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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생각

[ 평창인에게 부침!! ]

 

 

           [ 평창인에게 부침!! ]
                                                                                                                                     09.09.02 23:26
                                                                                           

 

한강에서 돌아온 이 밤,  이 카페를 보며 불현듯  [평창인에게 부침]  이란 제목 하나를 생각하고

이 글을 씁니다.

 

평창은 공활한 가을하늘 드높은 동리이며, 처음으로 물이 발현하여 멀리 한강을 이루는 수의

장 입니다.   그 속의 인간들의 세상 역시 자연과 닮아 인심이 풍요한  아름다운 이 마을이 우리

고장인 것입니다.

 

천만년 억누리에 이어나갈 우리의 평창 !!

이 풍요롭고, 청정한 고장에 살고있는 우리 평창인들은 또한  이 평창의 문화와 모든것을 대에

물려줄 깨끗한 유산으로  스스로 간직해야 함의 의무도 함께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영월은 엊그제 군청앞에 야간 조명의 분수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90년대

동강 살리기에 일심으로 노력하여 김삿갓 유적지등으로 ,또한 우리가 늘상 보던 옛날의 여만리

섶다리도, 관광자원으로 아마 영월 지방세수의 상당한 부분이 관광자원의

이라 생각 됩니다.

 

그러나 평창은 고속도로 주변의 리조트는 전국에서도 아마 상위 물량이며 펜션도 꽤나 많

리에겐 관광코스의 개발이 미약한 듯 합니다.

물론 펜선 각자의 프로그램은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여행자들이 팬션에서의 일과

딱 두곳뿐...메밀꽃 필무렵의 봉평과 대관령뿐이란 느낌이.

 

 

펜션의 경우 개별의 프로그램도 중요하지만  평창이란 큰 테마의 행사도 이루어 짐도..

그 속 양한 문화 답사도 어우러 지면  좋을 것입니다.

감자 축제이고 산나물 축제도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것은 한철이기에 아쉽고, 그럼 만약 평창

순례등의 등산로 코스 개척은 어떠할까요??

그러기 위해선 평창의 역사를 정립하고 주관할수 있는 조직체 ... 가칭 [ 평창 문화, 역사발굴

존 위원회] 정도의 기구를 조직함도 마땅하리라 생각 되어집니다.

 

우리는 비경의, 또한 자연스러운 흐름의 서강을 지니고 있고, 또한 임란때는 강원도에서 유일

항전한 노성산등 꽤나 많은 자원을 홍보나 또한 개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10년전 백옥포리에 청소년 수련관 건립당시 저는 군청의 어느 친에게 그에 이름을 [율]

이라 명명하면 좋을 것이란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의 내용은 아래 (* 참조,,

해설에)...타당할수 있는 명칭으로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참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예에서 보듯이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고장, 스스로의 역사는 우리가 이해해야 하고, 스스

챙겨야 할 것입니다위의 예에서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알았다면 노성산은 꽤나 이름있는 으로

알려졌고, 율곡 수련원은 처음엔 어색하리라 느끼지만 아마 지금쯤은 한층 더 진가를 발휘하지

았슬까 하는 느낌입니다.

 

만약 이런 조직체가 앞으로 해야할 과제라면,,,

평창의 선사유적 ( 이것도 이 카페에 부지런히 설명하였습니다만)의 발굴및 검증의 학계인정

앞서,,우리 스스로가 파악과 보존 또한 각 대학 역사 탐방의 기회로,,,

역사 학도들의 현장 답사와 그 곳에서 선사인들의 체험같은,,,대학생 초청의 프로그램 저확충

시설과 산성 답사코스등의 개발등....

 

낙엽이 지면 산성찾기에 나서겠다는 엄기종님의 의지에 찬사를 보내며,,,,

그 옛날에는  오지인 이곳에 왠 산성이 있는가 하고 반문을 하는 독자가 계신다면 ,,,,,

 

山城( 산성)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하면  故 양주동 박사의 말에 의하면 단군민족은(우리배달의

민족)은 檀(박달나무 단)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산 위에서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우고대사에서

산성은 참으로 중요 합니다. 산성 그 자체가 생활의 일부였기 때문 입니다.

 

 

 우리 민족의 태동시에도 국내성, 오녀산성(졸본성),,, 환도성,,, 아마 유목민족은 기동성과 그에

따른 간편음식이 식생활의 기본이지만 농경사회의 전쟁 준비는 첫째가 城의 확보인 입니다.

 

현대戰은 線에의한 공격과 방어의 작전에 의한  전선으로의 Line( 라인) 전 입니다. 하지만 옛날의

전투는 城에 의존하는 점으로 이어지는  포스트대 포스트 戰이라 해야 될듯 십습니다.

 

안시성의 예로 본다면  양만춘 휘하의 병력이 안시성에 철문을 굳게 잠그니 적들은 안시성 밖에

더 높은 성을 쌓고 그들을 무찔러야 앞으로 진격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그냥 두고 다음 성으로 공격을 하다보면 양수 겹장에 빠진다는 이치이죠.

