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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평창 후평리의 선돌백이

평창 후평리의 선돌백이

 

* 강원도민일보의 기사 내용

이 글에서 후평리의 선돌백이는 옛  석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인공적인 선돌은 아닙니다. 따라서 정원대의 의문이나 강원일보 기사는 의미없는 이야기입니다.

[강원도민일보 신현태 기자]

평창읍 후평리 노산 입구에 선돌로 추정되는 대형 바위가 발견돼 선돌여부를 확인하는 학술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자칭 평창지역 향토사학자 정원대와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평창읍 후평리 31호선 국도 옆 노산 자락에 위치한 이 선돌 추정 바위는 높이 10여m,폭 1.8m 크기로 국내에서 발견된 선돌 가운데는 상당히 큰 규모에 속한다.

특히 이 바위가 위치한 마을은 주민들 사이에 선돌백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어 전국적으로 선돌이 있는 마을지명과 같아 주민들은 이 바위가 선돌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선돌은 선사시대에 큰 바위를 똑바로 세워 기념물이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유적으로 마을 어귀나 평지에 많이 분포하는데 이 바위가 위치한 곳도 평창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노산 입구에 위치해 있다

더욱이 선돌 추정 바위의 경우 측면에서 보면 큰 바위 위에 바위가 올라가 있고 바위 사이에는 받침돌로 보이는 작은 바위가 끼어있어 선사시대에 세운 선돌로 추정되고 있다.또 하단부에 과거 2∼3m 복토가 이뤄졌고 이 곳에 기단석으로 보이는 사각 바위가 일부 모습을 드러낸채 묻혀있어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정원대 씨는 “마을이름이 선돌백이고 바위 모습과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 바위가 선돌일 가능성이 높다”며 “선돌로 밝혀질 경우 국내 최대 규모로 추정돼 정확한 학술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평창읍 후평리에 위치한 선돌로 추정되는    대형 바위의 정면                                                      ▲ 평창읍 후평리에 위치한 선돌로 추정되는 대형 바위의 측면

신현태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http://www.kado.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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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8 06:00 HHHHHHHHHHHHHHHHHHHH

 

* 후평리 선돌백이에 대한 의문

 

선돌이란 인공적인 돌이지 자연의 돌이 아니다.

그러기에 정원대의 책에서 옛 사람들이 선돌백이라 부른다 하였다고 선돌백이라 하는데 선돌은 인위적 설치 돌이란 설명이 없어서 이돌이 선돌로 규정되면 않된다.

 평창을 드나들며 시루목 고개 아래의 옛 우시장터의 산의 바위를 볼 수 있다. 이번에 이 바위 옆의 지름 50cm정도의 나무들을 모두 베고 산지 정리를 하여서 바위의 측면이 드러나며 위 사진의 큰 바위는 선돌처럼 보이게 되었다. 평창의 정원대는 이 동리에 연로하신 분들에게서 선돌백이라 불리는 증언을 받으며 그러면 동 바위는 진짜 선사시대인들이 세운 선돌인가 하는 사실 여부에 관심이 뉴스가 되었다. 그러나 선돌의 가능성이 높다하는데 대하여 필자로서는 상반되는 이해를 피력합니다. 

그간 앞면만 보이던 바위가  중간에 종으로 금이간듯 보이기만 하였는데 주변에 고목들의 정자 작업으로 양 옆이 드러나 보이며  마치 거대한 선돌로 보이게되고 이러한게 사실로 다가서면 가히 세게적인 거석문화란점에 신문에 오르게 된듯 하다.

