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사지에 한점의 의문의 답
高 柱 浩 2017.10.10 17:58
수다사지엔 지금 2개층의 옥개석만 남아있는 탑 앞의 조그만 뜨락에 위치해 있던 3기의 불상. (大) 입상 2척5촌,
(중) 입상 2척2촌, (小) 좌상 고1척9촌이 지금은 없어졌으나 정원대님의 이야기에서 마을 김종근 옹의 증언에 따르면
김 옹이 열살때 이곳에 목욕을 하러와서 본 불상은 양 팔이 떨어져 나간 것도 있다 하였는데 이 불상들은 군인들이
와서 큰 절로 옮겨간다고 하였는데 월정사의 8각9층 석탑앞의 석조 보살상은 1940년대 총돋부에서 발행한
<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서 월정사 경내의 사진에 동 탑앞에 석조보살상이 없는듯 하다는데 그러면 지금의
석조 보살상은 혹 수다사의 불상과는 연관이 없는가 하는 문제의 의혹에 답을 드립니다.
* 여기서 수다사의 개괄적인 가람배치도는 지난 2013년 "수다사지 활용방안"의 세미나에서도 거론되지 못하였는데
정원대님의 탐문시 증언 기록에 의한 고증으로 다음 수다사지 2차 보고서에서 제출한다.
물론 큰 불상은 2척5촌이란 표기는 동 세미나의 최응천 교수의 레포드에 명시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들엔 2척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좌상의 작은 불상은 최소 170cm이 넘는다.
이 석불들은 월정사 석조좌상과는 크기의 차아가 있으며 아래 사진들을 보고 다시 설명합니다.
좌)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우) 현재의 사진
좌의 사진은 언제인가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양 팔이 떨어지고 그 떨어진 조각들이 아래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그런데 동 보살상에대한 탑과의 매치의 엣날 글에서 본인이 기억하는 바 사진이 반대로 되어잇어 확인히니
우측의 요즘 사진을 보면 무픞을 꿇은 쪽은 오른쪽으로 좌측 사진과는 반대로 되어있다.
이것은 사진을 180도 뒤집은 것이 아니다.
이건 도깨비나 할일인텐데.. 어찌된 일일까......글씨다~~~~~~~
이것은 거울에 비치는 상을 찍어서 왼 사진이 된것입니다. 반대로 올커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위 부분을 확대해보니 오른손이 왼손을 감아쥐고 있는 안쪽이 떨어져 나간것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왼팔은 꼬부라진 나무로 대체한 발상,,, 당시로선 기발한듯 합니다.
월정사 석조여래좌상을 누가 내려친듯 부서진 것으로 그 손부위도 아래에서 확인할 수있기에 김종근 옹이 증언하는
수다사지의 양 팔이 부러진 모습을 70년전에 본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김종근옹이 놀러가 본 석좌불이 양팔은 떨어진후 그 손이 그대로 보존되기는 어려울듯 하며 월정사 석조불인 떨어진
손이 아래에 방치되어 있는 점에서 만약 옮겼다면 손은 잘 보관하든,, 또한 그 시대에 유교국가에서 이러한 깨진 석불을
옮겨갈 것도 아닐것이란 추정입니다.
그런데 월정사 석조여래 좌상이나 약왕보살로 미화되어 있는 석조불에 대하여 의혹의 기록은??
일제 가점시절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최남선 감수) 에 실려 있는 월정사 사적 등에는 탑
앞에 약왕보살석상(藥王菩薩石像)이 있는데, 손에 향로를 들고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다며 이 좌상이 절의 남쪽
금강연(金剛淵)에서 나왔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이능화의 기록과 현재 상황이 다를 수도 있다고는 하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 석상은 석탑과
세트로 묶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라는 기록에서 본인이 한마디 보태면,,
월정사 8각9층 석탑은 석탑중 가장 크지만 가장 정교하게 탑 양식 이론을 철저하게 준수하여 보다 창의적이고 진보적
조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석조좌상은 완벽한 인체 구도를 이해하지 못한듯 팔을 꺽어 들고 있자면 그건 한 순간이지 장시간 있자면
팔에 힘이들어가는 불균형의 모습이 되기에 자연스러운 조각상이 되자면 비례에 맞는 위치에 팔을 가슴에 붙이고
있어야 자연스러운 구도가 될 것이란 점이다.
