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
후세백작 2020.03.13 08:21
아래의 『평창상고사』 게시글을 사정상 본인의 임의로 삭제합니다.
하지만, 본 게시글은 아무런 문제나 제약을 받지 않기에 후일 원문 그대로 다시금 평창의 상고사를 조명하겠습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1) 1차 조사- 후평리 유적
2) 2차 조사 - 방림리와 주진리 유적 조사
3) 평창강 유역 철기시대 주거지 탄소연대 측정결과
평창의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 원본 게시글)平昌歷史 史觀定立후세백작2020-03-20 12:16
이로서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은 평창의 청동시대,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다
2,평창역사의 상고사
1)구석기 시대 유적
2) 신석기 시대 유적
3) 청동기시대 유적
.
+++++++++++++< 평창 상고사 끝> ++++++++++++++
<감상과 이해>
이상으로 평창의 상고사를 기존의 내용에서 최근에 밝혀진 정확한 고고학적 시굴 조사 방법으로 밝혀진 역사사료에 의해 새롭게 조명하였습니다.
기존에 내용이란 읍면지나 군지, 지명지등의 군 발간의 연감등에서 역사서술이 아닌 새롭게 밝혀진 역사에 서술은 과거 시대에 역사자료를 출처도 없이 마냥 베껴쓰고는 자기가 답사하고 자기것인양 하는 악질적인 행위애서 탈피하여 새로운 평창 고대의 상고사를 조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 서술에는 개안으로서는 자료의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자료를 찾는데,,,일전 대상리 사지 탑의 옛날 자료의 사진을 찾다보니 아마 그 출처는 "
강원대학교 박물관, 1987,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라는 책에 기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동 책은 시판되지 않는 책으로 대화. 진부 도서관에 문의한 바 소장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래서 이 사진의 인터넷 게시자에게 문의 결과 평창군청 근무시 문화과에서 그 책을 스캔하였다 한다.
동 책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은 아마도 학술지에서 평창 역사를 서술할때 자주 인용되는 책으로 평창에서 실시하는 역사 세미나는 자주 인용되는 책으로 평창의 역사 사실 규명에 학자란 자들은 답사도, 증언도 없이 하는 제잘난듯 인용하며 무수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바 동 책 자체에서부터 검증을 하려 하여도 개인으로서는 구해 볼 수 없는 책이다.
이렇듯 개인으로서는 자료의 한계가 있기에 위의 게시한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과 "하리 청동기 유적"이나 "후평리 유적"등의 역사 글은 문화재청이나 고고문화원 사이트에 깊숙히 파 뭍힌 리포트를 들춰 찾아서 기록하는 것으로 또 하나의 문제는 개인이 리포트를 찾아 정리해 서술한다고 객관화 사료로 채택되는 것은 아니기에 개인이 정리할 사항이 아니라 평창군이나 평창의 관제 시스템의 공적인 역사 단체인 평창문화원이나 그 산하 평창 향토사학회가 주관하여 객관적으로 정립하여야 할 문제라고 보는 바이지만 그러한 단체들에서는 무엇이 바쁜 업무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평창 역사의 정사의 기록에 대해서 단 한마디 언급도 찾아 볼 길이 없다.
본인이 이러한 평창 상고사를 정리하게된 이유는 일전 평창 역사 연구자와의 이야기로 청동기 박물관을 만들면 채울만한 역사유물이 없다 하길래 본인은 몇 년전부터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내용도 단조로운듯 무리하다는 주장처럼 전달되기에 평창의 상고사를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다시금 본인이 주창하는 청동기 역사 박물관이 필요한 점의 이해와 소통의 노력으로 평창의 상고사를 각 출처별로 빠짐없이 면밀하게 기록하는 것입니다.
