월정사 중창의 허구라는 열 편정도의 글을 쓰기에 1970년에 월정사 8각9층 석탑을 해채 복원당사 기록관 홍사준 선생(부여박물관장 역임)의 탑에 대한 기록은 어떠게 하는 것일까 하는 부분을 공부하기 위해 혹시나 보수공사의 탑의 제원실측 기록을 찾고 싶었으나 아직도 그러한 기록은 보지 못했으며 당 공사의 감독관 정영호(당시 단국대 교수)의 복원공사 리포트와 비슷한 내용의 리포트만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본인의 탑의 조형적 구조주의라는 체계적 학설과 유사한 학문은 아직 발달치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댓글에서 인용게시한 그래픽을 우리는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제원산출에 그치는 한계점을 가지는 것은 아닌가 추론합니다. 이 추론이 댓글에서 인용책을 저자와 출판사를 명시했어야 하는 가본 사항도 망각했기에 이를 찾아보지 못하며 추정으로 그것은 학문으로 대두되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 앙각의 그림이 비체계적이란 이유와 또 하나는 본인은 논문에서 앙각의 지수를 계측하기에 전각탑은 그 자체에 성격상 상층 탑신부 비례는 곡선으로 감아 휘어지기에 앙각의 측정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하였는데 댓글자의 인용 그래픽의 대상체 예시 탑은 바로 전각탑이었습니다.

 

  우리나라 10~20기 정도의 전각탑이나 모전석탑중 경상도의 2기의 오층 전각탑은 앙각의 사선이 휘어지지 않고 직선인, 즉 비례적으로 균형이 완전한 탑도 있지만 댓글에 게시 그래픽의 전각탑은 어느 탑을 샘플로 하였다는 표기도 없이 아마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실기반이 아닌 도형상의 이미테이션 그래픽 아닌가 추론하며 전각탑으로 앙각의 샘플 값을 구한다는 것은 좀 그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모호한 게시가 아니라 정확한 출처를 표기하는등 앙각에 대한 공부를 더 하시기 바랍니다.

 

  그 댓글의 앙각이라 지칭하던 그래픽등 그렇게 공부한다는 점이 어떠한 학설로 대두까지 되었지는 본인으로선 알 수 없지만, 본인처럼 조형적 구조론에 입각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점을 보지는 못했다. 그 하나 예로 태백의 “본적사지 삼층석탑”에서 볼 수 있다.

 

  동 탑은 붕괴되고 일부 부재들이 유실된채 일부 부재만 석탄 박물관에 보존하다가 국립공원화에 의해 삼층으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감상으로는 복원시 새로 만든 부재들이 원래의 사이즈를 찾지 못하여 복원한 탑은 아마도 원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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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적사지 삼층탑에는 3층 탑신석과 2층 옥개석이 유실되어 새로 만들었는데 누가 보아도 제 싸이즈가 아니란 점을 볼 수 있습니다.

3층 탑신석은 2층 탑신석보다 높이가 커서 사가들이 이야기하는 단어중 체감율은 마이너스로 내려간 것이며,, 여기에는 각 부재들의 싸이즈에 대비하여 정확한 분석의 그래픽의 설계도가 없이 그냥 눈으로 보고 대충 조각한 느낌으로 크기가 틀리고 상층 탑신석의 높이가 더 크기에 탑에서 흔히 쓰는 체감율도 이 부분은 마이너스 값을 지니게 만들었다.

 

  하지만 만약 이 탑의 유실된 부재 두 개의 사이즈 값을 구해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벽은 어디를 기준으로 사이즈를 잡아야 하는가 하는 기준점이 문제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함에는 본인의 조형주의 구조론에서는 그것을 임의의 사선에 전각이 물리는 앙각을 기준으로 잡고 있기에 우선 동탑의 앙각은 몇도일까 하는 문제를 파악하는 것으로 지금 잔존하는 부재로는 원래 탑의 앙각을 충분히 궤적하여 유추해 낼 수 있기에 가능하며 그렇치 못할 경우에는 삼층탑의 일반적 앙각의 값인 75~77도 쯤을 대입하여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수항리사지의 탑을 탑의 조형론의 구조적 이론을 창출하고 동 탑의 부재들의 정확한 객관적 데이터를 가지고 이 이론에 대입하는 객관성의 논지로 유실된 부재들의 싸이즈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조형론의 논지에 따라 수다사지 탑 부재의 가상 수치를 알아내듯 태백의 본적사지 삼층석탑도 구조주의적 조형론에 입각하여 새 부재들의 사이즈를 파악하였다면 아마 지금 복원된 모습이 아닌 원래 모습의 원형에 더욱 근접하는 복원을 하였슬 것이다. 논지에 따라 복원하였다면 다른 감상을 표출할 수 있었으리라.

 

  이 탑은 복원후 이미지는 좀 길쭉한 현대적인 큰 키의 모습을 자아내지만 본인의 이론에 입각하여 재원산출의 값을 구하였다면 지금의 시각적 이미지와는 다른 맛으로 작지만 그 원래의 모습으로 온후하고 정감있는 탑의 모습을 표출할 것이란 점입니다.

 

 

  이상으로 탑에 관심있는 분들의 이해를 위한 점검과 기존 학술의 타성의 인식으로 생소한 단어나, 앙각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창조적, 도전적으로 방향으로 탑의 연구를 가하지 못하고, 편향된 자세로 본 논문도 충분한 이해의 노력없이 수구적인 자세로 오류만 잡으려는 문제는 여기서만이 아닌 학계 전반의 타성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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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설명이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이를 토론하는 자세라야하지 위의 질문은 그러한 모습을 찾기 힘들고 학문도 아니며 본인과 감정도 없이 스스로 오류들의 잣대를 가지고 헐뜻기만 한다면 그야 웃음뿐이라.

그러나 본인은 그들의 내용이 반면교사로서 본 논문에 관한 애정으로 보았으며, 본 논문의 다른 시각적 고려등 충분히 살펴보게 되었으며, 이러한 검증으로 본인의 논문의 난제 해결에 이상이 없슴을 점검하게된 계기를 가진 점에 감사를 표하며 논문의 이해력을 위한 이 장을 마칩니다.

 

 

6) 체감율(遞減率)이란 용어의 이해

 

 체감율이란 사전적 의미는 단계적으로 그 비례에 의해 점차적으로 감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탑에 관한 글들에서 채감율이란 단어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를 사용하면 고급문장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필자 본인은 이 단어가 부정확한 단어라고 해석합니다.;

 

 모든 탑의 체감비율의 예는 아래의 도표와 비슷한 비례관계를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서 옥개석 한 부분의 체감율을 보면 1~2층 사이의 체감율이 8,4%, 2~3층 사이는 11,4% , 3~4층 사이는 6,4% . 4~5층 사이는 9,6%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각 층의 체감율 비율은 존재하지만 1에서 5층까지의 하나의 통일된 비례의 체감율은 존재하지 않는다. 체감율 제로의 예를 하나 더 본다면 위 도표에 3층과 4층의 탑신 높이는 동일하게 39cm이다. 그레서 이 부분의 체감율은 0 (제로)를 나타내고 있다.

 아래 도표에서 체감율을 어느 논문에서 인용해 봅니다. 아래 도표에서 볼때 2, 3 ,4층의 높이의 규칙성이 없다. 이것은 본인이 주창하는 탑의 생명선이란? 논리에 부합되지 못하는 즉, 크기의 비례가 정연하지 못하여 임의의 사선(앙각의 연장선)상에 각 층의 전각이 정열되지 못하기에 임의의 사선이 구부러졌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어떤 탑은 체감율이 급격히 감소했다고 말한다면, 기실 감소하는 그 체감율이 비례적이지 못하기에 이에 표현은 부적절하기에 본인은 이 단어는 탑에서 사용하기엔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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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양식계 석탑의 체감비 예(例)

 

1층

2층(체감율)

3층(체감율)

4층(체감율)

5층(체감율)

탑신 高

146,5

46,5(68,3)

39(16,1)

39(0,0)

37(5,1)

탑신 幅

261,5

231,5(11,5)

206,0(11,0)

179,5(12,9)

146,5(18,4)

옥개 幅

495,5

421,6(8,4)

373(11,4)

349(6,4)

315,5(9,6)

<한국 석탑의 백제양식에 관한 연구. 왕궁리 탑> 14)

 

 

 그러기에 탑을 감상하며 채감율이란 단어를 사용함에는 주관적 감흥을 나타내는 단어로 무리는 언 이 체감율이란 단어는 위에서 본바와 같이 객관적 서술의 단어는 아니란 점인데, 이를 앙각으로 구체화 시킨다면 앙각 몇도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에의해 수다사지 탑의 분실되어 알 수 없는 3층 탑신석과 3층 옥개석또한 2층 탑신적의 가상적 사이즈를 구할 수 있지만 체감율은 주관적인 단어이기에 다른 응용이나 이해가치가 없다. 이로서 제원산출이나 탑의 감상이 아닌 탑의 원론에서는 절대적으로 앙각의 값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앙각에 의한 보편율의 탑의 앙각 값의 조성원리를 부록으로 첨부합니다.

 

7) 고려탑에서 부연의 의미??

