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
후세백작 2020.03.13 08:21
"평창 후평리, 방림리, 주진리 유적"<강원고고문화연구원 학술총서 51책>
- 국도 31호선 영월- 방림(1) 도로건설공사 구간(후평-주진- 방림리) 구간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원주지방 국토 관리청/강원 고고문화 연구원
(아래 내용은 2014~5 정밀 발굴조사에 의한 2007년 보고서애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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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도 31호선 영월-방림(1) 도로공사구간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와 유구및 유물현황
1) 1차 조사- 후평리 유적
*평창군 평창읍 후평리 480-1번지(8,213㎡). 조사기간 2014, 10, 25~12, 10
*조사결과 철기시대 주거지 15동. 굴립 주유구 3기. 주혈군 1기. 구상유구 1기. 수혈유구 10기. 조선시대 수혈주거지 1동을 발굴 조사로 철기시대 경질 무문토기호, 타날문 토기 단경호, 연질 호, 타날문 옹, 조선시대 기와편 등의 토기류와 와전류를 비롯해 석검, 석촉(재), 석도, 방추차, 지석, 고석, 발화석, 마노제, 관옥등의 석기류와 철촉, 철부, 철도자, 철착, 철제 삽날의 철기류 총 90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2) 2차 조사 - 방림리와 주진리 유적 조사
* 방림리유적 - 평창군 방림면 방림리 612-4 번지 (1,822㎡) 조선시대 토기류, 철기류 총 9점을 수습(조사기간 2015,10,6~10, 20)
* 주진리 유적 - 평창읍 주진리 488-11번지(6,580㎡) 청동기 시대 토기류, 석기류와 조선시대 도기류, 청동가류등 총 32점 (조사기간 2015,11,6-12,3)
* 주진리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2동과 야외노 1기, 조선시대 토광묘 1기를 조사하였으며, 청동기 시대 구순각목 공열문, 구순각목문, 공열문, 무문토기와(적색마연) 대부소호, 적색마연 장경호, 토제 어망추와 조선시대 시유도기등 도, 토기류를 비롯해서 석촉재, 석추, 방추차, 지석, 고석, 연석, 작업대등의 석기류,용도미상의 청동기 제품등 총 32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3) 평창강 유역 철기시대 주거지 탄소연대 측정결과
유적명 |
방사성탄소 연대(BP) |
보정(68,2%) 연대 |
보정(95,4%) 연대 |
연대눈금 맞춤결과 |
측정기관 |
후평리 3호 |
1,740±30 |
259AD~340AD |
80AD~240AD(95,4%) |
국립 공주대학교 공동실험 실습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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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평리 4호 |
1,850±30 |
125AD~245AD(68,5%) |
80AD~240AD(95,4%) |
국립 공주대학교 공동실험 실습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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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림리 1호 |
1,860±30 |
80AD~120AD(7,5%) |
80AD~240AD(95,4%) |
국립 공주대학교 공동실험 실습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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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리 2호 (강고연2011) |
1,720±40 1,860±40 | AD320~AD380 |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 ||
약수리 2호 (강고연2013) |
1,770±40 | AD270 |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 ||
천동리 4호 (강고연2012) |
1,730±60 | AD315 |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 ||
마지리 (강고연2012) |
1,570±50 1,980±60 |
AD486 AD40 |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
*(강고연 = 강원고고문화연구원 )
이로서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은 평창의 청동시대,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다
2,평창역사의 상고사
1)구석기 시대 유적
◆ 자료조사를 통해 평창읍 도돈리 평창강 북쪽 언덕에서 찍게, 찌르게, 긁게 등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 강원도 평창군 강원문화연구소 2004. 「문화유적 분포지도 - 평창군」
◆ 2007냔에 연세대학교 박물관의 학술발굴조사에 의해 평창군 미탄면 기화리 쌍굴의 발굴조사
결과 동굴내부 3개 지층에서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와 동굴뼈 화석이 발견되었다.
