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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아리랑

Re ; 평창아라리의 문화 공간적 이해와 발전방향 ... 후세백작의 생각은??

 

 
 
Re ; 평창아라리의 문화 공간적 이해와 발전방향 ...감사드립니다.
                                                                                                                              09.08.14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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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hijb 평창아라리 소고


평창아라리의 문화 공간적 이해와 발전방향


김진백 (평창군보건의료원장)




1. 영평정 문화의 지리, 공간적 배경 이해


영평정 지역은 예로부터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으로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왔으며 풍습도  유사하며  언어와 방언도
비슷하다. 20세기 초까지 강원도에서 평창군과 정선군을 통하는 길은 미탄면 한치동(평안리)에서  성마령을 넘는 길
과 대화면에서 벽령과 가리왕산을 넘는길, 그리고 진부에서 오대천을 따라 연결되는 길이다.  1906년 동강이 흐르
는 평창군의 동면이 정선군의 신동면으로 이관되고, 1931년 정선군의 도암면이 평창군으로 이관되니 평창과 정선
같은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교통이 발달한 최근까지 영평정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5일장을 찾아 물자의  교환이  있었고, 각
가정에서는 서로 며느리감 사위감을 영평정에서 찾아 通婚하니 특히 영월, 평창, 정선의 세 지역은 정신적 공감대
문화의 동질성, 지리적 연대성을 지닌 곳이다.


2. 평창, 정선아라리의 이해


가. 발굴 아라리에 편수에 대해서
평창아라리는 1933년 출간된 조선구전민요집에 수록된 5편을  포함해서 각 자료에 수록된  평창아라리의 편수를 종
합하면 총 1973수인데 이 가운데 의미가 겹치지 않은  것을 추려내면 총 992수이다.
장정용.이한길, 평창아라리가사집, 평창군, 2005


‘정선아리랑’이란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930년 총독부 기관지 ‘조선’ 6월호에 연재한 김지연의 ‘조선민요연구’이며
4천여수라는 양의 노랫말은 순전히 지역민들의 입과 가슴으로 전해 온 것이다.
김연갑, 정선아라리의 시원설에 대하여, 민요론집, 1995, 154쪽


영평정 문화를 지리, 공간적 배경으로 이해하면 평창군은 8개 읍면에서  독창적인  지역의 고유아라리가 있었고, 정
선군 역시 고유 아라리가 있었으며 서로 문화 지리적 공간을  공유하면서 같은 내용이  중복되기도 하고 평창아라리
가 정선으로, 정선아라리가 평창으로 전파되었으며, 시대적 배경을 같이하면서 발생되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 외에 실제 정선아라리가 편수에서 월등히 많은  것은 1977년  ‘관동향토문화연구’를 시작으로 성균관대
학교 대동문화연구소에서 1982년부터 1994년까지 13년간 조사과정과 1970년대 정선아리랑이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부대행사인 경창대회를 통해 새로운 전승  계기를 갖게  된 것이 아라리 발굴,  보존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평창아라리는 정선과 비교해 전승발굴사업이 비교적  소극적이었고 늦은  발굴과정으로  평창아라리의 많은
소리가 정선아라리로 흡수된 것이 사실이며, 1930년대 김소운의 ‘조선구전민요집’에서 평창아라리의 존재가 확인되
었고 1990년대 이후에 발굴된 아라리의 수가 1000여수가 넘는다는 것은 평창군만의 자생적인 소리가 있었음을 입증
하는 것이다.


나. 평창군지 및 읍면지에 기록된 아라리
평창군은 지리 역사적으로 8개 읍면을 2개의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평창군으로
불려온 평창읍과 미탄면이며 다른 하나는 1906년 강릉에서 이관된 방림면, 대화면,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과 1931
년 정선에서 이관된 도암면이다.
즉 영동권과 영서권의 문화가 복합된 곳이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평창군내에서도 아라리의 양상이 지역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 사례로 먼저 진부아라리 진부면지, 평창문화원, 1993년, 339쪽 중 대표적인 아라리의 가사를 보면 긴아라리 음율
로 소절마다 후렴이 있는 것이 있다.