 

 부연의 사전적 의미는 아마도 부연착고(附椽着固), 부연과 부연(서까래) 사이를 막아서 끼는 판판한 널조각이란 뜻에서 그 의미를 따온듯 하다, 그러므로 탑에서 부연이란 각 부재와 부재 사이에 끼워넣은 얇은 널 조각이란 뜻으로 이 기능은 자리맞춤 돌기라고 이해해야할 듯하다.

 

 

 탑의 조성방법론에서 신라 정형탑이 고려로 넘어오며 변형을 가하고 있지만 , 여기서 이형탑이라는 다층탑이든 삼층탑이든 모든 고려탑은 옥개석 받침의 층급이 신라의 5개에서 4개 또는 3개로 변형되며 옥개석이 반전되어 위로 올라가지만 옥개석 절단면도 수직에서 차츰 사선으로 옮겨감도 볼 수 있으며, 일부 사가들의 기록엔 고려 탑에서는 부연이 생략되는등 마치 고려탑은 규칙이 없으며 방만한 태도라고 느낄 수 있지만 본인은 이러한 방만한 작태로 치부하는 것은 고려탑의 위상을 흩트리는 위험한 생각이란 점으로 해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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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정주성 "한국 석탑의 백제양식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건축학 대학원 1989 p58 표 3.

이 도표는 19개 탑의 도표중 3번째인 "왕궁리" 탑의 예만 인용하여 별도 작성한 것임. 위 논문은 그래도 실험적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본 논문 p58의 실측자료의 도표중 하나의 탑의 수치를 인용해본 것입니다. 이러한 부연이 신라시대엔 탑의 양식구현에 정확하게 표출되고 또한 때에 따라서는 부연의 높이가 3cm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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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령 서양미술의 변천사에서 자연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등의 사조(ism)의 변천과정은 시대사적인 변화이지만 바로 바로 바뀐 것은 아닙니다. 이렇듯이 고려시대라고 신라의 정형탑이 고려 양식으로 바로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서 신라시대의 표현양식이 충만하고 보다 더 많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양식적인 부분의 변화가 차츰 전개되면서 돌아보면 고려탑으로 지칭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라시대 탑 양식에서 엄격한 구조로 각 부재에 반드시 부연도 조출되지만 모든개 그러하듯 규율적 양식도 시간이 흐를수록 선택적 사용으로 서양 미술사의 변천에서 보듯 한 사조가 영원치 못한점은 더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에게 다가서고저하는, 인간의 욕구에 따른 사고적 변환에 기존 양식의 질서는 변경되고 수정되어 더 발전적이고 더욱 인간의 사고의 변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려 탑에서는 부연이 있고 어느곳엔 없고하는 마음대로인듯 하지만, 그것은 더 확대되는 욕구에 대한 양식적 변용의 다양화란 점으로 시대의 변화에따른 발전성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란 점입니다.

 

  신라탑에서 형식에 맞추는 부연이 높이가 3cm짜리도 있는데 이는 멀리서 보면 탐에 가로의 종선을 긋는 지저분함으로도 느낄 수 있다. 그러기에 고려 양식에서는 부연이 생략되기도 하며 탑마다 제각각으로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도 있긴 하지만 필요한 부분엔 부연이 정확하게 존재한다.

 

  그 예시를 하나 든다면, 기단부 받침석이나 갑석의 상면의 경사면의 폭이 빗물받이용으로 넓게 뻗어나오고 이때에 상대 부재와 맞물리는 위치는 안쪽으로 때로는 10여 cm들어가 있으며 여기에는 그 위치 값, 즉 부연이 맞닿는 반대쪽 부재의 부연의 자리가 정확하게 표식되어 있다.

 

  이렇듯 고려 문화는 신라의 형식미보다는 필요치 않는 부분의 분연은 하나라도 삭제시켜 내적 충실미로 본 수다사지 탑에서 약식처리가 되는 노반과 복발은 얇고 납작하여 감은사 탑이 도도함을 느낀다면 수다사지 탑은 온후한 정감을 자아내도록 노력한 것이라 봅니다.

 

 

8) 바닥의 놓여있는 옥개석과 탑신석 부재에 관한 문제

 

수다사지 탑에서 바닥에 놓여진 옥개석과 탑신석 한 점씩의 문제는 물론 그 사이즈 값으로 현 탑의 3층에 올려보면 옥개석의 앙각의 값이 틀려짐을 볼 수 있기에 사이값 치수로만도 타 탑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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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에 이것이 명시되어 있기도 하지만 나의 답사기준이라는 글에 이러한 점을 다시 개진하니 그럼 2층 옥개석이고 그 구멍은 사리공 아닌가 추정한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늘상 주관적 견해로 이치 작용을 파악하려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탑의 각 부분의 치수를 밝히고 어떤 부재가 그 데이타 값에 만족해야하는 객관화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고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탑신석의 높이가 문제이지만 탑신석의 가로, 세로 비율이 현 수다사지 탑 탑신석과 맞지 않는 비율값을 가지기 때문이고 옥개석 또한 그러기에 이는 다른탑의 부재임은 확실한 답이다.

 

  그러기에 위의 바닥의 옥개석의 싸이즈를 현 2층 옥개석과 비교해보면 그 값으로는 이층 옥개석이 아니란 점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객관화를 취하지 못한 예란 점이며 이러한 문제가 비일비재한 것이란 점입니다.

 

  본 논문에 적힌 사이즈 값으로도 타 부재임이 증명되는데 위 질문에서 3층 옥개석으로 확신한다는 질문자는 무슨 생각인지 본인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등 열가지 문의가 모두 그러하여 답을 금하니 삭제나 하시오 했더니 본인이 이 논문이 수상 취소를 건의하겠다 또 다른 사람은 심사위원이 누구냐고 묻길래 그것은 본인의 관점 밖이니 집적 알아서 하라고 답하는등 지나고 나서도 아무리 화해하였다하지만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탑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감정 자체도 비 논리적이기에 탑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듯 하다.

 

  참으로 비 합리적인, 있슬 수도 없는 생각들만 난무하는 장이었던 생각이지만 지금 탑의 전반적 견해는 대부분이 이런 식견없는 우려속에서 병들고 있다는 느낌도 가진다.

 

 

9) 탑의 구조적 조형론이란??

 

 탑의 연구를 계통학적으로 구분해 볼때 크게 미술사, 고고학, 역사학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학문이 연결된 고리를 가지고 조성 시기와 조성 주체, 조성의 배경과 도상적 의미를 찾고자 연구하는 것이라면 지극히 당연하게 조형적 논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탑의 연구서들은 미학자들에 의해서 많은 연구 성과를 이루었으나 수항리사지 탑에서 보는 바와같이 3개의 연구 보고서에서 본 사지 탑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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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도상적 연구의 조형적 구조론이란 점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본인은 315호의 국보15)중가장 많은 부분이 탑으로서 30개의 탑이 국보로 등재되어 있는데, 본 수다사지 탑의 예에서처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미비된 분야로 남아있다

 

  탑은 망가지고 떨어져 고장이 났는데 이에 원형이 무엇인지 역사적 소명을 함에는 우선 수선을 하는 원리적 방법의 모색이 일차적일텐데 지금의 학문적 치중의 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원리의 연구는 없이 역사적 사실들을 유추하여 목록의 작성이나, 팔부중상의 인덱스나 고, 정영호 선생의 논리중의 하나인 전국적 분포등이나 안상등이 조식된 장엄석탑의 동 년대등이나 사방불의 감실이 있냐 없냐는 논고등 역사적 단위만 소명하였지 기울어지고 고장난 부재나 빗물이 새는 탑의 알맞은 수선적 방법은 뒤로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도형적 구조의 조형론은 전무한듯 하다.

 

  또 하나의 관점은, 큰 서점에 무수히 많은 책들 가운데 탑의 이론서의 종류는 한, 두권 뿐이고, 다만 일반인이 구할 수 도 없는 학점취득을 위한 학사, 논문에 탑파에 대한 논리는 그 연구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미약하여, 이로서 국보중 가장 많은 탑의 위상을 다하기엔 역부족이란 점이다.

 

  본인이 주창하는 조형론은 몇 가지 사안의 탑의 재원산출이 정확해야 하는데...일층짜리 건물 한 채도 구청에 설계도에 크기및 모양새가 다 기록되어 인허가를 내야 하지만 국보인 탑은 그런 사이즈 기록이 없다.

  이러한 탑의 재원기록이 왜 중요한가 하는 것은 박경식의 세미나 리포트에서 3점의 부재가 의심이라며 맨 위의 별석받침의 탑신부 중요성도 이야기 하는 상황논리끝에서 위 사진에서보듯 별석 받침이 다른 기단석 부재보다 현저히 작기에 이를 빼내어야 한다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이 3점의 부재와 탑의 각 부분 사이즈를 실측한 도표에 의해 그가 주장하는 별석받침의 부연은 위와 아래의 부재에 사이즈가 맞게 물린점을 알 수 있으며 가운데 부재가 일반적 명칭으로 상층 탑신석의 받침석이란 증거를 사이즈의 맞물림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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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국보는 315호까지 있으며 국보는 411개가 있다.