일련의 게시글에서 5~6 만년전의 미탄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인의 역사가 암사동 선사 유적이나 전곡리 구석기 유적보다 중요한 점은 기화리 쌍굴 유적의 특별한 점은 구석기인들의 도구인 밀게, 돌도끼등의 유물만이 아닌 상대적인 각 동물의 화석뼈를 통해 당시의 인간이 먹었던 동물들까지 생생하게 이해해 볼 수 있는 점이고, 하리 청동기 유적은 인골롸 함께 고조선식 청동검이 출토된 무후한 기록과 후평리, 천동리등 철기시대의 유물들은 평창읍 전 지역이 유물산포지로서 많은 유적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유적, 유물들은 영월- 방림간 도로 건설지역의 발굴 조사등이였고 앞으로 평창읍 전체가 유물산포지로서 어떠한 공사시에도 평창읍은 지금의 열 배 백 배의 공간이기에 채집될 수 범위는 크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앞으로 발굴될 수 있는 유물이 아직껏 발굴된 사료보다도 더 진귀한 역사 사료도 나올 수 있기에 아으로의 유적 발굴조사도 기대되는데 지금까지의 유적은 평창으로는 박물간이 없는 관계로 춘천 도립박물관이나 강릉등지의 박물관으로 전세살이 갔으나 앞으로 발굴될 유적도 모조리 타향살이를 보낸다면 그리고도 평창의 유산으로 무얼 더 기대할 것입니까??
우리는 노산성에 올라 충의제등 가식적인 제를 지내는 것은 무신정신만을 기리는 것으로 문치국가로서의 전체적인 이땅의 얼을 조명하기에는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논고도 한 바, 진정 역사란, 이 땅의 먼 선인들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역시적 삶의 궤로서 평창의 혼이 담긴 정채성과 우리의 기상을 자아낼 수 있는 역사물은 쓰레기로 보이듯 팽게치고,, 관치의 문화원이나 향토사 연구소나 향토사 연구자분들은 지금의 이런 상고사의 내용 한 번이라도 서술해 보았습니까??
위의 평창역사 서술에서 보듯 평창은 먼 옛날의 구석기시대 ,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궤적을 이루며 이땅에 선인들이 살아왔다. 이러한 점은 평창이 고대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이기에 선인들이 찾아들었고 모여살며 오늘에까지 이어 온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점은 평창초교의 교가에서 보듯 억만년, 억누리의 시,공을 넘어서서 우리는 산좋고 물맑은 천혜의 고장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얼은 팽개치고 내가 이땅의 주인이오 하고 유아독존하는 평창인들이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평창은 돌 체험관이란 기호적인 전시관도 생기듯이, 평창 시원에서 오늘에 이르는 삶의 역사궤적속에 평창 특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청동기 뮤지엄이 생긴다면 이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까??
앞으로 더 중요한 유적이 발굴되어도 이 땅의 주인들을 타향살이 보내실 것입니까?? 자주 인용할 것은 아니지만, 평창문화원은 평창의 유, 무형 자산을 기록화 하겠다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지만 본인으로서는 이러한 평창 역사이 얼이 가장 중요하고 또한 우리는 이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소명을 부여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문재는 지난해에 오대산 사고의 박물관이 건립되고 일본에서 돌아온 사고의 소장본의 원본이 소장되길 기대하였건만 영인본이라는 모조품만 비치되었습니다.
예전 유흥준 문화재 청장은 오대산에서 김진선 도지사에게 오대산에 박물관을 지으면 원본을 내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원본론을 언급한바 이때 평창의 사학자 한 분은 옆에서 들으니 원본을 준다 하여서 유청장은 다행히 계란 세례를 받지 않게 되었지만 후일 박물관이 건립되고서는 약속한 원본이 아닌 이비테이션의 영인본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듯 지금 만약 평창에 박물관이 건설된다고 타지의 박물관에 비치된 평창의 유물이 모두 평창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하는 문재입니다. 물론 청동기 박물관은 국립이나 공립으로 문화재청에 귀속되기에 일부 평창의 유산이 돌아 올 수는 있지만 중요 문화재의 보장성은 희박할 듯 한 것입니다. 과거 60년대 원주 단구동에 버려진 철불 5개를 춘천 박물관으로 입고되고나서 이후원주박물관이 생겼는데 원주 박물관의 메인 로비에는 단구동의 좌상 불이 전시되고 잇지만 그것은 원품이 아니라 이미테이션의 모조품입니다. 모조품이란 조각가 로댕의 활쏘는 브르텔이 호암 미술관에 있는데 이는 로트 번호를 가지고 로댕 회사에서 판매하고 80년대 초에 억대가 넘는 값일텐데,, 이럴때 이미테이션이 통하는 것이지 박물관에서 이미테이션(모작)은 박물관의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이라 보입니다.