월정 오대산 박달남근
축자 왕자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
(나머지 생략)


가사가 긴 사설에 푸념조 형식의 엮음아라리도 있었다.


내팔자나 네팔자나 죽어지면 육신장포
일곱매끼 자잘끈 졸라매여 사시나무 장강틀에
대추나무 연촛대에 밤나무 마구리에
왱그렁 뎅그렁 네 귀에 풍경달고
영월 평창 운교지골 대화 방림 강릉 궁내
이통천 문앞에 스물 두다리를 건너
북망산천 돌아들어 살은 폭폭 썩어서
뜰잔떼 이불을 삼고 눌잔떼를 울타리 삼아
흙밥이나 될 인생 도척같이도 맘 먹지를 말아라.


또 독창 또는 선후창 방식의 아라리면서 후렴조는 없고, 음율은 미탄아라리와 동일하나 정선의 긴아라리  보다는 빠
르니 보편적인 평창아리리다.


시방시채 어러리 구정산 어러리
신정산조로 잘 넘겨주게


시구야 떫어도 막걸리가 좋고
참나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도 본 낭군이 좋더라.
(나머지 생략)


평창아라리를 대표하는 미탄아라리 미탄면지, 평창문화원, 1988, 113쪽는 한치 뒷산의 청옥산과  육백마지기, 성마
령을 무대로 분명 산지에서 부르는 독창적, 자생적 음율과 가사를 갖고 있으나 조선시대까지  정선과 평창을 연결하
는 유일한 육로인 성마과 칠족령이 있고 동강을 사이에 두고 신동면과 접해있으니  이 지역을 무대로 발생한 아라
리는 미탄아라리요, 동시에 정선아라가 될 수 있다. 실지 미탄아라리의 많은 가사가 정선아라리와 중복되어 있다.
이는 어느 군이 먼저 발굴, 기록, 전승하였느냐의 차이지 기록의 순서로 시원을 논하는 것은 근거가 미약하다.


한치뒷산의 곤드레 딱죽이 나지미 마음만 같다면
병자년 흉년에도 봄살아 나지
(나머지 생략)


미탄아라리는 정선의 긴아라리와 자진아라리의 중간 단계의 빠르기를 갖고 있으며 같은  메나리조라도 정선의 긴아
라리와는 각 소절의 첫 행의 선율이 다른 느낌을 받는다.
또 미탄 지역의 엮음아라리는 상당수가  정선아라리와 가사가  중복되어 있지만 평창아라리는 대부분 후렴조가 없는
것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보고 있다.


. 후렴조에 대한 이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평창과 정선은 같은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공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음에도 후렴조의 유무에서 확연히 대조가 되
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정선에서 새로이 후렴을 붙였거나 평창에서 후렴이 없어진 것으로  가정할  수 있으며,  정선아라리가 후렴조가
붙여졌다면 아주 최근의 일이다.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공간을 같이 하면서 평창아라리에 후렴조가 없다는 것은 정
선에서 평창으로 전파 가능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거나, 특정 동기에  의해 짧은 시간동안 모든  정선아라리에 후렴조
가 붙여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연갑의 아리랑시원설연구 김연갑, 아리랑시원설연구, 명상, 2006, 31쪽  내용을 보면 1930년  이재욱 조사의 ‘영남
전래민요집’에 조사된 두 편의 ‘정선진아리랑’에서 유사한 후렴이 나타나는 것을 제시하고 있으나   후렴의 유형이 다
양하다는 것과 후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라리의 후렴이 정형화 되지 않았거나 처음에는 없었던 것임을 시사
한다.


김시업의 ‘정선아라리’ 김시업, 정선아라리,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소, 2004, 18쪽 ( 2차인용)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
이 기록되어 있다.
정선아라리는 원래 후렴의 기능이 따로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경우는 노래판에서 한차례도 불리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후렴을 부르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인 듯하다. 정선에 살면서 20여 년 동안 정선아라리의  사설을 수집, 정리한 연규한
 (1987년 당시 정선군 부군수)은 예전에는 후렴이 없었고, 근자에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아라리는  아리랑과는 다르게  조율성보다  노랫말이  중시된 소리이며, 영평정 산지의 노래로 평창아라리가 후렴이
없는 것이 특징이 아니고, 후렴이 없는 것이 아라리의 특징인 것이다.
즉 영평정에서 명칭을 아리랑이라 부르지 않고 아라리라고 고집하는 이유이다.


