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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Re:평창 상고사에 대한 저의 생각 <월정사 중창에 대한 나의 감상 소견은?>

[ Re:평창 상고사에 대한 저의 생각 ] 

                                                                                                       09.07.31 05:34

 

         < 평창 상고사>                            엄기종  09.07.28 06:30

평창의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찾아야 합니다.  남한강 상류로서 수많은 고인돌과 선사시대 유물들이 강변마다
나타나며 곳곳에 산재되어 버림받고 있는 산성들이 안타갑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동조하는 사람들이 없지요.
혼자서 해결할 수도 없고 강원도 칠대명산 거슬갑산도 잃어버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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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의 이야기>우선 몇일전 어느 산악회의 월정사 탐방 사진 두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근자에 월장사 중창의 대공사가 마감지어진 듯한데, 이를 보는 저의 느낌의 생각을 시간 나는데로 써
겠습니다.
국보급 문화재의 무식한 몰 이해....보살상의 모조 조각품 대타가  석조 보살상의 의미를 저버리는 생각팔각구층 석탑의 보호석이 해인사 3층석탑 가드레일 베낀것으로 이 가드레일이 팔각탑엔 잘 맞지 않이유. 또한 경내엔 석등이 4개인데...석등의 근본적 이해... 
저의 상식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월정사 사찰의 조형 양식의 속 의미는 ??
모든 학자들이 지금까지 탑 아래의 석조 보살상이 좀 엉성한 조각이란 평에 그렇치 않는 이유,,,,
아마 우리나라 학자들 누구도 이해 못한 점들을 쓰겠습니다.
또한 상원사, 월정사 가람배치의 미로현상,,또한 팔각구층 석탑 앞에서 사진찍으면 2중 난간석만 찍히는....
 
월정사 마당에 서서 이번 중창을 감상한다면, 정말 무식타는 말밖에.....
국보급의 문화재의 구구주먹식 돈만 벌겠다는 공사의 흔적들,,,,
문화재 난간석은 문화재 2급 자격증만 비치하면 공사 자격이 주어진다. 그래서 문화재 2급 자격증으로
인사 탑 보호석 베껴 일반 공사의 10배 금액을 만들었슬 것이란...
아마 여기엔 문화재 전문위원들을 낮잠만 잤다는 이야기일뿐...
 ( 1차 가드레일 공사는 춘천 동원건설이 2급 문화재 자격증으로 공사를 하며 공사 금액은 당시 6천만원이 조금 넘었다. 한변이 15M로 약 60m 원봉과  2-3m 에 지주석 하나씩한 1차 석조 난간석 공사시 금액이다. 즉 문화재 공사란 이유는 일반 공사 하고도 그에 10배 공사 금액을 받아간다.)

석탑은 문화재이기 때문 행정관청에서 예산 들이고,,,
중창은 보시로 이루어 지고, 전통 룰에 맞지 못하는 짬뽕 양식,,,아예 양식없는 석물 조형
가지고 단지 수익 올리는 월정사. 그것을 한번 까는 것 보다 문화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쓰겠습니다.


우선 잠시 쉽게 설명하면,,
석보 보살상이 15m 높이의 팔각 구층석탑과는 비례가 않될많큼
작게 만들었이유와, 그 모델은 미륵 반가 사유상이란 것과. 지금의 재생 석보살의 좌대를 높여 탑 중앙부만 바라보는 결과를 낳은 점,,,,즉, 원근법의 작용을 우린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점이다.


결론은 천년 전의 석공은 한 눈에 이 탑을 바라보며 공양을 드렸슬 것에대한 이해를 하지
 못한 현실. 석공은 석조여래 좌상의 눈을 통하여 이 탑을 한 눈에 바라 보았슬 것이다.
그런데, 그 보살상이 천년의 풍화에 수명을 다한 듯 박물관의 실내에 안치하고 새로운 모조 보살상을
리에 대신 하였다.


다시 복제한 석조보살상은 높은 좌대와 크기가 커져서 탑신의 메인에 비해 비례적으로 균형을 못 맞추살상의 눈은 고개를 약간 떨구고 탑의 한 부위만 바라보는 이러한 모조 조각을 대신하였는데...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이렇게 양식이 모자랄까??
아니면 심는 형식이고 높고 크게만 부풀리면 공사 금액은 뻥튀기로 그에 10배 정도씩,,,,
 
또한 석등은 원래 경내에 배치에 있어 갯수가 하나를 전통으로 하는 이유와 불국사 창건의
모량리 청년 성이 그 화려하고 유려한 석가, 다보탑을 만들며 불국사 석등은 초기 석등의 기본적 요소들로 간결고 단순하게 만들었던  이유, 
그렇다면  팔각구층 석탑을 조각하며 보살상 하나에 성의를 들이지 않았다는 모순의 괴리...
이 가정으로 보면  팔각구층석탑앞의 보살상은 한눈에 탑파를 바라보며 공경하는 마음을 만들었슬 것이란
저의 이입니다.


