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읍 응암리의 김삿갓 시비(詩碑)
江 家
金 秉 淵 (김삿갓)
1807~1863
船頭漁躍 銀三尺
門前峰高 玉萬層
流水當窓 稚子潔
落花入室 老妻香
뱃머리에 물고기 뛰어오르니 은이 석자요
문앞에 산봉우리 높으니 옥이 석자라
창 바로 앞에 물이 흐르니 어린아이는 늘 깨끗하고
떨어지는 꽃잎이 방으로 날아드니 늙은 아내까지 향기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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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들은 평창읍 응암리로 왼쪽으로 강 여울을 건너가면 김삿갓의 둘째아들 익균이 살았던 천동리이다.
첫째인 학균은 형 병하에게 양자를 보내고 둘째인 익균이 대를 잇게 된다. 지금도 천동리 주민들은 익균이 천동리에서 훈장을 하며 살았으며 그가 공부를 가르치던 서당터와 생가 터도 정확히 알고 있으며 돈동리 산자락(하도맟)의 간간히 그의 묘에 올라 벌초도 하고있다 한다.
그러기에 위 詩는 가령 김삿갓이 아들 익균의 집을 방문하였거나 아니면 먼 발치에서 보고 갔다면 주천서 들어올때는 응고개를 넘는게 빠르지만 영월쪽에서 들어올때는 바로 이 응암리 강을 건너서 위 시에서처럼 보이는 강 건너 높은 절벽을 바라보며 응암리 마을을 지나서 천동리로 들어가야 한다.(물론 마차애서 공기리를 통하여 도마치를 넘는 코스는 강을 건너지 않기에 장마떄엔 용이한 도로일듯 하다)
이 험한 절벽에는 두 개의 굴이 있으며 아래 하험굴은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공간과 물이있어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 4번대가 백봉령을 넘어 목적지 원주 강원 도영을 점거하러 가는 길목에서 정선군수 정사읍은 항복하였지만 평창 군, 관민은 항복이 아니라 항전의 기치를 높이고 이 굴에 숨어 들었다가 발각되에 왜구에 짓밟히게 되는 유서깊은 굴이다.
위의 江家란 김삿갓의 詩는 어쩜 지금 우리의 눈에도 비칠듯한 해맑은 동리의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이 詩가 가장 적절히 표현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응암리로 김삿갓은 이 마을을 지나 천동리 아들 집으로 갈때의, 또는 아들 집을 먼 발취에서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려 방랑을 떠날때에 눈에 선한 가정사를 읊은 한 쪽의 그리움의 詩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익균은 영월 와석리 생가에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김삿갓 결혼 8년째란 기록으로 보면 익균은 3~4세 나이) 새 어머니를 맞이하였으며 그가 천동리에서 훈장을 하자면 노루목 삼거리에서도 7km 길도 없는 깊은 골짜기 속에 살았기에 아마 이 시절 어린 나이에 부친(김삿갓)에게서 한학을 배운듯 하다.
이렇게 본다면 김삿갓은 한 평생 방랑을 한 것이 아니라 1차 방랑에서 돌아와 익균을 낳고 부인이 사망하자 새 장가를 들고 얼마간 다시 가정 생활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그의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익균이 출가하자면 산속보다는 마을로 내려와야 하고 그래서 행세 좀 하는 양반들이 없는 천동리로 이주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김삿갓은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홀로 남겨둔 자식 걱정에 아마도 천동리를 좀 다녀갔으리란 예측이다. 이 비석은 김삿갓이 자식 집을 멀리 떠날때의 그리움의 詩같기도 하며 응암리에서 재치있게 이러한 시비를 제막한 것도 우연만은 아닐것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이 비석은 현 제방 위보다는 200m쯤 올라가 아래 사진의 절벽앞에 있었으면 더욱 운치가 있는 詩가 될듯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은 무엇인가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이는 곳은 응암리 매화마을 건너 절개산의 절벽
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인용부 1>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ㅃ