아는 새로운 국보재정에 의한 것으로, 예를 들어 종전의 국보 제 48호는 월정사 8각9층 석탑이었는데 이제는 석탑의 보살상까지 포함하여 국보 제 48-1호는 8각9층 석탑이고 국보 제 48-2호는 8각9층석탑 석조 보살상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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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탑의 구체적인 실 사이즈의 재원이 있으면 주관적인 견해와는 엄청난 결과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기에 오차가 없는 객관적 증거로 답을 가려야 하는 것이다. 탑은 국보의 위상에 맞는 이러한 세부적 데이타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찾아볼 수도 없다. 그저 위에서 예시한 체감율처럼 어림짐작의 주관적 느낌으로 일관되어 온 듯 하다.

 

 또 하나의 이야기로서, 여기서 일반론으로 고려시대엔 탑의 부연이 들죽날죽 생략되기도 하는 비 논리적이란 표현에 부당성은 다음 (부연의 장)에서 거론할 것이지만, 탑의 실측이란 문제는 개인으로서는 한계가 있기에 과거 10여년전 본인은 월정사 중창론이 허구라는 일련의 게시글을 쓸때에,‘70년에 월정사 8각9층 탑의 해체 복원의 보수공사시 감독관인 정영호 당시 단국대 교수나 실측 기록관인 홍사준(후일 부여 박물관장)의 기록에서 탑의 실측 기록은 어떻게 작성하는 것일까 찾아보려 하였지만 그러한 탑의 자세한제원의 실측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고 동 탑 보수에 관한 리포트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딱 한권의 석사논문에서 약 20여 기의 백제 초기탑에 실측 사이즈를 싣고 있다. 또한 이 논문은 백제 양식계 석탑의 변천과정과 조형적, 구조적 특성을 체계적으로 고찰해보고 구성요소 상호간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한국석탑에 있어서 백제계 양식의 원리적 원리의 시도를 삼고자 한다라고 쓰고 있다16)

 

 이 책에서 20여기의 탑의 실측자료와 그 분석에 앙각은 80도에서 2, 3의 수치를 더하고 있다라고만 어렴풋한 실측자료로서는 탑의 조형적 구조적 작용을 이해하기는 어렵고 본 논문의 그러한 구조적 원리의 이해에 단순한 단어적 서술뿐 이 논문도 백제계 양식의 흐름을 뒤쫒고 있는 기타 다른 논문집처럼 탑의 변화등 역사적 고증만을 하고 있슬 뿐이다.

 

 주 14)의 도표에서 볼때 2, 3 ,4층의 높이의 규칙성이 없다. 이것은 본인이 주창하는 탑의 생명선이란? 논리에 부합되지 못하는 즉, 크기의 비례가 질서정연하지 못하여 임의의 사선(앙각의 연장선)상에 각 층의 전각이 사선의 직선으로 정열되지 못했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수항리사지 탑에서 두 개의 옥개석으로 그것이 상층것인가 2층 것인가 하는 문제를 파악해 볼 수 있으며 분실된 옥개석을 앙각의 연장 사선에 꼭지점을 찍어서 유추하여 그 사이즈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도표에서 체감비율은 환산으로 나탄낼 수 있는 수치이지만 이를 이용할 수 있는 효용가치는 없는 것이다. 단 여기서 1층 탑신석의 사이즈가 2층보다 배 이상이 높게 (위 도표에서 68,3%의 체감율로) 책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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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6) ; 주14)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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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1,200여기의 석탑은 우리 고유의 탑으로서 그 모양새는 모두 비슷한 기단석과 1층 탑신석이 크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도 아래에 하나의 장으로 추론할 것입니다.

 

이에 본인은 본 논문과 그에 연하는 논문해제의 장에 수항리사지 탑의 의문을 해결하며 나아가서 현제 옥개석은 두 개만 남아있는 본 탑의 원형을찾는 가설까지 논고하며, 탑의 조형적 구조론의 새로운 학설을 제시합니다.

 

 

Ⅱ. 수다사지에는 당간이 있었는가??

 

  수다사지에 당간지주 기록은 1) 수항리 사지(수다사지)의 석탑은 3층탑인가?에서 밝힌 바와 같이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p555에서 삼층석탑과 3구의 석불과 당간지주가 있다하는 기록이 있지만, 그 기록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간다.

 

  또한, 지난 2013년 평창군이 주관한 "수다사 활용방안"의 리포트에 기록되있는 주제발표Ⅱ의 "평창 수다사지 삼층석탑 및 석조유물" (단국대 사학과 교수 박경식)는 수항초교롤 옮겨진 장대석은 당간지주의 난간석 아라하며 리포트와 6장에서는‘83년 신종원 교수가 먼저 난간석이라 하였다.

 

 아마도 당간지주의 난간석이 아닌 당간 자체의 난간석으로 표기함이 더 좋을 듯하지만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당간지주에 난간석을 조출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당간에서 당간의 난간석이라는 양식은 어디에도 한 곳도 없었다.

 

 

  

 

(익산사지 당간지주)                (탑위쪽 법전이 있던 부분의 부재들이 보이는 “82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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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사진에서 보는 익산사지의 당간지주는 통석으로 바닥이 덮혀 있는데 당간에 이러한 통석이 있는 당간지주는 약 5~6개 정도가 보인다.

  또한 위의 오른편 사진엔 불전의 위치에 장대석이 두점 보이며 큰 장대석은 탑전과 수평을 이루는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법당의 난간석으로 제 위치 였는지도 의문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현 수항초교로 옮겨진 장대석으로 수항초교에 3점과 수항초교 건물현관 계단용의 3~4점은 현재 그 아래 묻고 다시 공사를 하였고 탑아래 1점과 뚝방에서도 보인다.

 

 

 

 

 

 

(수항초교에 방치상태인 부재)        (뚝방에 방치된 부재)                    (탑 아래에 있는 부재)

 

 

  이러한 장대석은 리포트에서는 한 가지 싸이즈(가로, 세로의 폭)라고 하였지만 두가지 이상의 크기로 나타나고 정작 당간지주는 왜 없슬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당간지주는 크기가 큰 것으로는 아마 강릉의 수문리 당간지주가 있지만 작은 것으로는 앞에 1m넘짓한 당간지주를 볼 수 있다, 

 1m 당간지주라도 뿌리까지는 최소 1,5m 정도 일텐데 이러한 약 1,5톤 이상의 당간지주는 있었어야 할텐데 어느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수다사지에 당간이 있었다면 그 위치는 어디였슬까??

수다사지는 지리적으로 수항천이 분리시켜 마을에서 개천을 건너 두타산쪽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을 들어가자면 어디로든 수항천을 건너야 하며 이곳의 입구는 현재는 다리가 놓여진 동남쪽이라 한다. 그러면 현 탑의 10m 뒤의 불전까지 사이에 당간은 세워지고 당간지주의 석물은 존재하든 아니면 흔적이 있었어야 할텐데 아무곳에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곳이 사유지라 지금을 경작을 위해 부재들의 잔흔은 버려졌다면 최소한 ‘80년대 방문자들의 답사기록엔 당간지주의 기록은 있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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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이 없이 1층 탑신석까지만 올려진 사진)              (현재도 주변애는 많은 와편이 딩굴고 있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 동 탑은 "79년 도괴되어 밀반출되다 다시 갔다 놓은 것으로 '82년 답사한 신종원 교수는 동 탑에는 언급이 없었으나 우측의 사진은‘82년쯤의 어느 사진으로 1층 탑신석까지 올려지고 옥개석이 없는 사진이 보인다.

 

 

 

 

(원주 법천사 불전의 난간석)                                      ( 현 수항초교에 있는 부재애 안상석 조식)

 

 많은 석재, 와편 잔해들이 나딩구는 수다사지에 유독 그 무거운 당간이 있었다면 어디로 갔슬까?? 하지만 본인은 이러한 많은 석재와편들은 두가지 이상의 타입으로 아래에서 보는 원주 법천사의 법당 난간석과 같은 난간석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 수항리 일대의 석재 잔해들

  월정사 8각9층 석탑은 화강암에 철 성분이 함유되어서 산화되어 미색의 석재들을 볼 수 있지만 수다사지 석탑의 화강암은 불순물이 끼이지 않는 양질의 석재입니다.

  그리고 수다사지로 들어가는 수항리 삼거리의 마을회관 뒤편 뜨락에는 위 사진의 좌측의 석재들과 같은 파편 조각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며 건너편 민가 앞에는 위 사진의 우측의 석재를 볼 수 있다. 이 석재는 채석장에서 뜬 돌로 보이며 크기는 1×2×0.7m정도의 약 3톤정도로 채석한 인공의 흔적이 보이는 원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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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항리 노인회관 뜨락의 석재 잔해들)                       (노인회관 건너 민가앞마당의 1차 가공된 석재)

 

  이 지역은 교통에 거리가 멀어서 과거에 채석산업이 발달한 흔적은 없다면 이러한 파편 석재들은 왜 있는 것일까?? 여기에 해답이 수다사지 석탑과 불전, 당우등에 필요한 석재를 가까운 산지에서 채석하여 수항천을 건너기 전에 이곳에서 석재를 다듬어 수항천을 건넌듯 하다면 채석의 산지는 사지 뒷편의 두타산이기 보다는 앞쪽의 산일듯 싶고 수다사지 탑은 리포트에서 거론되는 하나의 면석도 가능한데 여러장이라는 점의 이해에서 석공은 한명이라도 가능하지만 석재의 운반에는 수 톤의 석재는 말이나 노새가 동시에 몇 마리 필요한점등에서 멀리 오지의 조그마한 암자에서 이러한 품의 부족현상으로 여러개의 나비장으로 이은듯 싶다.

