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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월정사 8각9층석탑이 13층 탑이었다

월정사 8각9층석탑이 13층 탑이었다

(※ 월정사탑이 13층 탑의 기록)

오대산의 개산에는 자장법사의 문수신앙의 성지로 알려지는 기록에 시발인 삼국유사 (권5) 자장 정율과 민지(閔漬) 의 기록을 다시 찾아보던 중 고려말 민지의 기록에서 월정사 13층 석탑의 기록을 찾았습니다.

<인용>

고려 말 민지(閔漬)가 지은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명주(현 강릉 지역) 오대산을 찾아가 지로봉(地爐峰)을 올라 부처님의 두뇌사리와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비석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이어서 월정사를 창건하고 13층 석탑을 세워 사리 37매를 탑심(塔心)에 봉안하였다 .(위 부분은 오대산 본전기에서 나왔음.)

이제 저는 우리나라에 큰 역사인 월정사 9층 탑이 원래는 13층 탑이었다는 점을 해결할 것입니다. 아래의 글에서 보면 2013년에 월정사 중창의 허실이란  약 10편의 글을 게시한  바,  마지막으로 동 탑에 대한 미학적 예찬론은 유보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제  13층의 문헌을 찾았기에 탑에 문제를 그래픽으로 증명한다면 예찬론을 쓰기에 선행되는 문제를 다 해결하는 듯 합니다.

( ※ 앞으로 쓸 예찬론의 내용)

1.  '70년 동 탑의 해체 복원공사 감독인 정영호 기록관, 홍사준 선생은 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이형탑으로 팔각은 고구려 목조 팔각탑의 계승이라고 기록하였지만 (동 리포트 기록책은 성보 박물관에서도 판매하고 있음) 필자는 팔각탑은 송나라 선진문화 유입이라 기록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로서는 알아보지를 못했지만 이제는  정론이 되어 3년전  경찰 임용고시 기출문제에서 고구려 계통이라고 답을 쓰면 오답이고,  저의 말과 같이 송나라 문화의 영향이라고 써야 정답입니다. 

 

2 . 지금까지 탑의 축조 연대를 10C경으로 알려졌으나 2년전 지층 작업시 12C경의 송나라 주화가 발견되어 조계종에서는 동 탑의 연대를 12C 로 공식 발표하였다. 또한 보살상과 탑의 지반은 하나로 이루어진 것도 밝혀졌다. 

3 . 보살상과 탑의 지반석이 하나로 이루어져서 과거에는 큰 탑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설에서  그때의 탑이 고구려식 목조탑이라면 몰라도 석조탑이었다면 그 잔해는 남아 있어야 한다. 왜냐면 현 팔각탑의 교체부분 4~5개의 옥개석은 지금도 월정사 담장 넘어 외각에 존치되고 있는바 큰 탑이 있었던 것이라기 보다는 탑과 보살상이 지대석이 동일한 높이로  그 거리감을 가져야 학 때문이다.

여기서 탑과 보살상의 거리감이란 탑은 세존을 뜻하며  보살상은 석왕보살이란 주장도 있지만  그  역시 보살로 공양을 드리는 의미로 볼때 원작의 보살상은 바닥의 앞면을 높여서 경사지게까지 한 이유는 세존의 전체를 바라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바 거리감을 가진다는 의미로 바닥이 넓게 된 점이다, 새로운 모작은 밑만 바라보는 각도로 무엇인가 의미도 모르고 구구주먹식으로 깍았다.

10년전에는 월장사 중창의 허구에서 예찬론은 다음으로 미룬다 하였는데 그점은  동 탑의 가장 큰 문제로  우리나라 1.200여기의 탑중 가장 우수한 탑인데 정영호 박사는 실기했습니다. 당시 저로서는 앞으로 월정사 탑의 미학의 예찬론은 아직 문제를 입증한 뒤 후일 쓰겠다고 하였습니다.

( ※월정사 탑의 미학 예찬)

이제는 위에 열거한 사항들이 충족되었다. 그 중에 12C 건립이라야 선종의 시간에 맞아 껄어지고 그 중흥에  월정사가 위치하며  월정사 탑은  석조 보살상과 탑신부의 라마식 원형의 장식은  불교 세계의 우주관의 표시로 동 탑은 하나의 지향적 불교관을 그리며 또한  종내에  우수한 탑파로서는  통일신라 정형탑인  감은사지 탑의 도도함이나 고선사지 탑의 아카데미적인 수려함을 넘어서  섬세하고도 우아한 깃품을 가지는 예술품의 극치를 나타내며 전국적으로 가장 큰 13층의 거대탑의 정교한 수학적 계산과 치밀함의 역학을 가지고 불교 원리를 잘 표출하는 탑으로서 찬란한 우리 문화의 한 폐이지를 담당하는 천년보물로서  현재에도 그 자리를 다하고 있다는 예찬론을 쓸 계획입니다.

