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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리에 김삿갓

천동리 도마치골에 김삿갓의 김병연(추정분)과 아들 익균의 묘는??

천동리 도마치골에 김삿갓의 김병연(추정분)과 아들 익균의 묘는??

 

후세백작 2017.12.16 23:14

 

본인의 예전 글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이란 글에 의하여 평창의 향토 사학자 두분이 천동리를 다녀가며 천동리에 사시는 두 선배님의 증언을 통하여 김삿갓 묘(추정분)을 밝히고져 합니다.

 

http://blog.daum.net/kkks1/1501 김삿갓, 김병연(추정분)과 아들 김익균의 묘답사기/정원대

 

이곳의 위치를 아래의 다음의 지도로 설명합니다. 

(두 점에 아랫쪽는 익균의 묘이고 위쪽은 김삿갓 묘(추정)이다)

 

이 지도는 평창읍 남쪽 6km 아래 천동리로 평창과 영월을 가르는 삼방산 남쪽자락 끝에 샘이 솟는 마을로 옛날에는 정동 또는 현 행정명상 천동리 산 23-3번지에 김병연(일명 김삿갓)의 묘와(추정) 불과 4~5m  아래엔 아들 김익균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감병연의 子 익균은 천동리에서 훈장을 하며 살았다고 하며 익균의 묘는 이곳 천동리 동네분들에 의해 확인이 된다. 그러나 바로위에 둥그렇게 동일한 모양에 크기도 비슷한 모양의 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또한 이곳의 증언자 분들도 익균의 묘는 벌초했다 하면서 바로 위의 묘도 몇일내에 같이 벌초가 되었던 점으로 보이는데(추석 다음날 현장 답사)  같이 된 점으로 보이는데도. 그 묘에 대해선 김익균의 부친 김삿갓 묘가 분명할텐데 일체 누구의 묘라고는 하지 않는다. 왜 그래 금기사항이 되었슬까?? 

 

아마도 외부인이들이 아곳을 다녀가며 소상하게 기록을 인터넷 등지에 남길때. 김삿삭 묘라고 하면 증명하라는 등의 사후 논란을 대비한듯 일체 김삿갓 이야기는 회피한다. 그래서 증언자들이 필자에게는 선배님들이지만 이곳이 김삿갓 묘라 하는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었고, 따라서 김삿갓의 아들 김익균의 묘는 증언자들이 있지만 그 4~5m 위에 이곳이 공동묘지처럼 비좁은 것도 아니고 온 산속에 딱 두기의 묘가 위, 아래로 있는데 그 위의 묘는 누구의 묘인줄 모르고 다만 추정만 할 따름입니다.

 

이번 천동리 답사에서 김삿갓의 아들 김익균은 천동에 살았으며 이곳 천동리 정동 샘터옆에와 마지리에도  훈장의 서원이 있었으며, 어느 겨울날 진바리 (도돈) 주막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 응고개아래 섶다리를 건너는데, 섶다리 아래로 미끌어져 물에 떨어진 것을 친구들도 술이 취하여 건지지를 못하고 동네 장정들을 불러오는 사이 여울물속에서 얼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이 부분에서는  더 이상 제세히는 하지 않겠습니다)

 

김삿갓의 족보인 휴암공파 족보에는 익균의 부인이 먼저 사망하고 스무살, 열여섯 아들 둘이 있었는데, 익균의 친구들은(증언자님의 증조부)는 깊지도 않은 산속에 오솔길도 없는 소나무 골에 어느 묘 4~5m 아래에 익균의 묘를 썼다. 위의 묘가 봉분이 더 작아져서 불과6~70cm 정도 크기에 제절에는 30도정도 기울게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친구들이 익균의 묘를 어느 묘 아래에 쓴 점은 가상적이지만 익균은 부친을 찾아 모시려 대구등 여러 곳을 다녔고 화순에서 부친의 시신을 등에 지고 천리길을 달려와 장사 지냄에 사람들이 다닐 필요도 없는 한적한 야산 깊은 곳을 택하여 이장을 하였던 것이며, 이때도 술을 좋아했던 익균은 친구들과 음복하면서 이제 내 할일은 다한듯 하오, 앞으로 내 죽으면 부친묘 아래에  묘를 쓸 것이다라고 진담반의 이야기를 하였슬듯 하기에  막상 익균이 사망하자 그 친구들은 그래 너의 소원대로 부친묘 아래에 장사를 지내 준것은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 봅니다.