 

 

  또한 아래 우측의 너럭반석은 수항리 어느 민가의 야외 탁자용 판석으로 이러한 수성암의 일종인 판석이 수다사지 탑 지반석으로 자연석으로 쇠시리의 평탄 작업을 한 흔적을 볼 수 있으며 밭주인의 말에 의하면 이 지점에서 서북방 70여m에는 밭일을 할 때 열명이 둘러 앉아서 식사를 했다는 규모가 큰 고인돌이 있었으나 어느날 도괴되었다 하는데 고인돌의 석재도 이러한 자연석의 일종이 아닌가 추론해 봅니다.

 

 

  

 

(수항리 민가의 야외 탁자돌)                                 (수자사지 탑의 저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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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수다사지에 존재했던 석불 3구의 이해

 

1) 수다사지의 석불 3기와 논산 개타사지의 석불 3기의 동일성은?

 

  고적도보에 본 사지에는 3점의 석불이 존재하였는데 3기의 불상. (大) 입상 2척5촌,

(중) 입상 2척2촌, (小) 좌상 고1척9촌이 지금은 없어졌으나 본문의 증언자 정원대님의 17.10.11일자 기록에는 수항리 김종근옹(86)진부공립국민학교 수항간이학교 12살에(2년제)입학을 하고 수다사 앞 강에서 친구들과 물놀이 하면서 수다사 탑 앞에 석조좌상 2구와 입상1개가 있었고 목과 손이 부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6,25동란 휴전무렵 군인들이 큰절에 가지고 간다며 석불을 가지고 갔다고 하는 채록 기록분은 논산 개타사지의 석불상처럼 보살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수다사지 3구의 석불은 이미 없어저 그에 관한 연구는 가능한 것이 아니란 점이나 그래도 본인은 이번 여름 2차 답사시 주 목적은 물론 지금으로선 그 어떤 물증이 확보되지않는한 증언으로서만은 확증을 가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위 증언자 김종근 옹이나 또한 6,25이후 도괴될때까지 이 석불을 보아온 주민들에게 이 석불에 관한 이야기를 한점이라도 캐치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면 우선 논산 개타사지의 석조 보살상을 논고해 봅니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한 전승기념으로 세웠다는 개타사는 새로운 통일왕조를 알리는 상징적인 장소로 왕건은 이곳에 국찰(國刹)을 세우고 새로운 고려의 문화양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남아있는 장소라 한다.

 

 

  

 

(개타사지의 석조 보살상 3기)                                       (개타사지 보살상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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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타사에는 석조 3존불 입상, 오층석탑, 철확(가마솥)이 있지만 좌 협시와 우 협시 보살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보살상이라 한다

아마도 수다사지의 석불 3기는 입상과 좌상에 목과 팔이 부러지는 형태이지만 이것이 3존불이라 하기엔 각 개별 불상들의 차이에 혹 입상은 개타사지 좌, 우협시의 보살상과 비슷한 우슬착지형의 공양상 아닌가 하는 점에관해서 추론을 해 봅니다.

 

2) 고려의 문화양식은 고구려의 복고풍인가?

 

  이 장에서 월정사 탑을 논고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고려의 8각 다층탑이 고구려 복고풍이란 점에서 고려 불교 문화양식은 그러한 잘못된 논리의 그늘에 가려져 있기에 역사에서 이 부분의 새로운 정립이 먼저 선행되어야 고려 불교문화나 고려 탑의 생명력이 살아나기에 이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월정사 8각9층탑은 신라 정형탑들의 우수성을 넘어 사방불 표현의 4면각형을 넘어서서 사각탑의 강인함을 뒤로하고 팔각으로 온후함속에 장엄함을 드리우며 상륜부의 원형의 장식의 청동기 둥근 조각형은 밀교인 라마의 영향권을 받는 것이지만 이를 수많은 논문중에 대가들의 고구려 복고풍이라는 권위에 눌렸는지 밀교적 문화권의 수용이란 글은 단 한줄도 없는듯 하다.

 

  학문은 남을 쉽게 반박하여서도 안되겠지만 또한 남의 지배론적 영향권의 구태는 벗어나야 정의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가들이 월정사 8각9층 석탑은 고구려 복고풍이란 발표에 너무도 제한적 금기를 가져온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1,200여기의 탑의 조성의 가장 번성한 중흥기에 탑의 조성의 완숙미를 자아내며 또한 탑 그 자체 하나의 보살상을 위시하여 불교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는 우리 탑 문화양식의 결정체임에 두말의 여지가 없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월정사 8각9층 석탑에 찬미를 보내는 글은 단 한점도 없었다.

 

  탑은 역사적 고증으로만 끝날뿐인가?? 수항리사지 답사객들은 본 사찰의 가치관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많은 학자들의 다각 다층석탑의 연구에서 특히‘70년 월정사탑 해체 복원’당시 감독관인 故정영호(당시 단국대 교수)는 해체복원 레포트에서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은 이방형으로 고구려 탑의 복고형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이 점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논제의 재고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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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홍대한의 논문에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조탑배경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그는 팔각의 양식적 계보를 서술합니다17)

 

아래에 인용한 17)에서 홍대한은 10세기초라는 제작연대 추정은 지난 2년전 조계종에서는 12세기라 발표하였습니다

.

  여기에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은 2002년에 대한불교 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단장 정각 스님. 총무원 문화부장)은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의뢰로 최근 2개월 동안 사찰석조보살좌상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11세기에 주조된 동전인 숭녕중보(崇寧重寶. 1102-1106년 주조)와 성송원보(聖宋元寶)가 9층 석탑 지표면보다도 아래 층위에서 출토됨으로써 10세기대로 추정돼왔던 이 탑의 조성연대는 12세기 이후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며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24일 밝혔다.

 

  당시 이러한 뉴스에 본인은 이 뉴스의 조성연대가 맞을 것이란 기억에. 그것은 세계 모든 역사를 보아도 한 국가가 탄생하며 필연적으로 새로운 문화에 도전하지만 이것이 10세기 초라면 고려 건국과 맞물려 양식이 확 바끼는, 문화는 마치 공장의 레디메이드 제품처럼 바로 자기 스타일을 구가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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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한 이해로 우리가 잘 아는 피카소의 입체파는 피카소 자신이 바로 만든것이 아니라 이러한 큐비즘에는 세잔등 여러 사람의 당시의 경향에 대한 반발과 이로 이어져서 큐비즘이 완성되는 것이며 피카소도 바로 입체파의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라 청색시대, 황색시대를 거치며 장고의 시간속에 무수한 노력으로 입체파는 완성되듯이 모든게 흥망성쇠가 있듯이 한 국가의 문화적 칼라도 시대를 지나며 무수한 노력과 시행착오속에 완성될진데 고려 건국시인 10세기라함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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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월정사석탑에 대한 기존 연구는 팔각평면과 多層, 異形石塔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신라석탑의 발전론을 기준으로 월정사석탑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며, 고려 초 고구려 舊土를 중심으로 유행한 팔각다층석탑의 연장선상에 월정사석탑을 위치시켰던 것 역시 월정사석탑을 이해하는데 장애요인이었다.월정사석탑은 고구려계 석탑양식을 바탕으로 부분적으로 새로운 조탑 기술이 반영되기 시작하는 10세기 말 제작으로 추정된다.

 

  월정사석탑에 대한 기존 연구는 팔각평면과 多層, 異形石塔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신라석탑의 발전론을 기준으로 월정사석탑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며, 고려 초 고구려 舊土를 중심으로 유행한 팔각다층석탑의 연장선상에 월정사석탑을 위치시켰던 것 역시 월정사석탑을 이해하는데 장애요인이었다. 월정사석탑은 고구려계 석탑양식을 바탕으로 부분적으로 새로운 조탑 기술이 반영되기 시작하는 10세기 말 제작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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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국가의 사회는 안정되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러한 새 시대 새 문화의 긴장의 완화속에 새로운 문명이 탄생되며 새로운 문화가 축약적으로 표현되는것이기에 본인으로서는 사학자들의 탑의 여러 요소들에 기인하여 조성 시간대를 예측하며 이로서 월정사 8각9층 석탑이 고려 건국초인 10세기 초라는 학계의 동향은 어딘가 무리수를 띤다는 생각이었다.

