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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기상

(1) 평창읍의 청동기역사 박물관 건립에대한 제안 (평창 남부권 개발의 두가지 案)

 

(1) 평창읍의 청동기 역사박물관 건립 제안 (평창 남부권 개발 1)

 

 

후세백작 18.06.14. 14:20

 

 어제 새벽 지방선거의 개표당시 평창군수 당선자의 소감 인사에서도 평창의 균형발전을 위한 남부권 개발을 이야기 하였듯이, 이제 2018 동계 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른 평창군은 이제 그간 10여 년간 지방의 일반예산만도 매년 500억 이상 씩 집중적으로 북부권에 투입 되었기에 상대적으로 대화, 방림, 평창읍, 미탄면은 올림픽을 치른 군으로서도 빈곤한 예산 배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평창은 이제 올림픽을 치른 이후 앞으로는 남부권 개발이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영서 산간지방의 낙후된 농업마을로 막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봉착된다.

 

 남부권 개발에 농업을 주로하는 군으로서 낙후된 여러 사정도 있겠지만 30여 년전 서울대 지리학 교수의 논문에서 강원도는 앞으로 레져의 관광산업으로 자리바꿈 하게 되어야 한다고 예고 했는데 이제 강원도는 전국에서도 가장 상위의 관광의 레져공간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인접 영월은 김삿갓 유적을 모태로 그간 30여 개의 박물관으로 전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학습관광지로 부상하였고, 정선은 아리랑을 축으로한 레져 관광지를 형성하였으며 관내 봉평은 이효석과 메밀꽃의 테마로 전국적 행사규모로 부상한 바, 이 모두 그 배경은 평창읍과 미탄면에 깊은 연관을 가진 소재들인 것입니다.

 

(봉평 메밀꽃 축제의 전신은 지난 '70년대말에는 평창읍에서 3회까지 효석 문학의밤을 계최하였고. 근자의 저의 발표엔 후렴이 없는 평창아라리가 을 기조로하는 전국 아리랑 모두를 아우르는 구원성[久遠性]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정선아라리의 모태는 한치 뒷산의 아라리란 점입니다. 또한 김삿갓 묘는 현존 천동리 도마치골에 있다고 추정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부권의 균형 발전을 위해 두 가지 을 간략히 제안합니다

두가지 사안 모두 본인이 글로 밝힌바 있지만 다시금 제안 합니다.

 

 

1.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지 박물관

 

 평창읍 하리 240-4번지 청동기 유적지로 지난 2년 전 이곳에서 유적과 유골이 출토된 점의 발표가 있었다.

이곳은 1986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화재조사에서 마제 석촉이 발견 되었으며, 2004년 문화재분포 조사중 무문토기가 발견되어 선사시대 유적이 입지할 가능성이 높은 지대였던바, 이 지역에 단독주택 신축시 선사분묘 일부로 추정되는 석열유구와 적색 마연 토기편.마제 석검편이 발견되자 강원고문화연구원이 조사하였다.(*2016, 허가번호 2016-0847. 강원 고문화연구원 발표)

 

 조사결과 청동기 시대의 무덤 유구가 14기 발견되었으며 2호 무덤은 비파형 동검과 인골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예는 매우 드문것으로 20182월 문화재청의 발표 그간 2년 동안의 분석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김재현 동아대 고고미술학과 교수팀이 대퇴골 크기와 근육, 치아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인골의 성별이 여성인 것으로 확인 되었으며 여성의 나이는 20대 초반, 신장은 160.4cm로 추정됐다. 초기 철기시대 여성으로 알려진 경남 사천시 늑도 유골보다 10cm 이상 클 정도로 신체 조건이 좋았다

 

 출토 동검은 길이 26.3cm, 3.8cm로 두 동강 난 채로 석관 동쪽 측면에 묻혀 있었으며, 양식은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의 특징을 지녀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경 인물로 추정된다

 

 김창석 강원대 중앙박물관장(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삼국시대 초기 여성이 제사를 주관했다는 극히 적은 기록이 있지만 이보다 앞선 선사시대엔 여성 제사장이나 지도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고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시사하는 발견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춘천 중도에서는 현 우리나라의 발굴 청동검 숫자를 능가하는 40여개의 고조선 청동검이 발굴되었지만 100여기의 고인돌에서도 인골은 전무한 상태였다.

 

 인골이 2,500여년 지속되기 힘들다면 평창읍 하리의 청동기 유적지는 천헤의 명당 아닐까 합니다. 또한 이제는 고인골의 DNA검사로 식생활과 그로인한 농경상태. 기후등 다방면의 시뮬레이션의 영상분까지도 제작이 가능한 과학을 가지고 있다.

과학에 힘입어 청동기 시대의 고인골을 통하여 그 옛날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오며 문명의 태동에 평창은 천헤의 자원, 살기좋은 금수강산의 길지임도 나타낼 수 있다.

