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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리에 김삿갓

김삿갓은 죽어서도 세인들을 멀리 운둔하고 계신가??

김삿갓은 죽어서도 세인들을 멀리 운둔하고 계신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蘭皐 김병연에 대한 영월의 김삿갓묘 전개과정의 이야기속에서 과연 무엇에 범실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고져 합니다.

김삿갓의 시는 형식에 얽메이지 않는 파격성에 풍자와 해학으로 삐뚤어진 이 세상을 풍자하고 양반들의 기성의 권위에 대한 희롱조등에 통쾌한 웃음을 선사하기에  인터넷의 블로그나 카페등엔 김삿갓에 대한 이야기에 무수히 많고 또한 김삿갓이 지은 詩가 아닌 논지를 지닌 詩임에도 유머와 해학이란 김삿갓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듯, 김삿갓의 詩세계로 끌려들어 둔갑되즌 것 또한 김삿갓의 유머와 풍자시의 독보적 세계란 위상을 나타낸다.

그래서 인터넷에는 영월의 노루목의 김삿갓의 묘를 관람한 수 천명의 기행문엔 한결같이  김삿갓의 노루목 묘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유독 본인만은 김삿갓의 묘는 평창에 있다는 전혀 전혀 다른글로 김삿갓의 묘는 평창읍 천동리 하도마치 산자락에 있으며,  사후 150여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세인들을 멀리하고 숨어서 운둔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본인보다 이전에 이곳을 다녀가며 이곳의 역사를 이해하신 분들도 많고 영월 역사팀원 분들도 다녀갔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글은 전혀 없는데 본인은 역사의 진실을 위하여 밝히고져 함이지 영월을 탄함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영월로서는 김삿갓 문학을 세상에 알렸던 노력은 존중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김삿갓이 오늘 영월 노루목을 다녀간다면 어떠한 기분일까 하는,,, 아마도 정가산 충절사 탄 보다 더한 임 영월을 탄하노라하는 詩 한수 더 지었슬듯 싶지 않으련가?? 

 때로는 가끔  나의 블로그에는 "김삿갓"이란 키워드(검색어)가 뜨고 김삿갓에 대해  여러 게시글을 읽고 간다. 본인의 김삿갓글의 이야기에 지금껏 아무도 없던 내용의 글로서 흥미로워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면 혹시, 나의 주장에 반하는 영월인이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인의 김삿갓론의 다수의 글에 딱 하나 빠진것은 세상에 한 사람의 묘가 두 개인점은 하나도 없듯이 나의 주장대로 평창에 김삿갓 묘가 있다고 한다면  영월 노루목의 김삿갓 묘에 대한 반박론도 있어야 할텐데 이런 글은 상대를 비난하는 글이라 본인으로서는 필요치 않았기에 지금껏 쓰지는 않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본인에 김삿갓론의 글을 꼼꼼하게 읽고 간다면 이왕지사 김삿갓 묘에 대한 본인의 이해력의 글까지도 다 읽어야 완성된 모습을 연상할 수 있기에 이 글을 씁니다. 이러한 내용은 남겨 두었던 점은 본인의 김삿갓 론에 문제가 제기되면 그때 정히 쓰려던 글을 정리해 게시합니다.

<이문열의 김삿갓론>

작가 이문열은 그의 소설 「시인」에서 "김삿갓은 어려서부터 이미 조부의 역적행위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로 이것은 자신의 출세길이 막는 것이기에 통탄하고, 그 한을 백일장에서 글로 표현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젊은 시절 한동안은 서울의 권세가를 기웃거리며 조부의 행적을 극복하고 출세길을 꿈꾸었으나 현실의 한계를 깊이 절감하고 그제야 마침내 삿갓을 쓰고 전국을 떠돌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본인은 이미 일전에 이와는 다른 견해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김삿갓은 나이 스물에 영월읍내 백일장에서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한다"는 시제로 장원급제 하였는데 그날 저녁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김익순이 자기 조부인지도 알지 못하고 추상같이 준엄하게 꾸짖었기에 씻슬 수 없는 죄인이라 하늘을 볼수도 없는 마음에 한평생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로 접어 들었다 한다.

