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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리에 김삿갓

김삿갓의 바른이해 연구

[김삿갓의 바른이해 연구]

풍류시인 김삿갓 !!

이 몸 죽어 백년인데 풍류인심 간 곳 없이 아찌다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 ---김삿갓 북한 방랑기---- 지난 시절에 정오 12시전 5분 드라마로 당 시대에 풍류적으로 북한의 괴수 김일성을 호되게 꾸짖는 김삿갓은 통쾌하기 이를데 없는 단막극 드라마였다. 장장 1만 천여회 방송으로 천재시인 김삿갓은 전 국민에게 친근하고 낯익은 인물이 되었다.

아래에서는 K.B.S 역사 스페셜에서 이야기를 인용하여 본다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520  김삿갓 신드롬 방랑시인은 왜 슈퍼 스타가 됐냐??

 

**************<인용부>******************

엄응용 김삿갓 유족 보존회장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을 논하고또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탄핵하는 그런 내용이었지요. 그때 김병연은 결국 김익순의 죄를 크게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장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김병연이 삿갓을 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시다. 그는 김익순의 항복을 정시의 죽음과 비교하며 영원히 역사에 치욕으로 남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후 어머니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이 비난한 사람이 할아버지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알려져 온 김삿갓의 전설이다. 그런데 1925년 발간된 한 책엔 이와 다른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전기와 그들의에 관한 일화를 엮은 「대동기문」 이 책에도 김병연이 지었다는 내용의 똑같은 시*주1)가 있다.

 

그런데 지은이를 김병연이 아닌 노진이라 적고 있다. 노잔은 평안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시인이었다. 그는 과거 시*주2)를 잘 짓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김삿갓에 미치지 못했다. 노진은 김병연의 재능을 시샘했다. 그리고 그것은 김병연과 가문에 대한 조롱이었다. 김병연은 수치심과 분노로 피를 토했다. 그리고 다시는 관서 땅을 밟지 않았다. 김익순이 할아버지인줄 모르고 시를 지었다는 전설과 다른사람이 그를 조롱하기 위해 썼다는 기록, 과연 어느쪽이 진실일까?

 

정대구박사. 김삿갓 연구저자

"아버지 누구, 할아버지 누구, 외할아버지 누구 이걸 해서 사주단자 앞에 딱 써놓고 이것을 하거든요. 이런 가문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과거공부를 하는 사람은 의례 자기 아버지 이름, 할아버지 이름은 알아야 된다 이거예요. 더군다나 김삿갓처럼 영민한 아이가 22살에 과거를 봤는데 22살까지 자기 할아버지 이름을 몰랐겠어요."

조선 형법의 뿌리인 대명률에 의하면 모반대죄의 죄는 엄격히 처벌되었다. 가족은 남자아이와 여자 아니는 노비가 됐고 살아남은 어른들도 삼천리 밖으로 유배됐다. 죄는 대물림(緣坐)됐다. 연좌의 흔적은 가문의 족보에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김익순의 동생은 해남으로 김병연의 아버지는 남해로 귀양갔다.

 

김응현 안동김씨 휴암공파 종친회장

'안자 근자 이 할아버지가 사실은 유배되기 전에 여길 왔는데 큰댁의 본댁을 왔었는데 같은 집안에서도 배척을 하는 바람에ㅐ 역적이 여길와서 그 자손이 의탁을 하고자 하니까 도와줄 수 없지 않습니까. 요즘이나 그땨나 그러다보니까..."

친척들 마저 모두 등을 돌린 상황.역적의 자손 김병연에겐 몸을 의지할곳도 과거를 볼 기회도 없었다.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했슬까. 예조판서를 역임했던 신석우의 문집(해장집)에 김삿갓의 행적에 대한 단서가 남아있다. 그는 서울로 갔다. 그리고 한 세도가의 문객으로 지냈다.

 

"그때 과거에 힘쓰고 있었는데 범위가 툭 트이고 기교가 대담하며 훌륭한 솜씨가 기대되었다. 매일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그치지 않고 백가(百家)를 베끼는  손이 쉬지 않았"

그는 과거시험에 쓰는 시와 글들을 공부하며 세상에 나아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서울 양반들도 재능있는 그를 반겼다.