 

 천동리분들은 천동리 산 23-3번지, 이곳을 下 도마치라 부른다.

하 도마치는 평창의 진산인 삼방산은 동서로 길게 놓여 있으며 서쪽 끝자락이 천동리이며 이곳 삼방산 서쪽 끝에 하도마치란 곳의 약간 굴곡진 계곡을 따라 산을 약 200여m 오르면 아래에 김삿갓의 아들 익균이 묘에 먼저 다다른다. 경사지라 주변 돌들을 모아 3단쯤의 축대를 쌓고 제절은 막힘이 없이 좀 넓게 만든 묘가 보이는데 봉분은 50여cm정도로 내려앉고 몇 년전쯤에는 제절에 5센티 정도로 굵은 나무들을 수 없이 베어낸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익균의 묘 5m위에는 익균의 묘와 동일한 크기와 똑같이 둥근 제절을 한 묘가 하나 더 있는데, 봉분은 사그라져서 겨우 알아볼 수 있다.

처음 보고 느낌은 이 묘는 누구의 묘일까 궁금증보다는 아래 익균의 묘와 쌍둥이 묘같은 인상에 두 묘는 어떤 깊은 연관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아래 묘가 익균의 묘이라하는데 그럼 위에 묘는 김삿갓 묘 아닌가 하는 추정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이곳이 김삿갓 묘이라면 올해로 딱 150년 되는 묘로서 봉분은 사그라져 그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데 봉분 내엔 지름이 약 20센티 정도의 소나무 두 그루가 자랐으나 그 중 한 그루는 얼마전 쯤 베어지고 한 그루는 아마도 세월을 잘못 만난 김삿갓을 한탄이나 하듯이 비슴듬히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동묘지가 아니라면 대개는 산세 초입의 밭 가장자리 쯤에 묘를 쓰거나, 아니면 천동에서 도마치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그마한 야산인 매봉산 자락에 지사함 장군묘와 풍산 지씨 묘역처럼 야산의 보기에도 좋은 장소에 묘를 쓰는데, 익균은 부친 김삿갓 묘를 산방산 자락의 어느 이름없는 골에 쓴 점은 마치 청개구리 동화같은 모습이지만, 그래도 익균은 항간의 세인들의 질타에 부친의 묘를 산속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은둔하여 쓴듯 합니다.

  (영월의 김삿갓 묘는 당시 문화원장 박영국 옹이 학계에 건의하여 학계가 인정해준 묘로 그곳은 영월서 봉화로 넘는 길에 김삿갓 생가로 가는 삼거리에 누구도 잘 보란듯한 곳에 묘가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익균은 당시 천동리에서 훈장을 하였으며 권문세가 집안으로 부친을 찾고자 노력한 점으로 볼 때 전형적으로 예를 중시하는 가문일텐데 명당론 보다는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묘를 쓴 점에서는 영월 노루목 삼거리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짜기 입구의 학회가 인정하는 묘를 쓴 점과는 이룬다. 영월의 묘에서 향은 주작의 제일 봉 쪽으로 향하여 쓰고 있다고 한다.

 

안동 김씨의 명가이지만 대역죄인의 폐족이라는 피해의식인듯 세상이 두려워 마치 정약용의 여유당에서 "여"자의 뜻에 겨울철 찬물을 건너듯 조심하여 양반들을 피하여 영월 와석리 깊은 산골에 살았던것 처럼 죽어서도 대 역죄인이 가문이 해금이 되지 않은 상태라 그의 묘도 산속 깊이 숨어 조심하자는 의미였던 듯 하다.

 

 영월 노루목의 김삿갓 묘는 집으로 들어가는 골짜기 입구에서 나 여기있소 하고 소문이 지나가는 뭇 사람들에게 말을 건내려는 듯한 인상이다. 그럴려면 뭐하려 고생스럽게 땅 자리도 없는 와석리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살았슬까?

 

여기서 여러분은 어느쪽이 진실일까 하는 의문의 자답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습니다.

천동리의 하 도마치의 산세는 완만한 경사면으로 여기나 저기나 어떤 특정한 장소도 아니고, 그러기에 풍수론에 입각한 명당을 찾고자 한 흔적은 없는데 왜 산속으로 숨어들어 갔슬까? 그것은 세상의 무서움에 아직도 조심한 것인듯 하지만 그래도 햇볕이 드는 양지 바른곳으로 김삿갓이 바라보는 앞산은 그래도 맑고 정결한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다.