 

 고려 초의 불교는 왕실 권위의 결속과 보호라는 미명하의 대각국사 의천의 교종이 정치적으로 성행되었으나 이러한 교관겸수의 고려의 불교국가는 안정적 시기를 거치며 선종으로 바뀌고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와 정혜쌍수의 평민 교화론적의 불국토 사상으로 바뀌며 불교 문화는 완숙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불교 사상이 성철스님의 돈오돈수 주창까지 천여년 이땅의 대중 불교에 공헌한 점이다. 이렇듯 한 문명은 새 국가가 탄생하며 시작하지만 그에 결정판인, 즉 고려시대에 문화 융성기는 월정사 8각9층 탑으로 볼때 이러한 고려의 완성되고 성숙된 고려 이형 다층탑이 고려초기에 바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정사 탑의 보수 공사시 탑의 지반 아래층에서 송나라의 엽전이 출토된점, 이것이 노역자가 흘린것이 아니라 당시 유력자들이 탑의 축조를 기원하는 바람의 보시는 아니었슬까?? 아뭏튼 여기서 12세기란 점과 송나라와의 교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점에도 홍대한의 위 논문은 기실 약 10여년전 e-북에서 산 것인데 논문 발표 년도를 알 수 없지만 논문속의 인용부에는 2011년이 기재되었기에 2012년 발표분인듯한 논문에서 조계종의 이러한 사실은 전혀 무관하게 종전의 일반적인 학계의 의견대로 10세기 초에 팔각구층 석탑이 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논문에서는 최소한 조계종의 발표분은 어떠한 사유로 인정치 못한다는 멘트는 있었어야 타당성을 가진 논문으로, 그러기에 본인은 이 논문은 탐탁스레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팔각탑이 송나라 수입문화라면 전국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인데 고구려 구토 중심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면 동 시기에 8각탑과 같이 나타나는 6각탑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입니까? 그러기에 이 답은 진부분 집합의 모순을 가지는 점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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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어느 학생의 책에 당시 강의를 요약 메모한 글에 보면 신라탑, 백제탑, 고구려 탑의 구분에 도피안사의 탑은 백제게이지만 경기와 중부지역에는 신라 탑이 한 기도 없다고 필기되어 있다. 그러나 쉽게 본 수다사지 삼층 석탑은 조성시기가 고려때이지만 완벽한 고려양식인가 하는 점이다.

 

 

또한 조형적 복잡함을 가지는 명주의 신복사지 탑은 그 복잡성의 원인이 각 층마다 탑신석의 받침석을 마련했기 때문이며 이는 탑에대한 경외심의 발로인듯 하지만 각층의 탑신 받침석 3매를 빼면 사각 삼층탑으로 옥개석의 층급은 4층으로 고려양식이지만 큰 범위에서 본다면 사각 삼층은 신라양식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팔각은 고구려 목조탑의 복고풍이라면 6각 탑은 창작이라 설명할 수 밖에 없겠으며, 고려의 다각 다층의 여려 모양의 탑이 나타날까 하는 현상에는 지방 호족들의 출현이란 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사가들의 기행문엔 8각탑이 다섯개밖에 없다하지만, 위에 인용한 다다시의 고적도보 유리건판 사진에는의외로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점도 다시 연구해야할 대상인듯 합니다.

 

  그러기에 고려초 지방호족들의 등장 배경과 고려가 신라에 이어 다시 삼국통일을 하게되는 역사적 배경과 이 부분에서 신라 하대(선덕여왕~경순왕까지 156년간)의 왕권을 위한 암투와 이에 따른 제반 역사를 이해하여야 하며 또한 고려태조 왕건은 삼국 통일의 높은 위상을 갖추기위한 노력중에 새로운 시대를 향하는 시대구현에 고구려 복고풍의 답습이란 새 시대에 의지에 반영될 수 없는 구태란 점의 이해와 고려조 지방 호족의 등장이란 원인과 그 배경은 무엇인가 하는 역사적 고찰에 신라 하대의 정치상황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좋을듯 합니다.

 

 

  여기에서 또한 고려초의 롤 모델이 되는 송나라는 무엇이 고려 통일왕조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송나라의 문화사의 이해하기 위한 본인이 게시할 글들은 우리나라 어느 역사책에도 만족할만한 글들이 없습니다.

이 장에서 게제할 송나라 역사는 본인이 서술하는 역사의 관점이기에 일반적으로 그 내용들이 일반 역사서나 인터넷 검색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송나라 문화사의 본인의 글은 좀 길어질 것이며 이러한 송나라 문화사를 이해하여야 고려의 건국초의 지방 호족과 중앙정부 지도층의 액션의 방향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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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3가지 부분의 고려초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여야 하며 이에 따라 고려 초 강원도 산골 산자락 깊숙한 수항리에서 고려초의 새로운 역사의 발판에 공유되는 그 무엇이 있었슬까 하는 이야기까지 마치면서 수다사라는 옛날의 조그마한 절의 이야기들을 풀어 보겠습니다.

 

 

  아마도 다각다층의 이형탑인 고려탑의 대가이신 고, 정영호 선생의 업적을 탄(歎)하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분은 미술 사학자로 출발하여 사학에서 영춘의 온달산성 발굴로 고구려 영토의 남하점에 중원 문화권의 신라만이 아닌 고구려 영토였슴을 찾아내는등 탁월하신 업적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분은 최소한 월정사 팔각탑의 팔각은 북방형이고 고구려 목조 팔각탑의 계승이라 하는 리포트에 견주어 본인은 이에 반하여 10여년전 멘트에서도 다른 견해로 이는 송나라 선진문화라 하였습니다.

 

 

  물론 팔각탑이 송나라의 영향이라면 전국적 분포를 가져야 한다는 홍대한의 논문에서 서술도 있지만, 2년전 경찰 임용고시 기출문제에 다음중 올바른 답을 고르시오 라는 선택형 문제의 정답은 월정사 8각9층 탑은 송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항목이 정답이었습니다.

 

  그러면 문화권은 송의 영향이고 주14)의 논문에서 기록하는바 송대의 팔각탑등의 모델탑들이 없었다 하는데 그럼 고구려 팔각탑은 독창적이었다는 이해의 의문처럼 송나라 시대에팔각에 의미가 상당히 유행하던만큼 고려탑도 선자의 고구려 탑의 팔각은 있기는 하지만 고려탑도 독창적인 팔각을 추구할수는 없었슬까 의문도 해 봅니다.

 

 

  이렇듯 하나의 역사의 규정적 서술에는 주변의 역사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시 고려 개국에 왕건은 이 땅에 통일 신라이후 재통일하였다는 의미의 부각은 마치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나 진시황의 중국천하를 통일하였다는 새로운 제국의 문화 창건에 도전이었듯이 고려의 삼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달성하였는데 고구려풍의 복고로 돌아간다는 이미지는 통일이란 과업의 장대한 드라마에 목표점이 아닐것이란 점으로, 어디까지나 어떠한 역사도 미래를 위한 미래 도전이며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 이상주의적 정치를 펼치고자 함이 지배자의 속성이란 점에서 고려는 지방 호족들의 지지속에 당시 주철양산의 송나라의 선진문명을 수급함으로써 지배계급의 차별적 권위로 삼았던 것으로 이 철기 양산(量産)의 송나라 선진 문명과 문화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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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초 지방 호족세력이란 무슨 의미일까??

 

 고려시대의 탑을 이해하기엔 지방 호족세력들에 의한 다각다층의 이형탑이 등장하는데 이에대한 부제적인 설명은 찾아볼 수 없기에 역사를 그냥 외우는 식의 되어 버려서 지방 호족세력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히는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고려의 개국에 역사적 배경으로서 지방 호족세력을 이해하여야 함에 우선 이에대한 호족세력이란 역사에 본인의 이해부터 피력하겠습니다.

 

 

 고려시대 초에 지방호족세력의 등장은 신라 하대의 정치적 모순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신라 중대 초 선덕여왕시절 외세의 압력과 여왕이란 비난속에 젊은 자장율사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중국에서 돌아와“大國統”으로 호국불교를 위해 거대한 황룔사 9층 목탑을 건립하며 정치적 안정을 모색합니다만 이 선덕여왕부터 이후 성골이 끝나고 진골의 왕위 찬탈의 불안정스런 정치 위기속에 신라 하대는 정치적 혼란기에 빠지며 골두품의 호족들간의 왕권다툼의 분열이 일어나게 되며 이로서 국권의 분열과 국력이 소모되자 각 지방의 혼란스런 반란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백성들은 세금을 거두어 조정 금성(경주)로 보내면 신라 중앙정치의 다툼에 의해 국력만 소모되고 돌아오는 혜택이 없이 모든 지방이 비폐해지자 이에 대한 원성이 높아가게 되는데, 진성여왕 시절 국고가 바닥이나자 각 지방으로 관리를 보내 세금을 독촉하게되자 이를 계기로 전국에 초적(草賊)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초적들은 전국적 군웅할거 시대처럼 반 신라의 앞장을 서며 신라의 통제력은 점점더 상실되어 갑니다.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 : 상주)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킨 뒤 도적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신라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무리들 중 죽주(竹州 : 안성시 죽산)의 기훤(箕萱)과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이 주요 세력이었습니다. 

 

   궁예가 기휜에서 양길쪽으로 투항하자 양길은 세력이 확대되었지만. 이땅에 진정한 통일의 주역은 한평생을 노력한 견휜이나 궁예가 되어야 할 듯 하지만. 궁예는 철원평야의 경제적 기반의 좋은 여건을 갖고 있으며 또한 강원도일대의 이곳 평창까지도 다녀가며 영토를 다져나갔지만 대외적인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로 그의 대망의 뜻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견휜은 신라땅인 대가야(합천)을 쳐들어갔는데 내친김에 서라벌까지 쳐들어가 경애왕과 왕비도 유린하는등 수탈을 자행하다 돌아갔다. 이렇게 부도덕하고 잔인한 견휜은 진정 통일의 의지가 없었던 듯하다.

