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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원본게시글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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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게시글은 문화재청의 자료 열람에 의해 강원고고문화원구원의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pdf" 조사 연구 리포트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Ⅰ. 조사개요

 

1, 조사경위

평창읍 하리(240-4, 240-12번지)일원에서 1986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화재 조사에서 마제석촉이 수습되어 평창읍 하리 유물 산포지로 수습된바 있으며, 2004년 문화유적 분포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지표조사중 무문토기편이 수습되어 선사시대 유적이 입지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건축주 지해영씨는 본 지역에 단독주택 신축허가를 평창군에 신청하였으나 동 지역은 상기한 바와 같이"평창읍 하리 유물 산포지"*㈜에 해당하는 이유로 사업 시행전 입회조사를 실시 하였다.

입회조사 결과 트렌치 내부에서 선사분묘의 일부로 추정되는 석열유구와 적색마연 토기편, 마제석검편등의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어 정밀 조사를 하게 되었다

*주:  강원대학교 박물관. 1986, 「평창지역 선사유적과 그 문화 」.「강원사학」제 2집

        강원문화재 연구소. 2004. 「문화유적분포지도-평창군」

 

2, 발굴조사

2016,7,11일에서 동년 9월 13일까지 현장 조사를 완료하였다.

유적의 성격은 청동기시대 분묘유적으로 비파형 청동검을 부장한 수장급 무덤을 정점으로 소형의 석관묘가 군집한 상태이며, 특히 인골과 비파형동검이 공반하여 그 중요성이 높이 평가된다. 한편 9월 6일 전문가 회의를 통하여 유적의 처리방안이 논의된 바 비파형 동검과 인골이 공반하는 2호 석관묘와 상테가 양호한 4호 석관묘는 이전 복권을 실시하여  (주) 한국문화재단에서유구의 이전을 진행하기로 하였으며 그 장소는 국립 강원대학교 박물관으로 결정 하였다.

 

Ⅱ. 유적의 위치와 현황

1. 유적의 위치

평창군 평창읍 하리 240-4, 240-12번지에 해당하며 평창강 북안에 위치한 충적지 북편 구릉의 발달에 위치하며 전체적으로 완경사를 보이고 있으며, 조사지역은 전체가 기 조사된 "평창읍 하리 유물산포지"에 포함된다.

 

2,유구

유구는 청동기시대 문화층인 흑갈색점질사토층을 굴착하고, 후대 정지및 그 성토과정에서 삭평되어 일부 유구의 덮개돌이 유실된 것으로 보이나 유구 확인 조사과정에서 찾아낸 유구는 모두 12구이다.그 중 하부 조사과정에서 원 위치를 잃은 덮개돌로 판단되는 3기를 제외하면 모두 9기의 유구에서 매장 주체부가 확인되었다.

 

1) 1호 석관묘

● 1호 석관묘는 덮개돌의 남벽, 동벽이 유실된채 발견되었다. 조사결과 남벽은 조사지역 서편의 31번 국도 건설과정에서 파괴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동벽의 경우 후대에 조성된 민묘의 이장과정에서 파괴되었다. 때문에 1호 석관묘 내부에 유물이나 피장자의 유체는 남아있지 않았으며 무문토기 2점이 수습되었다.

 ● 유물로는 무문토기 호의 중소형 호형 토기편으로 구연과 경부를 곳선으로 연결하는 기형이다(잔존 높이 9,95cm. 잔존 넓이 9,3cm, 기벽두깨 0,8cm)

 

2) 2호 석관묘

 ●  2호 석관묘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중 가장 규모가 크고 덮개돌이 덮힌 상태로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168cm×104cm이다.

● 석관은 석회암재 판석을 사용하여 네 벽을 조성하였으며 바닥은 천매암재 판석을 사용하였다. 석관의 내부는 163cm×53cm이다.