 

 2,500여년 전은 고조선 말기쯤으로 고조선은 민족이 아닌 국가를 말함이며, 춘천은 맥, 강릉은 예란 단어를 지금도 흔히 쓰는데, 이는 북방의 예맥족이 남하한 것으로 남쪽의 족이 같이 어우러지는 제정일치 사회가 고조선이라면 그 시기의 어쩌면 고조선인은 아니었슬까??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500년경에서 기원전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하며, 민무늬 토기 시대라고도 합니다. 비파형 동검은 고인돌에서 출토되고 있어, 고인돌에 동반되는 유물로 파악하고 있다.

 

 비파형 동검이란 고조선식 동검을 말하며.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은 모두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는 시각이 퍼져 있으나 일반적으로 미송리형 토기, 탁자식 고인돌 등이 동반되는 경우에서 고조선의 영향권에 속한다고 보며, 그 이외의 비파형 동검은 동호족(산융족) 등의 문화로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평창의 비파형 청동검의 특징은 14기 묘에서 미송리 토기는 출토되지는 않은 듯 하지만 마제 석기등이 다수 매장품이 출토 되었으며 일반적인 고인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석실에서 출토된 점이다

그러기에 고조선 시대인이라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듯 합니다

 

 이에 보존과 기록 영상물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 건립 또한 좋치 않습니까?? 문명의 태동에서부터 살기좋은 고장 평창이란 점의, 청동기 시대인의 생활상을, 어쩌면 고조선인의 살아 숨쉬는 석기 역사의 테마가 깃든 박물관을 평창의 브렌드로 함이 좋치 않습니까??

 

 평창 남부권은 이제라도 전국에 부상할 수 있는 렌드마크를 찍는 아이콘을 개발하여, 평창 남부권 개발 계획중에 휴식과 관광의 레져공간 형성이 가장 핵심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테마기 깃든 문화란 무엇인가 하는 점은, 가령 평창의 백일홍 축제를 가지고 분석해 봅니다.

평창의 백일홍 축제는 끝이 어디인줄 모르는 공활한 가을 하늘아래 오색의 백일홍 속으로, 드넓은 자연속으로 빠져들며 또한 미식을 돋구는 게삼츠레한 막걸리 한 잔 축배에 자연과 동화되는 축제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좋치만, 이는 시간성의 제약과 공간적인 시장성 범위의 한계에 놓인다고 2장에서 게시하였는데 이 한계는 무엇일까??

 

 이에 봉평의 메밀꽃 축제를 비교해 봅니다.

이제 봉평은 이효석의 메밀꽃 소설을 테마로 해서 메밀 축제로 전국에 확실한 랜드마크를 찍었다. 여기에서 이효석 문학관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소설은 봉평의 메밀꽃 축제에 하나의 이야깃 거리에 불과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반대로 가산 선생의 메밀꽃 필무렵의 소설이 없이 봉평의 메밀꽃 축제가 태동할 수 있었고 또한 지금도 가산 이효석이 빠진 메밀꽃 축제는 가능할까 하는 가늠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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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 평창은 태기산성의 태기왕 후손인지 아니면 가리왕산의 갈왕의 영역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평창의 청동기 문화와 인골은 넓게보면 당시 고조선이 강력한 지배국가로 고조선 후기의 사회로 이 고인골은 그 시기가 고조선 시대인이라 표현하여도 무방할 듯 합니다.

 이러한 청동기 시대의 평창은 위의 설명대로 고색창연한 하늘아래 기름진 옥토에 살기좋은 지역이기에 청동기시대로 부터 이어진 천혜의 고장 평창이란 점에, 마치 봉평의 메밀꽃 축제의 바탕엔 이효석의 소설이 배경으로 깔리듯 평창 청동기시대 박물관을 건립하고 이를 주축으로 백일홍 축제에도 시너지 효과를 불어 넣는다면 평창의 백일홍 축제는 백일홍의 모티브 그 자체보다는 더 강력한 모터를 축으로 하여 백일홍 축제도 하나의 큰 테마를 만들어야 더욱 융성한 문화축제가 될 것이란 점입니다.

이러한 가상에서 보듯 아래에서 "평창 청동기 시대인"의 박물관 건립 구상에 대하여 논 하는 것입니다.

 

 

평창의 석기시대의 역사유물들

 

 미탄면 기화리 산 1번지 쌍굴엔 적황색 토양 포함 낙반석층은 B.P 45,000±

5,000(탄소 측정연대로 45천년전),북벽 암갈색 토양층 B.P.58,000±3,000 년대값을 나타내며 이 굴은 구석기시대의 찍개, 여러면석기, 뗀석기와 각종 동물 뼈인 꽃사슴, 사향노루, 고라니, 산양, 코뿔이, 표범, 호랑이, 오소리, 너구리 곰, , 물고기등의 모든 동물의 치아들 위주의 뼈가 발굴되었다.