 

묘의 앞산은 솥뚜껑을 엎어놓은 형상으로 정제산이었는데 임진왜란때 권두문 평창군수와 군만들이 응암굴로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었으며 이때 군수의 소실부인 강소사는 천인절벽으로 뛰어내려 절개를 지켰기에 절개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절개산은 해학과 풍류를 즐겼지만 불의를 보면 못참고 쓴소리를 하는 김삿갓에겐 덧없이 좋은 곳으로 태양이 비춰오는 절개산을 바라보며 지조와 절개를 지킨 강절부님의 자태를 바라보면 구린네 나는 인간세계보다 더 맑디맑은 신선한 마음이었으리라.

이렇게 하 도마치 작은 골엔 이렇게 역사적 깊은 서정속에 맑은 향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김삿갓(추정) 묘역으로 원내는 봉분임

약 150여년된 묘로 현재 봉분은 50여cm으로 봉분임. 왼편에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 한 그루가 봉분에서 자라고 있다.

정원대는 벌초를 하면서 이 소나무를 베어 버릴까 하고 본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벌초는 좋지만 마음대로 하지 마시고 소나무 뿌리는 단단한 물체만 닿아도 뿌리는 두 가닭으로 벌어지는 양반나무이오니 그냥 두고 봅시다. 마치 김삿갓처럼 세월을 한탄이라도 하는듯 누워있는 인상인데 세월을 비웃기나 한듯 인상적이군요 하고 답을 하였다.

▲ 김삿갓 묘(추정분) 5m쯤 아래에 있는 익균의 묘(제절 끝에는 자연석 석축이 3단이며 위의 묘는 1단임)

 

▲ 김삿갓묘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원내는 익균의 묘이다(위와 동일한 묘임)

위, 아래 사진 모두 동일한 사진으로 익균의 묘로 증언자님들에 의해 확인됨.

▲평창의 진산 삼방산이 동서로 가로 놓이는데 서쪽 끝자락 천동리에 지금으로서는 무연고의 묘 두 기가 위, 아래로 나란히 있다.(천동리 산 23-3번지)

 

  이번 가을 너브산장님이 선배 시인님이라 다시 올라서 벌초를 한 것이고 그간 위의 증언자로 님들의 부친들이 하셨고,  또한 부친들의 부탁에 따라 증언자님들이 근근히 벌초를 하였던 것이다.

지난 11월 이곳을 찾았슬때 산 아래 입구에 사는 첢은 친구는 마침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영 형님이 이 산을 매년 가끔 오른다고 증언을 하고 있다. 밭도 없는 야산에 나무하기 위해서도 아닐텐데 매 해 올라간다면 이는 증언자 님들은 부친의 사망 이후에도 지금까지 이곳의 벌초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삿갓은 1807년 출생하여 1863년 전라도 화순에서 객사하였고 김삿갓을 알아본 동리의 어느 양반이 가묘를 하였다가 3년후에 아들 익균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 시신을 가져오는데...일제 강점기시 밀묘를 하기위해 시신을 거두어 멜빵에 등짐을 하였단는 이야기도 들은적 있는데 익균은 당시로서는 이와같은 방법으로 화순에서 천리길을 걸어왔슬 것이지만 아버님의 유해를 모시기에 발걸음은 가벼웠슬 듯 싶다.

 

여기서 지금의 사람들은 김삿갓 묘를 영월의 와석리로 알며 또한 그렇게 화석화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와석리의 김삿갓 묘는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 노루목에 위치하는데. 이는 당시 영월문화원장인 故, 박영규옹이 학계에 수차례 진정하고 건의한 바 인정받은 묘이지 김삿갓 후손들에게 인증을 받았다는 기록은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1982년 여름에 강원일보에서 이 기사를 읽었으나 어떤 학계인지는 기사화 되지 않았으며 또한 현 와석리 김삿갓 묘역엔 이와같은 유래가 각인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어떤 학회가 무엇을 증거로 와석리 생가로 들어가는 노루목의 무연고 묘를 김삿갓의 묘로 인정해 주었는가 하는 사실의 진위는 다시 검증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학계가 인정할시에 반대의 의견도 있었다 하며 김삿갓 묘의 사실여부를 검증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의혹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김삿갓 집안에서 이 묘의 진위여부는 쉽게 답을 구할수도 있겠지만 항간의 이야기처럼 어디엔가 명당자리에 앉았으니( 천동리 도마치 골을 지칭함) 이렇게 후대인들이 추모해 주지 않는가 하며 구차한 이야기는 필요없슬 듯도 하겠지만 와석리의 김삿갓 묘에 대하여서는 논리적으로 두가지 의문의 반증을 제시한다.