그러기에 이 석조상은 8각9층 석탑과는 조각 수준의 차이가 나는듯 하며 이 석조상은 동 탑이 완성되고 이후 언젠가
다른 석수스님이 조각하였을 듯한 느낌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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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 수다사지의 전반적인 글을 쓰기에 앞서 아직 미비되는 것은 폐사지가 되는 이유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그 이유는 알 수 없다하며 6,25전쟁이나 도로에서 멀기때문이란 비 논리적인 설명을 리포트에서
하고 있습니다만 그 두가지는 본 폐사지의 원인은 분명 아니란 점입니다.
그리고 동 사찰이 폐사지가 되는 이유를 알게되면 동 사찰의 복원문제가 용이해 질 것이란 점과 또한 일전에
가설로 쓴 폐사지가 정치적 영향이란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에 반하여 문정왕후의 숭불정책으로 중종의 선릉 이장후
봉은사에서 100일 불공드릴제 종로 육의전 거리에선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의 썸싱이란 소문이 자자해지는데도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며 보우스님을 2품의 판서로 중용했는데, 문정왕후의 섭정 이후에 사림들이 득세하며 보우스님을
가장 먼 제주도로 유배하고 대비 문정이 살아있기에 그에게 사약은 못내리고 아주 우서운 꾀를 내어 타살시킨다.
(제주목사 변협의 잔꾀는 본인의 다른 글에서 확인힐 수 있다)은 우스운 꾀를내에 타살시킨다.
이 시기에 문종왕후의 서얼철페론에 양반게층이 위기감을 느껴서 선종의 탄압정책은 분명 있슬것이란 추정해 봅니다.
이런 영향으로 선종의 탄압이 있었다면 그것은 역사를 수정시켜야 할 광범위한 문제란 추정으로 수다사, 원주의 거돈사,
흥법사, 법천사, 양양의 전진사등 그리고 경기도 일원의 사찰들에 폐사지의 원인은 조선의 배불숭유정책이 그 직접적
원인일듯 하지만 문정왕후 섭정이 끝나자 사림들의 세상으로 보우와 연을 잇는 선종의 스님들이 회오리 바람에 강타
당하였슬듯 한 공통점은 아닐까 의혹의 눈길이 닿는 것입니다.
수다사지 본 절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점의 기록이 아마도 1976~77년 강원출판서 발행 " 강원의 맥"이란 6권의 역사책중
평창군 편에 이야기 되고 있는 듯 합니다만 수다사지 레포트에서 개괄적 이야기에 최응천 교수는 평창의 문화 유산적
가치로 수다사는 태백산의 오대산 신앙의 원조란 점에 있으며 지금이라도 이러한 문화적 가치를 적극 복원하여야 할
시기에 놓인 것이다.
여기에 지난 세미나에 하나도 풀지 못했던 의문과 또한 세미나 주제에 빠지거나 미흡했던 사료들을 들춰보며 본인은
수다사의 문화적 재 정립의 첫 장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강원의 맥"이라는 동 책에서 평창의 가장 힘든 역사는 아마도 고종 장례식에 반대하는 평창사람들의 왜경에
도망치다가 남산에서 4~50여명이 사살 되었단 기록입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고종의 죽음의 의혹에 장례를 거부했지만,,5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곳은 전국적 기록에도
평창 이외엔 전무할듯 합니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려진 사실로 이러한 평창의 기상을 재 조명해야 할 듯하며 본 책 "강원의 맥"에서인듯한 또다른
어느 역사 글에서 당시 왜경은 평창읍내 500여호중 250여명의 남자를 잡아서 송기산 정상부 아래의 수직동굴
두 개중 한 동굴에 생매장하고 흙으로 덮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제가 읽은 사료가 당 책일 것이라는 점에 이 책을 알아봐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아마도 전 6권중 4권째 평창군 편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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