*박영철, 2008, 「강원 평창군 기화리 쌍굴의 퇴적편년의 검토」
2) 신석기 시대 유적
◆ 평창읍 유동리, 주진리에서 처음으로 빗살 무늬편을 수습하여 유적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림
*강원대학교 박물관, 1987,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후평리 평창 대화 통합 상수도 시설공사 부지내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편이 출토되는 야외 노가 발견되었다.
*중부고고학 연구소, 2013, 「평창, 대화 통합 상수도 시설공사 부지내 후평리 유적」
◆ 용황리. 다수리와 천동리 일대에서 수혈유구, 야외 노, 토기류등이 확인되어 이들 중심으로
선사문화를 형성하였슴을 추정할 수 있다.
*(주) 예백 문화재 연구원. 2010, 「평창 용두리 유적」
3) 청동기시대 유적
청동기 유적은 이전 시대보다 보고된 수도 많고 출토 유물도 다양해 평창읍 일원의 충적지를 중심으로
취락을 형성하였슬 것을 것으로 판단된다.
◆ 지석묘(평창의 고인돌과 선돌)
받침돌로 지하에 무덤 방을 만들고 주위에 여러 개의 돌을 놓은 후 덮개돌을 얹은 구조이다.
이를 개석식(蓋石式) 기반식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평창의 고인돌은 기반식으로 약 37개가 남아 있으며 대부분의 고인돌은 다섯 곳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1, 상리群-고인돌 3기와 2기는 자연석으로 추정
2, 종부리群 - 10여기가 있으며 그 중 2호기는 5~8cm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3, 계장리群-현존 1기가 남아 있으나 원래는 20여기가 있었는데 농경지에 훼손되었다
4, 후평리群- 6기의 고인돌이 전해지고 있으나 과거에는 20여기에 달했다 한다.
5, 임하리 群- 7기가 전해지며 그중 한 기는 칠성바위라 불린다.
그외 대화면 신리, 대화리, 하안미리등에 몇 기의 고인돌이 잔존하며 그 중 진부면 수항리의 수항리사지 옆에 농경지 고인돌은 밭 주인의 증언에 의하면 고인돌 위에 10명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밭일 중에 참을 먹기도 했다하는 크기(지름 약 3m정도)로 아마 석질의 모양새도 상당히 좋았을 듯 하다(현 수항초교 앞 민가에 탁자석 상판석처럼 주변의 돌들을 보면 색상과 평편함의 변성암이란 점을 느낄 수 있다)
강원도 고인돌 특징은 대부분 개석식이며 370여기중 북한강은 인제등보다 충적지가 발달된 춘천에 많으나 남한강에서는 하류인 영월과 원주지역보다는 상류인 평창과 정선 지역에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밀집 되어 있다.
이는 전곡리 유적과 비슷한 지형으로 수심이 낮고 강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중상류 쪽이 청동기인들이 생활터전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강 유역에서는 대규모 군집을 볼 수 없고 다만 2~5기가 모여 소형군집을 이루는 것이다.
평창의 고인돌은 대부분 파괴되어 현황조사및 재정비, 관리가 시급한 상태이다.
◆ 임하리의 선돌 - 선돌의 뜻은 고인돌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선돌은 전국적으로 약 10~15개 분포한다.
