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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문수신앙의 성지 오대산 불교권에 수항리사지의 위치는??

문수신앙의  성지  오대산  불교권에  수항리사지의  위치는??

3)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본론 2)
    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2013. 6. 12.

오늘 필자의 블로그에 이 글이 검색되어 오래전의 글이라 기억이 희미해서 무엇인가 다시 보았습니다.
일반적인 탑의 이론을 넘어서 윗 글에서부터 출발하는 탑의 앙각의 개념을 도입하여 후일 수항리 사지 탑이 3층임을 증명하면서 논문을 쓰며 지금까지 탑에 이론들이 역사학자들의 각 탑들의 공통적 특성 즉, 팔부증상이나 삼산화 문양이나  안상등 여러 특징의 기록으로 동시 연대를 측정하는 논문만 많은데 필자는 수항리 사지 탑 논문에서 탑의 새로운 조형성의 공식을 만들어 탑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습니다.


지난해 장서각에서 왜정 때의 유적자료에서 수항리 사지 탑은 3층 탑이고 제반 치수가 확인되었는데 이전에는 3층탑인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었는데  현재 두 기의 옥개석만 남은 탑을 보고 평창군지에서는 3층 탑이라 하였고 2013년인가 수항리사지 탑의 세미나에서 박경식 박사는 무엇을 보고 3층 탑이라 했는가...
물론 동 탑은 6,25 때 파손되었다고 모두 떠들고 있지만 기실 '69년도에 어느 주민이 100만 원에 팔아서 호리꾼의 밀반출 중 적발되어 다시 제자리로 갔다 놓은 것이다.

 

 2013년 평창 예총에서 실시된 수다사지 세미나 리포트에 기록을 보면 단국대 박경식 박사는 제목이 수다사 3층 석탑이고 그 기록에 바닥에 있는 옥개석을 현 2층 옥개석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현재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석탑 부재의 하나인 옥개석은 동 탑의 옥개석과는 사이즈가 맞지 않아(  탑의 옥개석과 바닥의 옥개석은 크기에 비례해서 옥개석의 두께의 비율이 같지 않다)  수항리 사지 탑이 아닌데도 이 탑이 3층이란 기록도 없는데 제목은 왜 3층 탑인지?

또한 두 번 답사했다고 기록하며 바 탑 부재에 자질을 했다면 알 것인데 답사는 무슨 답사였으며, 동 탑재(바닥의  옥개석)는 찰주 공의 구멍이 있는데 박사는 이 사이즈가 20cm라고 기록하였는데 동 탑재의 두깨를 넘어서는 사이즈다. 이러한 세미나가 박사님이 연구한 세미나라고... 웃겨도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듯이 한참 웃겨도..
또한 바닥에 놓인 옥개석에는 네모의 찰주 공(孔)은 있지만 현 탑재의 2층 탑 위에 약식 노반에는 찰주 공이 있어야 하나의 찰주가 내려 꽂히지만 노반에는 찰주 공이 없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며 세미나를 하시에 필자로서는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고 평창 사람들을 무시해도 한참 무시하는구나 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동 세미나 리포트는 이러한 기록에 촌사람들 무시하는구나. 그러면 본인이 공부하여 바른 원리의 이해를 구해보도록 하겠다는 마음에 탑에 서적들을 구하려 여러 서점을 다녔지만, 서점엔 탑에 서적들이 없어서 중고 서적상에게 고 책이 없냐고 물었더니 마침 언 학자의 유산 같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 탑에 관한 박사, 석사 논문이 3~40여편 있어서 몽땅 들고와서  논문을 비교하여 공부하는데 애로사항으로는 일반서적에는 여러 용어가 해설이 있어야겠지만 이러한 학위논문들은 각기 필요한 용어들만 사용하기에  탑의 용어나 원론을 이해하기 까지엔 여러 권의 책을 50번 100번 다시 들고 보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항리사지 탑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여 전국 문화원 공모 논문전에서 역사편찬위원장의 상을 받았다. 