선돌은 세우는 것은 신석기시대나 청동기 시기는 철의 사용시기가 아니기에(물론 청동기는 화강암을 깍기에는 단단치 못하다) 돌을 깍는 것은 불기능했으며 무거운 돌을 4등분의 곡선으로 맞추어 조각하는 것은 공예적 수법이지 수 톤에 무게를 이러한 방식으로 조각하는 것은 현재도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어려운 퍼즐 맞춤보다는 평면으로 깍고 상부의 돌을 올려놓는것이 더 용이할텐데 이렇게 맞출 이유는 타당성을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돌은 하나의 돌이 균열되고 사이는 부스러져 빈 공간을 만들기도 하며 바위의 균열의 시간성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두 사진에서 의문점은 왼쪽 사진에서는 중간에 인공이 가미된 쐐기형 석재를 끼운듯하며 오른쪽 사진에서는 하단부가 마치 산의 곡선에 기대듯이 바위는 곡선으로 산에 붙여 기댄듯 보인다. 만약 이러한 문제가 자연적 어떤 균형의 문제가 아니라야 선돌로서 의문이 제기되며, 그 판명의 가장 기준점은 지면에 닿은 바닥면의 문제가 흙에 올라져 박혔는지 하는 점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지질학적으로 화강암이란 용암의 마그마가 화산으로 분출되지 않고 지하에서 그대로 식어 된 것이기에 이 바위가 선돌이라면 바위위에 세울수도 있겠지만 하부의 면을 바치는 곳이 암반인가 아니면 흙인가를 따지고 여기서 이해 여부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4등분 돌의 탄소 동위 연대등의 과학적 확인은 바닥의 뿌리 확인이 선결되는 이후라야 할 것이다.

뉴스가 나자 평창군은 바위 사이즈를 재어 갔다며 선돌의 입증 연구에 세미나 운운의 풍문이 들린다. 벌써 당국의 입장 발표는 없었슬텐데,,,평창은 툭 하면 그 잘난 세미나가 유행이다. 세미나란 어떠한 역사나 문제의 확인등의 연구의 시작점으로 현안 사업의 과제는 연구되고 현상적으로 제기되어야 할텐데, 세미나의 현안 과제의 연구는 연구가 없어 부실하고, 또 하나는 세미나의 역사적 규명에도 문학 박사들이라나...대부분의 세미나에 마치 단골 구두닦이럼 출연하여 세미나를 하며 또 약간의 오류적인 차질을 빚을까 하는 기분이 연상되기에 또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군 당국의 입장발표는 아직 없지만  이번 선돌 문제에 학자들이 왈가왈부해서는 않된다. 선돌이 아닐경우의 단서는 찾기 쉬우나 선돌의 입증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는 문화재청이나 이하의 학계에 선돌의 가능성이 보고되고 연구가 되야 하는 것이다.

바위는 네 부분으로 아래 바위는 좀 두터워 약 15~20여톤정도이고 윗 부분은 10여톤으로 전체는 약 25톤 정도인데 이 정도 무게가 하나의 바위로 선돌로 사용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현재 가장 무거운 선돌은 프랑스 남부 인구 5명의 섬에 약 20m에 무게 35톤의 길쭉한 선돌이 3등분으로 깨져 땅에 떨어져 있다.

영국의 스톤헨지는 수 백km를 끌고 왔다 하는데 900여명이 잡아 끌면 된다하는데, 가령 900여명이 끈다면 일인당 30kg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2,700kg의 무게를 끈다는 수 백명이 당길 끈의 무게는 얼마이고 그 거리에 비해 힘은 반감될것 아니겠는가하기에 이런 계산법은 비 상식이지만 알 수 없는 방법에 의한 방법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보다 이 세상에 가장 불가능할것 같은 곤혹스러운 역사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들은 하나의 돌 기둥탑으로 수 십m인데 그중 가장 큰것은 암반의 땅을 46m나 사각 주변을 파고 내려가다가 깨져서 포기하여 미완으로 남아있는 오벨리스크다. 이것은 암반의 땅을 쪼개서 바위로 만들고 그를 조각해서 탑으로 만드는 것으로 아랫변은 더 깊이 내려가 올려서 밑면을 끊어 조각하는 과정을 거치겠지만 이는 오벨리스크가 완성되면 약 120여톤 이상인데 이 탑이 완성되자면 이동사키고 똑바로 세워야 할텐데 어떻게 이동했으며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답은 우리시대엔 영원한 미제로 남지만 옛 석기시대인들은 이러한 점이 가능하였다.

여기에 위에 제시한 두가지 의문에 필자는 현장을 답사하였다.

필자는 사진에서 보이는 의문을 풀기위해 현장을 다녀가며 관찰하고 사진의 의문을 확인한 바로는  이 바위는 뒤편의 화강암반의 돌산의 일부로 떨어져나간 것으로 주변에는 결이 가고 부서지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이 산은 반대편의 방축골에서 보면 화강암이 오래 노출되어 노후된듯 보이며 부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질학적으로 중생대 쥬라기 시기의 화강암이라 한다.