 ● 인골은 측와장 하였는데 상당부분 부식이 진행되었으나, 두개골과 상·하악골과 치아 상·하완골, 되퇴골, 경골, 비골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 비파형 동검은 인골의 가슴 아래와 허리 사이에서 확인되었는데 중간부분이 둘로 나뉜 채 수습되었다.

 동검의 잘린 면을 통해 볼 때 매납당시 인위적으로 구부러 부러뜨린 후 부장한 것으로 보이며 , 이는 매장당시 의레와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비파형 동검과 공반하는 유물로는 적색마연토기관, 무경식 석촉, 관옥, 환옥등이 있다.

 ● 2호 석관묘 유물로는 적색 마연토기 호와 무경식 석촉 6점, 환옥, 관옥,비파형 청동검이 발굴 되었다. 석촉은 화살대에 결입을 하기에 결입부는 일자형으로 가까워 지며, 단부로 갈수록 얇아져 화살대에 끼우기 용이하다. 아래 도판 22번의 4번 무경식 석촉은 길이 4,8cm, 너비 2,3cm, 두께 0,5cm이다.

 ● 비파형 청동검

2호 석관묘 동장벽 중앙부근, 노출된 가슴~허리 측면에셔 출토된 동검으로 한 개체가 구부러 부러뜨린 방식으로 이분할해 매납하였다. 검신에 돌기와 결입부가 있는 동검이다. 슴베의 한쪽 면에는 섬유질 끈에 의한 결박흔이 남아 있다 (사진의 맨 아래)

검의 전체의 넓이가 일정한 것은 요동이나 평양의 서포동에서 발굴된 서포동식 동검과 유사하지만 봉부가 상대적으로 짧은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이러한 형태적 특징으로 보아 전통적인 비파형 동검으로부터 퇴화하는 단계로 추정되며, 유적내에서 출토된 석검과 석촉, 토기류의 출토시점과 대체로 상응화는 청동기 중기단계 이후의 동검으로 판단된다.

검신 전체 길이는 25,8cm. 검신 길이는 23,0cm. 경부길이는 2,8cm. 봉부길이는 1,8cm. 검신너비 2,1~3,65cm. 경부너비 1,15cm. 검엽두께 0,1~0,28cm. 등대두께 0,6~0,9cm이다.

 

3) 3호 석관묘 유물 

무문토기호 구연부편. 적색마연토기 동체부편. 저부 투공토기 저부편. 일단병 석검편.  유경식 석촉.

* 일단병 석검편은 회색 셰일제 석검으로 4분된채 출토되었으며, 잔존길이는 23,0cm. 병부길이 8,5cm. 병부 폭 3,8cm. 검신폭 4,7cm. 검신두께 0,9cm. 병부두께 0,98cm.

 

4) 4호 석관묘 유물 - 소형 호형토기. 유구 석부편. 미완성 석기 9점.

5) 5호 석관묘 - 공열토기문 구연부편 1점, 호형토기 구연부편 1점, 호연토기 경부편 1점, 무경식 석촉 1, 일단경 석촉 1, 미완성 석촉 1, 석기 반제품 1점, 관옥 3점,

6) 6호 석관묘 유물 - 적색마연 발형토기 구연부편 2점, 적색마연 호형토기 동체편 1,  무문토기 저부편 3점, 무경식 석촉 2점.

7) 7, 8, 9호 석관묘 유물 - 각 호 3점씩

 

※ 1~9호 석관묘 출토유물 합계 -55점

 

Ⅲ. 부록

1,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 금속유물 보존처리

* 청동유물은 Cu-B.T.A층의 안정화 보호피막을 만들어 부식발생을 방지한다.

* 강화처라는 유물 내부에 수지를 침투시켜 약화된 철재맟 청동유물의 강화와 방식효과를 주는 작업 실행.

* 금속유물의 경우 재 손상을 대비하여 조습제와 함께 밀폐된 공간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여야 한다.

1) 청동검의 파단면 확인 결과 외부적인 압력을 가해 파손시킨 후 부장한 것으로 확인되어 접합하지 않았다.