 

"젊었슬때는 詩文에 힘쓰며 서울에 가서는 進取를 꾀했는데 서울의 시인 명사들과 아끼며 흉허물 없이 대했습니다"

그는 세도가의 힘을 빌어 출세할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허물없이 어울리던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시골양반이라 속이고 감춰왔던 역적의 후손이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건호박사 김병연시 연구저자

"그 사람들과 사귈때는 어느정도 신분이 친하지 않은 정도의 신분이어야만 그런 사람들과 사귈귈 수 있기 때문에 향품(시골의 양반)이라 했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본인의 신분이 탄로나니까 그런 분들이 그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봐 (김병연)을 멀리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연좌의 굴레는 풀리지 않는다.

 

"우울하고 즐겁지가 않아 거의 미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얼마후엔 그이 친척이 합격했다가 취소 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역적의 자손이란 신분을 뒤늦게 알고 합격을 취소시킨 것이다. 어디에도 길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갓을 벗었다. 눈마저 닿았다. 장동 김씨 24세손 김병연은 그렇게 방랑시인 김삿갓이 됐다.

 

************<인용끝>*****************

 

영월 백일장의 장원 급제에 대한 이해

본인이 게시한 글을 리필해 봅니다.

http://blog.daum.net/kkks1/1289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

1. 구한말의 시대적 배경의 사회상

2, 영월 동헌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 에 의문?

3. 김삿갓의 방랑에서 의문은

4. 김삿갓에 대한 미지의 마지막 의문점은?

 

김병연은  스무살이 되던 해 1826년(순조32년), 영월읍내의 동헌에서 시행된 향시를 통해 논"가산 충절사 탄 김익순 죄통우천"論鄭 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이란 시제로 김익순의 죄에 대하여 망군(忘君),망친(忘親)의 벌로 만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여 장원을 하였다 한다.

 

장원을 한 날 어머니는 오늘,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익()자 순()를 쓰는 선천부사가 할아버지이며,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사때 신주를 모시기는 커녕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處士)로 써서 속여 왔다고 얘기하는데,,

 

김삿갓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대한 고민 끝에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으로 인해 20세 무렵 처자식을 둔채로 이때부터 김삿갓은 죄인의식으로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다 하여 삿갓에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본인의 가장 의문은 영월서 백일장이라 하는데 당시에 지방에 자체적인 백일장 문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며, 이러한 백일장은 도호부라 했다 한다면 그것은 향시를 말함이며 역사적 기록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만약 향시에서 장원급제 하였다면 외조부까지 호패를 확인한다. 대 역죄인의 가문은 과거를 볼 수 없다 장원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자손 대대로 대역죄인은 김삿갓 두째 손주가 스님으로서 고종을 알현하며 면죄된다)

 

 우리가 쉽게 알자면 정약용이 대역죄인으로 귀양가며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과거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학연의 명의가 되고 학유는 국에시간에 배우는 농가월령가의 저자로 문인으로 재야에 운둔하게 된다.

 그러기에 영월은 김삿갓의 많은 의문중에 첫번째로 이에 명확한 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신빙성을 갖추지 못하기에 위 연구자들은 이를 도외시하며, 또한 본인의 이해도 그러하다. 노진이란 시인은 김삿갓이 그의 조상을 욕되게하는 묘한 시를 써서 역풍자를 하여 선친도 못나고 손자도 잘못했다는 조롱의 詩로, 또한 당시 안동 김씨들도 욕을 하자는 의도는 아니었던가??

 

제사때 어머니가 지방에 처사라 쓰고 속이기 전에 할아버지 김익순이 처형될때 병연은 6살로 당시를 기억 못할까?? 당시 평화롭던 한 집안에 할아버지는 처형되고 아버지는 귀양가며 멸족에서 폐족으로 살아난 그는 형 병ㅎ와 함께 노비 김성수의 고향 곡산으로 숨어들고 거기서 서당을 다녔다 한다.

우리는 한글을 배울때 어머니, 아버지 이름을 먼저 쓰고 배우듯 과거 한문을 배울때는 보통 유교교주의 아래 아버지, 할아버지 존함은 물론 자신이 족보도 먼저 배운다. 제사때 지방에도 처사라 쓰고 숨긴다 하더라도 그의 장원급제 詩에서 김익순은 장동 김씨로 알며 자신의 족보는 틀리게 알았단 말인가.