 

  이후 궁예 휘하의 개성의 왕건은 군사 5천명으로 신라를 공략합니다. 당시 왕건은 휘하 병사들에게 이 전투에 나가기에 신라의 마을의 횡포는 물론 민간인의 곡식 한 톨이라도 수탈하는 자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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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란 과정은 중요치 않으며 오직 목적인 승리만이 있어야 하는 상식률을 깬 세계역사이래 전투에 나아가는 사병에게 이러한 명령은 처음인듯 합니다만 이 전투를 다시 본다면 왕건은 전투에서도 정의와 선의를 먼저 지향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 신라는 5천명의 적은 숫자의 적군이 금성(경주)까지 침공하는데 신라 조정은 무기력 상태를 보이는 것은 국가의 말로가 보이는듯 합니다

 내분과 외세의 압력에 지칠대로 지친 신라는 화백회의를 통하여 천년역사의 신라를 신흥 고려에게 위탁하여 왕건으로 하여금 善民정치를 해달라고 투항을 합니다.

 백제는 계백장군이 황산벌 전투에서 패하며 한때 융숭했던 백재 역사는 여기서 끝장이나고 백제의 문화는 단절됩니다만 신라는 패배도 아닌 스스로의 붕괴하지만, 그래도 선민정치와 도의정치를 하는 왕건을 믿고 고려에 투항하여 신라 문화유산은 고려에 계승됩니다.

 

  이제 고려의 왕건은 이 땅에 삼국을 통일한 두 번째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논산의 개타사지는 왕건이 후백제를 제패한 전승기념이라고 하듯이 신라에 등을 돌린 민심과 지방 호족들은 왕건의 도덕성에 고려에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왕건의 위상은 높아지며 각 지방 호족들 사이에서 고려정부를 호응하고 지원하게되는 것이 며 그중 강릉의 명주권 지방 호족은 원성왕의 왕위 찬탈에 김주원은 명주땅으로 도망가며 후손 김원창등의 정치적 복권등이 무산되는등 많은 반란을 가진 상태라 고려의 등장에 강원도 일대의 명주군왕의 지역적 배경과 양길의 북원 나아가서 철원평야의 경제적 기반위에 일어서는 궁예와 지방호족의 지지는 상당한 위력을 가지는 고려 초의 지방 호족세력의 등장이란 표현에 대한 저의 이해입니다.

 

  이러한 지방 호족세력들은 신라 조정의 혼란속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외국과 교역을 한 점도 간과할 수 없으며, 이에따라 고려초는 당시 가장 부유한 송나라의 신흥 선진 문명과 문물이 자연스럽게 유입되며 송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4) 고려시대에 송나라 선진문물의 수용이란??

 

 이 문제를 넓은 시각에서 이해해 본다면 개성에서 발굴하였다는 왕건의 앉아있는 철 동상의 이해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11월쯤 북한문화재 남한 전시계획이 불발로 끝난듯 하다는 기사가 잠깐 소개되었는데, 이 철 동상 하나가 부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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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도 없어 왜 그리 중요한 문화재인가는 알 수 없지만 본인의 이해를 우선 피력해 본다면 이 동상은 언듯보면 이집트 고왕조의 아부심벨 신전의 람세스 2세의 앉아있고 동상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표현의 포커스도 유사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람세스 2세는 높이가 30여m의 석조물인 반면 왕건의 철동상은 고작 1,5m 정도일테지만 그 모습은 닯은꼴 입니다.

 

그런데 조그만 왕건의 철동상이 남한 전시 목록에 오를 만큼 왜 그리 중요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고려초에 송나라의 선진문명과 고도의 문화가 유입되며 철기문명, 주철의 양산적인 혁신기술도 고려에 들어왔다는 고려초 선진기술의 철기 문명을 상징하기 주철로 동상을 조각한 점입니다.

 

  이러한 철의 기원에서 우선 철의 제조법은 단순한 방법으로 지금도 동일방법을 사용하는데.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고대 바그다드의 타이트 족이 발명하였지만 송나라 시대이전까지는 화목의 최고온도는 철의 용융점 1,580도보다 200도 작기에 이후 화목으로 주철 제련은 어려워서 청동기가 전개되었으나 물론 삼한시대의 철기 생산도 있지만 화력의 받침이 않되어 용융점까지 완전히 녹는 철생산인지. 또한 생산도 미미한 정도로 보이고 오히려 청동기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송나라는 1,000~1,200년까지 중원의 조그마한 나라였으며 이후 남송으로 밀리어 150여년후 멸망합니다. 하지만 중원의 이 조그마한 국가가 주철 생산으로 중국 최고의 문명의 발달에 힘입은 부국으로 시인, 묵객도 제일 많았던 중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한 중국의 로마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철의 주조가 대량화, 산업화 하면서 부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역 팔괘의 주희, 남종화의 왕희지, 북종화, 세종때 북극성의 28좌 “천상분야 열차지도”라는 우리의 고유의 별에 하늘의 임금님이란 옥황상제는 어느 종교적인

명칭이 아니라 송나라시대에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 전반이 송나라 발명품으로 그중에 바람개비를 돌리는 풍로도 송나라 발명품으로 그들이 이 풍로로 숯을 달구어 주철을 대량 생산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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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 보원사의 철불 하나를 예로 든다면, 이 철불은 신라시대의 8세기경에 주조한 것으로 주철인지는 도상설명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10세기경 광주 춘궁리의 철불좌상은 높이가 2,8m의 거대 철불로 고려초 거대불상에 힘입은바 이는 송나라에서 수입된 주철기술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후 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위상을 높이기에 금동상은 가능치 않았겠습니다만 당시 최고의 선진기술인 주물을 녹일 수 있는 주철 기술의 상징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송나라에서 주철이 양산체제도 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송나라의 많은 발명품중에는 풍로가 있었으며 목재를 숯으로 만들어 풍로로 바람을 돌리면 숯의 온도는 화목보다는 200도가 더 올라가기에 주철을 생산하게 된 것으로 종래에는 원심분리를 하여 불에 달구어 때려 붙이는 편철법에서 이러한 주철문명은 인류 역사에 발달사에 변화의 획기적 사건이었건만 역사서에서는 취급조차 않고 있습니다.

 

 

 중국 역사서나 중, 고등 참고서등3~40권 뒤져 보았으나 송나라 역사엔 한결같이 정치편의 구법당과 왕안석의 신법당의 역사에 편중되어 있슬뿐 송나라의 중국제일의 문화로 이러한 문화사는 너무나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송나라 富의 원천이 주철 생산이란 기록의 서술은 단 한권의 책에서도 찾아복지를 못했습니다. 단 한가닥의 이야기는 인터넷 강의에 대치동의 학원 강사라는 선생왈,,, 송나라는 철을 녹여 무기를 많이 만들었는데, 아이로니하게도 전쟁에는 약했다 한다.

그 강사도 송나라 철기문명을 완전하게는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송나라는 자국의 국방을 위해 兵器를 만든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주문하는 병기를 송나라는 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였던 것이다.

 

  실크로드에 금, 은, 보화등을 서역으로 수출하였다고 우리는 배웠지만 송나라는 북방민족들이 3번이나 쳐내려왔는데 그때마다 백금, 은을 1~2십만돈씩 주어 돌려보냈는데 송나라의 그러한 부의 원천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자못 궁금하였었다.

그러기에 본지에 송나라 주철문명의 선진사상이 고려에 유입되었다고 쓴다면 송나라를 검색해볼때 본인의 이러한 송나라 문화사의 출처가 없어 본인의 글이 왜곡되었다고 이해할것 같기도 하기에, 본 논제와는 조금 어긋나지만 송나라의 시대문명과 문화에 대하여 조금 더 언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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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송나라는 주철생산에 힘입어 많은 富가 발생되자 주화로는 교역량이 한계

를 넘는 문제가 발생되자 송나라는 세계 최초로 지폐를 만들게 되었다.

 

또한 송나라는 세계의 주철의 전반을 담당하기에 엄청난 부를 창출하고 사상, 철학, 시인, 묵객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하였지만 이에따른 폐단으로 숯을 만들기위해 중원일대의 모든 산의 나무를 벌목하여 민둥산을 만들어 황사의 제어기능인 방품림이 사라지게 되었다.

 

 

  황사란 겨우내 차디찬 히말라야 봄철에 몽고로부터 히말라야 산정을 넘는 고온건조한 퓐(foehn) 현상의 높새바람으로 중국 내륙에 지편을 내려치기에 이에 타클라마칸의 고비사막등 4개의 사막이 생기게 되었다.

1,000년경의 송나라는 내륙으로 몰아치는 높새바람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제어할 기능을 가진 방풍림의 효과의 모든 나무를 벌목하였기에 황사는 더욱 가속화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위세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물론 송나라가 태동하기 이전인 신라의 기록에도 봄철 황사로 호흡기 질환의 사망자가 속출되는 기록도있으나 송나라 벌목이 8~900여년 지난 지금에서 치유가 되지않고 회복력을 상실한채 황사는 맹위를 부리는데 인간의 자연파괴중 가장 큰 문제의 하나로 지적되어야 할텐데 지금도 이러한 황사가 천재지변인가 인재의 화인가를 이해하는 학자도 없는듯 합니다.