<인터넷에 있는 이야기를 발췌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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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 諱炳淵(휘병연) 선조의 모친 咸平李氏(함평이씨)와 아드님 되시는 학생공 諱翼均(휘익균) 묘역을 현지 확인하기 위하여 府尹公(부윤공) 諱榮鎭(휘영진) 선조의 후손들 연락처를 찾고 있습니다. - 제언자 : 경기도 양주시 회암리 난고 휘병연 선조 생가지 기념화 사업회의 향토 작가인 李殷模(이은모)씨 - 묘역주소 :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천동리와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신대마을(족보상 조우화 : 화장한 것으로 되어 있슴). - 府尹公(부윤공) 諱榮鎭(휘영진) 선조의 후손 : {佑東(우동), 英東(영동), 晳東(석동), 星東(성동), 升東(승동), 明東(명동), 翊東(익동), 潤東(윤동), 五顯(오현), 奉顯(봉현), 豊顯(풍현)}씨나 그 후손분들, 그리고 이 분들을 아시는 분은 휴암공파종회(관동 016 227 7793)에 연락 주시면 대단히 감사 하겠습니다. |
623 | 府尹公(부윤공) 諱榮鎭(휘영진) 선조의 후손들 연락처를 찾고 있.. [1] | 김관동 | 2010-03-18 | 1233 |
ㅃㅃㅃㅃㅃㅃㅃㅃ<인용부2>ㅃㅃㅃㅃㅃㅃ
제 19회 난고문화 축제………… 동창회방
2016. 10. 1.(토요일) 1997년 강원도 영월에서 오김의 선조이신 난고(蘭皐 炳淵 1807~1863)선생을 추모하는 문화제를 속칭 “김삿갓 문화제”라고 명명하여 매년 10월 연휴를 기하여 행하여 온지 어언 19회가 되었다. 그동안 전임 고 연동(蓮東)회장 재임 시 난고 문화제를 시작하는 고유제를 올린다고 연락이 와서 참석하기 시작하여 우리 문중과는 인연이 되어 매년 기념행사로 빠짐없이 대종회와 연대하여 일박(一泊)씩을 하면서 까지 버스 한 대를 전세 내어 참석하곤 하였다. 그러던 중에 경기도 양주(揚州)에서 난고선조를 연구하고 심취(深趣)했던 작가 이은모씨가 난고의 묘소를 발견하기에 이르러 당시의 집행부였던 용현(容顯) 회장의 인솔로 평창에 있는 난고 2남인 익균(翼均 1830~1884)의 서당터와 묘지가 발견되어 직계후손들과 함께 2010. 12. 16일 현장을 답사하고 영월의 난고 문화제를 참석하지 않기로 결의를 하였었다. 그 후 난고제는 타 문중과 화수회에서 참석을 하는 이변이 이루어졌으며 요로에서 내 조상을 위하는 행사에 구태여 불참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권고가 있어오던 중 집행부가 석한(䄷漢)회장으로 바뀌어 18회 난고제부터 문중에서 주관하여 행사에 참례하기로 하여 준비를 하여 왔는데 석한회장이 갑자기 급체하여 입원하기에 이르러 전임 용현회장을 주축으로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아침 6시 30분에 지하철 1호선 신길역에서 출발하여 사당사거리 한전앞에서 잠시 정류를 한 후에 경부선 죽전 정류장에서 양동 사무국장과 합류하여 10시가 조금 넘어 행사장에 도착하였다. 고유제는 초헌관에 박선규 3선군수가 임기 마지막으로 헌작을 하였고, 우리문중에서 병린(炳麟) 고문이 아헌을 하였으며, 함평이씨문중에서 종헌을 하기로 하였으나 참석이 늦어져 영월 문화원장이 헌작을 하였다. 고유제를 지내고 난고 주거지라는 곳을 찾아 올라갔다. 수 년 전에 글 쓰는 친구와 연재물을 쓰기위해 풍수계의 지형(地形)학자 조수창교수와 동행하여 수명(受名)하였던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의 이름과 함께 난고 산소에서 받았던 옥녀세족형(玉女洗足形)을 돌아보았다. 산을 내려와 군에서 제공하는 식권을 가지고 부녀회에서 점심대접을 하고 있었다. 바로 먼저 도착하였다는 대구화수회장 부웅(富雄)씨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동안 난고 문화제는 다각도로 발전을 하여 지명(地名)도 2009년 9월 영월군 하동면에서 김삿갓면으로 개칭이 되었으며 연륜이 쌓아가는 만큼 시와 풍류를 가미한 하나의 축제로 성장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선생이 가신지 153년에 이르러 하나의 문화 축제로 연륜이 쌓아가는 것을 직시하면서 저물어 가는 한해를 헤아려보는 걸음이 되기에 충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용 끝>**************************** 묘의 위치는 평창읍 천동리 산 23-3번지로 삼방산의 서쪽 끝자락의 야산속에 길도 없는곳을 약 200m 오르면 익균의 묘가 나오며 4~5m위에 그의 묘와 형태가 동일한 묘가 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김병연(일명 김삿갓)의 묘라한다. 