가장 특이할만한 점은 우리나라에는 기록도 없는 원숭이 뼈, 코뿔이(코끼리) 뼈도 발견된 점이다.

 

*BP라 함은 Before Present로 탄소 반감기는 5,730년으로 약 6만년까지는 정확히 잴 수 있으며, 1950년 핵 실험으로탄소 반감기가 인위적으로 변경하였슬 수도 있기에 BP는 기준점을 1950년부터 이전으로 잡는 것이다

 

또한 뼈가 인위적으로 끈어지고, 불땐 흔적도 발견되었으며 외부돌도 들어있는 점까지 파악되었다

이 기록은 2014년 연세대 박물관의 홈피에 학술조사에 기록된 리포트로 어쩌면 우리나라 구석기 역사의 판도를 뒤집는 사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청옥산 사람들은 호랑이도 잡아먹고 살았던 강인한 야성의 역사가 고스란히 나타나 보입니다.

(연세대 박물관의 평창 기화리 쌍굴의 리포트 주소는 130메가 분량이라 복사가 안되에 바로가기는 올리지 못합니다)

 

 이뿐 아니라 평창의 박물관 건립에 필요성은 위의 미탄의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1997년 강원고고학 연구소가 발굴한 평창읍 도돈리 유적(단면찍개, 주먹대패망치돌긁개밀개찌르개몸돌찍개등의 구석기 유물이 있다.

 

 신석기에는 학계의 관심이 집중된 국내 유일의 용황리의 고배토기와 평창읍 후평리에서 3, 유동리에서 2점의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채집되었으며 평창강 유역 대부분 지역 (대하리, 대상리, 응암, 도돈, 천동, 유동, 종부, . .하리, 여만, 후 평, 계장, 임하, 다수, 주진, 뇌운, 고길, 조동리) 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 토기는 대부분 외지의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또한 평창읍만 하여도 30기가 넘는 고인돌. 또한 임하리의 선돌등 이들을 보존 관리할 전문 주체자들도 필요로 하고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지난 90년대초 수항리 사지(현 수다사지) 언덕 위에 있던 고인돌은 도난 당하였다 한다. 수항초교 앞을 지나다보면 탁자석 한점을 볼 수 있다. 욕심도 없으면서 갖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만큼 빼어난 탁자석으로 아마도 도난당한 고인돌 또한 그러한 재질과 풍화된 표면의 아름다움이 있었기에 도난당한 듯 하다.

 

 우리는 평창의 이러한 고대 역사 유물이 어느 박물관에 찝혀 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면 역사를, 정체성을 상실한 고장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영서지방의 태동시의 역사부터 우리 손으로 보존하고 관리함도 있어야 한다. 그것도 청동기 인의 참 모습을보며 살기 좋은 천혜의 고장이란 테마를 곁들여서 역사관광의 무대에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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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쩜, 정선은 지난해에 아우라지 강변의 호박돌을 쌓아 만든 50여기의 적석 유구가 발견되며 그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장신구 기원전 13~4세기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현 보존 처라중)이기에 혹시나가 아닌 그들은 지금 한창 박물관을 구상중일 것이다.

평창에서 정선보다 늦어진다면 태백 산간의 문명의 태동에 대한 역사의 이미지도 정선에 빼앗기고 말 것이란 예측이다.

이제 평창인들은 이러한 태백의 영봉 평창의 정기를 찾는 박물관 건립에 중지를 모아야 할 때인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평창군이나 향토사관은 평창의 세미나. 논문집, 리포트등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어야 평창 역사의 시작일듯 합니다.

왜냐면 출처도 모르고 그들은 PDF파일로 다루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한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였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하여도 현재에서 그 역사를 필요로 할때 역사이지 과거의 사실은 역사가 아니란 점입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과 닐스보어의 양자역학의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볼때만 달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까"' 하고 분자에 대한 역설을 합니다. 이렇듯 과학에서는 우리가 필요치 않아도 모든것은 그 자리에 존재합니다만 역사는 이와는 다르다는 좀 이해하기 곤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의 사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역사가 아니란 점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관점에서 취급할때 역사이지 그냥 방치해 버린 과거는 역사가 아니란 점입니다.

현재의 관점에 의해서 과거의 역사는 변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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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 변절시키는 정선 아리랑 향수자들같은 행위는 아니고 현재의 사관의 관점에 의해서 과거의 역사를 다른 방향으로 보자는 조명이란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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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역사는 오늘의 정체성의 이해이며 앞으로 나아갈 미래 좌표의 예정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를 외면하는 자는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입니다.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자는 앞날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밝은 평창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그리기 위해서 평창역사는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