 

그런 이치로 그 옛날 평창인들도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성을 쌓았습니다.

노성산을 보면 에 절벽으로 배수지진의 천연 요새 입니다. 후방으로부터의 자연 방어와 샘만

있으면 요새형이 되는 것 입니다.

 

여만리 강변의 돌 무더기 두개 ( 엄기종님의 말씀은 뙤땀... ) 또한 다른 사람들은 왜구의 시체를

뭍었다하지만 강변 장광에 무덤을 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슬 것이고. 그것이 왜구들이 노성산

뒤편으로 정찰적이든 그런 진지적 사용임이 아닐까 하는??

그러나 여만리 제방에 뭍혀 버리고 이젠 그 사진도 찾기 힘듭니다. 우리의 것이 아닌 왜구의

이라도 평창의 임란당시 전사의 한 부분의 증거물입니다.

 

이 평창은 고대로 부터 우리의 조상이 살아 왔습니다.

고구려는 곰이란 단어 즉 (베어)의 파생어로 태백은 텃밭이란 의미의 단어로 해석하는 학자

으며 우리의 선조들은 아마 평창의 요소 요소들에 성을 쌓았던 것 입니다.

그 城들은 당시의 사회상을 유추하여 그려보는 선인들의 발자취이며, 또한 지금 우리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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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 이세적의 침입에 안시성의 싸움에 양만춘이란 성주는 야사에 전하는 이름입니다.

 

*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관직이 "판운수윤"으로 한강수계의  쌀등의 세수를 배로 한양 조창으로 실어

  나르는 운송직 관리였고, 신사임당 결혼당시 사임당들 다섯딸중 가장 아끼는 딸로서  멀리 한양까진 시집 보내지
  못하고 집 가까이에 시집보내어 
앞으로도 가르칠것이 많다하여 백옥포리에 이원수의 집을 마련하고 이원수가
   지방으로 출장 다닐적에
신 사임당은 오죽헌에서 홀 어머니 병환도 돌보며. 왕래하였던 것이다.

 

  사임당은 이곳  봉평의 백 옥포리에서 18년간 살으셨고 율곡은 어려서 이곳에서 자라서 성장하여 한양으로

  유학갔던 것이다.( 그래서 봉평엔 봉산서재가 있는 것이다)

  오죽헌은 신 사임당의  본가이고, 율곡의 성장한 어릴적 고향의 집은 백옥포의 집으로 기록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어릴적 형과 누이 두분,,, 옥산과 매창누이들과 함께 뛰놀던 봉평이란 시골의 정서도 몸에 배었

  슬듯 합니다.

  당시의 봉평은 강릉부 소속이었고 1900년경 평창으로 이전되었으며.봉평의 강릉최씨 문중의 땅에 집을 짓고

  살았단 기록이 전합니다.

 이것은 신 사임당 아버지의 배려였던 듯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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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평창 아라리는 참으로 진정한 가치를 부여해야 될 것입니다.

저는 일전 미탄에서 평창 지역에서 채집한 평창 아라리 출간 음악을 다 들어보는 순간 이는 정선

아라리와는 방향이 틀리다고 느꼈고 곧 바로 그 책을 건네준 친구에게 동창카페에다가 앞으로 5

내로  내가 아라리에 대한 재 고찰을 하겠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간 조금의 시간에 모든 컴들을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 후배인 김진백님의 평창 아라리 소고의 짤막한 글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찾고자 하던 생각들의 일부이었던 것입니다. 정선 아라리와 평창 아라리의 비교

검토로 평창 아라리는 자연 발생적,,현존하는 最古의 아라란 설명으로 이 글은 학계에서도 주목

하고 학문적으로 또는 역사 규명을 위해서라도 평창아라리의 현존 최고(最古)의 아라리란 점을

조명 하여야 할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평창인들의 이해를 위한 평창 아라리의 쉬운해석을 그려 보겠습니다.

아라리는 많은 뜻을으로 설명되어있고  아라리 글의 저자들의 자기의 논지로 아라리를 고정 하는

愚들을 범 하시던데....

 

아라리는 많은 순간의 우환을 읊어 내지만 어느 특정적,,, 또한 무엇이 원조이다 하는 독단의 결론들은

모두 잘못입니다.

그런 내용들은 아라리의 서정성 표출의 일부일뿐, 아라리에 대한 정설을 누구도 감히 할수 없

이유와 가장 중요한 것은 평창 아라리의 발굴, 채집은 아직도 미련이 있슬듯 합니다.

 

현존 아라리의 最古의 언어는 고려말 전오륜이 거칠현동의 만수산 이란 단어 입니다.