(보존처리에는 기술적인 것이 중요하지만 원형존중, 영속성 보장, 정당성, 가치부여와 같은 윤리적 원칙에 위배되는 처리는 피해야 될 것이다)

 

2, 인골에 대한 분석

무덤내에서 피장자가 확인되는 유구는 2호 석관묘 이다. 그외 석관묘는 5~60㎥의 크기로서 3호묘 등지에서는 목탄과 함께 인골이 발견되지만 1cm 이내의 작은 골편으로 화장골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매장상태는 확인핳 수 없다. 청동기 시대 유구에서 화장골이 확인된 예로는 평택의 토전리 유구에서 확인한 바가 있다. 2호 석곽분으 유구는 단독장 형태로 규모 140×40의 석관 내부에서는 슬 관절을 굽힌 약한 굴장의 형태를 취하고 검출된 인골의 잔존 상태는 다리의 사지골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두개골은 겨우 흔적만 잔존한다.

 

1) 성별과 연령

* 성별는 삼각근조편과 대퇴골 조선, 가자미 근선이 미약하게 발달하였으며 대퇴골 중앙부가 81cm  이하인 것에 근거하면 여성으로 추정된다.

*연령은 두정골과 시상봉합의 내판은 폐쇄되었지만 외판은 아직 개방된 상태이며 치아의 교모도가 1"b인것에 성년 전반 (20대)로 판단된다.

* 특기사항- 치아에서는 에나멜 질감과 치석이 확인되며, 상악 절치에서 삽모양의 치아가 확인되는 점은 피자아가 몽골리안(동양인)의 범주에 속한 인물임을 의미한다.

* 추정신장은 검출당시 우측 대퇴골의 최대 길이가 450mm인 것에 160,4cm로 추정된다. 초기 철기시대의 녹도 여성보다도 10cm이상이나 월등히 큰 신장에 해당하며 삼한시대이나 삼국시대 남자의 신장과도 비교될 정도이다.

 

3, 평창 하리 유적 출토 옛사람 뼈의 조직학적 분석

<동아대학교 고고미술 사학과 →국립 문화재 연구소 보존과학 연구실>

뼈는 생물학적 환경에서 지질학적 환경으로 이동하며, 메장환경과 화학적, 물리학적 요인에 따라 여러가지 변화를 가진다.

 

1) 분석대상

*평창 평창읍 하리 (240-번지 일원) 건물 신축부지내 유적 출토 1구.

*인골 인수인계: 인골 좌측 대퇴골 1구.

 

2) 분석방법

① 뼈의 조직학적 분석 - 뼈의 보존상태를 파악한다.뼈의 조직학 지수 HI는 0에서 5까지 6단계로 수치화 하였으며 수치가 클수록 뼈의 보존상태가 좋음을 의미한다.

② DNA분석-DNA 추출후 정제하여 미토콘드리아 DNA분석

③ 뼈 콜라겐 추출및 탄소와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 탄소 안정 동위원소 분석으로 특정 재배작물(C3 식물(쌀, 보리, 밀, 콩등), C4식물(조, 피, 기장등)의 섭취를 알 수 있으며 질소 안정 동위 원소값으로는 채식 또는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었는지 또는 도울성 단백질을 주로 육상동물 또는 해상 동물및 어패류를 섭취하였는지 추적이 가능함.

 

3)분석결과

① 뼈의 조직학적 분석(보존상태) 결과-평창 하리 유적 출토 인골의 조사결과 하버스관 형태만 존재하여 메우 안좋은 상태의 HI 0으로 평가됨

② DNA분석 결과 -  평창 하리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은 아멜로 제닌 유전자가 증폭되지 않아 성별을 결정할 수 없었으며 미토콘드리아 DNA분석 결과 - 하플로 타입 분석과 하플로 타입 그룹을 형성하기 어려움.