*「論 鄭嘉山忠節死 嘆 金益淳 罪通于天 (논 정가산충절사 탄 김익순 죄통우천)」

이러한 이야기는 노진(盧進)이란 훈장이 김삿갓을 관서지방에서 쫓아내려고 지은 시라는 사실이 <대동기문(大東奇聞)>에 분명히 나온다. 이것이  후대에 와전되어 정설처럼 굳어진 것이라 본다.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정약용의 유배로 인하여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연은 의사가 되었고 학유는 문인으로 농가월령가의 지은이이다.

이라한 예에서 보듯 김삿갓은 이러한 통탄할 일에 진위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미 폐족으로서 호패에 빨간 줄이 간 것으로 과거에 응시자격이 없기에 권위있는 작가들이 떠든다고 결코 옳은 이야기일 수 없다.

더군다나 여기서 필자의 생각은 영월에서 백일장은 지방의 향시로 과거의 사마시격의 초시에 해당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이 시기에는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고 숙종때의 속대전에 명백히 나온다.

한평생 삿갓을 쓰고 다닌것은 조부에 대한 역적행위를 통탄하고 회개하는 마음이라 생각하는듯 이야기들 하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선방에 스님이 될 것이지, 왜 기생과 동거를 했다는등 그런 이야기들이 풍미하는가? 만약 김삿갓이 스님으로 귀의하여 평생을 보냈다면 스님이 기생과 동거했다는 우스개 소리까지는 비약되지 않았슬거라 본다면 조부에 대한 회개의 마음에 삿갓을 쓰고 방랑하였다는 것에 맞는 논리가 아니란 점이다. 

 이러한 이해는 이미 앞전의 게시글들에서 논고한 바 여기서 생략하며, 삿갓이란 조선시대의 중, 상인들의 쏠라(헷빛 가리개) 모자이며 더군다나 머리를 삭발하고 탁발을 하는 스님들에게는 필수인 복식의 하나란 점이며 아마 김삿갓도 유랑의 길에 필요한 물건이란 점이지 그것이 김삿갓만의 전유물의 트레이드 마크는 아니란 점이다. 그러기에 조부에 대한 회개의 마음의 표현으로 삿갓을 쓰고 태양을 가리고 유랑의 길을 가게 만든것이 아니라 뙤약볕아래 눌러쓰고 다니던 모자이기에 속죄의 마음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것은 어패이리라

****<다음 백과사전 검색인용>**********

과거 응시자로 하여금 각각 자신의 본관에서 시험을 보게 하고, 만일 다른 지방에서 향시를 치른 사람은 회시에 응할 수 없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도 각과의 초시(初試) 중 하나로 향시를 실시했다.

모반죄와 강상죄와 같은 중죄인의 자손 및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서용되지 못하는 자, 재가했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자손, 서얼 등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했다.

8도의 향시 가운데 생원·진사 시험인 경기향시는 1417(태종 17)에 폐지되었다가 경국대전에서 부활되었으나 속대전에서 다시 폐지되었다. 속대전은 1746년에 인쇄, 반포했다

그리고 김병연은 1807(순조7년)에 출생하여 1863년(철종 14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영월이 이야기하는 나이 스무삻에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하였다는 것은 1827년에 해당한다.