 

욱 말이 안 되는 것은 김병연은 다섯살 겨울에 홍경래 난(1862)이 일어나 다음해 3월에 할아버지 김익순은 처형되고 이후 멸족에서 폐족으로 돌아서고 아버지는 귀양을 가며 집안이 풍지박선 나며 병연은 형 병호와 함께 노비 김성수 고향인 곳산으로 가서 서당을 다녔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집안 위기는 기억도 없고 서당 공부는 쏙쏙 들어가는 모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한, 위 예문에서 신석우의 「해장집」에서 그의 단서가 남아있다 하는데 그는 서울로 갔다. 그리고 한 세도가의 문객으로 지냈다 한다. 문객이 되자면 학문적 지식을 겸비해야 되며 시류도 폭넓게 알아야 할텐데, 문객으로 그집 양반과 대면시 명함을 건네듯, 장동 김씨 병연이오 하고 인사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시류에 따른 이야기로 장동 김씨 누가 어디로 가고 하는 이야기가 먼저 나올듯도 하는데... 이러한  교감도 없이 문객이 될 수 있었슬까??

(* 필자 주 ; 신석우는 영월 신씨로 1780년대 봉평 원길리 출생으로 그의 子 신범선생의 "봉서유고"에 있다)

 

그러기에 "가산 충절사 탄 김익순 죄통우" 의 답안지가 영월 김삿갓 문학관에 있다함에 그것의 출처는 이방의 이조에 비취 비치했었다면 지금은 규장각, 서울대 도서관등에 있는 자료철 중 한 장일텐데 어떻게 영월 김삿갓 문학관에 넘어 올 수 있는가에 대한  의아심에서부터 김삿갓이 살아서 이곳 영월에 와서 이 시를 본다면 또 한번 피를 토할 일이 아니겠는가??

김삿갓 기념관이 당사자를 바보로 왜곡시켜 우리가 즐거우면 그것이 기념관이다라고 말 할수 있슬까??

 

<조선시대 향시(鄕試)?>

 

****<다음 백과사전 검색인용>**********

과거응시자로 하여금 각각 자신의 본관에서 시험을 보게 하고, 만일 다른 지방에서 향시를 치른 사람은 회시에 응할 수 없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도 각과의 초시(初試) 중 하나로 향시를 실시했다.

 

정기시는 3년에 1회씩 실시하는 식년시를, 부정기시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열렸던 것을 말한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의 해석을 위주로 하는 시험이었고, 진사시는 글짓기 시험이었는데, 모두 초시·복시 두 단계 시험으로 각 100명씩 뽑아 생원·진사의 칭호를 내려주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양자를 합해 사마시라고도 했는데, 문과의 예비고사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법제상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반죄와 강상죄와 같은 중죄인의 자손 및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서용되지 못하는 자, 재가했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자손, 서얼 등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했다.

 

초시에는 관시·한성시(漢城試)·향시가 있었는데, 향시는 각 도에서 실시하는 초시이다. 8도의 향시 가운데 생원·진사 시험인 경기향시는 1417년(태종 17)에 폐지되었다가 1443년(세종 25)에 부활되었으나, 1603년(선조 36)에 또다시 폐지되었다. 문과의 경기향시도 1417년에 폐지되었다가 〈경국대전〉에서 부활되었으나 〈속대전〉에서 다시 폐지되었다

 

소속 당파나 정실에 의해 합격과 출세가 좌우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폐단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한 과거제 개혁방안이 실학파, 특히 유형원(柳馨遠)이나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그뒤 세도정치가 행해지면서 모든 관직이 벌열에 의해 독점되어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을 얻지 못한 관료예비군만 누적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제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이 전해져 근대사회로 변모하게 되자 구래의 관리등용시험인 과거를 가지고서는 맞는 신진인사들을 선발하기 곤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94년에 단행한 갑오개혁에서 성균관을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개편하며 과거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관리등용법을 제정했다.