◆ 하리 청동기 유적 - 최근 평창읍 하리 240-4번지의 신축건물 부지내의 유적은 고조선식의 청동검과 인골이 반출된 지석묘가 조사되어 청동기 시대 후기 평창일원에 사회적으로 상당히 분화된 청동기 시대의 취락과 분묘군이 존재했슬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3. 천동리. 마지리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16동, 주구묘와 석관묘 각 1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재) 강원고고문화연구원. 2013. 「평창 종부리 유적 」
5. 주진리 유적 발굴조사에 위석식 노 3기가 설치된 세장방형 주거지가 조사되어 구순각목공열문토기등이
출토되어 정선 아우라지 유적, 주천리 유적과 함께 청동기시대 조, 전기 문화의 확산양상을
4) 철기시대
1. 지표조사를 통해 평창읍 임하리, 종부리, 응암리, 중리, 마지리, 대화면 하안미리등지에서
◆ 응암리 적석총은 지표조사시 타날문 토기와 단경호등이 발굴되었고, 2008년 시굴조사시
격자 타날 토기편이 수습됨에 적석총 상부는 일부 훼손되었지만 매장 주체부는 잔존할 가능성이
◆ 평창에서 청동기시대 주구묘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종부리 일원으로 국도 31호선 영월-방림간 도로개설 구간에 대한 문화재발굴조사로 지난해 시굴조를 하는 평창군 종부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전기로 분류되는 주구묘(周溝墓) 무덤을 보호하기위하여 도랑을 두르고 중앙에 움[土壙]을 파서 시신을 직접 매장하는 무덤 형태와 수혈 건물지(竪穴建物地) 땅을 파서 만든 집터, 철기시대 수혈 건물지, 삼국시대 석실묘 등 선사와 역사시대의 주거와 분묘유적을 발견하였다(2012,11)
특히, 청동기시대 전기로 분류되는 주구묘에서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 ; 시신이 놓인 곳)가 토광목곽묘로 이뤄진 것을 확인했으며, 이는 이제까지 확인된 예가 없는 것으로 청동기시대 분묘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평창 상고사 끝> ++++++++++++++
◆ 아래의 도판은 국도 31호선 영월-방림(1) 도로공사구간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와 유구및 유물현황중 발췌.
▲ 경질 무문토기 호
4호 주거지 발굴 - 복원 구경 22,0cm. 가로 41,5cm. 저경 12,3cm. 두께 0,95cm. 색조 2,5YR
◀ 타날문 토기 동체편 - 7호 주거지 출토 -격자 타날문 잔존고 4,9cm, 잔존너비 4,9cm, 두께 1,1cm, 색조 2,5,Y.
▶ 경질 무문토기 뚜껑 - 5호 주거지 내부 퇴적토 출토. 잔존고 7,7 cm. 복운 구경 18cm.
◀ 경질 무문토기 호 - 3호 주거지 노 주변 출토. 복원구경 23,4 잔존고 32,7 저경 11,0 두께 1,3 색조 5YR
▲ 타날문토기 동체편 - 4호 주거지 내부 퇴적토 발굴.
▼ 발화석 - 4호 주거지. 휴대가 간편토록 납작한 활석을 연마해 사용하였고, 상면 중앙에 발화 홈이 있다.
◀ 유병식 석검편 - 4호 주거지 내에서 수습 검신 상단은 파손되었고 화재로 탄화되었다.
잔존길이 10,4 cm. 너비 3,7 cm. 두께 0,75cm. 암질-회백색Y5 천매암
▶타날문 토기 단경호 - 4호 주거지 출토 종방향 타날문 구경 19,6 잔존고 26,2 두께 0,5 색조 10YR
21) 석제 방추차 - 4호 주거지 직경 6,1 투공 직경 1,0 두께 0,75 천매암
23) 무경식 철촉 - 후평리 유적 철기시대 4호 주거지 출토 (9,0×2,1 두께 0,25)
24) 철착 - 5호 주거지 출토 철재 공구로 추정. 길이 4,1 너비 0,65 두께 0,2
25) 철도자편 - 후평리 유적 철기시대 4호 주거지 (5,5×1,55 두께 0,2)
26) 철재삽날 = 후평리 유적 철기시대 4호 주거지 출토 길이 20, 너비 17,1 두께 0,8
49) 경질 무문토기편
50) 타날문 토기 옹 구연부편
52) 석도 - 9호 주거자 출토,
53) 지석 - 중앙이 약간 오목한 장, 타원형의 돌로 전. 후면과 측면 모두 고타와 연마로 사용하였고 중앙에 길이로 정마흔이 분포하고 외연에 고타 흔이 보이며 후면에 일부 첡 마연흔이 보인다 (지석은 쉽게 이해하면 숯돌도 중앙에 길게 연마로 갈아서 약간 내려 달은 흔이 보이고 가장자리 부분은 고타를 하여 곰보의 휜 점들이 보안다)
121) 구순각목 공열문 토기 구연부편
구순을 포함한 기면을 물손질한 후 각목문과 공열문을 시문하였다.