그러한 자랑보다 우리나라 현 1,200여 기 탑 중에 수항리 사지 탑은 2기의 옥개석만 올려진 단순한 탑 같지만  탑재 각 부의 석물이 정형탑이라 부르는 4각탑 양식의 이론에 부합되지 못하는 잘못 쌓인 탑이다.

이 말은 동 탑은 월정사 8각 9층 탑처럼 2중 기단석에 위아래에 갑석 및 받침석의 부재가 있어야 하는데 동 탑이 밀반출되어 다시 돌아와서는 한 부분에 3매가 겹쳐지게 쌓았다.
 80년대 초의 사진에서부터 검사해보면 아마도 이 동네에 어느 분인지 동 탑을 가지런하게 주워 올린 점을 볼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탑신석의 깨진 부분은 방 바닥재 비닐로 붙여 놓는 등 수고스러움을 볼 수 있다.


동 탑재에 갑석 및 받침석이 3매가 뒤엉켜서 한 부분에 끼워졌기에 필자는 이 3매를 사잇돌로 표현하였더니  어떤 무식한 자들이 사잇돌이 뭐냐고 하며 지금도 여러 부분에 잘난 체하는 그러한 글이 인터넷에 떠 있지만 무식의 소치에까지 해명할 필요는 없다.

사잇돌이란 표현의 이해로서는 갑석에 탑재 제 위치에 끼워져 제 기능을 발휘 할때엔 비로소 갑석이라 칭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부위에 3개의 석탑 부재가 서로 엉켜 있슬 때  그 하나 하나는 상층 기단의 갑석 이라는 등 구체적 표시는 가능하지만 이 3매의 부재를 몽땅 그리면 사잇돌이라 표현하는 점이 무리인가??

다른 부위에 끼워져 갑석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 그것이 갑석이라 표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이 3매를 사잇돌이라 표현하였다.

 

이러한 사잇돌 3매의 부재에 강원대, 강원대 박물관, 또한 본 세미나의 박경식 박사의 리포트에 이것이 원래의 탑의 양식인지 알 수 없다고만 기록하였지만, 필자는 이 문제도 무엇이 잘못인지, 어떻게 조적하여야 하는지까지 완전해 풀어 해결하였다.
지금도 해설사들이 동 탑을 해설하는 사진들이 인터넷에 있건만 동 탑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몰라도 수항리사지 탑은 이러한 도난 사고 후 다시 쌓아 올리는 데에 우리 고유의 탑 양식에 정형 탑으로 명명된 사각 탑의 양식에 위배되어 있다.
이 점은 문화재청의 연구 심의 하에( 손쉽게 본인의 논문을 근거로) 연구심의하여 다시 2증 기단석의 양식으로 다시금 조적하여야 한다.


 또한 덧붙여 이야기하면 2013년 평창에서 세미나에는 다섯 부분에 많은 학자들의 연구 리포트가 작성되었다. 하지만 수항리사지가 삼국유사의 자장 정률조에 나오는 자장의 말년의 거처지로서 완벽함을 찾지 못하였지만( 물론 신종원 교수탐이 발굴한 多 자가 새겨진 명문기와나 현 춘천박물관에  있는 청동 촛대의 명문기록은 거론하지만 )
필자는 실록의 기록에서 水多洞의 지명을 찾아 기록했으며, 또한 고 지도 4편에서 청심대 아래에 水多의 지명을 찾아  이로서 수항리 사지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자장율사의 말년 거처임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현 수항리 사지란 폐 사원지의 명칭을 수다사지로 개명하기에는 군 지자체의 심의로 도 지자체로 이송되어 다시 심의 후 문화재청에 상정하여 심의가 이루어져야 수다사라는 이름을 득할 수 있기에 개인으로서는 자격이 미달하여 천상 평창군이나 조계종 본부에서 이를 득 하여야 하는데 월정사는 전혀 모른다.


