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댓글들에서...>
고향집이 쎈타에 있군,,,
70년대 그 시절 신작로 건너 앞집은 초가집이...건데 말이다,,,
울 집은 50년이 넘은 일제 강점기시절 일식집 사무실 정도의 기와집인데,,,,
홍수에 제방이 두어번 무너지고 시내에 물이 밀치고 들어올때 우리집앞 신작로에서 찰락거리며 멈추었다.
그 넘들 그걸 알고 터를 쓴듯 하다.
그러나 요즘은 뭘 하나해도 완벽에 다가가는 노력이 아쉬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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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복사금지가 걸렸지만 저의 집이라 할수없이 카피 하였습니다.
이 사진가지고 저작권이라 하시긴 뭐 할거고
이 사진의 주인님은 그런 사정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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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魯山)이 맞습니다
평창군 發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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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 2011,11,07 12:26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 조선말기 이전엔 노산이란 단어는 있어도 노성산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전국의
어떤곳에서 노성산이라 사용하면 그의 연표는 없고 모두 일본 강점기라는 이해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제에 조선을 병합하려는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기존의 한국 문화를 일제식으로 모두
뜯어 고치려던 행위의 과정에서 城자가 들어 간듯 합니다. 이러한 입증의 사료가 구하여지면 좋을듯 합니다.
없었던 노성산에 城의 의미에서 노성산이란 단어를 쓰지는 않았슬 듯 합니다. 그래서 성이 있다는 표시의
노성산보다는 노산이라는 단어가 현실적 이해로도 옳을 듯 합니다
10.10.29. 22:59
제 1의 역사이다. 강원도의 타 군들은 허리굽혀 항복하였는데 이는 임금님의 명을 거스른 대 반역죄이다.
그러나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왜구들에게 대항하여 싸운 기상이 당시 노성전투(가칭으로)는 평창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임진왜란의 역사이다.
항복한 자들은 임란이 끝나고 전범재판이 있어서 유배를 보내기 전에 사약을 먹었어야 하고 그의 가족들은
자손 대대로 노비가 되어야 할텐데 국력이 약한 탓인지 임금이 당파에 로봇인지 그러질 못했지만...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평창은 왜구에 대항하여 전투로 마감하였다.
관군 50명대 왜구 4,000 명의 역부족으로 패하고 그 보복으로 평창시내 지식인 남자 200정도를 송기산
봉우리 아래 수직 갱 굴 두개중 아랫굴에 밀쳐넣고 흙으로 굴을 막아 생매장 하였다는 역사기록을 30년전에
읽었는 이러한 역사를 알고있는 사람이 없고 굴도 존재여부를 모른다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여 420년후인 지금이라도 진혼제를 드리고 노성제 개회식때마다 평창 선인들에
대한 례를 지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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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협력체제를 마련할 즈음에 창씨개명등이 있었고, 아마 이 이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온 곳으로
그 이름을 따온 듯 합니다.아니면 평창은 옛날엔 산간오지로 귀양오는 학식있는 선비들이 그러한 이름을
붙였을 수 도 있습니다.(하나 참고로 하면 2-3년 전에 홍천에서 작자미상의 희극의 성 개방적 소설이
나오듯이 산간지방에 문인들은 그러한 귀양살이 선비들의 이루어 놓은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