6~7mm 공열문은 밖에서 안으로 관통해 있다.(주진리 유적)
123~125) 토제 어망추
주진유적 2호지에서 출토, 무문토기편을 재활용. 크기는 5~6cm 두께는 2,2cm
주진강 위에 주거 하였기에 민물고기 잡이 도구로 반도와 유사한 도구를 사용한듯 합니다.
129) 주진리 유적으로 시유토기 구연부편
130) 미상 청동제품 (상하는 하나의 유물로 입체로 보이는것)
길이 18,3cm. 너비 0,2~0,6cm
▲ 철기시대 석조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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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과 이해>
이상으로 평창의 상고사를 기존의 내용에서 최근에 밝혀진 정확한 고고학적 시굴 조사 방법으로 밝혀진 역사사료에 의해 새롭게 조명하였습니다.
기존에 내용이란 읍면지나 군지, 지명지등의 군 발간의 연감등에서 역사서술이 아닌 새롭게 밝혀진 역사에 서술은 과거 시대에 역사자료를 출처도 없이 마냥 베껴쓰고는 자기가 답사하고 자기것인양 하는 악질적인 행위애서 탈피하여 새로운 평창 고대의 상고사를 조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 서술에는 개안으로서는 자료의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자료를 찾는데,,,일전 대상리 사지 탑의 옛날 자료의 사진을 찾다보니 아마 그 출처는 "
강원대학교 박물관, 1987,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라는 책에 기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동 책은 시판되지 않는 책으로 대화. 진부 도서관에 문의한 바 소장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래서 이 사진의 인터넷 게시자에게 문의 결과 평창군청 근무시 문화과에서 그 책을 스캔하였다 한다.
동 책 「평창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은 아마도 학술지에서 평창 역사를 서술할때 자주 인용되는 책으로 평창에서 실시하는 역사 세미나는 자주 인용되는 책으로 평창의 역사 사실 규명에 학자란 자들은 답사도, 증언도 없이 하는 제잘난듯 인용하며 무수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바 동 책 자체에서부터 검증을 하려 하여도 개인으로서는 구해 볼 수 없는 책이다.
이렇듯 개인으로서는 자료의 한계가 있기에 위의 게시한 "기화리 쌍굴 구석기 유적"과 "하리 청동기 유적"이나 "후평리 유적"등의 역사 글은 문화재청이나 고고문화원 사이트에 깊숙히 파 뭍힌 리포트를 들춰 찾아서 기록하는 것으로 또 하나의 문제는 개인이 리포트를 찾아 정리해 서술한다고 객관화 사료로 채택되는 것은 아니기에 개인이 정리할 사항이 아니라 평창군이나 평창의 관제 시스템의 공적인 역사 단체인 평창문화원이나 그 산하 평창 향토사학회가 주관하여 객관적으로 정립하여야 할 문제라고 보는 바이지만 그러한 단체들에서는 무엇이 바쁜 업무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평창 역사의 정사의 기록에 대해서 단 한마디 언급도 찾아 볼 길이 없다.
본인이 이러한 평창 상고사를 정리하게된 이유는 일전 평창 역사 연구자와의 이야기로 청동기 박물관을 만들면 채울만한 역사유물이 없다 하길래 본인은 몇 년전부터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내용도 단조로운듯 무리하다는 주장처럼 전달되기에 평창의 상고사를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다시금 본인이 주창하는 청동기 역사 박물관이 필요한 점의 이해와 소통의 노력으로 평창의 상고사를 각 출처별로 빠짐없이 면밀하게 기록하는 것입니다.