③탄소와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 결과 - 평창 하리 출토 유골에 총 2회의 뼈 콜라겐의 탄소와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 결과 콜라겐 수율이 낮아 질평가지수에 활용할 수 없음.

 매장 환경에서 뼈의 속성작용으로 인해 뼈의 생존시의 단백질이 손상되었다고 추정되며 따라서 탄소와 질소 안정동위 원소값음 활용할 수 없음.

 

4, 평창 하리  출토 청동검 분석결과  

1)분석대상-평창 하리출토 청동검 1점. 분석자- 국립 문화재 연구소 보존과학 연구실.

2)분석 방법- 성분분석, 미세조직 관찰 및 납동위원소 분석

3)평창 하리유적 청동검은 Cu(구리)-Sn(주석)-Pb(납)의 3원제 합금으로 Cu 77,3%.  Sn 9,72%.  Pb10,5%가 포함된 청동검이다, 또한 비소(As)가 1,86% 의도적으로 첨가된 것은 합금 첨가제로 구리는 내열성을 증가시키고 납에서는 굳히기를 증가하는 특징을 보인다.

 

5, 납 동위원소를 이용한 산지추정

창동기 내에 표함된 납의 생산지를 추정하는 분석법으로 이에 대해 분석의 기초 자료는 일본은 72개. 중ㄱ국 북부는 17개, 남부는 19개이며 남북한 지역는 각 10개로 일본을 제외하고는 국가별 사료 수가 많치 않아서 추적하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평창 하리유적 출토 청동검의 납 동위원소비는 기초과학 지원 연구원애 있는 열 이온화 질량 분석기(TIMS)를 이용하여 분석하였으며, 그 결과 평창 하리 유적 출토 청동검은 중국 북부지역의 납을 이용한 청동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

 현재 국립 문화재 연구소는 남한지역의 100여개의  납광산 (350여점)의 납 동위원소비 분석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나 북한 지역은 아직 비교할 만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향후 북한지역의 납 광산의 자료가  확보된다면 좀 더 정확한 산지 추정이 가능해 질 것이다.

 평창 하리 출토 유적의 청동검은 우리나라 청동기 분석 연구를 위한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6,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보고서

* 한국 지질 연구원, 지질분석 특성 연구쎈터.

* 자료명; 평창 하리 4호유구 주변

* 탄소연대 (ytsBP) - 2620  오차범위-30  연대범위 (BP)- 2590~2565

  (ytsBP는 1950년 방사성 탄소 연대를 의미함)

(이상 강우강원 고고문화 연구원의 평창 하리 유적 리포트의 발췌분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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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 대한 이해 >

 

 위 연구 보고서에는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이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탄소연대 (ytsBP) - 2620년에  오차범위-30년, 즉  연대범위는 (4호분 주변 검사 기준)  (BP) 2590~2565 전으로 BC590~565년 사이의 역사임이 밝혀졌습니다.

 

하리 청동기 시대 석관묘 내에서는 국내 가장 오래된 피장자의 전신상 인골이 발굴 되었으며 인골과 함께 매납된 비파형 청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비파형 청동검(일명 고조선식 ) 청동검과 마제석검, 마제석촉, 관옥, 환옥, 적색 마연토기, 무문토기등이 58점 발굴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BC5~6세기의 한반도 전체가 고조선이라 함이 아니라면 고조선의 강역이 일부일지라도 이 시기는 고조선 시대의 시기로  하리 출토 유물은 이 시기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고 고 인골은 유일한 고조선 시대인이라는 점 입니다.

 

유적 발굴시 고조선 시대라 지칭했더니 발굴처의 어느 역사가 왈,,,큰일날 소리 하지 마시고 청동기 시대 유적이라한다. 그러면  위에서도 삼국시대라 국가적 시기의 분류를 하고 그 이전엔 고조선이 아닌 청동기, 철기의 광범위한 구분으로 간다. 역사가 이넘들아 이게 시대구분에 논리적 모순이지 않는가..그러고도 나의 말이 모순이라 폄하는게 잘못이지 않는가??