이에  선행해야 될 과제의 하나는 아래의 그래픽에서 문제를 정밀 치수를 재어서 문제점을 그래픽으로 표출하여 규명하는 점입니다. 지금까지는 9층위에 문제라서 사진으로도 판별이 어려웠지만  현재로서 문제는  파손등의 문제에로 인하여 영구히 동탑을 포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안정 포장을 할 경우 안쪽에서 상간부 점검을 위한 리프트등의 장치가 겸비되어야 하는데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실측에 관건 사항이다.

아래 사진에서 필자는 탑의 생명선이라고 주창한 노란색 사선이 2등분된 옥개석과 탑신부에 현재 노반의 아랫부분이 9층 옥개석 상륜부에 맞춰지지 않은 점이다. 이 부분을 그래픽 작업으로 필자는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위 그래픽에서 모든 층의 옥개석은 동일한 곡선인데 비해  뻘간색 원내인 9층 옥개석 지붕의 곡선은 안쪽으로 더 길게 연장되며 곡선이 늘어졌다.

이 문제는 본 탑이 원래는 13층 탑으로서 13층 옥개석 상단부가 복발 하단부와 접하기에 양쪽이 맞는 싸이즈였으나  상단부에는 찰주공을 파서 상륜부를 꽂고 이격 틈새는 진흙으로 고착시켰는데 비, 바람의 풍화와 냉한기에 표면의 수축등으로 파손되어 옥개석 상단부와 복발의 하단부가  크기가 않 맞기 때문에  9층으로 낮추는데 이때에 9층 옥개석 상단부가 복발보다 크기에 9층 옥개석을 신규로 제작할때 하단부는 원래의 싸이즈이지만 상단부는 복발에 맞는 싸이즈로 축소시켜 제작하였다. ( 현 사진으로도 색과 질감이 틀림이 확인된다)

따라서  현 9층 옥개석 처마 곡선은 안쪽으로 길게 연장되어 아래층들의 처마 곡선과는 틀리는 점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1,200여기의 옥개석 처마 곡선은 탑마다 같은 폼(form)을 하고 있지만 유독 동 탑의 9층 옥개석 처마곡선만 차이가 난다.

이러한 제 문제들의 확인 방법으로는 최소한 동 탑의 8. 9층과 복발의 실 거리를 재어서 정확한 그래픽으로 13층까지 연장하면 13층 옥개석과 복발이 맞는 싸이즈가 됨으로 판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고려말 민지의 기록에 13층 탑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그래픽으로 원작의 싸이즈도 나타내어야 한다.

wwww<  13층의 문제에 대한 지난 글의  리피팅>wwwwww

2)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본론 1)

후세백작  2013. 6. 12. 20:08

( 본   론 )                                                                                                           

국보 48호인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원형은 8각13층 석탑이었다는 점의 기록을 찾아 역사적 사실의 진위의 당위성과 동탑의 설계기법의 논리적 모순을 통해서 동탑이 9층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문제점을 지적하며 가칭 "탑파의 생명선"으로 보는 월정사탑이 9층보다는 13층탑이라야 더욱 세련되고 완성적 원형이라는 이야기를 전개하여 본다.

 (1) 월정사 탑이 813층 석탑이라는 역사기록 고찰

 1) 1970년 월정사 8각8층 석탑을 해체 복원공사의 책임자 정양호 선생의 월정사 리포트 글을 인용한다.

 ◈  한국미술사상  월정사 八角九層石塔의 의의.

                                       정 영 호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본문 내용중 발췌)

1970년 10월 3일에 착수하여 8일까지 6일간 소요되었는데 해체와 실측을 동시에 시행하였다. 이때 작업의 책임은 필자가 담당하였고 실측은 홍사준씨(전 부여국립박물관장)가 진행하였는데 이호영씨 (전 단국대 박물관 연구원)가 함께 하였으며 작업은 장한건설회사(대표  정복영)가 맡았 었다 -- 이하 중략

月精寺 창건과 그후 중창에 관해서는 월정사에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여 잘알 수 있는바 그 내용을 간단히 요점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新羅善德女王十四年乙巳  慈藏律師入此山  奉安佛頂骨于中臺寂滅寶宮 因創月精寺 建八角十三層 石塔 奉安佛舍  利三十七粒 ……