박민일의 ‘아리랑’ 박민일, 아리랑, 강원대학교출판부, 1991, 289쪽 에 조사된 대방놀이와 평창아리랑의 내용을 보면
평창아라리의 사에도 일부 후렴이 수록되어 있다.


오대산 황국단풍은 구시월로 들고
임산당신 속단풍은 시시때때로 드네
아아 청룡산 너머로 나무하러 가세
아라리 아라리 아라리가 났네
아라리 고개로 넘어간다.
(나머지 생략)


후렴이 아리랑이 아닌 아라리로 표현된 것이 다르다. 평창아라리의 일부(진부아라리)가 후렴이 붙여진 것은 산지의
노래가 들의 노래로 바뀐 것도 있지만, 정선과 비슷하게 아리랑의 가사와 조율성이 접목된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정선의 아라리가 긴아라리, 엮음아라리, 자진아라리에 아리랑 후렴을 붙여 흥이나 마무리 조율성을  높이고, 속도를
다양하게 하면서,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발전을 위한 변형을 했다면, 평창아라리는 산지 아라리의 원형을 그대로 보
존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이는 평창이 독자적 아라리를 갖고 있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3. 보존이냐, 발전이냐


현재 평창아라리의 많은 부분이 정선아라리에 흡수되어 독자성을 잃은 단점이 있지만, 정선아라리가 강원도의 대표
적인 아라리로 발전되지 않았거나 없었다면 평창아라리의 발굴, 보존도 여러모로 어려웠을 것이다. 평창군은 그동안
무형문화재의 가치에 관심부족했고 발굴, 보존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시기가 늦었을 뿐이다.


평창아라리는 독자적인 산지 아라리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는 장점을 갖고 향후 발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보존을 위해서는 대중과 함께하는 발전 방안을 모색해야하고, 발전을 위해서는 뿌리가 되는 평창아라리의 보존이 있
어야 한다.


<보존 및 발전방향 제시>


가. 8개 읍면의 아라리를 포함한 민요(노동요, 유희요, 의식요)를 계획 하에서  체계적으로 재  발굴할 필요성이 있는
가.(문화원, 문화체육과, 장정룡교수님)
- 가사와 음원 동시 발굴
- 읍면장, 이장 참여가 효율적이며
- 예산이 반영되어야 한다.


나. 기능보유자, 소리꾼, 명창 발굴 및 육성(미탄면, 문화원 주도, 문화체육과 협조)으로 듣 는 이로 하여금 소리의 가
     치와 질을 높여야 한다.


다. 평창아라리의 학술적 재조명
- 강원도 산지 아라리의 원형보존과 평창아라리의 독자성 재고


라. 평창아라리의 전파, 보급을 위한 특색화, 대중화
- 음원 출간
- 아라리 구성을 재정리(지역별 표준아라리, 엮음아라리 모음, 가사 내용(제목)별 편집)
- 평창 모듬아라리로 단순적인 단점을 피하고 특색화, 대중화를 모색(표준아라리+엮음아라 리, 진부아라리+엮음
    아라리)
- 평창군 각종 행사와 축제에 활용


마. 평창 민요의 발굴, 보존 및 전승
    아라리의 가치만큼 음원과 가사를 급하게 발굴 보존해야할 것이 평창의 민요다.
    평창의 정서를 대표하는 노래라는 점에서 보존, 전승의 가치가 있으나, 이미 노래를 재 현할 수 있는 나이 드신
    분들이 돌아가시면서 주위에서 들어보기 힘든 노래가 되었다.
    평창의 무형문화재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이다.
- 음원 출간
- 노동요, 유희요, 의식요(밭 가는 소리, 논 가는 소리, 논 삶는 소리, 목도소리, 따복녀, 시 집살이 노래, 성님요,
   성님 오네, 종금새,
   상여소리, 회다지소리, 회심곡, 답산가, 초한가)