여기서 그는 후일에 전씨로 불리웠지 당시엔  全. 玉 씨들이 王씨족이엇지 않나 하는 느낌에서 부터

이 거칠현동이 정선으로 숨어들기 까지의 시간들,,,,

 

전오륜은 그의 스승 정선의 "이초"가 "이성계"를 제거하기위한 모반으로 중국에 들어가 알리고 실패

끝나자 목숨을 끊었고 이 후계파들이  불안으로 바로 고향인 정선으로 숨었슬까 하는 의문에...

 

아마 당시로선 율치,,, 한치, 청옥산을 지나야 정선까지....

이곳을 그냥 지나지않고 몇 삼년이라도 정계의 눈치를 보며,정가의 회오리가  안정적으로 판단 슬때

고향으로 갔다면 그간에 또 다른  가사가 흔적으로 남아 있슬까 하는 점과. 현존 정선아라리1865년

경복궁 중수때부터 이 오지 산간에도 뗏목의 경기 부흥과 사람과 물자가 모이게 되자 산의 아라리는

들의 아라리 후렴을 붙여 협동조의 신명으로 바꾸어 간 점이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조양강을 따라 동강으로 흐르는 뗏목의 애환의 가락은 있는데 이 뗏목의 채는

수 많은 품이 드는데 그들의 고난의 아라리는 채집되지 못 했다는 점 입니다.

 

역사의 기록으로는 해방이후에 까지 월정사앞 마을이 크게 번창 하였는데 그들은 벌채의 경기였고

그 벌목들은 오대천에서 정선으로 흘러 동강으로 실어 날랐던 것인데 벌채 말기에 진부에 당시의

월정사 중창에 고생하셨던 " 장길환" 씨등이 생존해 계신데  벌채의 노동요같은 한줄의 아라리라도

있었던지 다시금 노력해 보야 할 것입니다.

 

 월정사 목재를 벌채하러 산에 오르니 절에서 없는 양식에 쉰 감자를 참으로 싸 주어도 열심히 나무

베었다는데 그 원동력엔 가락도 자연 있게 마련 입니다.

분명 가능성 있는 지점입니다.

 

실낱같지만 만약 이 두 장에서 새로운 가사의 아라리가 나온다면 이는 분명 최고의 자리 매김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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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근자에 새롭게 단장한 월정사의 느낌을 쓰고 있습니다.

 

우선 모든 역사가들이 팔각의 탑은 異型이라 취급하지만 그것이 이형이 아니라는 나의 해석과 

사가는 보살상이 석왕보살이라 하시던데, 그 의미는??  또한 70년대  탑의 해체보수시 감독인

정영호 선생의 리포트적인 기록에 의하면 탐의 위치는 본전(적광전) 중심에서 동으로 170Cm 쏠

이유와 상원사가 있다면 월정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하원문수갑사라는 사가의 의견도 우

일반일들이 알 수 없던 내용들과 다음으로 저의 주장을 그려 보겠습니다

 

우선 근래 중창의 가람배치의 답답함은 보는 시각차이므로 배제하며 .. 물론 6,25 전에도 17채

당우를 지녔다는 기록도.

저의 주장은 한국 조형문화는 대부분 절에 의존되 있고, 절에서 공양의 최대 표현인 등불, 본존,

세존사리를 모시는 탑파의 조형물에서 월정사 팔각탑 난간석의 손질의  다른생각과 보살

조품괴리,  3m가 넘는 석등의 매너리즘이 아닌가 하는 나의 생각들을 기록하겠습니다.

 

또한 이번 생각중 탑의 그라픽적인 이해....

탑의 조형적 생명은 무엇인가??

감은사 탑을 우리나라 탑의 정형으로 보는데 그 의미와 월정사 팔각탑의 작도법의 공간분활

공식은?  만약 어느 책이든 탑의 그라픽 그림으로 각 부위 명칭 설명하는 그림들의 이해 하지 못한

탑의 그라픽  식은??

 

아마 저의 이런 생각들은 남다른 생각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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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8.21 07:03
정선 아리랑의 후렴이 평창 아라리에서는 잘려버린것이 아니라 정선과 평창의 아라리는 한 그 룹이였고 이후

 1900년대 신흥사조( 땟목의 경기)가 동강으로 들어오며 정선 아라리엔 개산조적

렴이 붙었다는 나의 생각

이 김진백님에 의해 먼저 발표되었다...

 

그 누구인지는 모르나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정선 아라리를 들을땐 세련된 가락이 가창력이 좀 있어야  되겠

다는 생각이 들지만 평창아라리는 좀더 촌스럽고 빠르지만 그게 원음(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음)이 생각도,,,
이 평창아라리는 음치도 자연스레 불를수 있고 팝을 잘 부른다면 이 아라리는 더욱 잘 부를수 있 슬 것이다.

 

이것이 평창의 정서적 목소리 인토우 네이션( 억양)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인토네이션의 사투리가 평창 사람들의 특징인 것이다.....
 

,,,,,,,,,,,,,,,,,,,,,,,,,,,,,,,,,,,,,,,,,,,,,,,,,,,,,,,,,,,,,,, 오늘은 여기서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