 

사람들은 일제때  이병도(초대 문교장관, 조카는 서울대 총장 ) 이하 일제 식민사학의 문제라 하는데 그런 일제 식민사학은 이미 두세대, 70년이 지났다면 새로히  뜻을 세워도,,그런 식민사학 핑게를 잡는다면 그보다 당시로서 더 큰 문제는 양반 쌍넘의 게급사회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 후에 난 양반이오 하고 에헴 거리는 넘은 한 명도 없다. 그러니 일제 식민사학이 고조선 발목을 잡는다 하지 마시고 옛날 대학입시에 역사과는 공납금만 까먹는 미달학과 였다고 폄 하기 전에  진정 우리 사학계계는 고(古) 조선의  역사를 바로 세워라,  이 부분이 사가들의 밥숫가락이 목에 걸리지 않는가??

하리 청동기 유적은 중국 짱께들의 동북공정에도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청동기 시대, 고조선사의 역사 유산이다.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은 고조선 시대후반의 고조선의 약 500여년전의 말기적 시대로 평창의 고조선식 청동검을 치켜든 고 인골은 고조선 인으로는 현존 유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기에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고 인골이 평창 역사의 시원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자 한반도에 고조선 강역의 어디에서든 유일한 고조선 시대인이다. 

 

지난 게시글을 다시 리필해보면 우리는 평창의 가장 큰 문화인 평창 군 페스티벌에서 노산에 올라 임진 노산 전적비에 충의제를 드리고 카니발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임진왜란 당시 노산성에서 왜구와 전투라던지 또는 왜구 100여명을 죽였다 하는데, 이제는 잘 알려진 임란 당시 평창군수(종 4품)인 권두문 군수의 호구알록에 의하면 왜구가 멧둔제를 넘어 조파(조동쯤)에 내려온 왜서(倭書)를 전달하는 자의 목을 베고 곧바로 후일을 기약하고 천동리 굴로 숨기에 배로 내려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기에 노산성의 임란대첩비는 사실이 아니라 가상의 거짓이란 점이다. 이 점도 문제이지만 그 보다 더한 문제는 평창의 際를 지냄에 호국열령의 충정의 기상이 가장큰 예절로 평창 문화에 예식에 일착이란 발상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노산제를 지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그 중요하다는 것은 임란당시 왜구에 항복하지 아니하고 항전한 모습으로 이것은 평창 역사에 영원히 빛내야 할 일이지만  평창 군민의 화합의 장에 이러한 충의제에서 부터 비롯된다는 발상은 큰 괴리감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괴리감이란 평창의 역사와 평창군민의 전반적 총칭의 군제(郡際)를 지냄에 국난극복의 무신적인 행위만이 군의 전채를 대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문치를 숭상하는 국가에서 이러한 충의제와 호국 영령의 추모는 군제의 하나의 범주에 속해야 하고 보다 더 광범위하게 이상적인 가치관의 군제를 지내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노산성에 평창군의 군사 성황사에 올라 군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듯이, 이 시대의 군제(郡際)는 평창의 가장 큰 의미를 포괄할 수 있는 상징으로서 평창의 하늘이 열리고 고조선 검을 높이 치켜들고 평창의 역사를 시작하는 평창읍 하리 출토의 첨동검을 옆에 찬 古인골은 평창의 시원의 조상으로 모시고 우리는 그러한 제를 군제(郡際)로 모시는 것도 아름다우리라 생각 합니다.

 이상 평창 읍 하리 출토의 고 인골에 대한 기록을 마칩니다.

다음 글로  문치 국가와 무인국가를 적나라하게 비교해 보이며 또한 한가지 이야기는 하리 출토의 고 인골은 20대 여자로 밝혀집니다. 당시 고조선식 청동검을 소유한 큰 키의 20대 이 여인은 누구였슬까 하는 의문속에 가상속의 가공인물을 그려 보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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