출처: 다음백과 https://100.daum.net/book/652

 

<속대전>

1688년(숙종 14) 박세채가 〈속대전〉 편찬을 건의했는데, 〈속대전〉이라는 이름은 이때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법전편찬은 영조대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1730년(영조 6) 영조는 오래전부터 새 법전 편찬의 뜻을 가져왔음을 밝히고 준비를 명령했다. 1746년에 인쇄, 반포했다

*******<인용 끝>**************

 

이상에서 볼때 가장 특이점은 모반죄와 강상죄와 같은 중죄인의 자손 및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서용되지 못하는 자, 재가했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자손, 서얼 등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했다.

 

이 한 예로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은 귀양을 가며 그의 자손은 과거의 길이 막혔다.

http://blog.daum.net/kkks1/177    [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를 찾아서

다산의 아들도 유배지인 강진까지 두번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다산 선생은 아들에게 밤이 깊도록 공부하는 법을 가르쳤답니다

다산선생의 두 아들은 대역죄인의 집안이라 조정의 과거시험의 출세길은 막혔으나 편지로 두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그는 편지에서 귀양살이에 번것도 없어 유산으로 물려줄 것은 없으나 특별히 을 물려주겠다고 이 두자를 적어 보냈다 한다.

 

첫째 아들 "학유"는 명의가 되어 정적 노론벽파의 실권자들도 노환등 죽음에서 의술로 살려주는 은인이 되었으나 아버지 다산은 의술을 폄은 좋으나 구차한 구명운동은 말라 하였지만 "학연"에 감동받은 그들은 다산의 금에 도움을 주었고 둘째 "학유"교과서에 실린 농가월령가의 지은이이다.

 

옛날의 과거시함에 요즘같은 증명서나 대리시험등까지 부정이 없도록 하기위해 호패를 확인하며 과거 급제시는 조부와 외조부까지도 확인한다 하였다.

 

8도의 향시 가운데 생원·진사 시험인 경기향시는 1417(태종 17)에 폐지되었다가 경국대전에서 부활되었으나 속대전에서 다시 폐지되었다. 속대전은 1746년에 인쇄, 반포했다

그리고 김병연은 1807(순조7년)에 출생하여 1863년(철종 14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영월이 이야기하는 나이 스무삻에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하였다는 것은 1827년에 해당한다.

영월은 이 문제도 확인하여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역사적 범위내에서 역사를 사실로 수정을 히여야 하는 것이다.

 

<K.B.S역사스페셜에서>

역사 스페셜에서 연구자들의 이야기에 결점으로 방랑시인 김삿갓이 이러한 시를 쓴 결과 조상을 탄핵했기에 하늘을 볼 수 없다고하여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데 이러한 글들을 읽음벼 일반인들은 삿갓은 김삿갓만 쓰고 다닌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오류란 점이다. 물론 이치적으로 맞는 이야기이나 삿갓은 누구나 쓸 수 있고 스님은 갓을 안쓰기에 삿갓을 쓰고 다녔고 상인들도 쓰고 다닌 당 시대에 모자는 차양모도 없었고 드골모자도 없었으며 썬 글라스도 없었기에 오직 삿갓형의 방죽 모자가 평범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위의 연구자들이 결여사항은 그가 삿갓을 쓰고 방랑을 하게되는 이유로 영월에서 장원급제가 아닌 서율 유학후 패족이 알려지게 되어 멸시되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 한다.

그러나 위에 밝한 당시 과거제도는 정상적인 시기가 아니고 아마도 과거시험이 완전하게 없어진듯하며 관리의 모집은 당파의 파벌에 의한듯 하기에 이를 뚫으려는 노력 아니었슬까 하며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삿갓을 쓰고 방랑에 들어갔다 하는데 이는 1차 외유이고 이 도전이 무리수로 끝나는것은 당시 집안의 우환의 소식을 접하는데 병연의 형 병호가 무고로 죽자 첫째 아들 학균을 형네 집에 양자로 보내고 결혼 4년차에 익균을 낳게 된다. 그리고 결혼 8년만에 부인을 사별하자 재혼도 하였다.

 

 또 하나의 이해 부족은 그가 과거에 응시 할 수 없어 방랑했다면 그의 집은 가평에서 평창 율치로 옮기고 다시 영월 와석리로는 왜 옮겼는가 하는 점이다. 율치리나 와석리는 모두 인적이 드문 산골인데 대체 무엇이 불편하여 인적도 없는 20리 산골로 슨며 들었슬까?? 오히려 화전은 커녕 채마밭 하나도 만들 수 없는 앞 뒤가 달라붙은 산골로 들어가는 동기는 무엇일까??