일련의 게시글에서 5~6 만년전의 미탄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인의 역사가 암사동 선사 유적이나 전곡리 구석기 유적보다 중요한 점은 기화리 쌍굴 유적의 특별한 점은 구석기인들의 도구인 밀게, 돌도끼등의 유물만이 아닌 상대적인 각 동물의 화석뼈를 통해 당시의 인간이 먹었던 동물들까지 생생하게 이해해 볼 수 있는 점이고, 하리 청동기 유적은 인골롸 함께 고조선식 청동검이 출토된 무후한 기록과 후평리, 천동리등 철기시대의 유물들은 평창읍 전 지역이 유물산포지로서 많은 유적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유적, 유물들은 영월- 방림간 도로 건설지역의 발굴 조사등이였고 앞으로 평창읍 전체가 유물산포지로서 어떠한 공사시에도 평창읍은 지금의 열 배 백 배의 공간이기에 채집될 수 범위는 크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앞으로 발굴될 수 있는 유물이 아직껏 발굴된 사료보다도 더 진귀한 역사 사료도 나올 수 있기에 아으로의 유적 발굴조사도 기대되는데 지금까지의 유적은 평창으로는 박물간이 없는 관계로 춘천 도립박물관이나 강릉등지의 박물관으로 전세살이 갔으나 앞으로 발굴될 유적도 모조리 타향살이를 보낸다면 그리고도 평창의 유산으로 무얼 더 기대할 것입니까??
우리는 노산성에 올라 충의제등 가식적인 제를 지내는 것은 무신정신만을 기리는 것으로 문치국가로서의 전체적인 이땅의 얼을 조명하기에는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논고도 한 바, 진정 역사란, 이 땅의 먼 선인들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역시적 삶의 궤로서 평창의 혼이 담긴 정채성과 우리의 기상을 자아낼 수 있는 역사물은 쓰레기로 보이듯 팽게치고,, 관치의 문화원이나 향토사 연구소나 향토사 연구자분들은 지금의 이런 상고사의 내용 한 번이라도 서술해 보았습니까??
위의 평창역사 서술에서 보듯 평창은 먼 옛날의 구석기시대 ,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궤적을 이루며 이땅에 선인들이 살아왔다. 이러한 점은 평창이 고대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이기에 선인들이 찾아들었고 모여살며 오늘에까지 이어 온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점은 평창초교의 교가에서 보듯 억만년, 억누리의 시,공을 넘어서서 우리는 산좋고 물맑은 천혜의 고장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얼은 팽개치고 내가 이땅의 주인이오 하고 유아독존하는 평창인들이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평창은 돌 체험관이란 기호적인 전시관도 생기듯이, 평창 시원에서 오늘에 이르는 삶의 역사궤적속에 평창 특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청동기 뮤지엄이 생긴다면 이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까??
앞으로 더 중요한 유적이 발굴되어도 이 땅의 주인들을 타향살이 보내실 것입니까?? 자주 인용할 것은 아니지만, 평창문화원은 평창의 유, 무형 자산을 기록화 하겠다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지만 본인으로서는 이러한 평창 역사이 얼이 가장 중요하고 또한 우리는 이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소명을 부여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문재는 지난해에 오대산 사고의 박물관이 건립되고 일본에서 돌아온 사고의 소장본의 원본이 소장되길 기대하였건만 영인본이라는 모조품만 비치되었습니다.
