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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이스 북에서 평창역사

《오대산에 이야기들 중..》

《오대산에 이야기들 중..》


어제는 적멸보궁을 다녀왔습니다
적멸보궁은 상원사 적멸보궁이라 하지 않고 월정사 적멸보궁이라 합니다.

아래의 탑은 고려말 학자 민지가 번역만 오대산 사적기에서 사자암 산에 정골사리를 묻고 가라허에 비석을. 땅속에 묻었다 기록하였다.

이 비석을 1950년 6.25때 상원사스님들은 피난가고 한암선사 홀로남았다. 이해 년말 워커. 유엔군 사령관과 김백일 3군단장의 전국 사찰 소요령에 월정사는 불타고 오대산 사고도 불탔다.

이때 상원사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스님 나오세요 명령대로 상원사도 불태위야 합니다 했는데 한암스님은 나도 이 절의 귀속체이니 함께 불태우라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셨다.

그러자 국군은 문짝 두어개 뜯어 마당에서 태우고 소요 명령을 이행하였다. 이로서 상원사는 6.25때 건재하였으며 선사는 임종이 다가옴을 알고 군인에게 내 죽으면 장례를 치러 줄거냐고 묻기도 했기에 국군들이 다비장례를 치렀다.

이러한 일화의 한암스님은 적멸보공에 올라 땅속에서 찾아 세윘다는 비석에 이야기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스님조차도 엉뚱한 글을 쓰고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하나도 없어서 필자는 이번 군 예산으로 하는 평창역사서에 이를 설명하기위해 사진이 필요하였다.

언 스님의 글에서는 이곳은 명당이기에 석물이 무거위 땅속에. 묻었다 라는 글이 있는데 명당은 석물을 세우면 않되는가. 또한 고려때 민지의 글에서는 명당 예찬의 단어는 하나도 없고 가리허에 묻었다 했다.
아니 그보다 이 비석의 탑의 그림의 내용은 이러한 설명은 위배된다.

이 탑은 법신사리의 개념으로 서카탑이나 일반 탑에서 목재 작은 탑을 탑속에 닣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아직 아무 설명도 없어서 필자의 해석임에 후일 사(절)측의 견해가 다를 수 있을지에. 양지 바랍니다.

가리허란 필자의 해석으론 산 가장자리의 언덕이란 뜻이고. 이 비석은 법신사리의 개념이다.

석가탑에는 무구광정다라니경을 사리 대용으로 넣고. 윌정사 탑에서는 시기적으로 이후이기에 보협인다라니경이 나왔다. 따라서 이 비석은 법신사리의 뜻을 가지는 것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그런데 언 스님은 용의 형국의 자리에 용이 날기에 무거워 땅에 묻고 사리는 훔쳐갈까봐 땅에 묻엇다고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럼 사리를 밖에 놔둡니까?
그는 땡중이라.

고려. 말 민지의 글 하나가 저열보궁에는 유일한 기록으로 다만 정골사리를 넣어 보관하는 탑이 없기에 사리는 사자암 뒤에 묻고.가라허에 비석을 묻었다 기록에서 이 비석은 오층 탑 그림으로 법신사리란 의미를 가진다.

하기사 어느 스님도 이 비석의 영문을 모르고 있으니..
필자는 책에 정확한 논리를 찾아 서술할 것이다.

필자는 신사임당.율곡의 생애사의 수 많은 왜곡을 바른 이해의 논문으로 하였으며 이는 잉태지는 설화로 이를 역사 세미나하는 학자들

수항리사지 탑의 논문에서는 탑의 조형성 이론을 개척하여 원론을 썼으며 시인 김삿갓의 편견을 문제삼고 평창의 김삿갓. 아리랑등 기존의 학설과 분명 다른 올바른 견해를 기진다.

평창을 논하는 학자.박사들
좀. 앞으로는 소설쓰지 마시고 사실의 역사를 구사하였으면 합니다.

위에 설명하였듯이 이 비석에 역사는 처음 조명됩니다

적멸보궁을 내려오니 시원한 냇물에 풍덩하고싶은 욕망이..
마침 관대걸이라

세조대왕이 관대를 벗어 걸던 옷걸이에 나도 옷벗어 걸어놓고 시원한 계곡물로 뛰어들어가고 싶었는데 아싑게도 못했다.
여행자들의 눈치가 무서위 못하는 소인배는 아니다.
그때 소낙비가 쏟이질듯 하늘이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서 아쉽지만 다음에 하기로 하였다.