석등, 요사체 까지공사가 일관되지 못하는 점은 , 아마 평창군에서 정부 예산으로 난간석을
만들었는데 해인사 3층석탑 난간석을 그대로 베낀 모조품 공사를 하고 문화재 2급 자격증만 비치하면 일반공사의 10 공사비를 부풀리는.... 
또한 옛시절 탄허스님의 노력과  말썽많던 장 만허 스님의 노력은 없어지고...
우리가 만허스님 인식을 잘못하는 등...당시 중창에 조그만 회사의 조중훈 회장님의 각고의 헌신적 봉사와 ...
역사의 이해란 점으로 길어도 써 보겠습니다.
  
또한 시간이 되면 평창 아라리(평창아리랑)의 재 해석을 하겠습니다. 정선 아라리는 동강 아라리란 명칭을 가지지 못했던 점과 평창  아라리란 무엇인가?? 고향땅에 옛 선조님들이 부르던 오독떼기 창법의 평창 아리랑의 노래가락에 의미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쉬운 이해와 아직,  그 누구도 설명 못하는 또 한가지는 평창아라리는
후렴을 잘려먹은 이유등.. 평창 아리랑의 책자에 감수자인 어느 문학박사도 아리랑이란 산의 메아리의 울림소리라 했는
데 , 저의 이해로는, 이러한 아라리의 설명이 아리랑의 정설로 자리매김이 되질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서정적 표현일 뿐이란 생각입니다.지금 아리랑이란 뜻의 해석이 제 각각이지만 어느것도 정설이 될 수없다는 그 제반 이해와 평창 아라리가
정선 아라리보다 현존 원음으로 남는다는 이해까지도 시간 닿는데로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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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평창의 구석기 유물에 관한 저의 생각은??


흔히들  건설 현장에서 역사시대의 유물이 나오면 소란 스럽지만 역사시대 이전의 문자가 없는 선사시대
의 발굴은 극히 어려운 듯 하다.
손보기 선생의 제천유물 발견이나,  故 김원룡선생의 한탄강 유적발견등은 그리 간단하진 않은듯.
 
한탄강 유적은 고고학과 재학중이던 미군 병사의 데이트 길에 주워들어 돌 팔매를 던지려던 돌을 가지
휴가가서 세계적 권위의 고고학자인  미국 스승에게 보고하여... 그래서 미국의 권위적인 석학이
먼저 서울대 강원룡 선생에게 이 돌은 선사유적이라 알려오니 규명이 쉬웟고, 그래서 전곡 선사유적은
이러한 행운이 따랐던 것이다.,,,
 
우리나라엔 아마 이 두곳 이외엔 보통의 사학자들은 선사유적 규명에 엄두도 못 내는듯 하다.
왜냐면 역사의 전통적 기존질서의 파괴이기에..우린 세계 4대강 유역의 문명이란 역사를 배우나 그것은
5천년 전을 넘지 못하는데 석장리 유이나 이런 구석기 문화 발견은 이를 위배되기 때문이다.
구석기 문화에 대한 발굴을 학계가 얼만큼 인정하고 수용해 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래서 이 어려운 과정을 하루 아침에 다 정복할 수 는 없지만, 평창의 역사자료는 지금 어느 정보관
되고 있으며, 최소한 지역 문화 보존과 발굴의 작은 협의체는 구성되어야 할듯 하다.
그리고 나아가 대학 역사과와 결연 방식으로  어느 대학의 역사 써클과 협의 공동체를 만들어 발전시켜
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인터넷 역사 공동체의 모임과도 제휴하여 역사전공 현장견학및 발굴 실습도 이루어 진행시
킴도 알맞은 형태의 발전이라 봅니다.


행정부를 두드려서 역사 전문가들에게 진단 하여도,,, 기존 질서의 벽을 못 넘기 때문이란 생각발굴에
시점에서 보면 미약 하나마 이러한 시도의 움직임이 보다 더 효과적이란 생각입니다



 




<한국전쟁 직후의 월정사. 탑만 남았다.>
 
고려 조선 때 화재…6.25땐 국군 초토화작전에 수난
 



<일제시대 월정사 전경. 당시 월정사는 근대 교육의 산실로 한국불교를 주도하는 중요 사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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