 

당시 박영규 옹과 이곳을 같이 답사한 평창출신의 역사가 황원갑님은 그의 글에서 김삿갓이 유랑을 하게되는 이유로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때문에 구만리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라는 글에서 김삿갓은 역적의 가문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울분에 뛰쳐나가 방랑을 하였다고 표현하는데 이것도 옳음 말씀이다.

하지만, 이로서는 이 문제에 역(逆)집합에 대입이 않되는 것은 조부 김익순이 사형을 당하고 멸문의 폐가문이 되어 가평에서 평창 미탄면의 율치로 이사를 하고도 이곳도 마땅치 못해 영월 와석리에 지금도 들어가기 힘든 산간오지에 이사 가는 이유에는 이의 설명으론 부족한 것입니다.

 

그는 방랑의 길에서 4년만에 돌아와 첫째 학균은 형 병호에게 양자를 보내고, 둘째 익균을 낳고 얼마후인지 다시 방랑을 하였는데 결혼 8년만에 부인 황씨가 죽자 다시 장가를 갔다면 이는 아마도 와석리로 이사하기 전일듯도 하지만 가문의 이런 파란만장한 위기 속에서 자신의 좌절감만으로 어린 자식을 두고 방랑을 하였다고는 이해가 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김삿갓에 대한 나의 사색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실오라기같은 깊은 산간오지로 숨어살게 되는 이유는 아래 링크의 본인의 글에 당시 시대상황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http://blog.daum.net/kkks1/1289 영월은 김삿갓을 어찌하고 있는가??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리를 다녀간듯,,)이라는 글에 서술하였듯이 구한말의 시대상황은 양반이 노비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는 횡포가 난무하는 시대로 당시 세도정치의 권문세가 안동김씨의 가문으로 역적이 되었다면 어느 동네건 양반, 사대부들은 그를 가만히 나두지 않고 린치를 가할 공포에 여기저기 이사끝에 아무도 없는 실오라기 산세를 타고 숨어 살았던 것이라 봐야 하는 것이다.

시대상황 점검이 중요한 것은 정선 아리랑의 제 이론은 검증도 없이 다시 그 위에 이론을 올려쌓아 역사에 합일되는 이론적 모습이 아닌 자동기술적인 매너리즘에 빠져들어 역사를 왜곡시키는 일이 비일비재 하기 때문이다.

 

정선은 아들을 가르치는 학습보도 자료에서부터 이젠 영서 아라리의 보고이자 최대 발상지인 한치 뒷산 청옥산 앞의 성마령에다 정선에서 이곳 미탄으로 아라리가 전래되었다는 비석을 세우듯 역사를 망각하고 왜곡하게 되는 것처럼 본인의 이러한 소견으로 볼때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함에는 당 시대상황의 역사 전반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란 점이다.


그러기에 구한말의 김삿갓 이야기는 고종임금도 재미있어 하였다 하는데 임금님은 한갖 재미만을 일삼은 것은 아닌듯 하다. 
당시 경복궁에는 연일 아라랑타령의 연회가 벌어지고 선교사 헐버트는 그의 아리랑 글에서 천일이 넘게 하루도 아리랑을 안 들은 적이 없다한다.

 

물론 이전에 간간히 전래되고 김열규나 몇 사람들의 아리랑 기록은 전하는데 본인의 생각으로는 고종은 당 시대에 세도정치와 양반들의 횡포에 바래져가는 이 나라의 정체성을 간파한 듯, 양반들의 창가나 판소리의 양반적 격식보다는 민초들의 민요인 아리랑을 더욱 부흥시켜 이 땅의 주체세력을 민초들로 전환시키고자 한 점이 역력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종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한갖 무능한 임금으로 인식할 수도 있으나 고종은 어려서부터 임금으로 추대될만큼 총명하였고 또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의 체결을 조르는 하야시 공사와 추밀원장 이토(이등박문)의 압력에 고종은 우리나라에도 학자가 있으니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백성의 민의도 수렴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답변을 냈다.

 

이러자, 하야시는 짐이 곧 국가인데 하는 루이 14세의 말처럼 전제국가에 주인은 오직 국왕이고 국왕이 결정자란 뜻이다. 그러지만 고종의 이러한 표현은 당 시대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문구를 당사자 고종 스스로가 표현하였단 점이다.