영월은 이 문제도 확인하여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역사적 범위내에서 역사를 사실로 수정을 히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백과사전의 기록으로 볼때 김삿갓은 과거응시 자격도 없었으며, 김삿갓의 나이 스물시절에는 과거제가 패지된 상태이다. 또한 영월에서 말하는 백일장이란 지방의 향시라고 본인은 판단하는데 이에 그냥 문학적인 백일장이기에 과거와는 상관없다고 변명하신다면 그럼 당시 영월의 인구는 얼마이고 그 중에 한문을 익히고 하는,,이러한 문화가 있슬 수 있었던 문화시대인가 반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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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석의 회고담에서>

(인용부)

우리 일행은 천신만고하여 마침내 와석리의 노루목 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이라는 것은 이름뿐이고, 개울가 좌우편 언덕배기에 서너 채의 집이 쓸쓸하게 매달려 있을 뿐인 곳이었다. 박영국씨가 경사진 언덕배기 위로 달려 올라가더니, 화전 한 귀퉁이에 오직 하나뿐인 무덤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이 무덤이 바로 김삿갓의 무덤입니다." 첫눈에 보아도 외롭기 짝없는 무덤이었다. 그 무덤 앞에는 높이가 두어 자 가량 되어보이는 묘비가 서 있는데 그 묘비에는  "蘭皐 金炳淵之墓" 라는 일곱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묘비에 "蘭皐 金炳淵之墓"라는 일곱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는 표현에서 이는 근자에 세운 비석인줄 알면서 글자는 선명하다고 말할 수 있슬까?? 그러기에 대 문장가라 문장에 또한 빈틈이 없슬 것이기에 이러한 일곱글자가 선명하다라는 표현은 작가가 이 글을 쓸때에는 이 묘에  과거서부터 비석이 존재해 왔다고 믿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래 김삿갓묘 발견당시의 사진들을 보면 묵밭 언덕아래 무드러져가고 어렴풋한 윤곽만 드러나는 무연고의 묫잔등 하나 발견하였지 비석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보인다. 그러기에 작가의 글은 이 묘가 김삿갓 묘의 비석이 원래 있었다고 표현한 것은 작가가 속앗든 아니면 알면서 독자를 이 방향으로 유도하는 둘 중의 하나란 점으로 결국 독자는 이름도 선명하다라는 말에 의해 앳 부터 비석이 잇엇다고 단정하는 것이 정비석의 말에 속앗다는 결론을 가지게 된다.

이런 오류는 명망있는 작가들의 말에 세인들은 믿고 따르기에 딜반인들은 이 묘가 김삿갓 묘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부분 하나 하나에 김삿갓 묘라고 인정하는 방볍론에 정상적인 발로는 아니란 점을 이야기 합니다. 

 

<유흥준의 김삿갓 기고에서 >

그러면 다음으로 유흥준의  「나의 문화 답사기」 8권 p63 의 글을 인용합니다.

난고 김병연(김삿갓)의 묘소는 영월의 향토사학자인 고 박영국 선생(66세, 전 농협영월지부 조합장)에 의해 1982 10 17일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속칭 노루목에서 발견되었다. 신민선(훗날 국회의원 당선)씨에게 김삿갓의 묘가 하동면 노루 고개에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하동의 원로인 강희준옹께 문의, 그 당시 영월 창절서원 원장이던 김영배옹을 소개받고 김옹으로부터 와석리 노루목 묵밭에 김삿갓 묘가 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한다.

김영배옹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김옹의 증조부인 한성부판관 김석봉씨가 흥선대원군의 지적을 받아 낙향하여 와석리에 살던 중 자신의 구명을 위해 대원군을 만나려 다시 상경(1872년경)하였을때 안동 김씨 중 유일하게 대원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김병기(김병연과 같은 문중이자 항렬자가 같음)를 만났는데 양백지간(태백산과소백산사이)인 영월과 영춘어간에 김삿갓 묘소가 있는데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알게 된 사실이 후손인 김영배옹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박영국 선생은 1982 10 17 74세의 고령인 김영배옹과 함께 20리 산길을 걸어 현지에 도착, 석리에서 3대를 살았다는 이장 이상기(1982년 당시 74)를 만나 김삿갓의 묘소를 확인하고 난고 김병연이 사망한지 119년 만에 드디어 그의 묘소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당시 이상기옹의 증언에 의하면 김삿갓의 묘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일제시대에도 일본 언론인들이 찾아와서 확인 하였고 의풍국민학교 교사도 확인 했다고 한다.  (故 박영국씨의 말- 김삿갓묘는 내가 발견한것이 아니지요. 대대로 이 산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김삿갓 묘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내가 확인해서 세상에 알렸을 뿐이지요...)