 

이것이 방랑과는 무관하고 주변의 멸시때문에 인적이 드문 산간오지로 들어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해 불가이다. 여기에 본인은 위 인용글에서 당 시대의 사회상을 피력하였습니다. 역사가들은 역사의 시대적 사회상의 전체적 분석은 결여하고 한 부분만 가지고 이해를 하고자 가상적 논리를 만들기에 이것이 틀리고 굴절되는 경향을 가지는 것으로 특히 지방의 향토사가라 하는 분들이 그러한 경향이 많다.

 

그것은 김삿갓 묘의 연구에 공헌한 박영국 영월 향토사학자의 경우에서도 그러한 면을 볼 수 있다. 영월에서 김삿갓 묘는 위 내용을 어느 역사학회가 맞다고 인정해준것으로 역사가 될 수 잇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럼 아랫장에서 김삿갓 묘에 대한 연구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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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묘에 대한 논고]

 

영월에서의 김삿갓 묘를 발견하는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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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부>

김삿갓면 김삿갓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흥준. 창비사. 2015,9,15  P64~65 )

난고 김병연(1807~63)의 묘가 여기에(와석리)에 있다고 하는 것은 불과 30여년전의 일로 영월의향토사학자 고 박영국옹에 의해서이다. 박영국옹은 당시 영월 창절서원 김영배 원장에게서 김삿갓의 묘가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묵밭에 있다고 증언을 들었다.

 

한성부 판관을 김영배옹의 증조부는 흥선대원군에게 밉보여 관직을 잃고 낙향하여 와석리에 살고 있었는데 1872년경 자신의 구명을 위해 상경해 안동 김씨 중 유일하게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고있던 김병기(金炳冀)를 만났슬때 그가 "양백지간(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인 영월과 영춘 사이에 김삿갓 묘소가 있는데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김병기와 김병연은 같은 문중의 같은 항렬이다.

 

그리하여 박영국은 '82년 10월 김영배 옹과 함께 20리 산길을 걸어 그가 알고있는 김삿갓 묘에 도착했는데 와석리에서 3대를 살았다는 이장을 만나니 "김삿갓 묘에 대해서 우리는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인본 언론인들이 찾아와 확인했고 "의풍국민학교 교사도 확인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김삿갓 묘의 발견이다.

 

이런 고증만으로 김삿갓 묘라고 확증지울 수 있슬까 싶기는 하지만 아무튼 김삿갓이 사망한지 119년만에 드디어 그의 묘소가 세상에 알리어 지게 되었다

<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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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인용에서 유흥준 선생이 이러한 고증만으로 김삿갓 묘라고 확증지울 수 있슬까 회의적인 글을 남겼는데 이는 역시적 물증이나 사료 즉 비석이나 고증적 문헌, 또는 이 묘를 후손들이 성묘하고 대물림하든지 하는 객관화된 자료 제시는 하나도 없이 누가 와 보고 하는 이야기로만 확정적인 묘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물론 이 근방 와석리에 생가에 김삿갓의 처, 자식은 살다가 익균은 언제인가 평창읍 천동리로 이사를 하였다.

 

김삿갓은 22살에 결혼하고 그 이후 방랑하다 4년만에 돌아와 익균을 낳고학균은 병호 형에게 양자로 보낸고 다시 이별을 하여 방랑하다 부인이 결혼 8년만에 사망하자 다시 돌아와 세 장가를 간다. 새 부인을 놔두고 바로 또 방랑을 할리야 없겠지만 언제 다시 방랑의 길로 접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익균은 언제가인지 평창읍 시오리길의 천동리로 이사하였다. 아마도 익균은 결혼을 하며 이사한듯 하고,  익균이 어린시절 노비를 따라 갔던 황해도 곡산의 봉산지씨들이 이곳 천동리, 음암리, 마지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점도 감삿갓의 子 익균이 이곳 천동로 와서 살게되는 점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 안동김씨 휴암공파 김병연 족보)

 

< 본인의 예전 글중에 일부를 리필합니다>

http://blog.daum.net/kkks1/1509  천동리 도마치골에 김삿갓과 아들 익균의 묘는??(추정분)

 

임금님도, 또한 만 백성이 친근하게 사랑하는 김삿갓은 오히려 인간세계의 그늘속에서 멀리 인간을 피해 유랑길에 오르며 죽을때에도 방랑의 길위에서 객사를 한다. 이 얼마나 어렵고 또한 슬픈 일이랴.