바. 문화원에 전문 인력의 인프라 구축의 필요성
- 상시 또는 한시든 문화 사업에 전문 인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인적 인프라 구축과 군차 원의 예산 안배가 필요하다.
- 사업의 계획, 구상에서 행사진행까지 전문가의 역할과 공무원의 역할 구분과 협조 필요


사. 일차적으로 미탄 아라리축제를 아라리와 민요를 포함한 소리축제로 하여 전국 단위의 권위 있는 연례적 행사
     로 확대 개최


아. 추후 한치동, 청옥산 일대를 소리특구로 지정 전국의 민요와 아라리를 포 함한 다양한  소리테마파크 조성 및
     관광 인프라 구축
   (칠족령 등산로, 백운산성, 동강할미꽃, 성마령 등산로, 민물생태박물관, 백룡동굴, 송어축제, 청옥산 육백마지,
    산나물, 마하리 . 동강의 사철 휴양지 조성, 아라리 민요 가사비, 아라리민요 체험장 및 공연장)


(참고문헌)


장정용.이한길, 평창아라리가사집, 평창군, 2005
김연갑, 정선아라리의 시원설에 대하여, 민요론집, 1995
진부면지, 평창문화원, 1993년, 339쪽
미탄면지, 평창문화원, 1988
평창군지, 평창군, 1979
김연갑, 아리랑시원설연구, 명상, 2006
박민일편저, 아리랑 자료집1, 강원대학교출판부, 1991
박민일편저, 아리랑 자료집3, 강원대학교출판부, 2006
진용선편저, 평창의 민요, 평창문화원, 2001
진용선, 정선아라리, 집문당, 1993
노성의 맥 6호, 평창문화원, 1991
노성의 맥 7호, 평창문화원, 1992
김선풍,장정용,김경남, 평창군의 민속놀이, 평창군, 2005




관련글:없음 글쓴시간:2008/12/16 13:31 from 210.179.20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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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전 어느 웹 사이트에서 본 글로 이 글에 감사 드립니다.
저는 약 2년전 평창 아라리가 출간되자 친구로부터 책과 CD를 선물받고는 평창 아라리는 정선 아라리와
확연히 틀림을 느끼고, 앞으로 그 구분의 성격을 파악해 보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리고 1차로 가을쯤  저
생각을 정리 하여볼까 하였는데, 그 생각의 일부가 이 리포트에 정곡을 찌르는 논리가 담겨있습니다.


평창아라리와 정선 아라리의 장단의 틀린점과 평창아라리의 꼬리후렴이 없는 점의  비교 연구가 이
정확히 비교 연구되어 있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러한 느낌입니다.
원래 정선아리도 평창아라리와 동일하게 자연발생적으로 후렴이 짤라져 나간 이유와 , 그후 1900년대에
뗏목의 성황으로 인제, 춘천 아리랑 처럼 동각 유역의 아라리가 개작되어 후렴이 붙었다는 생각입니다.


진도아리랑이 1930년대 각색되어 정착 되었다면  평창, 정선 아라리는 옛 원음이 유지되다 이 뗏목의
기에 활성과 그 속에 애환을 담는 가락으로 많이 불리워지게 되고,  그렇다면 아라리가 후렴이 다시 부활
될 수 있었던, 또한 평창아라리는 후렴이 부활되지 않은 모습으로의  이유도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6,25 동란 이전까지 오대산의 벌채로 아마 월정사 입구에 큰 마을이  형성되었고,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
분들도 있슬텐데...
정선 아리랑과 평창 아라리에 가장 큰 취약점은 뗏꾼들이 황새여울과 된 꼬까리가 무서워 부르는 아라
는 있는데 그 산판의 벌채공들의 노랫가락은 한 음절도 없다는게 가장 큰 취약점이고 2년전 동창 싸이트
에 저는 이런 글도 남겼습니다.


앞으로 70년대 이후로 매스 미디어로 인하여, 또한 노년층이 얆아지므로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 평창아
라리가 멀지않은 시간엔 이러한 부분들의 아라리가 있었다면 하시라도 빨리 발췌되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 벌채현장의 아리랑도 있었슬 것이고, 이는 후렴이 없고, 템포가 빠른 평창 아라리 계통의 노래일
인지??