여기에 사진의 의문 하나에서 바위 아랫부분이 역 아취모양의 곡선으로 된것은 반대로 산의 암반도 같은 형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바위는 산의 암반에서 떨어져 약 7~8cm 이격된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바위 앞 부분에 지면위로 약 30cm 돌출된 뾰족한 바위 턱은 이 바위의 지반의 암반의 원석인듯 보이기에  이 뿌리 턱에 걸려 선돌백이 바위는 더 이상 내려 밀리지 않으며 수 천만년전 이르렇슬 것이다

 이로서 본 선돌백이는 자연적 선돌이 아니라고 사료합니다.

눞혀져 있던 돌이 세워졌다면 상부는 무게의 균형이 이동되고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는 힘의 파장이 곡선으로 뻗히며 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처럼 바위는 상단 무게의 힘을 이기지 못하자 하나의 바위는 힘의 한게점의 곡선으로 깨진것은 아닐까 추정하며 아러한 물리량에 상부의 바위는 다시 약 8cm 앞으로 내려 밀리며 깨에진 쐐기돌에 이중으로 쐐기돌을 받치는 작은 쐐기돌등으로 인해 상부 바위는 그 무게감이 상하의 낙하의 힘에서  수평의 가로 무게로 이동하여 현재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이 바위는 선사인들이 세운 인공의 선돌은 아니지만 증언에서 보듯 과거 이 곳 마을은 선돌바위(골)란 지명의 이름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 후평리의 지형적 고찰

후평리 선돌바위 증언 채록분에서는 백 년전쯤까지는 이 선돌백이 아래에 강물이 차고 낚시도 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 선돌백이는 현재로는 복토된 지면 아래로 5~10m 더 내려가야 한다고 증언한다.

여기에서 과거의 후평리의 지형을 고찰해보면 후평리엔 영월- 방림 도로개발공사시 고 유적이 발견되어 시굴조사의 레포트 기록으로 보면 후평리 480-1번지에서 청동기 철기 수혈유구들을 확인 조사한바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나왔는데 이 지역은 주진교를 건너서 후평리에 진입시 옥고개 방향으로난 첫번째 농노와 국도사이의 지점으로 지금으로서는 강과는 거리가 멀지만 과거의 지형으로 추정한다면 일제 강점시 신작로는 후평리 중앙을 관통하고 있었는데 이 신작로는 주진에서 여울로 굽어 내려와 허강소를 지나 후평쪽으로 흐르기에 후평리의 지대가 높지도 않는데 여만리 과수원쪽으로 굽어 도는것은 과거 신작로 공사시 허드러지며 도는 강폭을 줄궈서 농지를 확보하기에 강물은 곧바로 여울로 굽어 돌게된 것이다.

이에 증거로는 과거에 후평을 지나 주진으로 가기엔 신작로로 주진을 가지만 도보로 가기에 강가를 따라 플러터너스 밭을 지나 주진으로 다녔으며 이 플러터너스 밭은 모래밭으로 평창 초교의 소풍지로 사용되었는데  이 포플러 나무 밭 안쪽 끝편인 지금의 옥고개를 넘는 삼거리 위치에는 옛날 붕어낚씨꾼들에겐 잘 알려진 작은 연못은 과거에 이곳이 강이란 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후평리 농민은 물론이거니와 본인은 친구따라 이곳에서 두어번 밤을 새워 낚시한 적이 있듯이 과거에 붕어 낚시를 다니신 분들은 이 연못을 잘 알고 계시는 곳이다.

이렇게 1872년 해동지도의 후평리 강은 송림으로 잘 표시된바 그 위치는 현재의 강줄기가 아니라 후평리 들로 더 굽아 돌게되며 후평리 480-1번지의 청동기 유적지는 강물과 더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고대인들의 생활터전의 조건에 첫째사항은 항아리등도 미비하여 물의 운송수단이 힘들자 물과 가까이 살아야 되지만 그 지형은 장마에도 범람되지 않는 곳이다. 그러기에 산을끼고  내려앉은 고지대의 산림 목재장까지 가는 곳은 앞으로도 많은 유물이 나올 수 잇는 지역이다.