하지만 더욱 슬픈점은 그는 죽어서도 인간세계로 다가오지 못한 점이다. 인간을 그리며 만 백성을 사랑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죽어서 150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인간세계 뒤에 숨어 잠들고 있다.

 

영월의 김삿갓 묘역은 잘 갖춰지고 화려하지만 영문도, 기록도 없는 묘이다. 기실 김삿갓은 평창읍 천동리 하 도마지 산속에 봉분도 사그라진 폐묘 분위기에 묘 중앙엔 그러한 일면도 모르는 철없는 소나무가 자라 세월의 무상함만 나타내고 있다.

이제 본인은 이 글을 정리하면서 영월의 김삿갓묘에 대하여 본인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 흥행이 어쩧던간에 본인은 진실 그 자체를 추구함에 영월에서 김삿갓 스토리에 위배되는 듯한 의혹을 일전 글에 충분히 게시하였다.

 

한 시절 국운이 쇠락하는 시기의 모순의 시대를 몸으로 저항하여 방랑의 길에서 이 슬픈 현실을 해학으로, 질타로 자아내던 위대한 시인임에 지금도 모든 사람들을 그를 반겨 찾지만 실상 그는 지금까지도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다.

평창읍 천동리 하 도마치 산속에서 아들 익균과 함께 그저 햇볕만 보며 외로이 잠들어 있다. 풍수도 입각치 않은 산세에 바람이 불어도, 추위가 다가와도 막아줄 곡장도 없이 온 몸으로 버티고 잠들어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 한구석의 찌든곳을 시원하게 해주는 詩聖 김삿갓의 잠든 곳을 정말 알아냈다.

 

시인이여!

이제 이곳에서 방랑의 삿갓을 벗어서 내려 놓으시고 양지바른 이곳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모든 백성을 사랑하면서 길이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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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국이 김삿갓 묘라 주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평창 천동리의 김삿갓 묘가 자연스레 세상에 알리어졌슬 것이다.

김삿갓의 자 익균은 천동리에서 서당을 하며 친구들과 친숙하게 생활하였던듯 보여진다.

어느 겨울날 익균은 응고개 아래 섶다리에 미끄러져 익사하였는데 친구들은 김삿갓 묘 바로 아래에 묻어주었다.

이곳에 전해지는 이야기엔 아버지 김병연(감삿갓)묘를 친구들 도움으로 이곳에 쓰며 한 잔술에 이제 아버님을 찾아 모셨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고 다음에 난 아버님 아래에 묻힐것이라고 농담반 진담반,,,

여기에 익균이 죽자 친구들은 정말로 죽어서라도 아버지와 함께 있으라고 김삿갓묘 제절 바로 아래에 묻어 주었다. 김삿갓 묘를 만들어 준 친구들이 익균의 묘를 만들었기에 그 묘의 형태와 제절의 모양세가 동일하다

 

이제 천동리 일부 주민은 부친의 유언이라기 보다는 간)곡한 부탁에 지금까지 증조부의 친구였던 익균과 그 위의 김삿갓묘를 벌초를 하며 가끔 올라 다닌다 한다. 그러나 이제 연루하신 주민들이 힘겨우실텐데,,, 언젠가는 이마저 끈어지면 김삿갓은 세상과는 영 이별일것이라는...

 글쎄... 그래도 주유천하에 군사 분계선이라는 철조망 넘어 북한을 드나들며 김일성이를 질책하던 이미지의 김삿갓 ,,아니 그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방랑시인으로 많은 사람에게 문학적 감정을 불어 넣어준 위대한 시인으로서...

이제 그의 묘는일년에 한번 찾아가는 동리 주민들의 벌초도 없어진다면 인적이 끊긴 별 세계로 갈듯하다.

 

시인이여!!

여정도 도정(道程)도  먼 길도 아닌 이제 정녕 무(無)로 가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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