평창에서 고고학회가 유물 조사시 지역 당당관은 발굴되는 유물에 대해 평창산이기에 후일 평창에 박물관이 건설되면 제 위치로 귀속의 반환 이행 서류를 작성하였을듯 하지만 오대산 사고의 영인본에서 보듯 시간이 흐를수록 반환의 보장성이 희박해질듯한 문제를 가지는것 아닌가 의문합니다.
그러나 평창 !!위의 평창 상고사의 역사를 통해서 볼때 평창은 구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 삼국 시대로 이어 흐르는 역사를 유추해 볼때, 평창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마을이란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랗게 천혜의 자원을 선물받은 평창은 산이 굽고 물이 돌아 흐르며 빚어낸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인가 하는 점에서 바로 이곳이 금수강산이란 평창인의 긍지심을 자부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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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에 인용된 오대산 사고에 대하여,,
오대산 사고는 선조의 명으로 사명당이 3년간 짓습니다.
월장사 법당이 스러지고 개수하지 못하는 점을 보고 사명당은 홀연히 금강산을 내려와 오대산 영감난야에 머물며 5년간에 걸쳐 ㅝㄴ정사를 중창을 합니다. 이후 선조는 불교의 힘을 빌어 국력을 신장하려는 의지로 오대산 사고를 짓기에 오대산 사고 현장 감독관에 사명당을 임명하고 수호군등 80명으르 보내며 사명당으로 하여금 밀직의 업무를 총 지휘하게 합니다. 그래서 오대산 사고 건축의 총 감독자는 사명당이 만들게 됩니다,
사명당은 임란때 가토 기요사마를 세번 만나 조선인으 염원은 가토의 머리가 조선에 있는 것이라는등 조선인의 기개를 펼쳐 보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까와 이에야스와 임진란의 강호를 맺고 포로 3,500명을 반환받아 돌아 옵니다. 이때의 사명당의 극일정신을 담은 야사는 많은데 사명당의 스토리에서는 월정사 중창과 오대산 사고지 건축에 8~9년 평창에 거쳐한 사실을
가지며, 오대산이 연구하는 사학 연구자도 있지만 평창의 오대산 사고지와 사명당의 관계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대산 사고지의 내력과 사명당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어쩜 사명당과 평창과의 관계는 자연스런 일일지도 있겠지만 이러한 이야기에서 보듯 유정 사명당이 평창을 가장 사랑한 인물임을 알았으며 인터넷 상이나 평창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회자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평창으로서는 오대산 사고지나 이하 요처에 사명당의 고마음을 표시하는 비를 헌액하여야 바른 보답의 사필귀정이라 하겠습니다.
◆ 강원고고문화원의 리포트에서 평양식 청동검이란,,,
위 리포트에 강원 고고문화 연구원에 노력과 열의에 감사하지만 딱 한가지 거슬리는 사안에 대하여 논합니다.
리포트 중간에 비파형 청동검을 일명 고조선식 청동검이라 하는데 평양식 청동검으로 표기한 예는 평창 하리 출토의 청동검이 평양과 인근의 청동검처럼 비파형 동검이 세형동검으로 가는 과도기라 곡선이 완만해 지기에 이를 평양식이라 하는데 그리고 평창의 검은 평양 출토의 검들보다 봉부가 더 작아지기에 평양보다 후대의 검이란 점은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평양식이라고 명문화 하지는 않습니다.