 

유흥준 교수는 이 글의 마지막에서 "이런 고증만으로 김삿갓 묘소라고 확증지울 수 있슬까 싶기는 하지만 ~~~" 하고 이 묘에 회의적 생각을 남기고 있다.

위 인용글에서 당시 조정에 안동김씨의 대표주자 영의정 김병기가 말하는 양백지간에 김삿갓의 생가는 있지만 묘가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는 말인가에 이는 역사적 사료로서는 부정확한 느낌이기에 여기에 소명이 있었어야 한다.

또한 일제 강점시 이 근방의 일인들도 문헌적 사료나 문중에 후손들이 제사를 드리는 이야기등의 사료적이 아니라 이러한 소문에 근거하여 다녀간듯 하며 의풍국교 교사도 이런 루머성 이야기를 확인한 범주를 넘지 못하는듯 사료됩니다.

 

 아무튼 그의 이러한 노력은 당시 이 지역 국회의원인 심명보로 하여금 전두환 전대통령의 후원금을 주선하게 했고 그 자금으로 김병연 묘소 주변 땅 5천여 평을 매입, 유적지로 조성하였으며 영월군은 이 곳에 이르는 도로를 확충하여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사진으로 보는 발굴당시의 김삿갓 묘> 

아래의 사진들은 김삿갓묘의의 묘가 노루목에 있다는 풍문에 노루목 어느 묵밭에 묘를 발견하여 김삿갓 묘라고 이해하는 영월인들의 이야기 입니다.

▲ 김삿갓묘 찾기위해 모인 영월의 유적 답사팀 , 원내는 묵밭 언덕아래에 무연고 묘 한 기를 찾았다.

▲ 원내엔 손질을 가하지 않는 원래모습의 무연고 묘.

무연고 묘에 봉분을 돋우고 손질을 시작했으나 윗글에 정비석의 말처럼 "난초 김삿갓지 묘"라는 일곱글자가 선명하다는 비석은 원래의 묘에는 없다. 언덕배기 아래에 묘에 붕분을 돋구었지만 비석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 비석은 없었다.

<인터넷에 있는 이야기를 발췌해 봅니다>

제 19회 난고문화 축제|

ㅇㅇ(김ㅇㅇ) 

조회 34|추천 0| 2016.10.02. 14:31 

2016. 10. 1.(토요일)

1997년 강원도 영월에서 오김의 선조이신 난고(蘭皐 炳淵 1807~1863)선생을 추모하는 문화제를 속칭 김삿갓 문화제라고 명명하여 매년 10월 연휴를 기하여 행하여 온지 어언 19회가 되었다.

그동안 전임 고 연동(蓮東)회장 재임 시 난고 문화제를 시작하는 고유제를 올린다고 연락이 와서 참석하기 시작하여 우리 문중과는 인연이 되어 매년 기념행사로 빠짐없이 대종회와 연대하여 일박(一泊)씩을 하면서 까지 버스 한 대를 전세 내어 참석하곤 하였다.

 그러던 중에 경기도 양주(揚州)에서 난고선조를 연구하고 심취(深趣)했던 작가 이oo씨가 난고의 묘소를 발견하기에 이르러 당시의 집행부였던 용현(容顯) 회장의 인솔로 평창에 있는 난고 2남인 익균(翼均 1830~1884)의 서당터와 묘지가 발견되어 직계후손들과 함께 2010. 12. 16일 현장을 답사하고 영월의 난고 문화제를 참석하지 않기로 결의를 하였었다.