들의 소리고, 산의 소리란 개념을 다른 이해로 하여 본다면 들에선 노동의 공동적 협력으로 타인이 후렴
을 들을수 있게 부르지만,,,, 산의 노래엔 혼자 저만치서 나물 뜯을때 혼자부르는 시간이 많았슬 것이고
혼자 부를때 후렴의 반복이 필요 없어졌슬 것이란점,,,,
벌채도 저만치 혼자서 톱질할때 매김소리고 이전에 혼자 중얼거릴 가락에 반복적 후렴이 싱거워져 소멸
되어가리란 생각과.....


정선 산간지방도 원래는 후렴이 없는 아리랑에 노동 집약적의  뗏군의 경기가 들어오며  서로 마주볼 수
있는 환경에서의 아리랑은 자연 후렴이 복고되었슬 것이란 가상도 하여 봅니다.
가상의 공간이라도 언제 체계적으로  다뤄 보겠습니다.


만약 삼국유사를 그대로 해석하며 읽어 간다면 아무 의미없는 책일것입니다.
그 책속에 가상의 공간이라도 만들어 원효와 의상의 당시 그러할 이유를 , 무학대사의 갓난아기를 학이
감싸고 갔다는 의미는 아마 바닷가에 생활에서 난파선으로 무학의 어머니가 일찍 과부가 되어 생계유지
가 곤란하니..
그럼 김대성이는 양자로 들어와 출세의 길로 나가지 않고 불국사 중창과 석굴사  창건에 평생을 바쳤다
면, 그 정도 실력이라면 상당한 출세길도 있었슬 테인데...당시 골품사회 서얼과같은 모순도 심했으리라,,,
그러나 불국사 중창엔 귀족계급과 왕실이 끊임없는 지원이...
이러한 예에서 보듯 평창아라리의 가상공간까지 영역을 넒혀보는 생각도,,,  이치를 이해할수 있으리란
저의 생각입니다.


앞으로 아리랑의 단어적 의미...
왜냐면 뉘는 정선 아리랑이 원조이다. 아라리의 뜻도 제마디 논리로 ....
전부다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서정적 표현뿐이고 아리랑의 원조는 없습니다.
선사시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단어가 아닐까요...


세습제 체계로의 전환은 아리안족과 쓰메르 족이 만나 아리랑 쓰리랑 했던것 아닐까요.
그들은 이 해석엔 모순에 걸릴 것이죠.
선사로부터 인간 생존엔 새의 알들과 리아스식 바닷가 갯벌에서 알들을  주워 먹으며 제일 발음이 쉬운
 " ㅇ" 자의 알"알"의 단어의 전개와 그것이 알평 알지...  등으로의 알의 발전과 ....


아리랑의 단어적  의미는??
또한 평창 아라이의 음조가 메나리조라는데 그것의 쉬운 이해의 글도
또한 벌채현장의 아리리가 없듯이 또한 우리가 잊어가는 생각들...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이상 위 아리랑글의 소고에 김진백님에게 감사 드립니다.

정선 아리랑의 후렴이 평창 아라리에서는 잘려버린것이 아니라 정선과 평창의 아라리는 한 그룹이였고
이후 1900년대 신흥사조( 땟목의 경기)가 동강으로 들어오며 정선 아라리엔 개산조적 후렴이 붙었다는
나의 생각이 먼저 발표되었다...
그 누구인지는 모르나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정선 아라리를 들을땐 세련된 가락이 가창력이 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평창 아라리는 좀더
촌스럽고 빠르지만 그게 원음( 엣부터 전해내려오는 음) 이란 생각도,,,이 평창아라리는 음치도 자연스
레 불를수 있고 팝을 잘 부른다면 이 아라리는 더욱 잘 부를수 있슬 것이다.
이것이 평창의 정서적 목소리 인토우 네이션( 억양)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인토네이션의 사투리가 평창 사람들의 특징인 것이다.
 
앞으로 쉽게 이해하는 평창 아리랑의 글을 써 봐야 하는데.....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