예전 하리 유적 발굴시 본인은 담당 학예사에게 고조선식이란 단어를 쓰니 펄쩍 뛰어요. 물론 고조선이란 정확한 물증을 가리지는 못하니 그러하겠지만 이 리포트에서 고고학계가 사용하는 연표를 한번 보겠습니다.
리포트엔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 하며 문명에 따른 시기로 분류하다가 철기 시대가 아니라 삼국시대라 하며 그 이전은 청동기 시대하 한다면 이는 삼국시대는 국가적 분류의 연대이고 청동기시대는 위애 말한바 문명 발달의 시기로 혼용하며 어떨때는 삼국시대이고 어떨때는 철기시대라 함은 그 모호성을 가지기에 삼국시대에는 그 이전 시대를 고조선 시대라 함에 큰 문제가 있습니까??
만약 고조선 국가라 지칭했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고조선 당시의 하는 표현이 제약을 받아야 합니까?? 본인이 볼때는 강원 고고학회서는 의도적으로 고조선이란 단어를 회피하기에 남들은 고조선식 청동검 하는데 이를 평양식 청동검이라 지칭하며 고조선이란 단어에 아마 컴플랙스를 가지는 인상을 풍기는 것입니다
아래의 사진은 본인 소장의 고대사 즉, 원삼국 이전 시대의 역사를 연구한 여러 학자들의 공동 연구의 논문을 공유하는 저서로 비매품의 자료로 2권 1,500 여 페이지에 달합니다.
아래에 책 P 198을 인용해 봅니다.
조선이 濊, 貊(허드레 예, 북방종족 맥) 이라 하고 있습니다
하리 청동기 유적 게시글에서 필자는 얘맥을 춘천을 맥, 강릉을 예라고 논고한점은 이러한 문헌에 기인하며 이중환의 택리지에선 춘천의 청량산이 맥족의 도읍이었다고 서술하며, 대동여지도 해설편에선 옛날의 강릉은 예족의 국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강릉에선 예의 후손이란 예라는 글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 고대사 연구」 출판사 없음, p198
++++++++++++++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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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애서 발행돤 평창군 지명지 책자에서 보듯 평창역사에 역사가 네거냐고
출처없이 자기것인양 마구잡이로 쓰지만 역사는 발굴한 자와 그 특유의 글에 의해 표현이 다르게 보인다.
그러기에 출처없는 복제는 문제의 여지를 갖는 것이다.
일전 본인의 글이 복제되어 사용되고도 오히려 본인을 꺼꾸로 본인에게 訴를 거는 우스운 사건도 있었지만
그래,,, 본인이 조사시 조사관과 세번 통화하며 뭣이 집안이라는등,,, 하지;만 그 조사관은 헤어지면서
인사가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해야 정상일텐데 존경스럽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더군,
그러한 소송정도는 웃지만 이 소가 종료되면 본인은 盜用( 도둑도, 쓸용) 즉 남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들고가
자기것인양 하는 점을 도둑으로 제소할 뜻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것을 일소에 붙이며 아직도 그러한 잡음들은 삼가 바라며, 앞으로 저의 모든 글은
역사 글이지만 무단 복제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지난 영월의 고씨굴엔 본인이 10년전 쓴 글을 현 문화원장이 보고 6개월내로 연구하여 끌을 쓴다 하였건만
그 점에 많은 문제중 본인의 글의 복제하여도 문제가 될듯하여 그냥 원본 그대로 후세백작의 글을 인용하여
관제보도 하면서 고씨굴에 임진 의병장의 비를 제막한 바 있는데 역사글도 함부러 들고가지 못한다는 점도 작용한듯
앞으로 본인의 허락없이 들고가면 법으로 처리할 것을 명기합니다.
모든 분들,, 이점 유념 바랍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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