 일제 강점시 사방공사로 제방의 신작로를 만들기 이전에는 후평리를 감아 돌던 강의 물길은 흐트러진 천변을 만들며 향동리 입구에서 돌아 시루목까지 내려와 노산아래를 굽어 돌기에 선돌백이 마을은 물길에 파여 좀 낮은 저지대를 만들었슬 것이며 이러한 지리적 환경으로 볼때 선돌백이 바위 아래서 낚시도 했다는 증언을 하는 것이라 추측하며 우기철에 강물이 범람시에는 평창 관아로 진입하기엔 선돌백이 위의 산의 능선을 타고 시루목까지 넘어야 할텐데 흐트러진 야산이지만 경사도가 만만치 않아 차라리 향동리 초입에서 방축골을 넘어 시내로 다녔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방축골이 지형적으로 풍수가 좋은 야산이기에 읍내에서는 이곳 방축골 일대의 야산을 공동묘지로 사용하였다면  후평리 일대의 사람들은 향동리 초입의 야산의 산자락을 공동묘지로 사용하였다 한다.

 또한,  동학의 마지막 격전지도 이곳  후평리로 아마도 과거엔 영월서 평창을 거쳐 강릉쪽으로 다니기엔 평창읍내를 거치지 않고 방축골에서 산을넘어 후평으로 다니기가 더 용이했고 제천, 영월의 동학군들이 삼삼 오오 모여 이 길로 후평에 접어들었던듯 이 야산이 동학군이 100여명 죽는 동학의 마지막 격전지가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지금도 연고없는 작은 묘들이 무수하다고 한다(이러한 증언 모두는 정원대님의 증언기록 채록분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지형적 고찰은 왜 하는가 하는 이유는 아래의 인용 예로 이해하기로 한다.

일전 국구사우 再 논고에서 평창읍내의 지형적 고찰을 하였다. 이 논고는 평창의 관아의 위치적 결정사항엔 노산 아래에 옹달샘과 중학교 위 샘물이 내려 흐르는 이 곳이 관아의 범위로 옛날에는 양택의 땅에 필수조건은 물이였으며 우물을 파기도 힘든 시절에 이 두 샘은 여름철엔 시원한 식수를 공급하며 겨울철에도 차지 않은 샘물이란 점이 관아의 자리로 이로운 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기에 관아의 부속채 건물의 총 집합의 범위는 두 샘물 사이란 점을 그리며 국구사우는 엣 원우터로 관아 옆에 있었다 하기에 그런 관아의 범위를 그려본 것이다.

 여기에  이경식의 "평창군 국구사우터 탐색과 복원의 당위성"이란 논문에서 표 4의 관아의  베치도를 보면  이를 밀고 건물 하나의 면적을 그리고 밀고 밀면 국구사우 터는 중리 343번지에 도달한다고 하였는바 이러한 언급에 군 지적계의 지적 전문가를 찾아가와 연구하였다 하지만  옛 고지도는 붓으로 그리고 어떠한 단위의 수치 기입도 없는바 이를 그리는 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육만으로 보고 이를 머리에 입력하여 기억을에 저장하여 기억의 모든 장면을 머리에서 합성하여 2차적(바로 사진을 찍는것은 직접의 일차라 하면,,)인 그림을 그리기에 그 면적의 정확성을 이 그림에 부여할수 있는가 하는데는 의문이라기 보다 건물 면적을 밀고 밀면 국구가우 터는 어떻게 중리 343번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이해에는 본인의 머리의 한계로서는 이해부족보다 회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관아의 배치도의 표 4는 결국 그 범위는 본인의 지형적 고찰의 양 샘물사이란 점과 얼추 맞는 윤곽을 가지기에 이러한 역사물에 이야기 전개과정에서는 지형적, 배경의 고찰이 필수로 필요한듯 하며 후일 누군가에 의해 후평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면 , 그리고 이러한 일은 만이 발생되기에 이때 이 글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선돌백이의 증언

선돌백이에 중요한 것은 1)예 부터 지명이 선돌백이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2) 평창 관아 및 향교 가는 길목 입구 (1872년 평창오면지도와 일치)

3) 400m 떨어진 고갯마루에 서낭당과 선사시대 석실고분이 있고 노산성에 성황사가 있습니다(1872년 평창오면지도 )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공동묘지가 있고 넓은 들과(후평 들) 특히 산 비탈을 이용하여 만들어 졌으며 위와 같은 내용을 지역 원로님에게 문의한 결과 모든 것이 일치 합니다 

위 증언은  정원대가 이 일대에 여러분에게서 받은 증언의 채록분이다.

이 증언은 선돌백이에는 직접 언급이 없는 증언으로 선돌백이 증안으로는 가치가 없다.