아마 이곳을 찾아오는 시인이나 관광객이 좀 많아진다는데 지금으로선 이곳에 안내판도 없는 실정이고 찾아가기가 힘들기에 위 주소로 찾아가시면 나뭇가지에 검은 리본을 따라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지난해에는 평창의 향토사학자겸 후배 신인이 벌초를 하였으며 안내 표지판이라 세울 계획이나 이를 가칭 김삿갓의 추정 묘로 표찰을 붙이려 하엿지만 이후 위 인용글을 보고서 추정분이라 하기도 후손분들의 생각과는 달라지기에 모순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곳을 올라보면 아래의 익군의 묘는 주변에 돌을 주어 3단의 축대를 싸아 올리고 봉분은 곡장처리는 안 였였으며 제절은 시원하게 넓은 상태로 100여년이 흐른 지금 봉분은 무척이나 작아져 있다. 그리고 그 위가 아버지 김병연의 묘로 동일한 형태로 축대는 자연 돌멩이로 한단만 쌓아져 있으며 폭삭 물러앉은 봉분은 그 형태만 알아볼 수 있으며 봉분엔 지름 20cm가랑의 소나무가 비스듬히 자라나고 있다. 천동리 주민 김*한씨의 말에 의하면 직게손들은 도미해 있으며 2년전에 모두들 다녀갔으며 그때에 주민 김*한씨도 같이 올라 제를 지내는 것도 함께 했다 하며 그의 말에 의하면 문중과 직계손들은 이미 이곳을 확인하고 여섯번이나 성묘를 다녀갔다 한다. 영월을 가지 않겠다고 결의한 것은 아마 다녀오면 폐단이 따르는듯 한, 들리는 바의 내용은 함구하겠습니다. ***************************************************************************************** 아래 사진은 김삿갓이 영월 백일장(향시)에서 나이 스무살때 장원급제한 글이라 합니다. 190년전의 글로 서 아마도 본인 생각으론 종이 질이 탈색이 되어 더 누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티탄계열의 화공약품 백색도 태양 자외선이나 오랜 시간 지나면 백색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일장에서 땅바닥에 없드려 쎃다기엔 오와 열이 너무도 정확한듯 하며 글 속의 필력중 하니 일자의 굵은 체는 오랜 필력에서 나타날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보다 김삿갓은 나이 여섯살때 조부가 형행되고 14년 후 그는 지방시에서 이 문제를 논하기엔,,,지금처럼 정보나 책이 많은 것도 아닐테고 산골에서 누구와 교류도 없이 10년전 역사를 장문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의 이해가 곤혹스럽고 (그 내용을 읽어보시면 광범위한 역사라는) 아마도 후일 누가 그를 반격한다는 의미로 쓴 것은 아닌지.. 마치 노진이란 시인이 썼슬 것이라 추정하는듯 하다.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 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西來消息慨然多 (서래소식개연다) 서북으로부터 개탄할 소식이 들려 오기에 是誰家食綠客 (문시수가식록객) 어느 가문에서 나온 벼슬아치냐고 물어 보았더니 家聲壯洞甲族金 (가성장동갑족김) 문벌은 명성이 드높은 장동 김씨요 . 名字長安行列淳 (명자장안행열순) 항렬은 장안에서 소문난 순(淳)자 돌림이 아니더냐 이러한 시를 쓰면서 안동김씨에 순자 돌림이라 쓰면서 김삿갓은 그것이 자기 조부 돌림자인지도 몰랐다 한다면 참으로 우서운 일이고 또한 이 시는 백일장에서 제출하는 과거용 답안지의 서술방식도 아닌듯 하다. 강효석(姜斅錫)이 정리한 야사집인 " 대동기문"에 실린 정확한 내용은 "사실 김삿갓이 썼다고 알려진 시는 노진이란 자가 지은 김삿갓 조부 시"로,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영월 과거장에서 김삿갓이 직접 쓴 시로 와전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것으로 추정된다 http://blog.daum.net/kkks1/1289영월은 김삿갓을 어찌하고 있는가??(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 영월 재미있습니다. 그러면 이 과거용 답안지는 위작인가요?? 그만좀 웃깁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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