표지판엔 수령 250년된 잇깔나무라 한다
오대산엔 유일한 잇깔나무이다
엄기종님 말씀엔 백두산 자생지로 일제때 가져다 심었다 한다 그럼 잇깔나무 서식지는 아니다.
또한 진부의 낙엽송 조림가 한분의 말씀엔 압록강 뗏목에 가문비나무는 송진등의 기름이 없어 일제때 제지 펄프로 사용했다 한다

그러면 오대산은 일제때 국유림으로 예전 상원사에 레일은 당시 노인봉까지 협궤레일을 깔고 오대산 전체를 벌체했기에 민둥산에다 일본 아덜은 아마도 종이원료로 잇까나무를 심는 실험식재였지 않았슬까 ? 그렇다면 수령은 100년이다.

상원사 계단의 자색 단풍나무이다
스님들이 여름에 하안거 하듯 이 친구들도 스님 닯았나
여름에 덥다고 휴면하고 낮잠을 즐기며 안 붉은 안토시안 색소를 내 뱉는듯 하다

이 서물은 1970년에 월정사 탑의 파손된 옥개석 4매를 교체한 것이다

위 사진에 교체돈 옥개석 4매증 맩위의 9층 옥개석으로 사각 구멍은 구륜의 상륜부 철재장식을 꼽는 찰주 공이다

본인의 예상대로 찰주공은 위 장싴물 무게른 못이겨서 금이 가고있다
그러기에 원래 13층 탑에서 13.12.11층이 부서지자 9층으로 만들었다 이때 맛물리는 사이즈가 틀려서 9층석은 변형하였다는 추론이다

단 한사람 본인만 본 탑은 원래 9층이 아닌 13층 탑이라 주장하는데 9층 것이 뮌래것인가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9층 탑이라한 현재의 탑을 위해서 새로 만들었던 탑인가 다시 검사해 볼 것이일연읮30년 후 민지는 오대산 사적의 신라향음을 번여 기록에서는 13층 탑이라 기록하였다

70년 동 탑을 해체복원의 감독자 정영호박사이 리포트에서 12층이라 하은 바닥의 기단석까지 잘못 헤아린 오류라고 단정하는데 그건 학자로서 크나큰 실례른 범하고 있다

분인은 겨울쯤 윌정사 연구의 박사는문들
잘못의 오류로 박사학의를 받았는지 모라도 바른 고찰을 백여페이지만 기록할 것이다

상원사 어디쯤 도로가의 나무인데 이 나무가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월계수관의 월계수 나무인지?윌계수 나무를 본 적이 없어서. 이
나무가 정말 윌계수나무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80년대 어느 글에서는 상원사에 윌계수나무가 한 그루 자생한다고 기록했으며 당시 사뭔사를 같이 디녀가던 일행분도 월계수나무라고 하였다 그때 보았슬땐 지름 15쎈티정도 가늘었는데 이젠 잘 찾지를 못하고,

 

연등은 일년 농사입니다
따라서 서울에 언 절은 하늘이 인보이고 땅이 안보이게 등을 거는데 상원사는 점잕은듯 하다

 

월정사 입구 경내에 있는 석물로 이는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는 보통 3m정도 높이이지만 봉선사에서도 이와같이 1m의 당간지주이다
월정사에 당간은 있었다는 기록은 없는데 당간지주는 있기에 당간은 있었다

다만 현재 지주사이의 거리는 1m쯤으로 넓기에 이는 원자리가 아니라 이전된 것이다
흔히들 당간지주른 하나의 양식으로 알고있지만 당간 지주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석물료 당간은 면통 잇듯이 철 파이프르 10m 장도 이어서 위에는 용머리. 주물을 만드는것으로 이의 목적은 문헌상 아직 없다

수항리 사지에 일제때 기록에 당간지주가 있다 하였고 두분의 박사는 당간지주 난간석이라 하였다
그 석물은 가로 세로 한자 미만으로 지주의 양식도 아니고 당간지주 현 5여개중 당간지주 난간석은 없다
단 본전건물 댓뜰 난간석이다

이 점은 필자의 "수항리사지 탑의 원형"이란 논문에서 기고하였다