여기에서 우선 어원적으로 이해해 볼 것은 선돌은 入石(멘히르)이다. 그런데 "선돌백이"란 무엇일까?? 장승백이란 큰 장승을 세운 곳의 지명을 이야기하듯 선돌백이는 선돌중 으뜸, 최고라는 뜻이다. 여기서 最高란 단어는 옛날에는 없었던 단어로 일제가 만든 단어이다.

본인의 게시글중 팔석정의 논고에서 "정치, 경제"나 팔석에 "도약"이란 단어는 중국에서부터 유래된 단어가 아니라 일제 강점시 일본이 들고온 단어라 하였듯이 최고란 단어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옛날에 최고란 의미는 백이. 비로(봉)등으로 표현하였다,  

 영월 입구의 선돌은 자연적으로 지반이 융기되며 갈라진 거대한 선돌로 정말 선돌백이로 표현해야 할 듯 하지만 영월사람들이 더 이상 단어를 몰라 그런지 선돌이라 하지 선돌백이라 칭하는 않는다.

선돌도 약 1~20여곳의 지역에 존재하는데 이런 전국적 분포에서 5~6곳엔 선돌백이란 칭하기에 이러한 "백이" 란 단어는 한 지방에서 필요에 의한 특별 발생단어가 아나라 옛시대 최고라는 일반명사로 사용되었기에 지방적 거리에서도 이런 선돌백이란 같은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유추해 본다.

 이렇게 선돌백이는 선돌중 으뜸이라 표현하는데 문제는 단양 수양개 수몰지의 선돌백이는 2m 남짓한 바위를 보고 으뜸바위라고 백이라는 단어를 붙였는가 하는 의문점에 그럼 "백이"란 으뜸이 아니라면 무슨 뜻일까??

여기에 정원대님의 이야기중에 평창초교에서 시루목으로 올라오는 마을을 잿배기라 하는데 잿배기의 원래의 고어는 잣배기로 그 뜻은 城아래란 의미를 가진다 한다.( 이 부분은 좀 잘못되었고 후일 논고합니다)

 여기에서 (선돌)백이는 으뜸이고 최고라며 본다면 잿배기에 명제는 城이고 배기의 뜻은 아래란 뜻이다.

선돌백이의 백이는 하늘이 있기에 최고란 점으로 백이란 단어의 대상체는 여타 큰 바위가 아닌 오직 하늘이기에 하늘아래 바위란 해석이라면 잿배기의 (城)아래에서의 아래와 그 의미는 상통하는것 아닌가 추론도 해 봅니다. 

전국에 1~20여개의 선돌중 선돌백이라고 불리는 선돌은 4~5개로 백이란 단어가 한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 분포를 가진다면 이는 과거 우리말에서 일반적인 명사로 볼 수있다.

이러한 논지로서  일전에 쓴 본인의 게시글중 " 육백마지기"란 어원의 고찰에서 육백마지기에 육백은 밭은 단위가 아니고 별을 헤는(맞이하는) 장소란 점이란 어원적 연구에 여러 사람이 반감인듯 하는데 그에 역사적이 아닌 보통 수준의 이해를 다시 게시하고자 하는데 그 논지는 여기에 백이란 단어와 같은 모습이란 점이다.

(육백마지기의 어원과 선돌백이란 단어가 어떻게 시골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단어였는가 하는 단어의 유사성은 다음으로 육백마지기 어원에 대한 비 역사적 이해의 게시글에서 논 하겠습니다)

 위 증언에서 선돌에 대한 4개항의 논지는 선돌의 입지에대한 참으로 중요한 증언입니다

후평리 선돌백이는 물론 선돌은 아니지만 이 지역(현 후평 4리)를 선돌백이란 지명으로 불렀다 하는데 일반적으로 선돌백이 골이 있지만 이곳은 골자끼를 끼지 않아 "선돌배기 골"이 아닌 "선돌백이"란 지명만 유래합니다.

위 증언에서 보듯이 선돌은 선사시대인들의 마을의 수호나 상징체적인 기념물로 고인돌이나 지석묘와는 달리 관아를 돌아끼고 앞으로는 마을과 들판을 지내고 있어야 함과 선돌의 선사인들의 문화였기에 조선시대에는 선돌을 우러보는 토템신앙을 믿는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개념의 성황사는 별도로 있어야 한다는 점으로 이는 매우 중요한 증언 채록이란 점이다.