예전 유흥준 문화재 청장은 오대산에서 김진선 도지사에게 오대산에 박물관을 지으면 원본을 내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원본론을 언급한바 이때 평창의 사학자 한 분은 옆에서 들으니 원본을 준다 하여서 유청장은 다행히 계란 세례를 받지 않게 되었지만 후일 박물관이 건립되고서는 약속한 원본이 아닌 이비테이션의 영인본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듯 지금 만약 평창에 박물관이 건설된다고 타지의 박물관에 비치된 평창의 유물이 모두 평창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하는 문재입니다. 물론 청동기 박물관은 국립이나 공립으로 문화재청에 귀속되기에 일부 평창의 유산이 돌아 올 수는 있지만 중요 문화재의 보장성은 희박할 듯 한 것입니다. 과거 60년대 원주 단구동에 버려진 철불 5개를 춘천 박물관으로 입고되고나서 이후원주박물관이 생겼는데 원주 박물관의 메인 로비에는 단구동의 좌상 불이 전시되고 잇지만 그것은 원품이 아니라 이미테이션의 모조품입니다. 모조품이란 조각가 로댕의 활쏘는 브르텔이 호암 미술관에 있는데 이는 로트 번호를 가지고 로댕 회사에서 판매하고 80년대 초에 억대가 넘는 값일텐데,, 이럴때 이미테이션이 통하는 것이지 박물관에서 이미테이션(모작)은 박물관의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이라 보입니다.
평창에서 고고학회가 유물 조사시 지역 당당관은 발굴되는 유물에 대해 평창산이기에 후일 평창에 박물관이 건설되면 제 위치로 귀속의 반환 이행 서류를 작성하였을듯 하지만 오대산 사고의 영인본에서 보듯 시간이 흐를수록 반환의 보장성이 희박해질듯한 문제를 가지는것 아닌가 의문합니다.
그러나 평창 !!위의 평창 상고사의 역사를 통해서 볼때 평창은 구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 삼국 시대로 이어 흐르는 역사를 유추해 볼때, 평창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마을이란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랗게 천혜의 자원을 선물받은 평창은 산이 굽고 물이 돌아 흐르며 빚어낸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인가 하는 점에서 바로 이곳이 금수강산이란 평창인의 긍지심을 자부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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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에 인용된 오대산 사고에 대하여,,
오대산 사고는 선조의 명으로 사명당이 3년간 짓습니다.
월장사 법당이 스러지고 개수하지 못하는 점을 보고 사명당은 홀연히 금강산을 내려와 오대산 영감난야에 머물며 5년간에 걸쳐 ㅝㄴ정사를 중창을 합니다. 이후 선조는 불교의 힘을 빌어 국력을 신장하려는 의지로 오대산 사고를 짓기에 오대산 사고 현장 감독관에 사명당을 임명하고 수호군등 80명으르 보내며 사명당으로 하여금 밀직의 업무를 총 지휘하게 합니다. 그래서 오대산 사고 건축의 총 감독자는 사명당이 만들게 됩니다,
사명당은 임란때 가토 기요사마를 세번 만나 조선인으 염원은 가토의 머리가 조선에 있는 것이라는등 조선인의 기개를 펼쳐 보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까와 이에야스와 임진란의 강호를 맺고 포로 3,500명을 반환받아 돌아 옵니다. 이때의 사명당의 극일정신을 담은 야사는 많은데 사명당의 스토리에서는 월정사 중창과 오대산 사고지 건축에 8~9년 평창에 거쳐한 사실을
가지며, 오대산이 연구하는 사학 연구자도 있지만 평창의 오대산 사고지와 사명당의 관계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대산 사고지의 내력과 사명당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어쩜 사명당과 평창과의 관계는 자연스런 일일지도 있겠지만 이러한 이야기에서 보듯 유정 사명당이 평창을 가장 사랑한 인물임을 알았으며 인터넷 상이나 평창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회자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평창으로서는 오대산 사고지나 이하 요처에 사명당의 고마음을 표시하는 비를 헌액하여야 바른 보답의 사필귀정이라 하겠습니다.
◆ 강원고고문화원의 리포트에서 평양식 청동검이란,,,
위 리포트에 강원 고고문화 연구원에 노력과 열의에 감사하지만 딱 한가지 거슬리는 사안에 대하여 논합니다.