 

이는 요즘 근래에도 드문 자유, 민주사상의 말로서 그것이 변명이라도 전제군주시대에 임금이 한 말로서는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을 표현이란 점으로 참으로 이상하리만큼 느껴지는데 이렇듯 고종은 명석하였다.그러기에 고종은 양반들의 횡포로 인하여 도탄에 빠지는 이 나라에 양반을 향하여 질책의 쓴 소리로 거침없이 일갈하는 김삿갓을 훌륭한 인물로 그리며 그의 일화나 詩들을 재미있게 관찰하는 것으로 본인은 느끼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의 임금위엔 당파가 존재하고, 적 장자가 아닌 천거된 임금은 당파가 이해관계에 부딪껴 조정을 움직이기에 고종으로서도 세도정치로 이어진 양반들의 모순이 쌓여 이 나라의 질서가 문란해진다는 점으로 파악했기에 더욱 민초들에게 이땅의 주인이란 자신감을 불어넣는 개화의 노력의 일환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듯 꺼저가는 이조 말기의 국운에 반하는 양반들의 행위에 김삿갓의 일갈들은 참으로 진지한 시대적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즐겨하는 詩로서 고종도 이에 공감을 하였던 것이다.사람들은 정수동의 해학은 잘 알지 못하나 김삿갓의 유모스런 풍자나 해학詩, 또한 양반을 질타하고 자연의 순수를 그리는 詩. 이 모든 詩중에 어느것 하나를 듣는다면 재미있게 웃슴을 자아낼것이도 또한 모든 국민중 단 한사람도 싫다할 사람 없을듯하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국민적인 詩란 점이다.

 

가상적으로 국운이 쇠락하는 시기에 시인들은 어떠한 시를 읊을까?? 아무리 맑은 시를 지어도 시대적인 바탕에뭉개지는 시기에 시들은 마치 위선같은 느낌일 것이라. 그러나 김삿갓의 해학과 풍자의 詩는 꺼져가는 구한말 시대상황에 민초들에게 감정을 돋구워 주고 양반들의 시대적 모순을 꼬집어 탄하는 장쾌한 맛을 지니는 것이다.

 

두보의 詩가 유명하다하여 아무리 읽어보아도 재미보단 어떠한 서술적인면만 두드러지는듯 하며 그의 詩는 변변치 못했던 두보의 생활의 궁핍으로 큰 대륙에 전국을 전전하며 떠돌이 이사를 다니면서 그곳들의 시대적 사회를 詩로읋은 것은 것으로 편견없는 서술이 그의 詩의 모태인듯 하다.

 

그러기에 동 시대상황을 떨쳐버릴 수 없는 김삿갓도 또한 선친으로 하여금 그러한 운명의 범주에 속하지만 그러나 그의 방랑시는 시대상황의 일부로 그의 詩는 넓게보아 구한말의 위태로운 국운에 걸린 사회상의 안스러움을 해학과풍자, 양반들에대한 질타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으로 그는 두보처럼 우리의 詩仙이라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임금님도, 또한 만 백성이 친근하게 사랑하는 김삿갓은 오히려 인간세계의 그늘속에서 멀리 인간을 피해 유랑길에 오르며 죽을때에도 방랑의 길위에서 객사를 한다. 이 얼마나 어렵고 또한 슬픈 일이랴.

하지만 더욱 슬픈점은 그는 죽어서도 인간세계로 다가오지 못한 점이다. 인간을 그리며 만 백성을 사랑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죽어서 150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인간세계 뒤에 숨어 잠들고 있다.

영월의 김삿갓 묘역은 잘 갖춰지고 화려하지만 기실 김삿갓은 봉분도 사그라진 폐묘 분위기에 묘 중앙엔 그러한 일면도 모르는 철없는 소나무가 자라 세월의 무상함만 나타내고 있다.

 

이제 본인은 이 글을 정리하면서 영월의 김삿갓묘에 대하여 본인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 흥행이 어쩧던간에 본인은 진실 그 자체를 추구함에 영월에서 김삿갓 스토리에 위배되는 듯한 의혹을 전 글에 충분히 게시하였다. 영월 김삿갓 유적지를 단 한번만 들여다 본다면 김삿갓 비석보다 박영국옹의 비석은 집채만큼 더 크게 보인다. 배끕이 커서 배를 이탈하든 그것은 본인의 관심사 밖이다.