즉 신라 善德女王14년(645)에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동시에 813층 석탑에 佛舍利 37을 봉안하였다는데, 여기의 13층석탑은 기단부를 탑신의 층으로 잘못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는 聖德王이 월정사를 중수하였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는 太祖6년(923)에 信孝居士가 중건하고 제 25대 忠烈王2년(1276)에  信義禪 師가 三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太祖元年(1392)에 有緣大 師가  四創하였고 제 2대  定宗2년 (1400)에는 太祖가 幸行하여 連谷縣의 土地二十結을 특사하여 上院寺에 속한 寂滅寶宮의 香火資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하  생략

 2) 朝鮮佛敎通史(조선불교통사)는 1918년 李能和(이능화) 거사가 저작하고 육당 최남선이 감수하였는 데  부처님  舍利塔(사리탑)이 있는 곳을 기록하여 두었다는 그곳에서 월정사탑이 13층이란 글을 인용해 본다.
http://blog.daum.net/kkks1/192

 4,平昌郡五臺山所在月精寺十三層塔奉安世尊舍利
평창군의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의 13층탑에 세존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 이하 생략.

 위 의 두 기록에서 월정사탑은 9층이 아닌 13층 석탑이라 표시하고 있다.

"70년 해체, 보수공사시 위의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의의"의 내용속에 철로된 찰주는 4,3m로 9층 탑신석을 관통하여 8층 옥개석 상단에 철편으로 고착시켰다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천년세월에 위 상륜부 의 금동 철재장식들의 무게와 화재와 풍압에 못이겨 균열을 아마 조선시대에도 이것에 수 많은 보수공사를  시행하였던 듯 하다 .

*주 ; 상현거사 이능화(1869~1943)

1918년에 그는 불후의 역저 『조선불교통사』를 간행했다.1915년 3월에『불교진흥회월보』를 발행하였으며, 그 이듬해 4월에 『조선불교계』를 발행하였고, 다시 그 이듬해 3월에는『조선불교총보』를 발행하였다.『조선사회사』,『조선유교급유학사상사朝鮮儒敎及儒學思想史』, 『조선의약발달사朝鮮醫藥發達史』,『조선십란록朝鮮十亂錄』, 『조선잡고朝鮮雜考』 등의 많은 책을 썼는데, 문헌학적인 측면에서 각 분야를 개척한 공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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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 사진)

◀ 숭녕중보 - 송나라 휘종 제위 3년차(1103년)부터 발행한 화폐이다

▶수항리 사지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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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 2013. 7. 21>

월정사탑 1970년 개 보수시 교체한 월정사탑의 옥개석으로  오른쪽은 4개의 교체 옥개석

왼쪽은 교체 옥개석중 9층 옥개석으로 가운데 찰주공은 상륜부 청동 장식의 기둥인 찰주를 꼽아 붙이는 찰주공이다.  이 찰주공 각변은 15cm으로 찰주공에 꼽아 고정 부착시 상륜부위 청동 장삭품이 태풍이나 강한 바람의 압력에 의해서 반대편 모서리는 금이가고 아래까지다 떨어진 상태이다. 이상한 점은 반대편도 그만큼 간격의 유격을 가져야 하지만  돌은 고무처럼 신축성도 아닌데 한 쪽만 벌어져 있다. 

본인의 주장은 처음에 13층에 각 변이 15cm인 찰주를 끼워 고정 부착시킬때 탑의 앙각에 의해서 9층 보다 13층의 옥개석 면이 작았기에  고려때 이같은 결과 무너져 내리자 대책은 9층 탑으로 세운 것이다. 이때 9층 옥개석은 상륜부와 닫는 면이 넓어서 다시 만들어  이때 9층과 13층일경우 상륜부 하단의 복발 싸이즈가 맞지 안게되자 ,  이를 맞추기 뒤해 옥개석의 곡선이 느려지는 점에 확인은 탑의 재원을 파악해야 하는데 실측에 문제를 가져야 한다. 

이 사진의 찰주공이 금이 간 것이 아니라 깨져서 벌어져 있는 점이 13층 탑이란 기록에 현재 9층이 된 점의 추정을 뒷 받침하고있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이제 寺측과 문화재 관리 당사자는 지금까지 15년전쯤부터의 기록을 잘 이해하고 앞으로 본인이 요구하는 탑의 실측을 하도록 지금 보수공사시 상륜부에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어야 한다.  지금 상륜부 함몰에 의해서 강화중으로 알고 있는데 이 공사 마치는 깃점에 본인의 요구를 허락해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