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昌의 鎭山, 魯山과 魯山城에 대하여 (1부)
1) 平昌의 지형적 개요
平昌은 차령산맥의 고원부인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백덕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조산으로 하여 산세의 방향을 틀며 회룡고조형으로힘차게 내려 뻗는 과립과 박환의 용트림속에 관자놀이의 시루목을 건너며 천리마의 굽은 말발굽 형상처럼 正南의 남향으로 힘차게 내려찍는 魯山을 진산으로 平昌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平昌에 魯山의 산세는 북쪽으로는 강을 드리우며, 험한 산세의 산을 등지고, 남쪽으로는 하천이 흐르는 충적평야의 개활지에 위치하기에 전형적인 背山臨水형 취락으로 외세의 침입에 방어가 용이하며, 뒷산에서 흘러들어온 기(氣)가 모인 곳으로 땅의 기복과 물의 흐름이 윤택한 지형의 배치로, 魯山은 겨울철 북서 계절풍이 찬 바람을 막아주며, 여름철에는 굽어도는 평창강이 바람을 시원케 만들어주는 조건도 갖추고 있기에 풍수지리상 천하의 명당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산은 평창인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진산사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창은 水太極으로 굽어도는 하천에 의해서 생활용수나 농업용수도 풍족하기에 인근 영월, 정선보다도 더 많은 농경지를 가지기에 상대적으로 윤택한 생활에 평창인들의 성격도 각박하지 않은 원만한 여유를 가지고 좀 느린편이다.
(느리다는 이유는 정선은 정말 평야지라고는 북평이 가장 넓기에 논도 별로 없는 땅이라 경제활동을 위해 뭐라도 하려는듯 정선 아리랑을 팔기엔 그 이론의 모순점을 수 많은 세미나를 통해 학자들을 해바라기성으로 만들며 정선 아리랑의 허상을 높이며, 영월도 정선과 같이 농토가 넓지도 못해 각박하기에 김삿갓 묘라고 하며 김삿갓면도 만들었으니 정작 김삿갓묘는 천동리 하도마치 산속에 있는데 이 두가지 모두 평창의 산물인데 각박한 환경의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자기것으로 만들지만 평창읍만해도 논 농사를 위한 보(洑)가 10여개 이상이라 농사일도 바쁘지만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기에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개발하지 않는 것이 느리다는 표현입니다)
지리적 자연적 환경에 힘입어 평창은 고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지난 '76년에는 평창읍 하리에서 2,500여년전의 청동기 시대의 유골이 발견되며 이와 함께 청동검의 출토 되었다. 이러한 평창의 시원에 평창은 천혜의 자연속에 살기좋은 고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평창의 지명은 고구려 장수왕때 " 우오현(于烏縣)" 혹은 " 욱오현(郁烏縣)"이라고 기록하며, 이것이 평창의 가장 오래된 지명이다. 통일신라 시대인 757년부터는 " 백오(白烏)"라 했는데, 이 지명들의 공통점은 까마귀 오(烏)자로 이는 신석기 시대 이후 동아시아권에서 태양속에 산다는 전설의 새를 이야기하며 "삼국유사"의 기이편(紀異扁)에서는 소지왕 10년에 까마귀가 나타나 사람에게 해야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영험한 존재로 등장한다.
또한 까마귀 烏자 앞에 어조사 于(감탄사)나 성할 郁(울창하다)라는 형용사를 붙인 지명으로 이는 태양을 형용, 수식하는 점으로 고대 이집트의 왕조에서 임금을 파라오 (pharaoh)즉 태양의 아들이라 하는 라(Phra, Ra)神의 태양숭배 사상과도 일치하는 태양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한 " 백오(白烏)"는 중국 진(秦)나라 시황(始皇)이 인질로 삼았던 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에게 까마귀의 머리가 하얗게 되고 말에 뿔이 나면 고국으로 보내 주겠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사실로 나타나서 연나라 태자 단을 풀어 주게 된 중국의 옛 고사(故事)에서 유래하는 길(吉)한 징조를 뜻하는 상상(想像)속의 흰 까마귀로 상서로움을 뜻하며 또한 태양의 밝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의 지명인 평창은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 개칭됐고, 조선 개국 원년인 1392년 태조의 5대조인 목조 효비의 고향이라고 하여 군(君)으로 승격됐다. 이렇게 옛 평창의 지명에서는 아무나 쓰지못할, 왕이 써야할 제왕적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물며 이러한 단어의 사용이 평창의 높은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 평창의 진산, 노산의 魯山城
평창 노산성(平昌 魯山城)은 평창군 평창읍에 있는 노산성으로 2003년 1월 18일 강원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었다.