  후 난고제는 타 문중과 화수회에서 참석을 하는 이변이 이루어졌으며 요로에서 내 조상을 위하는 행사에 구태여 불참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권고가 있어오던 중 집행부가 석한(䄷漢)회장으로 바뀌어 18회 난고제부터 문중에서 주관하여 행사에 참례하기로 하여 준비를 하여 왔는데 석한회장이 갑자기 급체하여 입원하기에 이르러 전임 용현회장을 주축으로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아침 630분에 지하철 1호선 신길역에서 출발하여 사당사거리 한전앞에서 잠시 정류를 한 후에 경부선 죽전 정류장에서 양동 사무국장과 합류하여 10시가 조금 넘어 행사장에 도착하였다.

고유제는 초헌관에 박선규 3선군수가 임기 마지막으로 헌작을 하였고, 우리문중에서 병린(炳麟) 고문이 아헌을 하였으며, 함평이씨문중에서 종헌을 하기로 하였으나 참석이 늦어져 영월 문화원장이 헌작을 하였다.

고유제를 지내고 난고 주거지라는 곳을 찾아 올라갔다.

 수 년 전에 글 쓰는 친구와 연재물을 쓰기위해 풍수계의 지형(地形)학자 조수창교수와 동행하여 수명(受名)하였던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의 이름과 함께 난고 산소에서 받았던 옥녀세족형(玉女洗足形)을 돌아보았다.

산을 내려와 군에서 제공하는 식권을 가지고 부녀회에서 점심대접을 하고 있었다.

바로 먼저 도착하였다는 대구화수회장 부웅(富雄)씨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동안 난고 문화제는 다각도로 발전을 하여 지명(地名)20099월 영월군 하동면에서 김삿갓면으로 개칭이 되었으며 연륜이 쌓아가는 만큼 시와 풍류를 가미한 하나의 축제로 성장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선생이 가신지 153년에 이르러 하나의 문화 축제로 연륜이 쌓아가는 것을 직시하면서 저물어 가는 한해를 헤아려보는 걸음이 되기에 충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용 끝>****************************

 이 이야기는 김삿갓, 난고 김병연의 안동김씨 휴암공파 종친회장님의 글로서 평창에서 김삿갓 아들 익균의 묘를 발견하여 영월 난고 문화제의 고유제에 참석에 관한 약간의 부정적 이유이다. 이에 관해서는 본인은 일전 다른 글도 게시한바 있습니다.

 익균의 묘는 평창에 있는데 그것이 익균의 부친 김삿갓과는 무슨 고리를 작용하기에 이런 말을 하였슬까요?? 

 저의 천동리 익균묘 답사의 기억을 기술하면 천동리 하도마치 골에 평지에서 약 150m 오른 길로 산의 두 峰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속에 인적이 없어 길은 없지만 그곳엔 익균의 묘가 있는데 봉분은 이미 반이상이 축소되고 곡장은 없으나 제절은 동그랗게 일반적으로 좀 넓은 모양을 하며 축대는 대략 3단의 호박돌을 쌓아 제절을 만들었다.

 익균은 천동리에서 훈장을 했으며 어느 겨울날 이 동리의 친구들과 술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기에 섶다리에 미끄러져 물에 빠져 사밍하였다, 그러자 친구들은 그를 하 도마치골에 안장하였으며 친구분들의  증손분들까지 지금도 대신 벌초를 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익균의 묘 4~5m 위에 익균의 묘과 크기가 똑같고 제절 넓이도 비슷하지난 축대의 호박돌은 1단으로 가지럲 노여있는 묘에 봉분은 이미 오래되어 삭을대로 삭아 1m 미만의 봉분을 하고 있는데 이 묘는 누구의 묘일까??

묻지 않아도 아들 익균의 묘 위에 있으니 김삿갓의 묘인 점을 금방 알아채릴 수 있다. 이 긴글로 이해함보다 한번 다녀오시면 더욱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