선돌백이에 관해서 평창군 지명지를 열람해 보았으나 이런 내용은 없었으며 방축골과 잿배기에 대해서는 짤막한 글만있는데 정원대님은 방축골의 위치도의 사료를 찾았다 한다. 방축골에서 방축은 가두리 농업용수를 저장하기위한 제방으로 방축골은 폭이 넓은 골로서 산은 깊지 못하기에 방축골에는 깊은 도랑이나 개울(川)을 이루지 못하는 지역으로 우천시 모든 물을 가두어서 농업용수로 쓰기기해 어딘가에 가두리 제방을 만들었다면 그 위치가 어디인가도 중요하다. 물론 방축골의 평탄면의 지형에 아디에 물을 가두었던 그것은 천수답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기에 방축의 위치를 확인해보아야 할 필요도 가진다

 (필자는 선대의 산소가 이곳에 있어 수 십년 성묘를 다녔기에 방축골의 지형은 가 보지 않아도 잘 그려볼 수 있습니다. 또한 초교시절에 하평의 논에 논물을 주는것을 따라다니며 방칫골 입구의 밭벼와 한키의 웅덩이에 물을 퍼 올리는 천수답도 눈여겨 보았다. 당시의 물은 뜨는 바가지는 엣날 나무쫄대식의 막걸리통처럼 나무로된 박아지로 퍼 올리던 모습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 "지명지"의 문제제기

그리고,  여기서 평창의 "지명지"라는 책의 문젯점에 한 가지 다시 재고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지명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오류를 지적합니다만,, 여기에서는 그런 오류를 넘어서 지명지에 또 다른 문제는 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하리에 (지명지 p181)의 농막골이란 지명의 설명을 예로 들어보면, 마을에서 "옹달샘 식당"으로 가는 방향으로 올라가다 고목나무 부근의 골짜기라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 섹션(문단)은 하리의 파트인데 "마을에서"란 설명의 시작은 물론 하리의 범위내이지만 그 마을이 어느 마을인지 또한 옹달샘 식당은 시대적 표현으로 지금도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하여 본인은 하리 태생이고 2~30년을 하리에 살았으면서도 이 귀절을 아무리 확인해 보아도 농막골의 위치는 어딘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정확치 못한 표현으로  왜 이렇게 서술하였슬까?? 아마도 그에 이해의 답은 아래에 있다.

아래에 능골이란 지명은 절골로 올라가다 우측방향으로~하는 설명을 하고 있다. 능골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절골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그럼 절골은 어디인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다행히 이 책은 뒤에 색인표를 가지고 잇어 절골이 수록된 페이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색인표에 절골을 체크해보니 무려 18개의 페이지에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는 절이나 암자가 많아 왠만하면 절골이란 지명도 많아서 어느 절골의 위치를 설정하고 찾아야 하는지도 모호하다.

그럼 왜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 책은 예전의 책을 카피한 것으로 보이는데  에전책으 일괄적 서술이 카피되며 문단이 하리, 중이로 새로이 나누며 각 항목이 다시 섞이는 바람에 하리의 각 단원은 바뀌어 절골은 다음 뒷장에 있다. 그 책에서는 능골이전에 절골이란 지명이 먼저 나오고 있기에 능골은 절골로 가는 길이란 표현은 전자의 암시성을 가지고 이해 할 수 있었으나 절골까지도 보고도 어딘줄 모르니 본인의 어둠알까 아니면 책의 기술상의 문제일까??

지명지에 또 하나의 문제의 예시로 여만리 파트에 "되담"은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았다고 전해온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물론 필자는 그것은 되담이 아니라 여만리 서낭단이였으며 그 증거로 1973년 수해때 재실은 떠내려갔으니 그에 대해 여만리 마을에서 증언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명지 책에서 되담의 설명으로 길이 50m, 폭 20m, 높이 3m의 돌담을 쌓았다 한다. 이를 왜구든 군인들이 3m 높이의 돌담을 쌓았다면 이는 크나큰 성벽이란 점인데 이런 표현을 쓰는 서술자나 감수자는 성벽과 돌담에 논리가 맞음을 파악하고 논고해야지 자기 이해의 해석을 기술한 바 이치적으로 맞는 기술을 하였으면 한다.

이 부분에 정확한 논고는 필자는 중, 고교시절 겨울이면 여만리 스케이트장을 다니며 추운날이면 바로 이 밭의 옥수수 낱가리를 불태우며 황덕불에 살찐디 하는데.. 그래서 이 돌 누적단의 모습은 정확히 설명하겠습니다.