노산의 사진에 위의 노란 환곡의 동그런선 안쪽이 노산성이다.
노산성내 가장 높은 정상부 봉우리에 샘이 있으며, 성내에 존재하던 군 성황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큼지막한 임란전적비를 세웠다.
아래 휜선내는 노산이 카르스트 지형으로 먼 옛날부터 빗물에 녹아 침식고 있는 부분으로 이곳은 카르스트의 습지였으나 복개후 활터장이 되었다
노산성은 감입곡류 하천이 휘어감는 노산의 정상부 아래에(해발 419m)에 쌓았는데,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은 가파를 절벽으로 이 또한 강으로 떨어지는 천험의 지대라고 할 수 있다.
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노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돌로 쌓았으며 둘레 1,364척, 높이 4척이다. 안에 한 우물이 있다. 지금은 반은 퇴락되었다’라고 되어 있으며, 증보문헌비고에서 금폐, 1864년 대동지지에선 노산고성이라 하여 이미 기능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517m이며, 성벽은 대체로 붕괴되었으나 잘 남아 있는 곳은 높이 5.3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성벽은 북쪽의 절벽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능선의 바로 아래 부분을 삭토하고 그 바깥쪽에 성벽을 구축함으로써 성벽을 따라 편편한 내환도(內環道)를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은 홍천 대미산성(大彌山城)의 축조법과 같은 방식이다. 성내 시설로는 산 정상 부근에 가장 높은 곳에서 지름 3m, 깊이 2m의 내부를 조적한 원구형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현대전은 물자공급이 원할하여 전선을 형성하는 라인전입니다.
또한, 성안에서 고려 후기에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조각들과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조각들이 발견되는데, 그 와편들은 모래가 아닌 미색 점토질의 와편들이 있었다. 본인이 수항리의 수다사지 답사시에 보았던 고려시대의 와편들과 비슷한 갈색의 점토 와편들이었으며 이것은 성만 축성한것이 아니라 건축물도 있었다는 증거이다.
산성내의 우물터에 대한 정원대의 채록분에 진경용옹(31년생, 중리거주)이 밝히는 바에 의하면 그 샘터를 돌아 묘를 쓰고 56년도에 이 우물을 길러서 먹기도 하고 잔듸에 물을 주었다 하며 이 샘터 원형의 가두리내에 남쪽방향에서 샘이 솟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러기에 성이라면 그곳에 몇달 몇일이라도 항전하고 대피할 수 있는 식량의 저장과 또한 성내에 물을 용이하게 구하는 것이 양질의 성의 요건입니다. 노산성은 산 정상부에 카르스트 지형에의한 용천수의 샘물이 위로 치솟는 우물을 가지고 있었기에 배산임수와 성내 우물등 성의 여러요건을 갖추는 우수한 성이란 점입니다.
노산성에 백과사전등을 검색해보면, 이 성은 조선 선조 초에 군수 김광복(金光福)이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권두문(權斗文) 군수가 지사함·우응민·이인노 등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이러한 이야기들은 역사 왜곡이란 점으로 노산성의 임란 항쟁사와 임란대첩비에 대하여 아래에 3장에서 논고 하겠습니다)
평창강 유역을 따라 많은 고인돌들이 발견되었고 청동기시대 유적이 대량 발굴되어 청동기시대부터 이곳 평창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에 노산의 성터는 청동기 시대 말에서 초기 철기시대 혹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그 이해력의 예를 들어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던 군대는 몽고군으로 우리는 드랴큐라가 무서운 귀신이고 아기가 울면 김일성 쳐들어온다고 말하여 달래지만, 헝거리에서는 우는 애들에게 징키스칸 온다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
몽고군에게 항전하면 그 댓가는 무지하지만 고려는 항전으로 90년간 몽고 침입을 받아 전 국토는 비폐되는 상황에 아마도 평창에서는 노산성이 긴요하게 사용되지는 않았슬까 추론해 보며, 평창의 여러분들은 여만리 강에 돌 무더기 두 개를 쌓고 그곳이 노산성을 공격했던 적군의 진지로 이담, 또는 뙤담등으로 추론 합니다.