리포트 중간에 비파형 청동검을 일명 고조선식 청동검이라 하는데 평양식 청동검으로 표기한 예는 평창 하리 출토의 청동검이 평양과 인근의 청동검처럼 비파형 동검이 세형동검으로 가는 과도기라 곡선이 완만해 지기에 이를 평양식이라 하는데 그리고 평창의 검은 평양 출토의 검들보다 봉부가 더 작아지기에 평양보다 후대의 검이란 점은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평양식이라고 명문화 하지는 않습니다.
예전 하리 유적 발굴시 본인은 담당 학예사에게 고조선식이란 단어를 쓰니 펄쩍 뛰어요. 물론 고조선이란 정확한 물증을 가리지는 못하니 그러하겠지만 이 리포트에서 고고학계가 사용하는 연표를 한번 보겠습니다.
리포트엔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 하며 문명에 따른 시기로 분류하다가 철기 시대가 아니라 삼국시대라 하며 그 이전은 청동기 시대하 한다면 이는 삼국시대는 국가적 분류의 연대이고 청동기시대는 위애 말한바 문명 발달의 시기로 혼용하며 어떨때는 삼국시대이고 어떨때는 철기시대라 함은 그 모호성을 가지기에 삼국시대에는 그 이전 시대를 고조선 시대라 함에 큰 문제가 있습니까??
만약 고조선 국가라 지칭했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고조선 당시의 하는 표현이 제약을 받아야 합니까?? 본인이 볼때는 강원 고고학회서는 의도적으로 고조선이란 단어를 회피하기에 남들은 고조선식 청동검 하는데 이를 평양식 청동검이라 지칭하며 고조선이란 단어에 아마 컴플랙스를 가지는 인상을 풍기는 것입니다
아래의 사진은 본인 소장의 고대사 즉, 원삼국 이전 시대의 역사를 연구한 여러 학자들의 공동 연구의 논문을 공유하는 저서로 비매품의 자료로 2권 1,500 여 페이지에 달합니다.
아래에 책 P 198을 인용해 봅니다.
조선이 濊, 貊(허드레 예, 북방종족 맥) 이라 하고 있습니다
하리 청동기 유적 게시글에서 필자는 얘맥을 춘천을 맥, 강릉을 예라고 논고한점은 이러한 문헌에 기인하며 이중환의 택리지에선 춘천의 청량산이 맥족의 도읍이었다고 서술하며, 대동여지도 해설편에선 옛날의 강릉은 예족의 국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강릉에선 예의 후손이란 예라는 글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 출처 - 「한국 고대사 연구」 2편, 출판사 없음, p198
++++++++++++++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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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애서 발행돤 평창군 지명지 책애는 출처 하나없이 문헌을 인용한 예에서 보듯
평창은 그 특유적으로 남의 것을 들고가 출처하나 없이 자기것인양한 몹쓸 버릇이 좀 있는듯 합니다.
일전 본인의 글이 복제되어 사용되고도 오히랴 본인이 訴가 걸리는 사건도 있었지만
본인은 그렇게 후덕한 위인은 못됩니다.
그러한 소정도는 웃지만 종료후에 본인은 盜用( 도둑도, 쓸용) 즉 남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들고가
자기것인양 하는 점을 도둑으로 제소할 뜻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것을 일소에 붙이며 아직도 그러한 잡음들은 삼가 바라며, 앞으로 저의 모든 글은
역사 글이지만 무단 복제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지난 영월의 고씨굴엔 본인이 10년전 쓴 글을 현 문화원장이 보고 6개월내로 연구하여 끌을 쓴다 하였건만
그 점에 많은 문제중 본인의 글의 복재도 문제가 될듯하여 그냥 원본 그대로 후세백작의 글을 인용하여
고씨굴에 임진 의병장의 비를 제막한 바 있는데 역사글도 함부러 들고가지 못한다는 점도 작용한듯
이처럼 본인의 허락없이 들고가면 법으로 처리할 것을 명기합니다.
이점 유념 바랍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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