그렇다고 본인은 평창출신이라 평창문화 창달에 기여하고픈 점도 또한 이로서 평창의 흥행이란 점도 본인의 능력 밖이다. 다만 일그러진, 또한 허상의 흥행보다는 스토리가 이해갈 수 있는 진실의 추구는 김삿갓의 詩를 한 층 더 독자들의 품속으로 다가가게 할 것이며 더 높이 먼 후일까지도 밝게 빛낼 수 있는 진실이란 점의 추구이다.

 

한 시절 국운이 쇠락하는 시기의 모순의 시대를 몸으로 저항하여 방랑의 길에서 이 슬픈 현실을 해학으로, 질타로 자아내던 위대한 시인임에 지금도 모든 사람들을 그를 반겨 찾지만 실상 그는 지금까지도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다.

평창읍 천동리 하 도마치 산속에서 아들 익균과 함께 그저 햇볕만 보며 외로이 잠들어 있다. 풍수도 입각치 않은 산세에 바람이 불어도, 추위가 다가와도 막아줄 곡장도 없이 온 몸으로 버티고 잠들어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 한구석의 찌든곳을 시원하게 해주는 詩聖 김삿갓의 잠든 곳을 정말 알아냈다.

 

시인이여!

이제 이곳에서 방랑의 삿갓을 벗어서 내려 놓으시고 양지바른 이곳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모든 백성을 사랑하면서 길이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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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글에서 김삿갓의 본명 김병연이나 또는 삿갓의 한자어보다는 우리에게 다감한 김삿갓으로 표기하였다

 

* 윗 글은 어찌보면 가족사를 포함하는 듯한 실례를 범하지만 김삿갓은 실로 지금도 모든 국민이 사랑하고 웃음을 자아내는 시인임에. 또한 국운이 꺼져가던 격랑의 시기에 온몸으로 부디끼며 저항하며 이를 웃슴과 해학으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시인으로 다시금 해석하여야 하는 것이다.

 

* 아마 지금도 용두리 일대에 계시는 후손분들을 찾아서 협조와 양해속에 이 글을 게시하여야 옳음이나 그러지 못한 점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본인의 김삿갓 묘에 대한 추정의 글이 김삿갓이나 후손분들에게 뉘가 된다면 아래에 메모를 부탁드립니다.바로 시정, 처리하여 드리겠습니다.

------------- 이상 ---------------------

 

*응암리엔 근자 약 1~20여년전쯤 동네분들의 손으로 김삿갓 추모의 조그만 시비를 세웠다 한다

어떤 사람이 김삿갓을 아낄 수는 있어도 이렇게 마을분들이 서로 공감하여 공통적인 마음으로 詩碑를 세운 예는 없었다.

그러기에 이는 특이한 예로 혹시 주민들도 천동에서 증언하시는 분들처럼 부친들이 익균의 친구로서 이러한 사정을 잘 전해지는 애기가 규합되에 추모비를 세운듯 합니다.

 

마지나 응암은 예전엔 평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평창은 강을 다섯번이나 건너야 갈 수 있었고 천동리도 두어 번 건너야 다닐 수 있는 지리적 요건과 또한 익균의 인품이 너그러운 듯 많은 사람들과 정감의 교감을 나눈듯 합니다.

 

강물이 불은 홍수시엔 도마치 골을 넘어 다닐수도 있지만 그것도 평창까지 가기엔 종부를 넘어도 막히는 길입니다.

 

만약 가상적으로 아버님 시신을 모시고 오는 길에 강물이 불었으면 마지리에서 자고와야 되는 이러한 가상에 그쪽은 천동과 유대가 깊었던 듯 하며 그러기에 이 시비의 제막에 이야기들도 증언을 통해서 발췌해 볼 필요가 있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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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들)

 

이*영11.11.08. 09:27 김삿갓은 평창에도 왔다간 흔적이 천동에 있는데....

청호11.11.08. 23:02 천동에도 살엇던거 맞습니다. 우리 평창에서 무관심한 사이에 영월에서 먼저 수년간 연구하여 먼저 유적지를 실행한 것입니다.

당시의 영월군수가 저와 고등학교 동창이여서 사정을 좀 알고있습니다.

최초 기념행사때 초청받어 참석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평창읍내 사람들은, 우리 평창에선 항상 조용한게 좋고 심한 변화를 바라지않고 지금에 만족하고............. 즉, 논과 밭이 비옥하여 먹고 살만하니 귀찮고 성가신 것은 멀리 한다는것이지요. ..

횡계 진부 대화일부는 땅이 척박하여 사냥 화전등 험한 생활 터전이다보니 억세고 거칠고 모험적인 성향이지만.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