지금 현재로서 오대산 50여 사찰 및 암자가 있고 중국의 4대 성지중 유일하게 오대산에 들어온 문수신앙의 성지에 대하여 역사적 기록은 갖고 있지 못하다.
 최소한 자장율사의 기록도 전하는 게 없는데 유일한 점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자장율사의 말년 거쳐지 수다사가 본 수항리사지임을 기록하여 오대산이 보궁(寶宮) 신앙으로 지금은 잊혀지는 단어인 "高山第一  月精寺" 란 란 점과 조선시대에는 상원사는 세조의 원찰이고, 나옹화상과 문하인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수도처인 월정사와 오대산 불교권은 임란시 수호 사찰로서 이러한 월정사는 한국불교의 원류로서 이 바탕에는 문수신앙의 성지라는 점을 증명하여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스님들은 이러한 역사적 의미 소명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광명 대업만 위하는 듯 하다.


스님들,,
이 뜨거운 여름날에 동안거란 명분으로 문을 잠가 걸고 해탈의 경지로 가기 위해서 禪의 정진에 고생이 많습니다..

 하지만 후세백작은 무 신앙론자의 무교이지만 神을 거스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해탈의 경지란 개인적인 영욕 아닙니까? 잘못 표현하는가요.
필자 후세백작은 오대산의 오대의 지리적 배경에서부터 오대산의 천하의 명당으로  나옹화상의  삼국유사 자장 정률 조에 기록된 자장율사의 말년의 거처로서 오대산 불교권이 한국불교사에 찬연한 문수신앙 성지라는 명문의 글을 쓸 것입니다.

 또한 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박경식단국대 교수의 스승 정영호 박사는 "70년 동탑을 해체 복원공사시 남긴 리포트 기록에 反 한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송나라 8각 탑을 모델로 하였다고 하였으며 10년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본인의 이러한 예언같은 송나라가 이제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합니다.

 분명 필자의 이론이 옳았던 예시였으며 앞으로는 동 탑에 많은 글의 마지막으로 동 탑이 우리나라 1,200여 기의 한국 탑의 조형미에서 단연 으뜸이라는 동 탑은 조형의 미나 또한 동 탑은 조식에는 신앙적 전개에도 필자의 석조 보살상론에서 보듯 불자의 하나의 불교 우주관을 자아내고 있기에 이러한 예를 들어가며 동탑의 미학적, 예술론적, 종교사적 최고의 예술품이란 예찬론도 함께 기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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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오대산에는 민지의 기록등 많지않은 기록만 전할 뿐인데 어찌 보면 가당치도 않을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으나 본인도 본 월정사에 시대사적인 기록을 남기겠습니다. 지난겨울에 이 글을 쓸려고 많은 기록도 찾아보는 등 노력을 하였습니다. 오늘  어느 분의 월정사편 검색에 우연찬케 댓글로서 썼지만  앞으로 이 글 월정사의 명문에 노력은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월정사는  "高山第一  月精寺"로서 조선 왕조에 면면히 흐른 제일불교였으며, 월정사 8각9층탑이 우리나라 고유탑 1,200여기를 대표하는 찬란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고 또한 평창에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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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이 글을 오래전부터 쓸려고 마음 먹는데 동 글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에 자꾸 밀리고 있는데 지금 현재로서  쓰는 글은 비행기재(마전치) 재를 넘기에는 역원취락이 있어야 하였고 또한 백운역이 존재 했었습니다만 아직 어느 역사서에 취급이 되지 않아 처음으로 조명합니다. 원래는 정선의 관문이라 정선인들이아리랑만 거짓놀이 하지 말고 선결해야 할 문제 아닌가요??

 다음으로 게시할 마전치재와 백운역 글에서 역사가도 아닌 구성달이란 자가 쓴 성마령 시비처럼 정선에서 평창을 거쳐(마전치재를 거쳐) 서울로 세계로 나아갔는가 잘 보시고 언제라도 정선아리랑에 집착자들이 필자의 무수한 아리랑글에 당연히 反할 것이다. 

언제라도 수십 편이라도 아리랑에 대힌 논쟁이라면 정중히 답해 드립니다.

또 하나의 글은 현재 이것저것 동시다발로 수편을 쓰고 있으며 아마도 한 3년 써야 평창역사를 들어볼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