이곳은 현 제방으로 역사의 장으로서 사진한장 안 남기고 뭍혔지만 이 위치는 여만리 강변으로 강쪽으론 약간 높은 잡석들이 쌓여잇고 강물까지는 50여m 호박돌 장강을 이루고 있다.이 반대로 동쪽으로는 밭들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의 밭은 약 150여평 정도로 직 사각형의 한쪽이 강쪽의 둑과 맞대어 있으며 강쪽 끝의 폭으로 몇 십m는 폭이 약 3~4m 높이가 약 60여cm높이의 단으로 처리가 되어 있고 이 단위에 남쪽으로 아랫쪽에 두 기의 원뿔형 돌 누적단을 탑처럼 쌓아 올리것으로 단위에서 약 3m가 넘는 콘 모양이지 돌담이 아니다.

군사용 목적의 돌담이란 사가들의 표현치곤 우스꽝스럽지만 이러한 성곽이나 돌 누적단의 서낭단에도 폭 20여m의 기단은 필요없는데 왜 만들었슬까 의문에는 그것은 약 5m폭의 돌 누적단으로 아마도 이 밭은 호박돌의 천변을 밭으로 개간하기에 돌을 모두 주워낸 것으로 흐트러내림을 방지하기위해 끝의 단처리는 흐트러져 내림을 방지키 위해 가지런히 올린 것이지 그것도 벽돌ㅍ쌓기식의 쌓아 올리기 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콘(corn)의 원뿔의 탑이 사찰에는 비일비재하지만 왜 강변에 있는가에 대한 해다을 풀지못해 몽고난때등의 군사용 목적 시설로 얘기하곤 하였는데 증언을 받았으며 그 논리가 합당한가 따져보고 글을 써야지 3m 돌담이 강변에 있다면 이는 성곽이지 돌담으로 이해하는, 즉  머리가 돌지 않는 자들이  조사나 증언 채록한 사람과 감수자인데 이 돌 누적단은 1981년 제방으로 덮혔으니 스스로는 구체성을 못 밝히지만 이 글의 기록을 보고 돌 누적단에대한 본인의 글을 판정해 줄 기억을 가진 자들은 많으리라. 

 노람뜰에 대한 설명에 이에대해 평창군 발간 2019, 10월호 평창이야기에서 노람들의 설명은 아마도 지명지에서 카피한듯 보이는데 그 설명으로는 과거에 이곳에 노암사란 절이 있어 노암 뜰이라 부르는게 발음상 편리를 위해 노람뜰로 변해서 불리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대한 필자의 이해를 논 합니다.

노암사는 아마도 한문으로 평창의 진산 노산에서 魯 자와 암자 庵자일듯 합니다. 그래서 일제때 제방이 축조되기전 노암사 주변은 천변의 개활지의 이를 노암뜰이라고 불렀다고 가정할때 노암뜰이라 부르는것이 노람뜰로 부르기에 발음상의 편리로 노람뜰로 불렀다고 한다는 것엔 본인으로서는 이의를 제기한다.

 노암뜰이 노람뜰로 변하는것은 편리상이란 설명이란 점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게 국문법은 글과 소리의 관게를 충분히 나타내는 틀이기에 발음의 변화는 아러한 채재적 내에서 표현해야 됨에 위의 변화는 자음접변은 아니지만 자음접변화라 서술하면 쉽게 이해할일인데 편리상이란 표현은 좀 닿지않는 표현인듯 하며, 이러한 변화에 대한 본인의 이해로는 노암뜰이란 발음하기엔 아무리 혀가 짧은 사람이라도 정확한 발음을 자연스레 나타낼 수 있는 일이거니와 노암뜰이 노람뜰로 변화한 것은 쉬운 발음이란 해석에는 찬성하지 못한다.

 정말 노암뜰을 표기하고 발음하기엔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문법적으로 특이 사항이 없기에 변형되지 않고 그대로 표기하고 그대로 발음하여야 한다는 이해로 생각하며, 그러면 왜 노람뜰이라 발음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본인의 주장은 노람뜰은 과거 이곳은 제방이 없던 시대에는 장마가 지면 범람하는 천변으로 갈대숲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가정한다면  蘆(갈대노) 濫(넘칠람)의 표현으로 노람뜰로 불리어지지는 않았슬까 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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