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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오대산 사고 실록, 오대산으로 돌아온다》

《오대산 사고 실록, 오대산으로 돌아온다》


오대산 사고본 실록과 의궤가 오대산 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된다
필자는 오대산 사적기에 민지의 기록이 좀 주관적 번역인듯 하여 원문판을 보려고 오대산 박물관에 갔더니...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월정사 입구에 있는 왕조실록의궤박물관 전시실 리모델링 공사를 위한 임시휴관 안내의 플래카드가 걸렸고 문은 닫혀 있었다.
박물관이 새 단장에 나선 건 조선왕조 실록과 의궤가 110년 만에 타향살이를 마치고 곧 환지본처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제1대 왕 태조부터 철종까지 25 472 (1392 ~1863)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다. 의궤는 조선 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내용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국가 기록물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국보 제151호이자 의궤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오대산사고에는 철종까지의 실록 788, 의궤 380, 기타 서책 2,469책 모두 3,637책이 수장되어 있었다. (고종과 철종 실록은 조선 시대 기록의 양식이 아니어서 비포함)
이들 서책들을 모두 목제 궤에 넣어 사각에 봉안해 두었는데, 목제궤인 실록궤 82, 서책궤 86, 공궤 7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오대산 사적" 기록에 따르면, 총독부 관원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께구찌와 고용원인 진부면의 조병선이 이듬해 (1914 3)에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적 150짐을 간평리의 다섯 동민을 동원하여 3일에 시작하여 11일까지 모두 주문진항으로 옮겨서 일본 도쿄 대학으로 가져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대산 사고 실록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3년 간토(關東)대진진에 모두다 전소되며 학자들이 빌려간 75책중 그로부터 9년후인 1932년에 27책이 경성 제국대학으로 돌아왔다.
이후 남아있는 책 47권 환수운동을 벌여 2006년 도쿄대가 조선왕조 실록 47권을 서울대(규장각)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하였다.

그리고 누락되었던 실록 한권을 2018년에 추가 환수받아 현재 75책이 환수되어 그중 48책이 고궁박물관에 소장이 아니라 수장(收藏거둘수. 감출장)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중종, 성종, 선조, 효종연간의 실록이다.

현재 국보는 337개로 소장지 분류에 따라 중앙박물관이 소재하는 서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현재 강원도의 국보는 10개로 앞으로 지굉국사 현묘탑이 문화재 보존처리 센타에서 원주로 돌아가고 오대산 사고본이 평창으로 돌아오는 날엔 강원도의 국보는 12개로 이중에 평창은 6개로 강윈도의 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진부에서 환수위원회가 구성되어 성명서에서 3차 협상에 의해 일본에 실록이 74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27책은 이미 경성제대 (서울대)로 넘어왔고 47책 환수되었고 추후 배현숙 교수가 누락된 한권을 발견하여 총 47책이 아니라 48책과 서울대에 27책으로 총 75책으로 환수운동 본부는 수정하여야 한다.

* 봉화의 태백산 사고는 40년대에 원인모를 화재라 하는데 20C. 의병때 화재로 기록된다.
폐 사고지엔 흉물이된 삼층석탑만 남아있는데 태백산사고 복원에 수호사찰이던 각화사가 반대하여 아직 제자리 걸음이지만. 평창은 오대산 사고를 복원했기에 사고 박물관을 지을 수 있었고 불교에서는 박물관을 문화재청에 기부하여 실록이 돌아오게 된다.

              < 효종실록>                                                    <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 반차도>

          < 오대산 사고 실록 환수성명서>

      * 오류 수정 바람 - 74책이 아니라 75책'이고  47책이 아니라 48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