 

  참고로 요즘 언제까지라도 이슈화가 되는 미세먼지의 배경엔 불어오는 황사가 큰 문제로 대두되는데 저는 10여년전 저의 블로그에 “황사는 천재(天災)인가 인재(人災)인가?”라는 글에서 황사는 천년전 송나라시대에 주철생산을 위해 벌목하여 중원일대를 모조리 민둥산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황사는 자연재해를 넘어서는 인재의 가미라는 사실의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시사적인 글을 게시하고 있습니다.

 

  송나라의 철기 문명과 선진 문화가 고려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고려초 지방 호족의 출현이란 점은 신라말 국가의 존폐에 헤메이지만 각 지방의 상인들은 자체 단위적으로 일본이나 송, 남지나해까지 교역을 하고 있었다고 보기에 고려가 건국하면서도 지방 호족들은 이미 송과 자연스러운 교역대상국이 되었슬 것이고 송의 선진문화가 고려 신생국가에 큰 영향을 준 것을 받아들이는 시기인데 위에서 이야기한 고려 왕건의 앉아있는 전신상의 철불은 당시 송나라의 주철문명의 태동에 철기문화의 고려 유입의 상징체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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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령 왕건은 이 땅에 다시한번(통일신라 후) 통일의 제후라는 기념비 제막에 금동상은 가능하지 않았슬까?? 하지만 이 시기엔 주철의 철 기술이 고급 선진문명이란점의 표시인 것이다. 이것이 왕건의 새로운 통일 고려의 강한 인상을 남기려는 시도로 볼 수 있기에 왕건의 통일 고려가 고구려 복고란 점은 좀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안이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건은 위대한 제후로서 후백제를 통일한 전승기념으로 논산의 개타사를 세웠다하며 개타사지의 석불이 보살상의 시초라 합니다, 여기에 선학자들은 이 보살상과 명주지방의 보살상이 하나의 카테고리가 형성함을 연구한다 합니다.

  왕건의 고려 개국은 각 지방 호족들의 등장을 예고하기에 명주지방의 신복사지 나 월정사 탑의 공양상은 왜 이 지역에만 분포하는 것일까?? 여기에 가상적이지만 수다사지의 석불 3점중 입상은 개타사지 석불과 좌상은 월정사 탑 공양상의 복합적인 조각상을 추론하며 가상적으로 수다사지의 석불이 보살상이었다면 논산 개타사지와 명주지방 보살상들의 연관고리에 큰 작용을 하였슬 것이란 점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엔 우선 원주지방의 사찰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원주지역 불교미술은 잘 알려진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과 석비, 거돈사, 흥법사의 승탑과 석비, 단구동의 철불 5구등 알려진 사지(寺地)만도 30여곳에 달한다. 고려시대 전기는(태조에서 문종때까지, 918~1082년의 약 160여년간)에 19명의 왕사와 국사

중 개성의 현화사 다음으로 원주지역에서 4명이 관련이 있으며 입석사 마애불의 1090년 제작시기가 밝혀지며 원주지역은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다18)

 

 

 지광국사 헤린의 탑비문에 수다사지에서 10년간 주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19)그가 죽자 왕도 애도하였으며 그의 제자중엔 당시 이자겸의 아들도 제자였기에 지광국사는 고려 권력 상층부의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던바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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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불교조각 논문집 2  -고려시대, 조선시대- 미술사학 연구원, 188호(1990)~253호(2007), p 39 "고려전기 불교조각(논문), 임영애

19)「佛敎寺院址」대한불교 조계종 불교문화재 조사단 (불기 2541) p465

「삼국유사」자장정율조. 「삼국유사」탑상대상오만 진신조.「삼국유사」탑상 대상월정사 오류 성충조.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세종실록지리지」등의 기록에 의하면 세기 후반이나 10세기초 유연이나 혜린이 11세기 초반 이곳에서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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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중앙박물관 서편 입구를 들어가면 보이는 지광국사 현묘탑은 일본에서 다시 돌아왔는데 이 탑의 조각에는 아라베스크 창문의 문양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있다.

 본인은 조각 전공자로서 조각은 설명만 듣고서는 그 바로 표현이 불가능하고 한번 본 것이 더 효과적이라면 승탑의 조각자는 혜초의 다섯나라의 천축국보다 더 먼 아랍까지 다녀온 조각 스님이라야 가능한 조각이란 점이다.

 

 이것이 당시 지광국사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고려초 각 지방 호족간의 연계에도 많은 작용을 한 듯 합니다.

이 점에서 왕건이 세운 논산 개타사는 고려초 지방 호족의 출현의 빠질 수 없는 후백제 전승 기념비적 사찰이기에 이러한 고리의 맥락에서 수다사지 석불 3점은 논산 개타사자 보살상을 모델로 조각하진 않았슬까 하는 의문속에 당시 고려초의 고려의 전면에 선 원주권 불교와 그의 배경에 명주권 사찰에 나타나는 보살상에서 수다사도 어떠한 고리 작용을 하였슬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또한 명주의 범일국사의 사굴산문이 대두되어 사굴산파의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와 정혜쌍수가 우리나라의 불교의 교화론적 지표로 천 여년간 이 땅의 불교 대중화에 받침이 되었던 점과의 관계도 더욱 연구가 되어야 할 점입니다.

 

 

 

Ⅳ. 수다사지 이해의 글을 마치며

 

 위의 장문들은 고려초 시대적인 역사의 산발적 조명이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여 보면 고려 개국과 맞물리는 송나라의 주철생산의 기반위에 선진문화의 수급과 또한 월정사 탑의 상륜부의 등근 청동장식은 신라탑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라마교의 영향으로 이 탑을 고구려 복고적이라 하기엔 역부족인듯하며 고려는 이러한 선진문물 수용에 힘입어 왕권을 공고히 다져 나간듯 하다.

 

 이러한 라마의 영향이 당시 몇 개의 사찰에서 나타난다 한다. 이를 고구려 복고의 계통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는가??

고려와 송은 국교가 수립되기 이전에도 북송의 상인들이 무수히 들어왔다는 기록들에서 어쩌면 국교수립 이전에 이미 지방 호족들과 북송의 상인들의 교역은 이루어지며 많은 불상이 수입되었다 한다.

 

 

 여기서, 고려초 지방호족의 출현이란 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명주군왕 김주원 이후 몇 번의 왕위찬탈의 반란을 거치며 명주권은 신라에 반하는 세력으로 구산선문중 명주지역의 범일국사 문하의 사굴산문의 고려불교에 등장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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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적으로 원주권과 명주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이곳 수다사지는 우리나라의 사찰을 제일 많이 건립한 자장율사가 말년을 보내던 암자로서 자장은 원래 계율종이었으나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대송정을 7일간 머물렀지만 이후 문수의 성지로 자라났듯이 이곳에선 자장은 화엄을 기조로 하였으며 법천사지의 비문에 기록된 지광국사 혜린은 법상종20)으로 수다사에 10년간 주석하였단 기록에서 법상종은 선종과 같은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이후 수다사지엔 문무왕때의 고승인 두타 스님 “신의”가 이곳 수항리를 찾아 자장율사가 거처하단 자리에 다시 암자를 짓고 수행하였다 하며 이후 유연장로(장로란 지혜와 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비구니의 통칭임)등 고승이 이곳에서 수행하는등 수다사지는 고려초의 불교의 맥락에 굵은 선을 그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곳 수다사지는 인터넷 글들엔 6,25 전란에 손실이 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기실 이곳엔 6,25의 전란은 없었습니다.

중공군 6차 공세는 서울로 향할 것이란 예상을 비껴 방태산을 넘어 진부로 밀고 내려왔고 이로서 국군 2개사단은 지리멸렬하여 최악의 경우를 맞았고, 이에 횡계 고지로 달려온 벤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이 자리에서 진부주둔 3군단을 폐지하고 여기서 제한적으로 국군이 사용하던 군사작전권도 회수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관령 전투에서도 진부는 주요 전략지가 되는데 이는 강릉비행장이 중부전선에 물자 수송기지로서 이곳으로 향하는 진부의 도로 확보가 중요사안이었지 진부서 수항천으로 내려가는 곳에는 인민군의 공습이 없었다. 또한 6,25 전해인‘49년

360여명의 무장 투쟁단체의 남파에 이호재의 오대산지구 제 1병단도 수항리에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

 

 본 논문에서도 수다사지 탑은‘79년 도괴되어 밀 반출될때까지 상륜부까지 완전한 탑이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과거 1,4후퇴시 월정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에 월정사 당우 22채 모두 전소되었지만 덩그러니 남았던것은 8각9층 석탑이 유일하였듯이 수다사지에서도 3층 석조탑이 석조라는 이름에서 그러하듯 끊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왔지만 이후 관리 부실로 탑은 일부 부재들이 유실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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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법상(法相)이란 존재의 현상을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일체법(一切法)은 허상에 불과하며 오직 마음의 작용인 (識 vijnana)이 연기(緣起)해 현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유식론을 바탕으로 존재의 공성(空性)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석해 설명하기 때문에 법상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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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아직 못다한 수다사지의 이해에 지난 세미나 레포트의 마지막 장에서 승가대 최태선 교수는 현 수다사 석탑이 위치하는 이곳이 원래의 사찰 터였는가 하는 의문의 글에 동감입니다만 그러나 현재의 탑이 물가에 너무 쏠려있다점에 의혹에 앞서서 이 레포트에서 이야기하는 신륵사나 일반적인 사찰들이 물을 가까이 하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본인의 이해로는 신륵사는 물이 몰아치는 가운데에서도 안정적인 바위를 점하고 있지만 수다사지는 물이 굽어도는 반대편에 있기에 혹 수해를 이븐다 해도 물이 역류하는 지점으로 유속에는 무관하게 물이 찰뿐이란 점이며, 그래도 너무 냇가에 있지 않는가 하는 의혹에는 물론 고대 생활에 물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일만 여평의 이곳 사지터에서 제일 위치가 좋은 지점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며 앞의 전경을 관망해본다면 사방의 분잡함속에 탑이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푸른 앞산이 전체 시야를 가려주기에 수도승에겐 조용하고 평온함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안정적 조망이란 점입니다. 수항천을 건너 가로막는 앞산의 풍광의 운치 또한 암자로서는 배제할 수 없다는 명당요건의 하나인듯 합니다.