하지만, 한림대학의 "강원도의 선사문화" (아세아 문화연구소 1986) 책에서는 이 돌 누적단을 적석총이라 하며 초가 철기시대의 무덤으로 해석하였지만 본인은 지금은 제방으로 덥혀진 돌 누적단 두 개는 조선시대 여만리 서낭당이라 주창하였으며 후일 그것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여만리 강변의 돌 누적단은 노산성의 역사와는 별개란 점을 지적합니다.
노산성의 필요조건에 이러한 외란에 대비함은 물론 내란등에서도 필요하였슬 것이라는 점입니다.1383년) 9월 왜적이 회양부와 춘주를 함락하고 평창현 경계로 쳐들어오자 교주 강릉도의 화척과 광대들이 왜적인 체하고 평창, 원주, 영주, 순흥, 횡천 등에 들어가 재물등을 빼앗으니 원수 김입견 체찰사 최공철 등이 50여명을 잡아 목베었다. 당시 왜적은 물론 왜적의 흉내를 내는 집단이나 또한 궁예가 원주의 양길의 지원부대를 합류시켜 영월, 평창을 거쳐 강릉까지 강원도 전역을 휩쓸고 지나가며 평창도 접수하는 내란의 환란에서도 그 이용가치는 컸슬 것이라는 점입니다.
▲ (左)성터내 우물로 지름 3m 높이 2m의 반구형의 연못이 돌로 조적되있으며 샘은 남향쪽에서 솟았다고 증언합니다.
▲ (右) 서북쪽의 가파를 형지에 삭토를 하고 돌을 다듬어 수직으로 쌓은 성터로 높이는 5m정도.
▲ (左) 서쪽의 성터로 일반 잡석을 들여쌓기로 조적하였다.
▲ (右) 남쪽의 성터로 호환형이 안으로 들어간 성터로 높이도 작고 경사도도 완만하다.
여기서 남족의 내환곡(內環曲)의 성터는 경사도가 낮고 또한 높이가 작아 쉽게 넘을 수 있어 이를 內城으로도 볼 수도 있지만, 이는 外城으로 성 위에 길이 있는데 이러한 것이 성일까 의아스럽지만, 본인은 초교시절 이 성터 위의 길을 역마차 길이라며 말 흉내를 내며 뛰 놀던 기억에..아마도 이 성의 남쪽의 안쪽으로 굽은 환곡의 낮은 성은 적이 칩입에 은페나 엄페의 위장을 못하게 하여 빨리 적발하여 말을타고 달려가 활을 쏘고 창으로 꼽아 적의 침입을 막았던 격전의 성터는 아니었슬까 사료됩니다.
또한 위 사진에서 보듯 성터의 축조방법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며 이는 방법적 구분에 동반하여 축조시기의 구분도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 조선 선조때 김광복(金光福) 군수는 옛 고성의 허물어진 부분들이나 추가해야 될 성벽등의 복원, 수리를 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백과사전이나 기록상에 김광복 군수가 성을 쌓아 만들었다는 표현은 본인으로서는 이해력이 떨어지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 산성은 적어도 고구려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축조된 산성으로 보이며,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을 전에 김광복 군수가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은 이후 일제때에 토지조사국의 전국적 측량조사 실시에서도 평창의 산 1번지로 등록될만큼 그 위상을 말하여주고 있으며 탑비도 세워져있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군수가 고을의 평안과 안녕을 위하는 국태민안의 성황제를 지내던 성황사가 있던 곳이었으나 지난 언제부터인가 역사에 알 수 없는 노산성의 임란전적비가 자리하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평창에서 박사들을 모시고 개최한 세미나에서도 이 성황사는 중리 암 서낭당과 접신형태라는 하지만 조선시대에 불교대신 국행, 국사 성황사는 마응과 개개인의 소원을 비는 곳은 아니었다. 무속인들이 말하는 시루목고개의 불근당이고 이곳은 장군당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으로 이에 관해서도 본인의 글 "평창의 국사 성황사"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3장에서는 좀 당혹스럽지만 노산성에서 임진왜란때 전투를 하였고 피골에서 군민들이 피를 흘렸다는 현재 서술되는 임진왜란의 평창역사는 어디에도 그 기록의 역사가 없는 픽션이란 점입니다. 이에 본인은 사료의 기록에 의한 임진왜란시 평창역사의 정론을 피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노산의 지질학적 이야기로 평창의 愚를 서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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