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아래의 『평창상고사』 게시글을 사정상 본인의 임의로 삭제합니다.
하지만, 본 게시글은 아무런 문제나 제약을 받지 않기에 후일 원문 그대로 다시금 평창의 상고사를 조명하겠습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 대한 이해 >
위 연구 보고서에는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이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탄소연대 (ytsBP) - 2620년에 오차범위-30년, 즉 연대범위는 (4호분 주변 검사 기준) (BP) 2590~2565 전으로 BC590~565년 사이의 역사임이 밝혀졌습니다.
하리 청동기 시대 석관묘 내에서는 국내 가장 오래된 피장자의 전신상 인골이 발굴 되었으며 인골과 함께 매납된 비파형 청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비파형 청동검(일명 고조선식 ) 청동검과 마제석검, 마제석촉, 관옥, 환옥, 적색 마연토기, 무문토기등이 58점 발굴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BC5~6세기의 한반도 전체가 고조선이라 함이 아니라면 고조선의 강역이 일부일지라도 이 시기는 고조선 시대의 시기로 하리 출토 유물은 이 시기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고 고 인골은 유일한 고조선 시대인이라는 점 입니다.
이 유적 발굴시 고조선 시대라 지칭했더니 발굴처의 어느 역사가 왈,,,큰일날 소리 하지 마시고 청동기 시대 유적이라한다. 그러면 위에서도 삼국시대라 국가적 시기의 분류를 하고 그 이전엔 고조선이 아닌 청동기, 철기의 광범위한 구분으로 간다. 역사가 이넘들아 이게 시대구분에 논리적 모순이지 않는가..그러고도 나의 말이 모순이라 폄하는게 잘못이지 않는가??
사람들은 일제때 이병도(초대 문교장관, 조카는 서울대 총장 ) 이하 일제 식민사학의 문제라 하는데 그런 일제 식민사학은 이미 두세대, 70년이 지났다면 새로히 뜻을 세워도,,그런 식민사학 핑게를 잡는다면 그보다 당시로서 더 큰 문제는 양반 쌍넘의 게급사회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 후에 난 양반이오 하고 에헴 거리는 넘은 한 명도 없다. 그러니 일제 식민사학이 고조선 발목을 잡는다 하지 마시고 옛날 대학입시에 역사과는 공납금만 까먹는 미달학과 였다고 폄 하기 전에 진정 우리 사학계계는 고(古) 조선의 역사를 바로 세워라, 이 부분이 사가들의 밥숫가락이 목에 걸리지 않는가??
하리 청동기 유적은 중국 짱께들의 동북공정에도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청동기 시대, 고조선사의 역사 유산이다.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은 고조선 시대후반의 고조선의 약 500여년전의 말기적 시대로 평창의 고조선식 청동검을 치켜든 고 인골은 고조선 인으로는 현존 유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기에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고 인골이 평창 역사의 시원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자 한반도에 고조선 강역의 어디에서든 유일한 고조선 시대인이다.
지난 게시글을 다시 리필해보면 우리는 평창의 가장 큰 문화인 평창 군 페스티벌에서 노산에 올라 임진 노산 전적비에 충의제를 드리고 카니발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임진왜란 당시 노산성에서 왜구와 전투라던지 또는 왜구 100여명을 죽였다 하는데, 이제는 잘 알려진 임란 당시 평창군수(종 4품)인 권두문 군수의 호구알록에 의하면 왜구가 멧둔제를 넘어 조파(조동쯤)에 내려온 왜서(倭書)를 전달하는 자의 목을 베고 곧바로 후일을 기약하고 천동리 굴로 숨기에 배로 내려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기에 노산성의 임란대첩비는 사실이 아니라 가상의 거짓이란 점이다. 이 점도 문제이지만 그 보다 더한 문제는 평창의 際를 지냄에 호국열령의 충정의 기상이 가장큰 예절로 평창 문화에 예식에 일착이란 발상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노산제를 지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그 중요하다는 것은 임란당시 왜구에 항복하지 아니하고 항전한 모습으로 이것은 평창 역사에 영원히 빛내야 할 일이지만 평창 군민의 화합의 장에 이러한 충의제에서 부터 비롯된다는 발상은 큰 괴리감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괴리감이란 평창의 역사와 평창군민의 전반적 총칭의 군제(郡際)를 지냄에 국난극복의 무신적인 행위만이 군의 전채를 대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문치를 숭상하는 국가에서 이러한 충의제와 호국 영령의 추모는 군제의 하나의 범주에 속해야 하고 보다 더 광범위하게 이상적인 가치관의 군제를 지내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노산성에 평창군의 군사 성황사에 올라 군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듯이, 이 시대의 군제(郡際)는 평창의 가장 큰 의미를 포괄할 수 있는 상징으로서 평창의 하늘이 열리고 고조선 검을 높이 치켜들고 평창의 역사를 시작하는 평창읍 하리 출토의 첨동검을 옆에 찬 古인골은 평창의 시원의 조상으로 모시고 우리는 그러한 제를 군제(郡際)로 모시는 것도 아름다우리라 생각 합니다.
이상 평창 읍 하리 출토의 고 인골에 대한 기록을 마칩니다.
다음 글로 문치 국가와 무인국가를 적나라하게 비교해 보이며 또한 한가지 이야기는 하리 출토의 고 인골은 20대 여자로 밝혀집니다. 당시 고조선식 청동검을 소유한 큰 키의 20대 이 여인은 누구였슬까 하는 으문속에 가상속의 가공인물을 그려 보이겟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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