 

 

 지난‘13년 평창“수다사지 활용반안“이란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듯이 수다사지는 지금이라도 폐사지로 잘 정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미나에서는 지금의 약 1만여평의 사지에서 더 확대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의는 없습니다만, 또 하나의 문제는 사지만 지정되었슬뿐 한 가닭의 실오라기같은 연구도 미비했고 이곳이 사유지라 경작을 위한 경작지 정리는 다른 각도로 보면 사지의 유적 훼손이지만 이를 대처할 방법, 규제의 기능이 없기에 이후 일부 부재가 유실된 탑만 제 자리에 있게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수용방안이 미비한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며, 본분에서 밝혔듯이 지금도 붕괴위기의 탑이 언젠가 붕괴되고나면 폐사지라라고도 할수없는 사지 터러는 흔적도 없어지게 되고 폐사지도 아닌 사지 터란 이름만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수다사지는 우리나라 불교계의 거목 자장율사가 말년에 암자를 짓고 거처하던곳 그 자체로만도 문화재나 보존의 돼상이 되어야 하지만 또 역사의 한편에서 나말려초의 고승들이 수도하던 암자로, 어쩌면 고려 불교의 지방 호족과의 관계가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좋을듯 한 수다사지는 모든 부재품들이 유실되고 탑마저 붕괴된다면 폐사지가 아닌 사지 터로만 존재하게 될 수 있는 점이다.

 

 

 그러기에 지난‘83년 신종원 교수의 보고서에서 밝힌바 본 사역지는 약 90여평 정도이고 3단형의 주초석도 있었다 한다.

 

이 주초석은 경작자의 경작지 정비를 위해 처리된 것으로 보이기에 사지를 결정하고 주초석을 찾아 제 자리에 다시 세우고 탑도 안전하게 정비하여 또한 사지를 정비시에 이 수다사지는 신도들이 많은 사찰이라기보다 고승들이 수행의 장으로서 암자적 성격도 띠기에 실내 유물인 반가사유상이나 실내 범종등이 있었슬까 하는 추정속에 시굴조사도 충분히 단행하여야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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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서 현 법정명이 지역이름을 붙인 “수항리 사지”에서 이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수다사지“로 변경하여야 하며 또한 우리나라 사찰을 제일많이 창건한 고승중 한 분인 자장율사가 거처하던 암자로서, 또한 원주권과 그에 배경에 명주권 불교의 고려초 불교중흥에 일약했던 사찰로서 우리 평창으로서는 월정사와 이곳이 천년넘는 역사유적으로 앞으로도 가치있게 보존하고 문화전승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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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 「東岳美術史學」2000 눈빛출판사 2000

◈ <논문> 조은정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전기까지의 조각」 1989

◈ <논문> 곽동석 「동문선과 고려시대의 미술 ; 불교조각」 1988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 1999

◈ 삼선포교원『탑과 사방불』 1995

◈ 송석상, 이강승 편저『우리의 문화유산』 학연문화사 1996

◈ 『불교미술 (23)』 동국대학교 박물관 2011

◈ <논문> 김은화 『한국탑파의 문비(門扉)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3

◈ <논문집> 『불교조각 논문집』 미술사학 연구 편 188~253호

◈ <논문> 『신라 하대와고려시대 승탑연구』 소재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 <논문집> 『불교미술 도상 논문집 3 (불교조각)』 미술사학 연구편 188~253호

◈ <논문집> 『불교조각 논문집 2 (고려, 조선시대』 미술사학 연구 편 1990~2007

◈ <논문> 신용철 『경주남산 창림사지 석탑의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0

◈ <논문> 정주성 『한국석탑 백제양식에 관한 연구』 전남대 대학원 1989

◈ <논문> 김병현『고려시대 일반형 석탑에관한 연구』한국 교원대학교 대학원1991

◈ 황수영 『석탑』한국미술전집6 동화출판공사 1974

◈ <논문> 문명대『고려 법상종 미술학 전개와 현화사 칠층석탑의 불상연구』2001

◈ <논문> 홍대한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의 조성 배경과 건립시기 연구』

◈ 김광호, 김상일 『한국의탑』 해성출판사 2016

◈ 정영호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의의』

◈ 홍사준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 해체복원 략보(略報)』

◈<학술총서>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의 재조명』 월정사 성보박물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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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다사지 석불 3점의 도괴의 의문점

 

  위에 「고적도보」에서 그 사이즈가 확실히 기재된 석불 3점은 1915년  오대산 월정사를 다녀간 "다다시"의 기록은 아니다.

다다시의와 동행한 사진기사의 4천여점 촬영에는 그 실측은 전혀 없고 인물로 대비를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실측은 위 설명대로 식산과에 보고된 사이즈일것이며 김종근옹의 증언에는 약 1940년대쯤 초교 저학년시절 기억에 입상, 좌상등 목이 부러지고 팔이 떨어졌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주민들의 증언에 6,25전쟁 말쯤에 국군이 큰 절로 가져간다며 싣고갔다 한다.

 

이 두점의 증언으로 석불 분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에 앞서 다다시의 1918년판 고적도보 6권에는 월정사 전경및 8각9층 탑의 다수의 사진과 평창읍의 "서남오중석탑"(현 유동리)와 그 위치가 조동리인지 중리인지 알 수 없는 "동북 오중석탑"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런데 현재 동북오중석탑의 사진은 존재하지만 읍내에는 그런 폐사지조차 알 수 없다.

 

혹시나 폐사지의 탑이기에 어디나의 사찰에서 가져갔다면 요즘 인터넷 시대에 그 탑의 사진이 올라올 수도 있는데 본인은 그 탑의 사진을 외우고 있기에 쉽게 찾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등산 답사객들의 탑에 사진에 오른 적이 없다.

아마도 원주 법천사지의 지광국사 현묘탑도 일본까지 반출되었다가 총독의 명령에 다시 돌아올 수 잇었듯이 이 시기에 다다시의 고적도보에 의해 일본에 알려져 도괴되어 밀 반출된듯합니다.

 

하지만 동란중이나 동란 후에도 일본으로 밀 반출에 일본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이고 이런 난리통에 골동품상이 있었다고는 보기 어려운 점입니다.

수다사지의 석불 3매는 그 시기가 6,26말기쯤으로 진부에 군인들이 많았던 시기 입니다.

중공군이 6차 공세로 방태산을 넘어 진부까지 뚫리고 이에 밴플리트 주한 미 사령관은 횡계고지로 날아와 작전회의에 진부주둔 3군단을 폐지하고 그간 부분적으로 한국군에게 주어졌던 작전권도 회수하였으며 강릉의 한신장군이 연대장시 대관령전투에서 인민군을 툋하는 이러한 시간대에 군단사령부도 작전자역에 따라 이동하지만 이 시기에 진부에 많은 군인들이 주둔했슬 것이며 아마도 수다사지 삼존불은 어떤 명령에 의해 정말 큰 절로 옮기려는의도가 보안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골동품이라면 팔 다리가 부러지고 목도 떨어진 석불보다는 그 옆에 그때까지는 온전한듯한 3층 석탑이 더 값나갈듯한데 이를 마다않고 부러진 석불을 가지고 간 것은 아마 명령에 의한것이지 현장에서 보앗다면 그를 싣고 갈 것인가 하는 의문도 갑니다.

가져갈 사찰에 탑은 있었기에 석불을 가져오라는 명령마지 그것이 부서졌는지도 모르는 명령은 아니있슬까 합니다.

 

아마도 이 석불은 이런 밀반출은 되었지만 부서진 흉물이라 어디에 묻힌듯 합니다.

 필자 본인은 지난 10여년전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이 2중난간석인데  합천 해인사 뒷마당의 탑이라고 가보지도 않은 사찰의 것으로 밝히고 있듯이 어디에선가 사진으로 다시 본다면 바로 적발할 수 있지만 아직 그런점은 않보이기에 이 석불 3점은 어느 절간에 방치되고 묻혀진듯 하다는 추정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